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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문학인 | 2024년 여름호(제14호)

‘우리’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 ― 『골드러시』(한겨레출판, 2024)

류수연 문학평론, 문화평론

2013년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인하대학교 프런티어창의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계간 문학인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대중’을 키워드로 한국문학과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대표저서로는 학술서 근대라는 외장(소명출판, 2025)과 뷰파인더 위의 경성(소명출판, 2013), 평론집 함께 내딛는 찬찬한 걸음(소명출판, 2023)과 만화웹툰작가평론선 한승원(커뮤니케이션북스, 2019), 에세이 딸아, 연애를 해라(2019, 교보문고) 등이 있다.

서수진의 『코리안 티처』(한겨레출판사, 2020)는 흥미로운 문제작이다. 연작 성격을 가진 장편인 이 작품은 한국어학당에서 일하는 네 명의 여성 시간강사를 주인공으로 한국사회의 모순을 응집해서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비정규직의 비애와 젠더 의식, 서열화된 착취구조, 정규직에 대한 희망고문과 출산여성에 대한 차별까지. 이 작은 어학당에 축적된 한국사회의 모순은 그 자체로 생생하다.

그런데 여기엔 작가의 또 다른 시선이 숨겨져 있다. 바로 어학당의 또 다른 구성원들인 외국인 학생들, 한국 사회의 경계를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이다. 어학당은 말 그대로 언어를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곳에 다니는 학생들에겐 어학은 목표가 아닌 수단으로 활용된다. 합법적 체류와 취업을 위한 편법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H대 어학당의 시간강사들이 겪는 모순의 이면에는 비싼 학비를 치르면서까지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이주자들의 고뇌가 드리워져 있다.

서수진의 신작 소설집 『골드러시』는 그와 꼭 반대로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한국인 이주자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점에서 본다면 『골드러시』는 『코리안 티처』의 또 다른 확장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동어반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안의 모순을 꿰뚫어야 하기에, 작기의 시선은 이전보다 훨씬 날카롭고 깊어져 있다.


1. 타자화 된 욕망과 무너지는 드림


이미 알려진 대로 작가 서수진은 현재 호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골드러시』에 실린 6편의 작품이 호주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가 서수진의 작품에서 느끼는 실감의 이유가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배경인 호주 자체가 주는 현실적 친밀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호주는 전 세계에서 6번째로 큰 한인공동체를 가지고 있을 만큼 한국 이민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이다. 한국인의 호주 이민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미국 이민사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호주는 한국사회에서 미국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매력적인 이민지로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어라는 언어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인 해외 어학연수에서 호주는 가장 매력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북미나 영국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갈 수 있다는 이점에 더해, 워킹 홀리데이로 일까지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북미보다 오픈되어 있는 호주의 이민정책은, 워킹 홀리데이를 통해 그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호주를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도록 만드는데 충분했다. 실제로 호주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 세대들이 늘어가면서 호주 내의 한국인 네트워크는 훨씬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골드러시」가 그려낸 풍경도 이와 맞닿아 있다. 진우와 서인은 결혼한 지 7년 된 부부이다. 호주의 한 셰어 하우스에서 만나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호주에서 정착하기까지, 그들의 노력과 시간은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진우의 노력은 더욱 절실하였다. 서인을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진우는 한인식당에서 최저시급의 70퍼센트만 받으며 일했고, 야근과 휴일 근무까지 무보수로 감당해야 했다. 이것은 모두 영주권 획득까지 갈 수 있는 457비자를 얻기 위함이었다. 영주권이라는 목표가 모든 불법적 노동 착취를 감내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노동에 시달린 나머지 정작 영어공부는 뒷전이 되었고, 결국 457비자도 영주권도 모두 아내인 서인의 이름으로 받아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불법이 아닌 것이 없었지만 호주 업체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한인 업체에서는 관례로 여겨졌다. 진우뿐만 아니라 한인 식당, 한인 슈퍼, 한인 여행사에서 일하는 한국이 모두 그런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 「골드러시」, 61-62쪽


