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파란 2024년 가을호(제34호)
웃자란 말들
1.
1976년, 화성에 도착한 바이킹 1호는 사이도니아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지구에 전송한다. 화성의 표면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기념비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공개된 사진은 곧 논란의 중심에 놓인다. 촬영된 지역의 일부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화성 최초 착륙에 성공할 만큼 당시 발전된 과학기술을 증명하는 하나의 자료로 사용될 수 있었을 이 사진은 한순간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목소리들로 뒤덮인다. 이를테면 화성에 고대 이집트와 같은 문명이 있었다거나 외계 생명체가 있다는 등의 소문들. NASA는 이 사진으로 인한 음모론이 가라앉지 않자 시간 간격을 두고 해당 지역을 촬영한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이것이 루머임을 입증하려 했다. 결국 2001년 마스글로벌서베이어가 찍은 높은 해상도의 사진이 공개되자 화성의 인면암은 빛의 음영과 비트 오류와 같은 당시 카메라 기술의 문제로 발생한 해프닝임이 확인되었다.
이 사건은 대상에서 의미 있는 형상을 찾아내려는 심리적 현상, 즉 ‘파레이돌리아’에 의해 발생한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어 왔다. 일종의 인지 오류라고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일은 일상에서도 흔히 이루어진다. 달의 표면에서 토끼를 발견한다거나 구름에서 특정한 형태를 연상하는 등이 그것이다. 인지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이와 같은 작용이 이루어지는 핵심 기제는 익숙함이다. 우리에게는 습관적으로 대상에서 익숙한 패턴을 추출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한번 인지하여 친숙해진 후에도 같은 대상에서 계속해서 동일한 패턴을 보게 되어 자신이 대상을 왜곡하여 바라본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특히 이러한 현상은 그 실체가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 대상을 바라볼 때 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러한 대상에서 사람의 얼굴처럼 확실한 형상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실체의 형상을 학습하게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파레이돌리아의 예로 자주 거론되는 UFO 목격담을 떠올려 보자. 대개 대기 현상으로 발생한 장면을 착각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러한 발견들이 거듭되면서 UFO의 실체를 본 적이 없는 우리는 그것의 형상이 대체로 그러할 것이라 학습하게 되었고 혹여 그와 비슷한 패턴을 보면 동일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누가 UFO의 형상을 공인하였으며, 그 형태가 정말 저러한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2.
이번 계절 발표된 시를 읽는 자리에서 다소 엉뚱하게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이번 계절 강지수가 발표한 「파레이돌리아」에 기댄 바가 크다.
햇빛이 비칠 때마다 얼굴 한쪽이 희게 빛났다 눈을 가늘게 떴다 광원을 바라볼 수 없으므로 빛나는 쪽이 늘 패배였다 차게 식은 볼을 매만졌다 기미 주근깨 그런 게 선명한 감각으로 느껴지는, 그래서 더 사람 같다고 생각하며
더 사람 같다고, 그게 무언지 헤아릴 수 없을 때 나는 더 깊은 그림자를 만들고 싶어 했고
더 사람 같다고, 빛이 있어서 그림자가 있는 거지 그림자가 있어서 빛이 있는 건 아냐
그건 알지만
―강지수, 「파레이돌리아」 부분(『문학동네』, 2024.여름
이 시에서 화자는 “더 사람 같다”는 문제에 대해 “그게 무언지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그가 묻는 사람에 대한 질문은 육체적인 조건과 같은 물리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일정한 자격이나 품격’에 대한 것일 텐데, 이와 같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 가운데 그가 이를 헤아릴 방법으로 “더 깊은 그림자”를 만드는 일을 선택한다는 점이 내게 특별하게 여겨졌다. UFO, 사람(다움), 문학(시)이 대체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막연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한데 묶어 본다면, 이러한 그의 물음에서 최근의 시와 비평이 ‘시가 무엇인가’를 묻는 모습이 떠올랐음은 물론, 이를 묻는 과정에서 최근 시가 선택한 작법이 화자의 행동과 상당히 유사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체로 시는 보편적으로 합의된 가상의 형상은 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이는 시중에 시에 대한 많은 이론서들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언젠가 누군가가 범박하게 ‘시’라는 형상을 제시했고, 그것에 대체로 합의하여 만들어진 모양이, 강지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햇빛에 “빛나는 쪽”과 “그림자”를 통해 만들어진 어슴푸레한 형상이, 우리가 합의해 온 시에 가깝다. 다소 상투적으로 빗대어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시의 한 축을 이루는 볕받이, 그러니까 가장 환하게 눈에 띄는 부분은 의미의 영역이었으며 형식 혹은 틀은 의미를 드러내는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해 왔고 많은 시들은 사실상 볼록판화와 유사한 형태를 가져왔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시는 빛이 비치는 부분과 그림자가 때에 따라 각자의 영역을 넓힐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 서로 조화되는 가운데 아슬아슬하게나마 합의된 가상의 형상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최근 시들은 이와 반대의 방식, 그러니까 강지수의 화자가 행하는 것처럼 그림자를 깊게 만듦으로써, 앞선 비유에 이어 보자면, 형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라는 헤아릴 수 없는 것에 관해 물으려 한다.
이번 계절 『문학동네』에서 마련된 ‘우리 시대의 시’ 특집에서 최다영이 ‘가속류’라고 가리킨 배시은, 김뉘연, 성다영 시의 작법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로 여겨진다. 1) 최다영은 그들의 시작법을 “현상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문의 반복과 변주”(배시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김뉘연), “파편적인 사유의 잘라 붙이기”(성다영)로 설명하며 그들 시에는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망, 개성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 없”으며 “언뜻 통찰의 깊이가 담기지 않은 기계의 발화와 유사해 보인다”는 의견을 낸다. 이와 같은 최다영의 진단은 이번 계절 발표된 강보원과 임지은의 시와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 이에 이 글은 강보원과 임지은의 시를 최근 시적 경향과 연결 지어 살펴보되, 의미가 아니라 형식을 전면에 내세우는 그들 시의 특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3.
먼저 강보원의 시를 읽는다.
그러니 이해해야 할 것을 남기지 않아도 좋다. 이 시는 본문(이 시가 어떻게 쓰일지 제시하는 부분)과 시와 상관없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으로는 시의 본문을 먼저 제시하고, 뒤에 이 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두 개를 덧붙인다. (그러니까 이 부분이 시의 본문이다.)
희수에게 얼마 전에 엄청난 할아버지를 만났다고 하자, 희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얼마나 엄청난 사람이었길래?” 나는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물론 그분이 대단한 분이시긴 한데, 내가 말한 건 굉장히 나이가 많고 굉장히 할아버지적인 사람이라는 뜻이었어……” (이 부분은 시와 상관이 없다.) 시를 쓰려고 까페에 앉아 밤크림라떼를 주문해 마셨다. 나뭇잎이 조금씩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부는 날씨다. 길에는 커다란 솜뭉치 같은 것이 떠다닌다. 조금 앉아 있다 보니 어디서 습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외국어를 연습하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외국인이 속삭이며 말하는 소리였다. (이 부분은 시와 상관이 없다.)
