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시작 2024년 겨울호(제90호)
울음의 시와 가장假裝의 시 ― 정우진 시집, 『지구가 멈춘 순간』, 서정시학, 2024. ― 기원석 시집, 『가장낭독회』, 아침달, 2024.
울음의 시
울음은 기억이다
울음을 참으면 목이 아픈 것은
수억의 장면이 한꺼번에 막혔기 때문이다
울음의 끝을 잡고 세상에 나와 말[言]이 되었으니
다시 기억하여 끝과 끝을 묶어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래도 울음의 시작
사랑이 아직 목, 숨에 있다
네 울음이 다 쏟아질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
―「울음의 자리」 전문
여기 한 “울음”이 있다. 이 “울음”은 한 인생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억”과 등가이다. 우리가 “울음”을 참을 때 “목이 아픈” 이유는 “기억” 속에 있는 “수억의 장면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밀려들면서 압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울음의 끝을 잡고 세상에” 나온 “말[言]”이 곧 시詩일 것이다. 오래전에 묻혀 있던 “기억”을 다시 꺼내 그 “기억”의 “끝과 끝을 묶어야”지만 비로소 어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결국 “울음”은 가슴에 맺혀 있던 생의 기억들을 몸의 바깥으로 꺼내 놓는 행위이다. 내밀한 “기억”들이 “울음”으로 다 토해져야지만 자신의 생을 끌어안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또는 ‘너’의 모든 울음 이후에 우리의 울음이 포개진 자리에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할 수 있다. 이 “울음”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기억 속의 상처가 깊을수록 “울음”은 오래도록 계속된다. 그리고 시인은 “울음”이 목구멍으로 쏟아지면서 동시에 오고 가는 날숨과 들숨에 “사랑”이 깃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시의 빛나는 지점은 “울음”의 숨결 속에 “사랑”이 있다는 놀라운 발견에 있다. 시인은 “울음”을 그치기를 종용하지 않는다. “사랑”에 조급하지 않다. 이 “울음”의 끝에서 “사랑”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울음이 다 쏟아질 때까지” ‘너’의 곁을 지키고 “기다리겠다”는 선언은 “사랑”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이 “울음의 자리”는 시 「차용증」에서 어렵게 꺼낸 “결혼에 대한 이야기”에 울음을 터트린 “여자”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시인의 ‘울음’은 생활인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일하고 상처받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하루를 살아간다.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최선을 다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시달린다. “시간은 오고 있는 것이었어/ 초 단위로 재촉하기 위해 째깍거리는 것이더라/ …(중략)…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 말고는 이제 남은 게 없다”(「무지개는 언제부터 9개의 목숨을 먹고 자랐나」). 평범하게 먹고 사는 일마저도 어려운 시대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을 분투한다. 성공과 행복을 향해 달려가지만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많은 비명들이/ 하루도 채 지나지 않고/ 저렇게 사라져 버릴까 봐// 가끔 모르는 눈물이 난다”(「자가면역질환」).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면 “나는 무엇이길래/ 온통 멍 같은, 흉 같은 물때투성이인가”(「바닥을 피우다」)라고 스스로 되물을까. “물때투성이”는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눈물 자국이다.
시인은 자신을 옥죄는 삶의 무게에 허덕이지만 꿈을 잃지 않고 간직한 자이다. 지금의 삶을 넘어 다른 삶에 닿고자 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낯선 이국인 아이슬란드의 빙하 “에이야프야트라이외쿠틀/ 괴괴한 이것은 먼 나라/ 가끔 자다가 소리 지를 때/ 나오던 이름”을 떠올리고, “소금기 어린 소음 속/ 그 안에 어느 섬, 강가, 언덕, 해구들 이름 흔들릴 때/ 낡은 해도에서 벗어난 고래를 꿈꾼다”(「새끼손가락이 두근거릴 때」). 현실의 암울함이 커질수록 이곳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은 더 배가된다. “내 꿈은/ 처음부터 덮여져야 할 것이었을까/ 왜 밤마다 환상통은 꿈틀거릴까”(「이안류」). 시인은 꿈에 대한 열망에 온몸을 앓지만 그가 결국 눈을 돌리고 바라보는 곳은 지금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에 대한 패배주의가 아니다. 현실에 잠재된 희망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다.