그런데 진우를 착취한 이 시스템은 다름 아닌 한인공동체였다.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낸 모든 장소에서 한국인은 착취의 주체나 객체로서 존재했다. 관례라는 이름 아래 비상상이 정상인 것처럼 또 다른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러한 시스템에 순응하는 순간, 삶 자체의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골드러시」는 진우의 잔혹한 호주 정착 과정을 그려내지만, 무엇 때문에 그가 호주에 정착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영주권이라는 당위와 목표만을 위한 처절한 삶만이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결혼 7주년을 맞이하며 서인이 예약한 골드러시 체험 상품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그것은 진우의,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서인의 ‘드림’이 이미 추락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골드러시라는 말은 호주의 근대를 수식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호주는 미국과 함께 대표적인 이민국가의 하나이다. 그런데 호주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된 것은 1851년 금광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를 휩쓸었던 황금광 시대의 대표적인 개척지가 바로 호주였던 것이다. 수많은 이민자를 이끌었던 금광은 이미 폐광이 되었지만, 드넓은 영토로 개척된 호주는 여전히 기회의 땅으로서, 이민자들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골드러시」는 되묻고 있다. 그 기회는 과연 찬란한 행복이었을까?


주머니에 넣어둔 오팔 반지를 생각했다. 그는 서인에게 반지를 내밀며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식장에 입장해 그녀에게 입을 맞춘 적도 없었다. 초음파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서인의 눈을 닮은 아이를 보며 경탄한 적도 없었다.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 그것을 기다려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붉은 햇빛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 「골드러시」, 82-83쪽


진우와 서인이 함께 한 7년. 그들은 단 한 번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다. 오랜 기간 노동에 시달렸지만 언어로 인해 457비자와 영주권 모두를 서인의 이름으로 받아야 했던 진우에게도, 그러한 진우로 인해 척박한 호주에서의 삶을 견뎌내야 했던 서인에게도 지난 7년은 단 하나의 ‘빛나는 순간’을 갖지 못했던 암흑의 시간이었다. 지난날의 영화를 뒤로 한 금광에서 발견한 것은, 그들이 호주에서 단 한 순간도 오롯이 행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처럼 주객이 전도된 삶이 갖는 모순은 또 다른 작품인 「졸업여행」에서도 드러난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지속된 호주 산불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승수와 미연,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잭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승수와 미연은 호주에 정착한 지 12년 된 부부이다. 물론 승수 부부의 호주 이민에는 좀 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아들 잭이다. 잭을 로컬학교에 보내기 위해 그들은 악착같이 살아냈고, 매년 한국 돈으로 1억이 넘는 돈을 학비와 렌트비, 생활비로 써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무사히 명문대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졸업여행」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한국인의 밤」, 「캠벨타운 임대주택」-에서도 이민1세대의 꿈은 한결같다. 모두 자녀가 현지인과 같은 영어를 구사하고 명문대에 진학하여 호주 사회에서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국의 입시와 꼭 닮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순, 바로 아메리카드림의 복사판이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혐오하며 떠난 이들이 한국 사회의 모순을 똑같이 반복하며 그곳에서 그들만의 성을 쌓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뤄내고 있다고 믿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10년을 기다려 영주권을 따고, 자기 이름으로 가게를 내고, 아들이 대학수능시험까지 마치자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 「졸업여행」, 99쪽


그런데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믿은 그 순간,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산불이 번진다는 소식을 들은 미연은 졸업여행을 떠난 잭을 염려하고, 수소문 끝에 승수는 잭이 졸업여행을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잭이 친구들과 함께 시골 마을인 밀두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승수는, 산불에서 아들을 구해오기 위해 밤새 운전해서 그곳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는 마약에 취한 아들과 마주한다. 산불보다 더 가깝게, 그와 아내의 희망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골드러시」의 진우와 「졸업여행」의 승수에게 호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두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지독한 허무였다. 무엇이 그들에게서 ‘반짝이는 순간’을 빼앗은 것일까? 그 답은 작가가 말하지 않은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두 작품에서 진우와 승수는 그들이 왜 호주에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회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 있다. 그 본질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영주권과 아들 잭의 성공이라는 타자화된 욕망뿐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묻고 있다. 영주권이 삶의 목표인 진우가 맞이할 최상의 미래가 승수의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빛나는 순간’이 될 수 있을까?