―강보원, 「점심시간이 끝날 때 쓰기 시작하는 시를 위한 지시문」 전문(『창작과 비평』, 2024.여름
그간 문학의 역량을 시험해 온 강보원의 여러 작업을 떠올려 본다면 이 시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의 배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괄호를 통해 시와 상관이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분리하는 등의 메타적 서술은 시적인 것과 시적이지 않은 것이 한데 섞여 있음으로써 텍스트 간에 어느 것도 우월한 것은 없음을 말해 온 그의 주장이 시화(詩化)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최근 시의 작법과 겹쳐 볼 때, 이 시에서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보고 싶은 것은 시와 상관이 있는 말과 없는 말이 그저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이 상관이 있고/없는지를 지시하는 말, 그러니까 시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시의 작동 방식이 전면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시의 제목이 가리키듯 이 시가 “점심시간이 끝날 때 쓰기 시작하는 시”, 그러니까 발표되기 전 단계의 시로 컨셉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마치 다 만든 옷의 겉과 속을 뒤집으면 시접들은 숨겨지고 매끄러운 표면만이 남는 상태가 되는 것처럼 가상의 시기에는 괄호들이 삭제된 버전으로 발표될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괄호 속 지시문을 없애도 1연의 “이 시는 본문(중략)과 시와 상관없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등과 같은 시의 작동 원리가 본문을 구성한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이는 “이해해야 할 것을 남기지 않아도 좋다”는 이 시의 첫 문장처럼 대개의 시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내용으로 본문을 구성하지 않으며, 내용이 시와 상관없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과 나란히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서술된 희수와의 대화나 카페에서의 일화를 한데 묶어 의미화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 부분은 시와 상관이 없다.)”라는 지시문으로 이것이 시에 불필요한 이야기라는 점이 강조될 때, 우리가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시의 전면(1연)에 제시되는 시의 작동 원리인 것이다.
최근 시들의 특성을 ‘기계적 발화’라고 할 수 있다면, 이러한 시들은 마치 작동하는 방식이 보이게 디자인된 투명한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만약 이것이 시계라면 보통의 시계는 시간을 표시할 뿐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노출하지 않기에 우리는 시계에서 현재의 시간만을 감지할 뿐이겠지만 투명한 시계에서는 시간을 표상하는 작동 장치의 움직임에 더욱 눈이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이처럼 작동 장치가 훤히 보이는 시를 그들이 왜 쓰는 것인가, 라는 문제다.
4.
임지은의 시를 이어 읽는다.
외로운 날에 부릅니다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혼코노
혼코노
여긴 혼자 와도 모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당신은 한국어를 잘합니까?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하겠지만
한국어는 뜨거운 국물이 시원한 것만큼 이상합니다
여기 자리 있어요,가
자리가 없다는 뜻도 있다는 뜻도 되니까요
그럼 여기 나 있어요,는
내가 있기도 없기도 한 상태입니까?
그래서 왔습니다
혼코노
혼코노
자주 오면 단골이라고 하던데
여긴 무인 상점이군요
혹시 CCTV를 돌려 보던 주인이
저 사람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할까요?
그럴 리가요
전 오늘 처음인걸요
사실 일본어는 잘 몰라도 됩니다
혼코노는 혼자 코인 노래방의 줄임말이거든요
한글과 영어가 섞인 글자의 줄임말이
일본어처럼 들린다니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렴 어때요
이젠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처럼
그 일은 머릿속에서 지우겠습니다
혼코노 혼코노
동전만 될 것 같은데 의외로
카드도 됩니다
―임지은, 「혼코노」 전문(『문학과 사회』, 2024.여름)
어쩌면 이 시를 앞서 다룬 시들과 나란히 놓는 것을 의아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혼코노’라는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기는 하나 이러한 반복이 ‘나’의 외로움 등과 같은 시의 의미 형성과 관련되며, 별다른 메타적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우리에게 익숙한 독법으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혼코노’라는 줄임말이 외국어같이 들린다는 점에 착안한 듯 2000년대 시에서 번역 양식을 빌려 말하던 목소리들을 연상하게 하는 화자의 어색한 말투는 그가 코인 노래방에 혼자 가는 상황과 겹치며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을 한층 깊이 있게 보여 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외로운 날에 부릅니다”라고 분명하게 자신의 외로움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러한 해석의 구심점에 시의 제목이자 시에 반복해서 사용되는 ‘혼코노’라는 단어가 놓인다는 점, 다시 말하자면 사실상 오래되어 누구나 아는 이 유행어의 의미가 긴장 장치로 사용된다는 점, 그마저도 시인이 수수께끼와 같은 그 의미를 모두 다 풀어 설명한다는 점은 이와 같은 독법을 의심하게 한다. 그러니까 시인이 ‘혼코노’라는 단어의 의미와 그것이 가진 특성을, 이를테면 ‘혼코노’는 일본어처럼 들리지만 ‘혼자 코인 노래방’의 줄임말이며, 한국어와 영어를 합친 줄임말이 일본어처럼 들린다는 사실의 이상함 등을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시의 긴장이 사라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상황은 사실상 이 시가 ‘혼코노’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거나 ‘혼코노’에 가는 ‘나’의 외로움을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시에서 이러한 내용적 요소가 중요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전략이 아닌가를 의심하게 한다.
특히 임지은의 화자가 ‘혼코노’의 의미와 뉘앙스를 이야기한 후 던지는 “아무렴 어때요”라는 무심한 말은 이것이 다분히 의도적인 장치임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자면, ‘혼코노’의 의미나 그 뉘앙스의 이상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서 강보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설명하는 이 부분부터가 ‘시와 상관이 있는 부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시 역시 ‘혼코노’라는 단어로 주의를 끌고, 이것을 어떻게 시와 상관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지를 보여 주는, 그러니까 시의 작동 원리를 펼쳐 보여 주는 시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렴 어때요” 이후의 서술은 ‘혼코노’라는 이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설명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혼코노’의 의미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일을 지우고, 다시 말하자면 의미에 중점을 두었던 지난 생각을 지우고 이 말을 반복할 때, 화자는 “처음” 가 본 ‘혼코노’에서 “동전만 될 것 같은데 의외로/카드도”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음을 밝힌다. 일견 사소해 보일지 모르는 이 발견은 그 자체가 코인 노래방 기계가 작동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지만 그 의외성은 한편으로는, 그와 우리를 어떤 고정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시작점같이 여겨진다.
5.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임지은의 화자가 보여 준 저러한 발견에 보태어 최근 작동 원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를 쓰는 이들의 의도를 종합해 보는 일이다. 2) 결코 추정밖에 할 수 없을 이 ‘의도’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 다시 한번 강지수의 작품을 빌려 본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의 사이
여백이 이름을 가지면
닫혀 있다고 믿었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다
(중략)
자려고 누운 침대 위에서 오래도록 눈뜨고 있다
사물의 빈틈을 멋대로 지켜보는 건
나의 악취미
날씨를 가늠하려고 다가선 창가에서 해보다 더 길게 바라본 창 틀의 먼지
그리고
매끈하게 부풀어 오른 이파리의 뒷면에
다닥다닥 붙어 차갑게 들끓고 있는 벌레들의 잔상
(중략)
온실 밖에선 모든 꽃이 한철이고
난 그게 마음에 들어
오래 응시하면 눈이 멀지도 모른다고
감았다 뜨면 산산으로 조각나는 아침의 정경에서
웃자란 풀을 뽑았다
뿌리가 희박했다
―강지수, 「파레이돌리아」 부분
강지수의 화자가 ‘더 사람 같은 게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림자를 깊게 만드는 일을 선택했을 때 그는 그 이유로 “나뭇가지와 나뭇가지의 사이/여백이 이름을 가지면/닫혀 있다고 믿었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든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다움)의 실체를 보기 위해 “바라볼 수 없”는 햇빛을 “오래 응시”하여 눈이 멀거나 풍경이 “산산으로 조각나는” 일을 택하기보다는, 빛을 확인할 수 있는 “깊은 그림자”를 만드는 것. 애써 멀리 있는 사람다움의 형상을 가늠하려 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지금의 일에 충실하는 것, “사물의 빈틈”을 지켜보며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 그렇게 하면 사람다움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를 믿으며 오래도록 눈 뜨고 있는 것.