2. ‘우리를 둘러싼 모순


이민자라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엔 그들의 삶이 갖는 모순은 너무나 처절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 ‘빛나는 순간’을 앗아간 그 포악한 세계의 진실을 탐구하는 것 역시 소설의 필연적인 몫이다. 작가 서수진은 자신의 이 본분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영원한 경계인일 수밖에 없는 이민자의 삶을 보다 찬찬히 들여다본다.

「헬로 차이나」에서 주인공 혜선은 홀로 딸을 키우는 부동산 에이전트이다. 그녀의 주 고객인 얀 역시 홀로 딸을 키우는 중국인으로, 혜선이 자리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류열풍으로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얀의 딸이 혜선의 딸인 에이미와 친해지면서 두 사람 사이는 더욱 돈독해진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급부로 혜선에게는 두려움도 커진다. 그것은 에이미가 중국인 남자친구 케빈을 데려오면서 표면화된다. 중국인과 일하는 자신으로 인해 딸이 “중국인과 사귀고 중국인과 결혼하고 중국에 가서 중국인을 낳게”(107쪽) 되는 건 아닐지 염려하게 된 것이다.


혜선은 싫었다.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적 농담이 중국인에게 국한된다는 사실조차 싫었다. 중국인 이름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 칭, 챙. 총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킴, 리, 팍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인종차별을 당할 거면 한국인으로 당하고 싶었다.

- 「헬로 차이나」, 123쪽


어쩌면 그것은 오래도록 혜선 내부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인종차별적 편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중국인 같다’는 말을 일종의 비하로 사용했었던 기억이 이미 그녀 안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보기엔 그녀는 너무나 중국인과 친밀하다. 오히려 혜선이야말로 “중국인이 절대적 갑인 분야”(123쪽)에서 일하며 그들에게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녀는 이미 한국이 아닌 호주에 살고 있으며, 특히 딸 에이미의 국적은 호주이다. 딸이 중국으로 간다 한들, 그 역시 또 다른 방식의 이민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선을 두렵게 만드는 이 모순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체성 때문이다. 혜선이 호주에서 마주친 현실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너무도 닮아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종차별을 당할 거면 한국인으로 당하고 싶었다.”(123쪽)라는 말 속에는 그저 동양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백인들의 사회인 호주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경계는 너무나 쉽게 무시되고 간과된다. 만약 딸 에이미가 살아갈 곳이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한 중국이라면? 너무나 쉽게 동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혜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에이미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엄마 혜선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 마당에 걸어둔 티베트 오색 기와 깃발이 자꾸 사라지는 이유가 다름 아닌 케빈의 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혜선의 거부감도 폭발하게 된다.


중국은 티베트가 독립국가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러니까 친중국파에게는 티베트 깃발이 반중국이고…….

오 마이 갓. 그래서 케빈이 친중이라 뒷마당 깃발을 떼기라도 했다는 거야?

에이미는 눈을 위로 굴렸다.

정말 끔찍하다, 엄마.

그녀는 영어로 빠르게 불평을 내뱉고는 청바지를 주워 입고 점퍼를 걸쳤다. 케빈을 잡아끌고서 차고를 나섰다. 혜선은 차고에 남아서 이불이 제멋대로 뭉쳐 있는 침대에 털썩 앉아 깊은숨을 뱉었다.

- 「헬로 차이나」, 139-140쪽


공동체란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며 서로의 삶에 더 끈끈하게 다가가는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매우 친밀하고 다정한, 서로에 대해 든든한 지지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력은 외부의 압력이 있을 때 더 단단해진다. 이민공동체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한국 내에서보다 더 분명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거기엔 또 다른 모순이 뒤따른다. 공동체의 피아(彼我) 구분이 또 다른 장벽으로 차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혜선과 케빈은 어쩌면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혜선이 딸의 남자친구인 케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케빈이 여자친구의 집에 걸린 티베트 깃발에 테러를 가한 이유도 그 출발점은 동일하다. 그들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만 하는 타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서 살아가면서도 본질적 뿌리를 잃지 않으려는 그 안간힘이 오히려 타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캠벨타운 임대주택」의 주인공 다니엘 리는 악성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캠벨타운 임대주택의 관리자이다. 그는 스스로 호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내재된 인물이다. 그런 다니엘 앞에 어느 날, 한국어 억양이 분명한 여자가 나타나 집에 두고 온 물건을 찾아달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더 큰 거부감을 느낀다. 그녀 자체가 그의 자긍심에 상처를 낸 것이다. 그가 배우고 접해왔던 모든 환경 속에서 느꼈던 바에 따르면, 적어도 한국인은 캠벨타운 임대주택에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가 애써 여자를 외면했음에도 결국 사건은 일어난다. 주택청소를 맡은 다니엘의 부모에게 여자가 다시 찾아갔고, 그녀가 한국인임을 동정하며 돈을 건넨 다니엘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한국인들이 임대주택에서 치고받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겠니. 이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임대주택 이민자에게 아무 죄 없는 청소 용역이 공격받은 사건이다. 내 말 알겠니. 어떻게든 상황을 바로 잡아야 돼.

- 「캠벨타운 임대주택」, 51쪽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다니엘은 한국인 이민공동체를 자랑스럽게 말하던 아버지의 또 다른 이면을 발견한다. 그것은 견고하게 쌓아 올린 피아(彼我)의 장벽이었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그녀가 한국인임을 부정함으로써,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비로소 한국인 공동체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것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엮인 철저히 배타적인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민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또 다른 작품인 「한국인의 밤」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자 이상, 이하로 나누었다.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만이 호주 이민의 고충을 나누며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클로이가 새 친구를 사귀면 친구가 한국인인지 물은 다음 영주권이 있는지 물었다.

- 「한국인의 밤」, 154쪽


「한국인의 밤」에서 클로이의 아버지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의 유무로 철저하게 구분하였다. 그 자신은 한국인임을 감추고 일본어를 하면서 일식당을 경영하지만, 한국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배타적인 공동체로서의 우월권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모습은 그대로 「캠벨타운 임대주택」에서 다니엘의 아버지에 겹쳐진다.

하지만 이 견고한 벽은 순식간에 우스워지고 만다. 병원에 꽃을 가지고 갈 수 없음에도 꽃을 들고 병문안을 온 한인교회의 목사를 비웃는 호주인들의 뒷담화를 들은 다니엘은 자괴감을 느낀다. 현지인들이 보기엔 그들 모두 똑같이 이상한 한국인일 뿐이었다. 그들 스스로 지켜내고자 하는 자부심도, 서로를 굳건하게 지켜왔던 공동체도 결국 형체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장벽이 결국 그들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든 것이다.


창틀 아래 동전만 한 구멍이 석고 가루로 채워져 있었다. 가루를 파헤치고 비닐봉지를 꺼냈다. 심장 이 발 빠르게 뛰었다. 봉지는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매듭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중략) 봉지를 꽉 움켜쥐었다. 봉지 안에는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알약도 가루도 아니었고, 지폐도 동전도 아니었다. 봉지를 열었다. 작고 까만 조약돌 세 개. 그게 다였다. 그는 조약돌을 쥐고 눈을 감았다.

- 「캠벨타운 임대주택」, 53쪽


그러므로 이 해프닝의 끝은 너무나 처연하다. 여자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것은 작고 까만 조약돌 세 개였다. 보잘것없었지만 누군가에겐 너무나도 소중했을 그것. 서로를 외면했기 때문에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서글픔이 그곳에 있었다.