시가 무엇인지 헤아리려는 지금의 시인들 역시 시가 무엇인가, 라는 거대한 물음과 마주하였을 때 이와 비슷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는 것은 아닐까. 이때 한 가지 중요하게 짚어 두어야 할 점은 지금의 우리는 좀처럼 시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에 대해 정의하거나 막연하게 그것의 미래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먼저 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일이 그들에게 더욱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가를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에 담을 내용은 부차적인 문제로 둔 채 그 작동 원리를 본문 자리에 두는 것은 아닐까. 마치 빛이 닿지 않아 “웃자란 풀”처럼, “뿌리가 희박”한 풀처럼, 어떠한 의미심장한 내용 없이 문장들의 증식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시는. 시가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 지금도 그것이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의 내용이 아니라 시가 작동하는 자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시. 나는 시를 새로이 갱신하면서 새로운 시를 기다리는, 작동하는 시를 본다. 웃자란 말들을 본다.
- 1) 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문학동네』, 2024.여름.
- 2) 이에 대해 최다영은 최근 시들이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물론 그의 글은 이 현상을 포착하는 데 주력할 뿐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발생 원인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기에 그가 이것만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러한 작법에 대해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이라고 가리키거나 박상수의 심사평을 비판적으로 가져오면서도 “중층적 메타 전략이 시가 저절로 진행되게 하여 편리하다”라는 그의 발언을 바탕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시를 쓰는 일보다도 (등단 여부를 떠나) ‘시인’으로의 진입과 공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 지점은 조금 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작법을 다소 비판적으로 읽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러한 서술은 그들의 방식이 단지 시를 쓰기 위한 시를 쓰고 있다거나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최다영,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91-93쪽.
추천 콘텐츠
1. 밤의 주문 간절기(間節期). 계절과 계절 사이의 이행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지칭하기에 환절기라고도 부르며, 매운 더위의 여름과 날 선 추위의 겨울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여유로운 시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가을이 점점 짧아지다 못해 거의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아버린 요즈음, 예전과 같이 계절 사이를 지나는 여유로움을 맛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여유는 체감의 영역에 달린 일이기에 달력을 넘기며 알아채는 숫자의 이월보다 먼저 몸이 느껴야 하는 것이지만,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다 보면 어느새 여름과 겨울로 넘어가 버리는 탓이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찾아오는 3월의 꽃샘추위가 유난스러웠고, 4월에도 눈을 뿌리며 그만큼 겨울과 여름 사이의 간극을 길게 늘여 놓은 올해의 간절기는 우리를 기이한 느낌으로 인도한다. 나로서는 이를 봄이 왔는지 안 왔는지가 아니라, 밤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에 관한 물음으로 돌려 부르고 싶다. 전자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담는 문제지만, 후자는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긍정하고 오늘과는 달라질 내일을 맞아들이는 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이 밤이 깔아놓는 순간의 포석들을 건너 저 아침을 난생처음으로 만날 때 생겨나는 차이의 감각 아닌가? 어제의 피곤을 안고 오늘을 살 수 없듯, 오늘의 고민을 풀지 못한 채 내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필연코 밤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밤은 하루를 정리하고 쏟아내는 과정이다. 낮 동안 쌓인 온갖 피로를 씻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누적된 갖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밤은 신체에 대해서는 망각의 수면을, 정신에 대해서는 신경의 안정과 정신의 이완을 선사한다. 동시에 밤은 절단과 단절, 변화의 시작점이 된다. 눈뜨면 다른 세계가 열리고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역시 밤을 통해서이다. 블랑쇼가 밤을 “미래로의 부름”이라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터. 저 미래는 낮과 밤의 기계적 순환에서 오는 순차적 시간이 아니라 순전한 밤의 노동 속에 도래하는 미-래이다. 그렇다, 밤이 주체다. 지난 수 개월간 우리는 그 밤을 기다렸다. 망연히 쉴 수 없는 밤, 부지런한 이행의 노고를 통해 움직이는 밤, 그럼에도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아챌 수 없는 부동의 밤. 그럼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내일을 불러내고 낯선 자신과 낯선 세계를 창안하는 밤. 지금은 일단 그 밤을 그저 밤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사회와 역사, 공동체의 변전을 통해 이름하는 자리는 따로 마련될 것이다. 그러니 저 밤을 기약하고 인도하며 견인하는 시간의 노동, 이를테면 시라 불리는 주문에 귀를 기울여 보자. 2. 원본 없는 사건 밤이 오지 않는다 분명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밤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엔 밤이 사라진 줄 알았다 저녁이 밤의 정면을 무시한 줄 알았다 한낮이 심야를 점령한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문을 두드렸는데도 그렇게 창문 밖에서 서성거렸는데도 어둠을 데리고 잠과 꿈의 손을 잡고 그토록 신호를 보냈는데도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 밤의 또 다른 얼굴이라고 그토록 귀띔해주었는데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밤의 외부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거니와 눈뜨자마자 밤부터 찾아야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을 챙겨 나가야 했던 것이다 - 이문재, 「밤이 부족하다」 전문 (『문학과사회』 2025년 봄호) 12시간 낮의 시간을 보낸다고 절로 밤이 오지는 않는다. 아니, 밤은 올 것이다. 어둡고 캄캄한, 하루의 일과가 중단되고 긴 잠만을 남겨두는 시간표의 여백이. 하지만 그 시간은 소진된 오늘을 간신히 벌충하는 충전의 순간일 뿐, 새로운 무엇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밖은 어두운데” “손목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데” 잠들지 못한 우리를 여전히 서성대도록 만들며 기다리게 하는 저 밤은 그와 다른 것이다. 그런 밤은 절로 찾아들지 않는다. 온종일 욕망하고 기다리며 다가들 때, 간절히 원하고 갈구할 때야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한낮, 오후와 석양까지의 모든 시간이 밤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저 밤은 끝내 오지 않으리라. 그러니 “아침저녁이 오전 오후가 다/밤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밤은 그저 낮의 반대말이요 시계 바늘이 이동할 때마다 다가왔다가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지루한 순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매양 똑같기만 한 어둠의 상태 그 자체로. 지구의 자전이 일으키는 자연 현상으로서 밤은 늘 똑같아 보이지만, 지난 날과 오늘을 구별하고, 오늘과 다가올 날을 갈라내는 사건의 시간은 단 한 번, 지금-여기라는 밤의 시공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원본 없는 밤”으로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을 낯선 시작의 출현에 값한다. 언젠가 이런 밤을 살았던 적 있는데 그 밤은 영영 지나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원본이 없는 밤이네 당신은 오늘 당신의 뒷모습에 대해 들었지 당신을 험담하는 동료들로부터 흐릿하거나 너무 가까운 시선들로부터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진짜 나를 봐! 몸에 덮인 외투를 결점을 곡해를 걷어내도 당신은 진짜 당신을 보여줄 수 없고 사람들의 속마음은 수장고에 숨겨놓은 모나리자처럼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지 […]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에서 그때에는 있지만 지금은 사라진, 더는 똑같은 묘사란 불가능한 시절과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밤에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삶이 통과하는 모든 밤이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는 깨달음은 마주하는 모든 밤을 “원본 없는 밤”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도래한 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도 있지 않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도 동일하지 않을 밤, 전적으로 낯선 생성의 순간들이라 불러도 좋을 터. “초고를 지워버린 소설”처럼 매 순간의 이야기가 다만 처음 만난 봄처럼 새롭게 펼쳐지는 서사라 말해도 과장은 아닐 법하다. 외양과 모양새는 언젠가 엇비슷하게 존재했을지라도, 지금-여기를 환하게 비추며 만들어지는 낯익지만 또한 낯선 광경들로서. 이야기는 이미 수천 년 전의 이야기 별빛은 이미 수만 년 전의 별빛 일찍이 부스러졌을지 모를 세계로부터 소멸로부터 도망쳐 온 복본으로서의 빛 - 조온윤, 「원본 없는 밤」 부분 (『서정시학』 2025년 봄호) 3. ambulo ergo sum 아마도 봄은 그와 같은 낯설고도 낯익은 빛의 광경 속에 형상화되는 사건일 게다. 하지만 사전 속 단어처럼 단 하나로 지칭되는 봄은 없다. 그저 매번의 봄, 서로 다른 봄을 향해 이행하는 봄들이 있을 뿐이다. 겨울과 여름이라는 계절의 이름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봄. 지속되는 겨울을 절단하고, 어떤 밤의 생성 속에 틈입하기 시작한 낯선 순간으로서의 봄. 