3. 그럼에도 새로울 희망


그렇다면 희망은 부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작가 서수진은 사실 더 적극적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국인의 밤」과 「외출금지」는 ‘우리’가 만드는 이 차별의 장벽이 가장 높고 거대해진 그 순간, 오히려 그 장벽 너머에서 ‘함께’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한국인의 밤」에서 클로이는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한국에 대한 기억은 액자 속에 박제되어 있다. 어린 시절 한국학교 부채춤 공연에서 입었던 한복, 너무 커서 우스꽝스러웠던 그 옷처럼 기억 속에 묻어버리고 싶은 것. 그것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클로이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동양인이었고, 성장할수록 다른 인종의 친구를 마주하기 어려웠다. 하이스쿨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ABK(Australian Born Korean)와 어울렸고, 그녀가 다니는 의대조차 ‘중국인, 인도인, 한국인의 대학’이라고 말할 만큼 그녀의 삶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은 클로이에게 기꺼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섬처럼 만든 한계로 인식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변화는 뜻밖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클로이는 윌리엄이 찬 훈장을 보았다. 그중 하나에 ‘KOREA’라고 새겨져 있었다. 자신에게도 그런 딱지가 붙은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선택하지 않은, 그러나 떼어낼 수 없는. 그 딱지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윌리엄은 여전히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클로이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드레스처럼 넓게 펼쳐진 치마를 헝클어뜨렸다.

한국 땅에서 호주인이 중국인과 싸우다 죽었다고 하면…….

월리엄이 중얼거렸다. 기자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 더 크게 이야기해주시겠냐고 하자 클로이는 자기도 모르게 기자에게 “No”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녀를 흘긋 보고는 월리엄에게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인터뷰를 그만하겠다고 했다.

- 「한국인의 밤」, 164쪽


참전군인 행진이 포함된 엔젝데이에서 한국전 참전용사였던 윌리엄과 인터뷰를 하면서, 클로이는 문득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자신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본다. 선택하지 않았지만, 이미 선택되어버린 무엇. 그것에 맞추어 살았지만 한 번도 온전히 들여다본 적 없는 그 딱지. 클로이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클로이는 윌리엄을 통해 또 다른 역사를 본다. 한국 땅에서 호주인이 중국인과 싸우다 죽었던, 윌리엄이 겪어야 했던 그 역사는 클로이에게 또 다른 선택지를 주는 듯했다.

클로이는 그 답을 위해 윌리엄을 다시 만나고자 한다. 한국인의 밤 행사에서 그를 찾아다니던 중에 심장마비로 쓰러진 한 노인을 CPR로 구한다. 마치 한국전에서 죽은 한 사람의 목숨에 보답하는 것처럼, 이 우연한 사건은 클로이에게 새로운 시작점을 알린다. 그것은 한국인이지만 호주인으로서 살아갈 클로이 최의 삶이다.

이러한 희망의 순간은 「외출금지」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동성결혼이 허용된 호주로 오게 된 레즈비언 커플 은영과 희율. 그러나 처음 이곳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이 아니었다. 그저 젊고 작고 예쁜 동양인 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마저 잃으면서 무너지던 그때, 팬데믹은 뜻밖에 화해의 조건이 된다. 살던 곳에서 떠날 수도 없는 ‘외출금지’ 속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온전히 둘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함께이기에, 손을 마주 잡고 있기에 가능할 수 있는 그 찰나. 그것은 호주를 배경으로 한 『골드러시』의 다른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순간이다. 오직 생존과 영주권에만 매달려야 했던 모든 등장인물들이 미처 가져보지 못한 ‘빛나는 순간’,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손을 잡고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걸었다.

- 「외출 금지」, 207쪽.


서수진은 말한다. 모든 ‘빛나는 순간’은 우리 곁에 있었다고. 다만 그것을 보지 않고 눈 감고 있었을 뿐. 더 어두워질 때야 비로소 반짝이는 그 찰나, 그 삶의 보석을 포착하는 작가의 시선 속에서 8개의 단편이 그려낸 세계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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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계간 문학인 전철희 민족문학저항역사문학사세계문학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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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희 따로 또 같이 열어가는 염려의 공간 ― 2025년 봄의 시