당연하게도, 이 같은 시간은 순전한 자연 현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항상 다르고 낯선 무수한 밤을 건너던, 의미의 사건을 바라던 수많은 욕망과 용기, 행동이 낳은 저 시간의 이행을 보라. 새로 이사 온 집 뜰에는 키 큰 목련 한 그루 옛 애인처럼 나를 반겼네 […] 아, 아린 너 아니라면 어찌 견디리 꽃을 기다리는 내 마음에도 눈보라 치고 봄날을 기다리 저 광장에도 밤새 눈이 내려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 눈꽃 같네, 눈에 아리네 아, 아린 기다림은 또 얼마나 황홀한 고통이던가 - 김경윤, 「겨울 목련나무 아래서」 부분 (『문학들』 2025년 봄호) 낯선 곳에 정착한 화자는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을 “키 큰 목련 한 그루”가 오래된 연인처럼 여겨진다. 풍경도 분위기도 익숙지 않은 그곳에서 의지할 것은 단지 자연물인 목련 하나. 하지만 그것 없이 겨울 한파를 버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목련 한 그루를 버티도록 해주는 아린 곧 싹눈의 껍질은, 따라서 화자의 벗이자 동지이며 마음의 거처가 될 수밖에. 그와 마찬가지로 세찬 계절을 건너도록 도와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린 면사포를 쓴/천사 같은 어린 소녀들”이다. 마치 아린 없이 내가 없었듯, 그들이 없었다면 “저 광장에도” “봄날”은 도래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니 우리는 결코 가만히 앉아 이 날을 기다리지 않았다. 간절기, 즉 계절의 사이는 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밤을 새워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던 누군가, 스스로 “눈꽃”이 되어 이 지상을 녹이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계절의 이행을 기억하자. 어쩌면 밤은 그들이 온전히 지켜내고 녹여낸 생성의 순간들로 가득 차, 낯선 아침으로 우리 앞에 도달한 미-래의 현전일 테니. 하루에 한번쯤은 나서는 그의 산책길은 발끝부터 시작되는 생각의 근육 키우기다. 유아차를 미는 고샅길의 노인을 만나면 잠시 안아드리며 세월을 질문하고 망초꽃 들길을 걷다가 훅 끼치는 두엄 냄새를 맡고는 대지의 권력에 끌린다. 사람이기에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걸으면서 자갈이 아삭거리는 강길을 찾고 강물에서 쏘가리를 건지는 사람과 웃는다. […]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다른 사람들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별의 길은 자전거로 잠깐이면 가는 곳쯤이나 될까, 생각을 이내 고원한 데로 몰기도 하는데, 날마다 그 길이와 풍광이 다르고 막다른 절역에선 환한 돌장미의 시도 만나는 길, 다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는 게 생명이라면 길마다에서 사라진 발자국도 찾아보고 길에서 만나는 왕오색나비와도 한통속으로 그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고재종, 「걷는 사람」 부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 사유하는 자로서 근대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했다면, 우리 시대의 그는 다만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bulo ergo sum)’라고 되뇔 따름이다. 이를 주체의 퇴락이나 축소, 소멸로 부르진 말자. 거꾸로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내는 그, 예전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이 세계를 관장하는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물러서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나로 인해 이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 이를테면 저 밤이 이 세계를 다른 곳으로, 낯선 시간으로 밀어 넣는 주체임을 알았으니까. “대지의 권력”이란 그 같은 인간 너머, 주체 바깥의 주체가 놓인 광대한 생성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강조하건대, 밤은 저절로 도래하지 않는다. 변화의 시간, 생성의 사건, 어제와 오늘을 가르고 오늘과 내일을 절단하여 낯선 세계로 이월시키는 저 밤은 욕망과 용기, 행동을 통해 인간과 우리, 나를 통과할 것이다. 소란스럽게 열띤 행진만큼이나 홀로 나서는 산책마저도 저 밤을 위한 걸음걸음이 되어 도래할 밤을 촉진할 테니, 이것이 지금-여기의 존재가 처한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닐까? 때로 “걸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로 길을 잃으며 걷기도 하겠지만, “이래저래 늦게 돌아오는 길” 안에 모든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밤들을 모조리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미-래는 지금-여기와 겹쳐질 게다. 따라서 인간은, 우리는, 나는 “걸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기에.” * 누군가는 잠들고 다른 누군가는 여태 잠들지 못한 이 시간, 그러나 아직 밤은 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밤이다. 다만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똑같고야 말 추상적인 밤일 뿐이다. 정체된 채 흐르지 않고, 누구의 산책길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따름인 시간.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밤은 촉진되리라. 낯설고 또 다른 밤을 향하여. 그러니 지금은 계절의 사이를 마냥 기다리지 않고, 바라보아야 할 때. 주의 깊게 머리를 숙인 채, 눈을 질끈 감고서 저 밤의 도래를 직시해야 할 시간이다. 간-절기(看-節期). 욕망하지 않고서, 용기를 갖지 않고서, 행동하지 않고서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봄을 여름으로 옮기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익숙하던 세계를 낯선 세계로 돌려놓을 환절의 운동은 기어코 저 밤이 이루어낼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예감해야 하며, 때로 믿기도 해야 할 테다. 그렇게 밤은 올 것이라고. 지금-여기에 구멍을 뚫어 현재를 함몰시키고 어딘가의 낯선 시공으로 뱉어내리라고. 그것이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미-래의 권력이라고. 간-절기, 혹은 시적 주문의 시간을 통해. 누가 피어나려는 꽃나무를 막을까, 누가, 온 세상에 차례로 번지는 색색의 봄을, 누가 쫓아다니며 막을까, 누가, 동시에 펼쳐지는 우산을 접을까, 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비를 막을까, 누가, 기울어지는 나무를, 세울까, 누가 무너지는 세상의, 얼굴을, 닦을까 - 박연준, 「새된 소리」 부분 (『문학동네』 2025년 봄호)
1 2024년 여름 『계간 파란』 통권 33호 ‘문질빈빈(文質彬彬)’ 항목에서 제시된 「“지평선”의 아름다움」에서 이미 암시했듯,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은 『주역』과 『중용』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고전의 영향 관계라는 문제틀의 테두리에서 이해되고 감수되어야만 한다. 이 시편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오래된 미래’로 자리할 수밖에 없을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이라는 방법론과 의제의 초점화를 통해서만 적확하게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시와 산문 텍스트의 상관성을 심층적으로 탐사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고전의 충실한 이해 및 참조가 필수 불가결의 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김수영의 초기작 「공자(孔子)의 생활난」에서부터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유발한 도피 행각과 귀가 이후의 실존적 격투가 고스란히 배어든 “신귀거래(新歸去來)” 연작, 그리고 말년에 창작된 「미역국」이나 「사랑의 변주곡」에 이르기까지, 그의 무수한 시편들에선 동아시아 고전의 수용 및 변용의 맥락이 일관된 지속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김수영의 시에서 동아시아 고전의 이름이 거죽 위로 솟아오른 텍스트로는 「술과 어린 고양이」, 「중용(中庸)에 대하여」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너도 취하고 나도 취하는 中庸의 술잔” “여기에 있는 것은 中庸이 아니다” 같은 구절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시의 本髓」 같은 산문 텍스트에서 활용된 “양극의 긴장” “대극” 같은 용어들 역시. 동아시아 문명사의 주축을 이루는 ‘주역 철학사’에서 부단히 제시되었던 ‘대대(對待)’ ‘순환(循環)’ 같은 어휘들을 수용・변형한 것이다. 김수영 시 곳곳에서 나타나는 “설움”과 “긍지”, “생활”과 “자유” 같은 대립적 심상들이 상호 보완적인 “대극”의 지력선을 이루는 것처럼, “대극”과 “양극의 긴장”으로 표상되는 산문 텍스트의 핵심 원리 역시, ‘중용’의 사유와 ‘시중’의 윤리학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중용』의 ‘신독(愼獨)’으로 대변되는 근본적 ‘자기성찰’을 수미일관한 실존적 태도로 “이행(履行)”하려 했을뿐더러, “생활”과 “뮤즈”가 “일자(一字)”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실천의 기반으로서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끊임없이 견지하려 했으며 이를 당대의 “서정시인”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권고했기 때문이다. ‘시중(時中)’이란 말은 『중용』 제2장에서 등장하는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君子가 中庸을 함은 君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小人이 中庸에 반대함은 小人이면서 忌憚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들을 통해, 그 어휘적 관련 맥락과 구체적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주희(朱熹)의 주석으로 나타난 ‘君子之所以爲中庸者 以其有君子之德 而又能隨時以處中也.(君子가 中庸을 하는 까닭은 君子의 德이 있고 또 능히 때에 따라 中에 처하기 때문이요)’라는 구절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시중’이 인격 수양의 정점을 표상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맥락을 좀 더 생생하게 감득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시중(時中)’이란 ‘고시조지의야(故時措之宜也)’라는 말에 담긴 실질적 의미, ‘그러므로 때때로, 상황에 따라서 행함에 의(宜), 적합하면 된다’(우응순, 『친절한 중용 강의』)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상황과 시간의 구체적 마디들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변화와 더불어 그것에 따라 달라지는 마땅함(宜)을 매번 다시 살피고 수행해야 한다는 숨겨진 맥락을 명료하게 풀이해주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에서 부단히 등장하는 부끄러움의 형상들이나 보잘것없음을 반성하는 자기성찰적 시구들은 한결같이 ‘시중’의 윤리학을 우회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김수영의 여러 시작품에서 줄기차게 나타나는 ‘시각성’의 이미지들 역시 좀 더 심층적인 차원의 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용』을 위시한 동아시아 고전에서 유래하는 ‘신독(愼獨)’ ‘권도(權度)’ 등과 같은 성찰성과 관련된 어휘들과 더불어 ‘중용’ 및 ‘시중’의 사유 맥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및 본격적 탐구가 필수 불가결하다. 2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콜맨의 신작품(新作品)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賣春婦)의 생활(生活)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神經質)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卑怯)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케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勞力) 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英國人)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 - 「바뀌어진 지평선」 전문 3 「바뀌어진 지평선」은 김수영의 시와 산문 텍스트를 넘어서 그의 실존적 태도와 세계관의 중핵을 구성하는 ‘중(中)’의 사유와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바탕으로 삼는다. 이 시는 상당히 긴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라는 예술 장르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되어 온 의미의 압축성과 리듬의 암시성을 충실하게 확보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특이점과 미학적 자질이 온전하게 작품 내부에 응축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 역시, 김수영 특유의 “대극”의 사유 방식 또는 “양극의 긴장”에 대한 그의 첨예한 통찰력에서 비롯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1연에 나타난 “뮤즈”와 “생활”이란 이미지는 명시적인 차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르는 “대극”의 의미 계열을 구축한다. 양자의 사이 공간에 들어박힌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시구와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라는 시간적 심상은 “대극”이 반복・변형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오늘”이란 “생활”에서 파생된 것이며, “너”는 “뮤즈”를 대명사로 바꾸어놓은 대체 심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활”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듭이 나날의 범속한 생활이 만드는 온갖 우여곡절들을 암시한다면, “뮤즈”와 “너”가 함께 이루는 연속적인 이미지 지력선은 시인의 포에지(poesie), 곧 시인의 예술적 이상으로 이루어진 예술혼을 표상한다. 나아가 시작(詩作)의 ‘내재적 과정’에서 체감하게 되는 ‘신독(愼獨)’의 실천적 태도와 ‘시중’의 윤리학의 절실한 자각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위에서 풀이한 맥락에 부합하지 않는 이질적 측면 또는 상반된 계기를 품고 있다는 의심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을 중용의 관점과 문제틀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긍지의 날」에서 상반된 위상을 차지하는 “설움”과 “긍지”라는 심상을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로 통합시키는 “대극”의 사유 원리를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는 「사랑」에서 등장하는 “변치 않는”과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이라는 시구의 상반성, 그리고 「사랑의 변주곡」에 아로새겨진 “위대한 사랑의 도시”와 “개미”라는 대극적 이미지 구성원리에서도 또렷한 되풀이의 모양새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만한 경박성”이란 작은 무늬는 ‘극즉반(極則反)’으로 표상되는 동아시아 전통의 ‘이상적 질서’, 곧 ‘중용’의 사유 및 실천 원리이자 ‘대대(對待)’라는 말로 집약되는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에서 감수되고 해석되어야만 한다. 「바뀌어진 지평선」이 품은 사유의 보석이란 어쩌면 정반대 상황에 놓인 사태들을 “대극”의 원리로 포괄하면서, 이들을 그저 대립하는 것만이 아닌 상호 보완하는 것이라고 사유했던 지점에서 최고 순도의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요만한 경박성”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덧씌워진 속물성이나 천박성을 껴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나의 가족」)를 예감하면서 “긍지”와 “사랑”으로 대변되는 상반된 “대극”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려는 잠재적 포석을 품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에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예감하는 사유의 밀알과 더불어 명실상부한 내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시인의 웅대한 미래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향한 상상력의 비상(飛翔)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2연을 구성하는 “대극”의 짜임새는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정(靜)의 심상과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동(動)의 표현이 상반된 지력선을 구축하는 자리에서 양자의 이미지 계열을 한층 더 풍성하면서도 복합적인 일상의 다면성을 담을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간다. 양자는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상반된 이미지 지력선을 각각 계승한다. 따라서 그저 단순한 ‘정(靜)/동(動)’의 “대극” 현상으로 파악될 수 없다. 도리어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요약되는 역동적 상호 침투의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나아가 중층적 “대극”의 무늬들을 2연 마디마디의 모서리로 틔워 올리면서 그야말로 풍요로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주요 동인으로 기능한다. 2연의 “다소곳한 분위기”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심상들 역시,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와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구절들을 각각 잇따르는 것이기에, ‘정(靜)/동(動)’의 단순한 “대극” 현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오히려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으로 표현되는 상호 침투의 역동적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그야말로 다면적인 “대극”의 무늬들을 아로새긴다. 달리 말해, “어느 매춘부의 생활 같이”라는 심상이 “다소곳한 분위기”라는 고요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느낌을 함축하는 것이라면,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라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의 심상은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라는 고양된 충만감으로 솟아오르는 역동적 개방성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면서 고립된 폐쇄성의 감각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무거운 일기”와 “우울”이라는 형상이 둔중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 지력선을 구축한다. 이와 상반되는 “걸어가기 위하여”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라는 구절들은 예민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의 원환 운동을 표현한다. 4연에 나타난 “생활”->“비겁”->“나의 원죄와 회한”의 계열이 함축하는 세속적 “타락”이라는 의미 매듭과 더불어, “뮤즈”->“경멸”->“너의 생리”로 이어지는 형상의 연속선이 이루는 신성한 “지혜”라는 의미 계열 역시, 앞서 살핀 연과 같은 “대극”의 구도에서 발원한다. “생활”의 이미지 계열이 발산하는 ‘세속-현실-일상’이라는 하나의 “극”과 더불어, “뮤즈”라는 형상의 계열체로 수렴되는 ‘신성-이상-예술’이라는 또 다른 “극”이 함께 이루는 “힘”과 “긴장”의 미학이 생생한 느낌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뮤즈”의 “대극”을 형상화하면서, 김수영은 나날을 살아가는 “온몸”에 “타락”과 “지혜”를 동시에 포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편은 나날의 “생활” 속에서는 “뮤즈”로 표상되는 시의 예술혼이 끝끝내 견지하려 했을뿐더러 이와 “대극”을 이루는 “뮤즈” 속에서는 “생활”과의 공분모를 형상화하려 했던, 시인의 실존적 “싸움”을 주도 모티프로 삼는다. 달리 말해, 시인의 몸과 마음에서 수시로 엇갈리는 무수한 “대극” 운동이 「바뀌어진 지평선」을 구성하는 전체 이미지의 주도소(主導素)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5연과 6연에서도 이와 같은 “대극”의 이미지들은 수미일관한 연속선으로 구축되지만,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곧 상호 모순에 가까운 ‘극단적 아이러니’의 어법과 구조를 새롭게 펼쳐놓는다. 특히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5연), “뮤즈여/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오늘은 나의 지평선(地平線)이 바뀌어졌다”(6연) 같은 대목들은 표면적인 통사 구조만을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의 적확한 해석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에 내포된 그 복잡다단한 의미론적 계기와 극단적 아이러니 구조에 관한 섬세한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7연의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를 비롯하여, 8연에서 등장하는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같은 구절들 역시 상호 “대극”의 이미지 계열을 구성한다. 