“이름이 있지만 이름이 지워진 것들의 목록을 골똘히 떠올렸고” (이은규, 「귤락」, 『딩아돌하』 2025년 봄호) 2025년 봄은 정치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계절이었다. 민의를 등진 기득권 카르텔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속속들이 장악해 왔는지 매번 확인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날이 팽창했다. 부풀 대로 부푼 담론의 장에서 광장이라는 공간을 의미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도 지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계간지들은 발 빠르게 ‘역사적 사건과 시, 그리고 지금’(『딩아돌하』), ‘내란, 광장정치’(『문화/과학』), ‘탄핵-일지’(『문학과사회 하이픈』), ‘K민주주의의 약진’(『창작과비평』), ‘12․3 내란일지’(『문학동네』) 등의 특집을 꾸리며, 광장정치의 한가운데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의 가치를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 계절의 시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광장정치가 현실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가운데, 이 계절의 시들은 다시 열린 광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더디고 조심스럽게, 말해지지 못했던 것들의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귤락’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은규의 시적 주체처럼, 이번 봄의 시들은 사라진 이름과 묻힌 말들, 소리 없는 침묵의 감정을 발굴하고 목록화하려는 시도를 보여 주었다. 특히 나희덕의 「광장의 재발견」과 진은영의 「광장」은 이와 같은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두 편의 시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의 소산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하는 감각의 지형과 그 속의 관계, 윤리를 되묻는 섬세한 언어의 실험이다. 4.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 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 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 도로 경계턱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 두 명이 일으켜주었다 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 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 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5. 정치는 길을 잃고 나는 발을 헛딛고 말과 입김은 무성하게 흩어졌지만 오래 잠들어 있던 여의도는 목소리들에 의해 깨어났다 공원은 다시 광장이 되었다 ―나희덕, 「광장의 재발견」(『문화/과학』 2025년 봄호) 1) 부분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 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모여들었지 ―진은영, 「광장」(『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나희덕의 시는 ‘여의도’의 공간적 변화를 사유하는 일로 시작한다. 과거 광장의 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나던 여의도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며 비정치적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12‧3 계엄이라는 사건을 통해 다시 ‘광장’으로 재소환된다. 신작 시집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에 엮이기도 한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여의도의 장소성을 복원함으로써 광장이라는 물리적 장소가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재의미화되는지 보여 준다. 그는 12‧3 계엄 이후 여의도를 찾았다가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만다. 그런 그의 곁에 다가와 ‘나’를 일으켜준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경찰이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을 건넨 경찰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하다. 경찰이 건넨 온기는 광장에서 대립하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 잠깐 열린 ‘틈’, 공동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 ‘재발견’된 여의도에서 시적 주체는 시민과 대치하고 있던 경찰 또한 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또다른 발견’을 한다. 결국 이 시는 광장이 단지 단선적인 대립의 공간이나 정치적 목소리의 공간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책임이 교차하는 장소로 다시 의미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광장은 발을 헛디딘 ‘나’의 자리인 동시에 미안한 눈빛의 타자가 건넨 온기의 장소이기도 하다. 정치의 격랑 속에서 시는 감각의 정치, 윤리의 광장을 다시금 상상하고 있다. 진은영의 시는 여성의 존재와 연대를 ‘광장’이라는 장소에 다시 위치시킨다. “월계수 잎 같은 여자들이었지/승리의 화관으로 엮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지”라는 전반부에서 시는 ‘승리’와 영웅서사에서 배제된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모여들었”지만, 완결된 공동체를 이루지 않는다. 이 느슨한 집합은 강고한 상징 체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장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앞서 살펴본 나희덕의 시가 광장으로서의 여의도를 재맥락화하고 대치 속 ‘틈’과 ‘온기’를 발견했다면, 진은영의 이 시는 각기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존재들이 느슨하게 모여드는 연대의 장을 상상하게 한다. 