전자(前者)가 바로 앞에 놓인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이어진 것임을 염두에 두면, “타락한”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맥락에서 활용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또한 “기자”의 직무상의 윤리가 매일매일 다르게 변해가는 세속의 풍습과 인심을 “정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이라는 시어와는 결합할 수 없는 상반된 의미 지향성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7연에서 도드라진 모양새로 등장하는 “타락한”은 기자”의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발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피한 상태이자, “이 어지러운 세상”이 강제하는 온갖 “탈”, 곧 사회적 페르소나(persona)로 해석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처럼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앞뒤로 연속된 시구들은 서로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어긋나는 모양새를 띤다. 이들은 “뮤즈”와 “생활”, 곧 ‘신성과 세속’, ‘이상과 현실’ ‘예술과 일상’ 등등의 상반 항들이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시인의 ‘역동적 균형(dynamic balance)’의 사유를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바뀌어진 지평선”이라는 제목이 품은 그 형상의 진의(眞義)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가치 전도의 의미를 거느린 이 형상은, “뮤즈”와 “생활”이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라 오히려 수시로 넘나들 수 있는 상호 전환의 융합 관계에 놓여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중(中)’의 시간적 궤적을 표상하는 형상인 동시에 ‘역동적 균형’의 운동 및 이행 과정을 지속하는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암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8연의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 역시, “바뀌어진 지평선”으로 빗대어진 ‘신성’과 ‘세속’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상호 전환 과정 및 ‘역동적 균형’의 상호 이행 운동을 역설 어법으로 새긴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구절 바로 앞에 놓인 “적당(適當)한 음모(陰謀)는 세상의 것이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아슬아슬하게/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精神)이여”와 더불어, 그 뒤를 잇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는 이미지 매듭을 오랜 시간 동안 숙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들을 곰곰이 되살피면,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라는 구절은 비단 “타락한” 시인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풍자를 비유한 표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저 구절은 언뜻 “가벼워서”, “배반”, “간악” 같은 시어들로 이어지면서 부정적인 느낌을 꼴 짓는 이미지의 핵심 매듭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의 앞뒤를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정반대 의미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다시 되짚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통해서만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와 배경이 “생활”에 있을뿐더러 “경박성”이란 그것의 필수 요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의 “표면”을 딛고 “아슬아슬하게” “날아갈” 수 있는 “정신”을 다시 강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은폐된 측면이 새롭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이라는 적확한 은유가 암시하는 것처럼, 저 이미지들은 “세상에 배를 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 “물”에 빠져버리지 않고 그 “위를 날아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부단히 유지할 수 있는 실천의 벡터를 암시적 문법으로 개진한다. 이 실천의 원리를 ‘시중’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 철학자가 제시한 ‘인간의 모든 “중中”은 “시時”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시時”라는 것은 객관적・절대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상황성을 말하는 것이다.’(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라는 언급은, 이 맥락 전체를 좀 더 명확한 철학적 범주로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와 같은 ‘시중(時中)’의 사유 맥락은 8연 마지막 대목을 이루는 “표면에 살아라/뮤즈여/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형상들이나, 9연의 “너의 육체는/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1연의 “뮤즈여/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같은 심상들로 변형되면서 점층적 확산의 의미구조를 형성한다. 시인이 “뮤즈”에게 “표면에 살아라”라고 말하면서,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 역시, ‘중中이란 오직 적절한 시時를 만날 때만이 중으로써 완성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시중’의 윤리학에서 기원한다. “표면”은 “생활”의 의미 계열로 수렴되며,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은 “뮤즈”의 이상적 예술세계를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자기 신념을 은은한 뉘앙스로 드러내는 역설 어법을 활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9연과 11연의 이미지 또한 위와 같은 해석의 범주에서 감수되는 것이 합당하다. “뮤즈”를 “아름다움”이 아니라 “육체”의 차원에서 호명하는 이미지 매듭(9연)이나, “시인”과 “시”를 “대극”의 차원으로 설정하면서 “뮤즈”와 “시”를 의미론적 연속체의 범주로 설정하는 구절(11연)은 「바뀌어진 지평선」에서 “생활”과 “뮤즈”가 완전히 다른 별개의 세계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면적 의미를 함축한다. 이 구절들은 “생활”과 “뮤즈”를 끊임없는 상호 전환 및 상호 이행이라는 융합・횡단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김수영 특유의 ‘중(中)’의 사유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사유는 또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라는 실천 원리와 가치 지향성을 내포한다. 9연과 11연이 연속적인 의미 계열을 이루면서 개진하려는 바는, 각각의 상황과 국면에 따라 “생활”과 “뮤즈”가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관계이자 최적의 방향성, 곧 매 순간 ‘시중(時中)’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궁극적 전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활”과 “뮤즈”가 12연에서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양자의 상호 이행 과정에서 매 순간 달라지는 ‘시중(時中)’의 위상과 내용을 신중하게 사유하고 충실하게 실천하려는 자리에서 비롯한다. 달리 말해, 시인은 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최적의 방향을 모색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는 실천의 ‘내재적 과정’, ‘시중(時中)’의 윤리학을 나날의 실존적 태도로 견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라는 구절로 표상되는 세계의 모든 영역이 “일자(一字)”를 이루는 “지평선의 대열”을 구축할 수 있는 궁극적 화합의 미래 비전을 상상하고 선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이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무리 대목에서 “뮤즈”에게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12연), “앞장을 서지 마라”(13연),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13연)라고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점을 이룬다. 시인은 “생활”과 “뮤즈”의 “대극”이 함께 이루어가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이행 과정을 섬세하고 풍요로운 이미지로 소묘함으로써, ‘세속/신성’, 현실/이상’, ‘예술/일상’이라는 대립 구도의 고정성을 부단히 해체-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동시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권유하려 했던 것으로 유추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라는 대목은 “서정시인”으로 비유된 당대의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모두 “모더니티”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혁신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전언을 간곡한 명령 어법으로 권고하는 내용을 품는다. 이렇듯 “지평선의 대열”이 그야말로 “일자(一字)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매리지/하우스펠 에어리어” 같은 어휘들로 표상되는 서구 기계산업문명의 선진성과 그 문화적 세련성을 무작정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으리라. 나아가 이와 같은 서구의 문화적 특질을 “뮤즈” 곧 “시”의 이상적 본질이자 예술혼의 정수로 추구하거나 숭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대 서구의 문화는 우리의 “생활”과 엄청난 격차로 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꾸어진 지평선」에서 시인이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라는 사회・역사적 상황과 이에 대한 신중한 고민 및 극복의 비전을 여타의 “서정시인”과 예술가들에게 권고하려 했던 맥락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이 권고에 깃든 속도의 담론과 비전이란 우리 사회 전체의 “모더니티” 수준과 밀도에 대한 시인의 근본적인 염려와 신중한 고민의 깊이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것은 『중용』 제2장의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군자가 중용을 함은 군자이면서 때에 맞게 하기 때문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로 함은 소인이면서 기탄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구절과 그대로 맞닿는다, 『중용』의 이 구절에 따르면, 군자의 ‘시중(時中)’은 소인의 ‘무기탄(無忌憚)’과 상반된 방향과 내용을 지니는 ‘기탄(忌憚)’, 곧 ‘거리낌’을 심사숙고하는 자리에서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리낌이란 신중함’이며, ‘거리낌은 인간에게 “거리”와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기에 실수의 가능성을 줄인다’(김용옥, 『인간의 맛』)라는 깊은 안목의 풀이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거리낌은 겸손인 동시에 인간다움의 강함’일뿐더러, ‘시중(時中)’의 근거이자 그 실천적 이행의 원천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바뀌어진 지평선」의 마지막 연에서 극단적 역설을 표현하는 반어법을 동반하면서, 우리 “모더니티”에 둔중하게 가라앉은 “우울”과 “경박”을 반추하도록 강제한다. 