시적 주체는 ‘화관으로 엮이지 못한 잎사귀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여성적 광장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2)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각자 하나의 잎을 쥐고서” 있다. 이때 광장은 전투나 외침의 장소라기보다는 잠정적이고 열려 있는 연대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진다.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 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 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사람들이 따로 잠을 자고 따로 아이들을 기르고 따로 집을 짓고 숲과 강가에 경계선을 그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 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 따로 정복자가 되고 노예가 되고 따로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사상을 발명하고 꿈을 꾸던 사람들이 따로 나라를 세우고 따로 혁명과 전쟁을 일으키고 따로 친구가 되고 적이 되었다 함께 나를 매혹시켰던 말들이 따로 나를 조롱하며 떠나갔듯이 그렇게 함께 그렇게 따로 세계는 낡아갔다 ―이경임, 「그렇게 함께 따로」(『문학인』 2025년 봄호) 이경임의 시는 광장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공동체의 기원과 해체, 연대의 형성과 파괴를 장구한 인류사적 스펙트럼 속에서 되묻는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과 공명한다. 시는 반복되는 구절 “함께”와 “따로”를 통해, 인류가 공유했던 감각의 원형에서 점점 분절되고 분열된 세계로 이행해 온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서술한다. 첫 연에서 사람들은 “함께 잠을 자고 아이들을 기르고/함께 숲속에서 나무 열매들을 줍고/함께 사냥 하며 음식을 나눠 먹던”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2연에서 시는 경계선을 긋고 “따로” 살게 된 공동체의 붕괴를 포착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함께 도끼, 창, 칼을 만들던 사람들이/함께 총, 대포, 핵폭탄을 만들던 사람들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기술과 협력의 진보가 어떻게 파괴의 도구로 전도되어 왔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함께”는 더 이상 긍정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폭력과 파괴를 가능케 한 이율배반적 형식으로 작용한다. 마지막 연 “그렇게 함께/그렇게 따로/세계는 낡아갔다”는 반복과 퇴행, 분열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감정적 유산을 응축하고 있다. 이 시는 지금의 정치적 현실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감정 윤리와 공동체적 감각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운다. 인간이 ‘함께’라는 말 아래 어떻게 ‘따로’가 되었는지 되묻고, 그로 인해 낡아가는 세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써 감정의 정치학을 역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한다. 매년 11월이 돌아오면 페루 사람들은 죽은 자의 넋을 기린다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음식을 장만하고 온 가족이 이틀간 죽은 자들과 함께 산다 산 자들은 아파트형 묘지를 찾아 꽃을 바치고 담배를 피워 악귀를 물리치고 브라스밴드에 맞춰 노래하고 춤춘다 매년 11월 초하루 페루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난다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한다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 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 산 자가 죽은 자의 얼굴 사진을 고이 모신다 먼저 떠난 자와 나중에 따라갈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 ―이문재, 「죽은 자의 날―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이문재의 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축제를 통해 공동체의 가장 깊은 층위라 할 수 있는 정동과 기억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있다. 특히 ‘함께’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던 공동체적 감각이 ‘따로’로 분열되어 온 이경임의 시와 나란히 놓을 때, 이문재의 시는 또 다른 방향의 회복 서사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는 페루의 11월, ‘죽은 자의 날’을 배경으로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문화를 묘사한다. 영화 <코코>(2018)로도 잘 알려진 이 축제는 흥겨운 춤과 노래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위의 시에서 망자의 넋을 기리는 것은 “한날한시에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방문”하는 적극적 실천으로 의미화된다. 특히 “죽은 자의 사진이 없으면/죽은 자가 살아생전 살던 집을 찾지 못한대서”라는 구절은, 기억과 이미지, 감각의 윤리가 어떻게 공동체 구성에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마지막 연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페루 사람들의 애국가 제목은 이러하다/우리는 자유로우며 언제나 그러하리라”는 시 전체의 윤리적 핵심을 밝힌다. ‘자유’는 더 이상 개인주의적 해방이나 정치적 권리의 언어가 아니라 타자, 그것도 이미 죽은 자의 존재조차 공동체 속에 포섭할 수 있는 연대의 감각으로 재정의된다. 