마지막 13연에서 “앞장을 서지 마라” “낮추어라” 같은 말들로 표현된 제한과 금지의 명령어들을 “뮤즈”에게 덧씌울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들은 김수영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1950-60년대 한국 시단에서 “모더니티”의 첨단을 맹종(盲從)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각별한 어조와 리듬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을 여타의 시인들이나 예술가에게 권고하고 공유하려는 치열한 노력에서 비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13연은 두 매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인간들이 걸어간다/뮤즈여/앞장을 서지 마라/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音階)를 조금만/낮추어라”라는 부분으로 매듭지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마지막 대목으로 분할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는 “뮤즈”에게 모더니티와 아방가르드 풍조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님을 권고한다. 또한 우리가 나가야 할 최적의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기를 간곡하게 요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고민과 성찰의 자리가 바로 ‘시중(時中)’의 윤리학이 펼쳐지는 구체적 실천의 무대일 것이다. 이는 또한 후자(後者)의 지극한 역설로 이루어진 반어법을 낳는 토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바뀌어진 지평선」의 “오늘의 우울(憂鬱)을 위하여/오늘의 경박(輕薄)을 위하여”라는 맨 마지막 무늬들은 김수영의 산문 「모더니티의 문제」를 비유적 차원에서 집약하는 구절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 없이는 충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 구절과의 통사론적 맥락에서 보면 지극한 역설을 내포한 아이러니의 수사학일 터이지만, 한국 “모더니티”의 후진성이란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맥락은 “우울”과 “경박”이라는 시어가 발산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이 우리 “모더니티”의 낙후된 수준과 후진적 형성 과정을 치열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그것과 ‘사랑하는 싸움’을 벌이려 했던 그 복잡다단한 속사정을 비교적 명징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모더니티의 문제」에 나타난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김수영의 “이상한 역설”이란 현대 한국인에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을 “우울”과 “경박”을 회피하거나 배제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수영이 말하는 “긍지”란 우리 모두의 “우울”과 “경박”을 껴안고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뿐더러. 이른바 ‘중용’의 미덕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김수영에게 “긍지”란 ‘시중’의 윤리학에 깃든 ‘실천적 원근법’과 ‘역동적 균형’의 부단한 “이행”에서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우리 “모더니티”의 후진성에서 발원하는 “우울”과 “경박”을 정면으로 마주치려는 주체에게만 도래하는 것일 터이다. 아니, ‘다른 미래’를 열어가려는 수미일관한 실천의 자리, ‘시중(時中)’의 충실한 이행 과정을 통해서만 체화될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아랫자리에서 인용되는 작은 무늬들이 넌지시 말해주듯. 오오 환희(歡喜)여 미역국이여 미역국에 뜬 구름이여 구슬픈 조상(祖上)이여 가뭄의 백성이여 퇴계(退溪)든 정다산(丁茶山)이든 수염난 영감이든 복덕방(福德房) 사기꾼도 도적놈지주(地主)라도 좋으니 제발 순조로와라 자칭(自稱) 예술파시인(藝術派詩人)들이 아무리 우리의 능변(能辯)을 욕해도-이것이 환희(歡喜)인 걸 어떻게 하랴 인생(人生)도 인생(人生)의 부분도 통째 움직인다-우리는 그것을 결혼(結婚)의 소리라고 부른다 - - 「미역국」 부분 우리의 현대시의 밀도는 이 자각의 밀도이고, 이 밀도는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가리켜준다. 이상학 역설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 그가 ‘앞섰다’면 이 ‘뒤떨어졌다’는 것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의식하는 점에서 ‘앞섰다’.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우선 우리들의 현실에 정직할 수 있는 과단과 결의가 필요하다. - - 「모더니티의 문제」 부분
1 이혜원은 2013년 여름부터 2023년 가을까지 발표한 글들을 묶은 『고백의 파동』에서 시의 가치를 다음과 같은 말로 새롭게 정의한다. “자신을 열고 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의 대화술은 물질과의 전면적 대화가 필요한 현재의 시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특별한 기술이다”(7)1). 코로나19를 지나며 물질의 생기를 실감하게 된 지금, 물질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대화의 기술’이 전례 없이 중요해졌지만, 그는 시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대화를 실천하며 “신유물론적 사유를 선취”(7)해왔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 비평의 가치 역시 시의 대화 능력을 매개로 물질과 간접적인 대화를 수행해 온 실천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그가 시 비평을 “시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특별한 대화술”(7)로 바라본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코로나 사태와 신유물론의 유행”(6)을 거치며 견고해졌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맥락을 획득하지만, 사실상 이는 그의 비평 전반을 관통하는 일관된 태도였기 때문이다. “또박또박 읽는다”는 2016년 팔봉비평문학상을 수상할 당시의 평처럼, 이혜원은 줄곧 시를 비평의 중심에 놓고 시에 대한 주의 깊은 독해를 통해 꾸준히 대화를 시도해 왔다. 초현실적이거나 침묵에 가까운 시 앞에서도 그는 귀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인의 언어를 먼저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겸양의 태도는 의도치 않게 시 비평이 함의하는 또 하나의 대화 구조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비평이 시와의 대화일 뿐 아니라 독자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이 이중의 대화 구조 안에서 의미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시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설명할 때 시를 중심에 놓는 데서 멈춘 것은 그 특유의 겸양에서 비롯된 일이겠지만 이 글은 바로 그의 서술이 누락한 대화의 층위, 곧 독자와의 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혜원이 시의 고백을 성실히 듣고, 그로부터 구성된 대화를 독자에게 다시 건넴으로써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열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는 그의 비평이 시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시로부터 들은 것을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겨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그가 구축해 온 ‘대화의 기술’은 단지 시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그가 독자에게 건네는 말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접속, 그리고 새로운 파동을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함으로써 또 하나의 대화의 장을 연다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기술이야말로 그의 비평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미덕이다. 2 좋은 대화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시중의 수많은 책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듯, 그 핵심은 경청에 있다. “최고의 대화술이 잘 듣는 법”(6)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이혜원이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들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을 제외하고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모든 글들은 개개 시편에 대한 구체적 시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 더구나 예외처럼 보이는 「산문시의 리듬과 대화의 시학」 또한, 그보다 약 10년 전 발표된 「슬픔의 달콤한 리듬―이제니의 시」에서 이루어진 이제니의 산문시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디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평은 예외 없이 시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경청’은 단일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등 적극적인 반응을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주의하여 듣는 목적이 이후의 대화를 잘 해나가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이혜원은 시가 하는 말을 듣고 반응하는 와중에 그 말이 어떠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그 배경과 의도, 감정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을 한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이제니론에서 그는 이제니 시의 리듬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떠한 배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 골몰한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 의해 이제니 시가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와 같은 상상이 언어와 리듬으로 발현되었다는 점을 밝히는가하면, 현대시의 산문화 경향에 따라 리듬이 점차 위축되는 흐름 속에서 이제니 시가 출현했다는 맥락을 제시하며 그 고유성을 보여주는 방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결국 통시적·공시적 좌표를 설정하여 시나 시인을 그에 맞는 정확한 자리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가 비평에서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혜원이 마련한 좌표가 동시대 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 작품들 중 “리듬이 살아 있는 시들의 질서 있는 언어”나 “리듬이 상실된 시들의 혼란스러운 언어”(558)와의 비교를 통해 이제니 시의 리듬 특수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를 “전통이나 정형의 리듬”(557)과 구분하며 전체 한국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해당 시(인)의 위치를 설정한다. 