그렇다면 이 시는 2025년 봄, 광장에서 실종된 감정의 언어와 윤리적 상상력을 되찾으려는 시적 실천으로도 읽힐 수 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벌이는 나라의 이미지야말로, 기억의 연대, 감정의 공공성, 존재의 환대를 담보하는 미래의 광장을 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한 달 동안 비워둔 내 방, 급히 잘라서 꽂아놓고 나온 구석의 파란 몬스테라가 유리 물병 속에서 잘 크고 있는지 걱정이다 지난번 쓴 시가 마지막 작품은 아닌지 끄적거리고 있는 이 시를 완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머니 칠십에 처음으로 집주인이 된 낡은 일층 빌라가 걱정이다 길 건너 천변이 보이고 가을 되면 불어난 냇물 소리가 들릴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지구온난화가 초가속화되어 부모님 생전에 집이 물에 잠기면 어쩌지? 마요네즈 범벅의 감자샐러드를 좋아해서 걱정이다 달고 진한 카페라테를 좋아해서, 비건이 못 되어서, 국회의사당에 검은 헬기가 날아오던 그 밤이 안 끝날까봐, 역사가 건망증 환자일까봐서 걱정이다 오늘밤 별이 지는데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정말 걱정이다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 두번째 대홍수의 날들에 천변 옆 낡은 빌라와 팔레스타인의 팔다리 없는 아이와, 숲을 따라 릴레이 선수처럼 달려가는 산불을 역사와 어머니의 심해져가는 건망증을 즐겨 쓰는 필기구의 단종 여부와 부활절 달걀들을 까맣게 칠하는 나의 증오심을 걱정하는 나여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그러니 나는 무수한 걱정, 무수한 불안, 무수한 죽음, 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다 그 밤의 일이, 두붓값 오르는 일이 일조지환인지 종신지우인지 분간 안 가는 걱정 속에서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 삶, 삶, 삶이여 슬픔이여 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 나의 소유자다 ―진은영, 「걱정의 소유자」(『문학동네』 2025년 봄호) 진은영의 「걱정의 소유자」는 앞서 논의한 시들과 달리, 어떤 특정한 공동체적 장면이나 외부적 사건을 서사화하지 않는다. 대신 시적 주체는 “몬스테라잎과 고콜레스테롤 혈증과 내란과”라는 다종다양한 걱정의 목록을 나열하며 오늘날 주체 내부에 축적된 정동의 무게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걱정’은 단지 사소한 불안의 나열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을 감각하는 자의 정서적 앎의 형식이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무수한 걱정,/무수한 불안,/무수한 죽음,/무수한 증오의 소유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시적 주체는 단일한 정체성이나 확고한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감정들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나날의 무력감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각은 바로 이러한 ‘걱정’이다.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몬스테라 잎처럼 작고 사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내란과 전쟁과 기후위기를 잇는 감정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진은영의 시는 그래서 말미에 이르러 이중의 역설을 던진다. “단호한 비일관성과 일관성을 동시에 지닌/삶, 삶, 삶이여/슬픔이여/부드러운 두부와 맹목의 탱크여//나의 소유자다”. 삶과 슬픔, 부드러움과 파괴가 공존하는 이 정서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님을 보여 준다. 걱정의 감각이 곧 윤리이고 정치이며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감정적 실존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오늘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내밀한 광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이로써 2025년 봄의 시들이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적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직접적인 구호나 선언이 아니라 정동과 감정, 회복과 연대, 슬픔과 불안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광장의 내부화’이며, 이러한 시적 언어야말로 이 계절의 시가 갖는 윤리적 실천의 장이 된다. 살펴본 시들은 외치기보다 감각하고, 선동하기보다 기억하며,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보다는 염려하며 서로 다른 말들의 숨결로 존재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을 끝내 붙잡고 부서진 감정 위에 느슨한 연대를 상상했던 이 시들은, 정동의 언어로 광장을 다시 열어젖혔다. 시가 도달한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정치적인 자리, 그곳에서 또다시 ‘함께’와 ‘따로’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1) 『문화/과학』 봄호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옥상의 시선’에 나희덕과 진은영의 시가 두 편씩 묶였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지상과는 다른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이야기”(「121호를 내며―12‧3 내란 이후 광장정치의 부상하는 주체와 그 함의」, 『문화/과학』 2025년 봄호, 7쪽)를 담은 것인데, 첫 필자로 두 시인이 섭외되었다. 2) “현장에 나가서 활동가분들 만나면서 연대라는 것 자체가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의미로 침범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최나현‧양소영‧김세희, 「연대는 아름다운 침범」, 『백날 지워봐라, 우리가 사라지나』, 오월의봄, 2025, 37쪽)

계간 딩아돌하 황선희 한국현대시시계간평광장정치연대공동체정동걱정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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