「감각의 향유―황인숙론」에서 황인숙 시의 개성이 “감각을 향유하는 능동적인 감수성”(384)에서 비롯됨을 밝히는 부분 역시 그러하다. 그는 거침없이 감각을 발산시킨 황인숙의 시가 “이념의 시들이 주도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로웠는가를 짚는 가운데 감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김기림의 시론을 불러온다. 이로써 황인숙의 시는 현대시사 내 감각적 시의 계보에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2) 나는 이와 같은 비평 방식을 ‘지형학적 비평’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러한 명명이 필요할 만큼 이 방식이 하나의 비평 전략이자 효과적인 대화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구축된 현대시의 좌표는, 비평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독자가 시와 보다 가까이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원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한편, 내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함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좌표 설정은 비평가가 바라보는 시적 관점을 독자와 공유함으로써 독자와의 대화를 이어가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가 시에 더 가까워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혜원의 비평이 현대시사의 지형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까지 꼼꼼하게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황인숙론에서 그는 황인숙의 감각적인 시가 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예술에서 감각이 저평가되어 온 연원을 밝히는가 하면 레비나스를 경유해 감각의 중요성을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는 현대시를 비롯한 예술이 “대중과 유리되면서”(36) 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사실상 비평으로 선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를 난해한 말로 멈추어 세우는 많은 비평과 달리 단정하고 친절한 그의 비평이 단지 시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에만 장점이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비평적 특성은 독자가 스스로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도록 격려한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그의 비평을 읽는 독자는 더 이상 비평적 사유를 ‘비평가의 일’로 한정하지 않는다. 시를 둘러싼 맥락과 작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 위에서 독자는 마침내 이혜원이 던진 질문에 함께 응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자들이 이혜원의 답변에 머무르지 않고 저마다 새롭게 바라본 문제를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그의 좌표 설정 ‘방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는 작품을 특정한 계보 아래 분류하고 좌표를 만드는 일이 곧 닫힌 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평은 단순히 계보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더 많은 대화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목표인 이러한 좌표 설정은 때로 상투적인 틀을 흔들며 시인과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예를 들어, 『고백의 파동』의 첫 글인 「고백과 공감」에서 그는 ‘고백시’의 효과를 논하기 위해 이성복과 최승자, 기형도와 황지우, 박준과 심보선 등 익숙한 조합뿐 아니라 윤동주와 김수영을 묶어 제시한다. 이 낯선 연결을 “견고한 양심의 울림”(21)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제시함으로써 독자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현대시사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두 시인을 “1960-70년대의 베스트셀러 시집”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중이 두 시집을 선호하게 된 배경을 비롯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하게하며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혜원이 설정한 현대시의 좌표가 닫히거나 고정된 체계가 아님은, 그가 점차 확장되는 서정시 영역을 시종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서 가장 섬세하게 다뤄지는 것은 서정시 미학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서정시와 질문의 확장성」 등의 글에서 그는 서정시와 비(非)서정시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로 시를 나누거나 서정시의 개념을 고정하기보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서정시의 특성을 구분하여 그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한다. 서정시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200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래파 논쟁을 통과하면서 보다 공고해졌을 수 있지만, 그 논의는 단지 미래파와의 대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의 사랑의 회의에서 ‘너’의 사랑의 발견으로―김수영 시에서 서정적 주체의 확장성」에서 그는 “김수영 시는 서정시인가”(301)라는 질문을 던지며 김수영을 “넓은 진폭의 서정시를 썼던 시인”(302)으로 바라본다. 동시에 그는 김수영이 왜 “전형적인 서정시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김수영 시의 서정성이 갖는 특성을 가늠해”(303)본다. 이러한 관점은 그가 분류를 위한 분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의 말을 세심히 듣는 작업을 통해 각 시(인)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하고, 결국 시의 구체적 미학을 발견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입증한다. 3 정리해보자. 『고백의 파동』을 읽고 우리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지형도와 그 지형 위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수많은 질문들이다. 이번 평론집에서 시인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어떤 이는 이혜원 비평의 대화적 성격을 ‘논쟁’의 반대말로 사용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2015년 신경숙 소설의 표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발표된 「모방과 창조의 거리」를 함께 언급하며 말이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 비평가들처럼 명확한 찬반 입장을 표하며 논쟁에 뛰어들기보다는, “표절과 창조적 모방 사이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바람직한 창작의 방법을 살펴보”(143)려는 다분히 학술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즉각적으로 링에 오르기보다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표절 개념을 정리하고 모방과 창조의 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사유하기를 유도한다. 이것은 결국 시의 본질적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쟁에 응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산적인 대화란 결국,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상대의 말을 곱씹게 만드는 대화이기에, 시의 가치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문제 제기는 겉으로는 조용히 감추어져 있지만 오히려 더 날카로운 것일 수 있다. 『고백의 파동』은 그렇게 앞으로 이루어질 더 많은 논쟁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다시 책머리로 돌아가 물질의 능동적 운동을 설명한 그의 다음 문장을 다시 읽게 된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듯 소립자는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자신을 가둔 장벽을 통과한다”(6). 이제 나는 이 문장에서 ‘소립자’ 자리에 이혜원의 평론집을 대신 놓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순간적으로 파동이 되어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책이라는 물질적 형식을 넘어 한국 비평장의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대화의 장을 여는 데 이혜원의 ‘대화의 기술’이 있다. 1) 본문에서 『고백의 파동』을 인용할 때에는 쪽수만을 표기한다. 2) 때로 그는 한국 현대시를 세계 문학 및 예술의 지형 속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정재학, 강성은, 서대경의 초현실주의 시를 카프카 문학과 병치하며 읽어내는 「초현실주의 시와 현실의 재발견」이나, 김수영과 자코메티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 관계가 아닌, 공통된 방법론을 지닌 예술로서 고찰하는 「김수영과 '시선'의 재발견」 등이 그러하다.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