살기 위해 먹는 것에
사는 기쁨을 더하려는 정성이 희고 곱다
그 마음은
어버이나 자식이 되자 만들어지는
지위가 아닌 삶에 대한 작정이어서
같은 시간에 입을 벌려 먹이를 마주하는
나뭇잎이며 개미며 나비며 저기 어떤 개이며 하는 것들과
둘러앉은 입들처럼 나란해진다
해가 뜨고, 해가 높고, 해가 질 때를 따르는 밥때
해를 따라 그 먹음으로 사람은 순환 속에 놓인다
이 나란함에는 차이가 없고
어떤 이들도 지금 배가 고프겠구나 하는 마음은 당연해진다, 그렇게
낳아 준 분은 몸의 어머니이지만
배고픔은 공생의 어머니이다
문득 이유 없이 느껴지는 허기가 있다
나란함의 어머니가 슬퍼하지 않도록
어두운 골목들
배꼽이 지워진 채 마른 뿌리처럼 사라지지 않도록
―「백반」 전문
이 시는 우리가 평상시에 가장 많이 만나는 밥상인 ‘백반白飯’ 앞에서 부르는 생의 찬미이다. “살기 위해 먹는 것에/ 사는 기쁨을 더하려는 정성이 희고 곱다”. 하루하루의 생은 그저 “살기 위해 먹는 것”의 수준에서 반복되지 않는다. 때로는 눈앞이 막막하고 생이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밥때”가 되어 백반 앞에서 앉으면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흰밥과 국, 반찬을 정갈하게 내놓은 밥상에는 “사는 기쁨을 더하려는 정성”이 서려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밥때”의 “순환”을 따른다. 밥상 앞에 앉아 한술 뜨려고 할 때 “어떤 이들도 지금 배가 고프겠구나 하는 마음”은 세상을 한층 따듯하게 만든다. 생의 “허기”에 시달리는 자들이 울음을 운다. 울면서 밥을 먹는 자들이 있다. “사는 기쁨을 더하려는 정성”이 우리를 간신히 버티게 한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흰밥과 반찬, 국이 놓인 식탁을 볼 때마다 가슴 뜨겁고 먹먹해지리라.
정우진 시인은 울음의 시인이다. 그의 첫 시집 『지구가 멈춘 순간』에는 울음의 순간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전과 공전이 만드는 백색소음 같은 것들이/ 잠깐 멈추는 그런 때”(「지구가 멈춘 순간」) 우리는 한 인간의 내밀한 순간을 들여다보게 된다. 생의 허기로 지친 누군가가 울음을 우는 순간이다. 밥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든 존재에게는 울음이 있다. 그는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가만히 곁에 서서 세상의 울음과 함께한다. 『지구가 멈춘 순간』은 세상에 지친 이들에게 잠시 울음의 자리를 내어 준다. 그의 시집에서는 ‘괜찮아’라고 다독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울음의 곁을 내주는 시집이 몇이나 될까.
가장假裝의 시
1966년 독일에서 초연된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은 서사나 행위 없이 연극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진 언어극이자 기존 연극의 전형성을 깬 실험극으로 평가받는다. 배우들은 편안하게 무대 위 배우의 연기를 관람하러 온 관객들을 조롱하고 모독한다. 일상적이고 수동적인 관객의 위치를 흔들어 기존과는 다른 관객이 될 수 있도록 재배치하는 작업이다. 『가장낭독회』는 희곡 『관객모독』의 형식 일부분을 명민하게 차용한다. 『관객모독』에 ‘배우들을 위한 규칙’이라는 연출 지시 사항이 있듯이 『가장낭독회』에도 ‘가장낭독회’의 참여하기 위한 안내서인 시 「튜토리얼」과 ‘낭독을 위한 지시사항이 담겨 있다.
[낭독을 위한 지시사항]
그러나 가장 적막한 홀에서도 낭독은 들리지 않을 것. 혀와 입술의 움직임만으로 시를 읽을 것. 관객은 자신의 청각을 해방할 것. 낭독은 점점 빠른 속도로 진행할 것. 처음에는 모데라토 다음에는 알레그로 마지막에는 아지타토 프레스티시모까지 치달을 것. 정확한 발음과 깊은 성량으로 낭독할 것. 관객은 그 모습을 낱낱이 들여다볼 것. 팔짱을 끼고 한쪽 어깨를 불쑥 내민 채로 낭독자의 검은 목구멍을 꿰뚫어 볼 것. 날카로운 불신과 의심 속에서 낭독자를 말없이 힐난할 것. 낭독자의 혓바닥과 낭독자의 송곳니와 낭독자의 입천장과 낭독자의 침 삼키는 소리를 꿰뚫어 볼 것. 그것들이 탄로 나지 않도록 낭독자는 낭독할 시가 아닌 가짜 문장들을 준비할 것. 시가 아닌 육성과 시가 아닌 단어와 시가 아닌 리듬과 시가 아닌 열망과 시가 아닌 거짓말과 시가 아닌 호소와 시가 아닌 삶을 예비할 것. 혀와 입술의 움직임만으로 전달할 것. 요동치는 침묵을 관객들은 두 눈으로 필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을 것. 그것을 소리 내어 읽을 것
―「가장낭독회」 전문
시집의 “관객”은 ‘가장낭독회’에 초대된다. “[낭독을 위한 지시사항]”이라는 직접적인 표기에서 보듯이, 이 낯선 ‘가장낭독회’를 진행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세부 지침을 들어야 한다. 낭독자의 “혀와 입술의 움직임만으로 시를 읽”어야 하고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자신의 청각을 해방”해야 한다. 이상한 요청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관객”은 “낭독자”의 언어를 “불신과 의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낭독자”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고 낭독할 “시가 아닌 단어와 시가 아닌 리듬과 시가 아닌 열망과 시가 아닌 거짓말과 시가 아닌 호소와 시가 아닌 삶을 예비”해야 한다. 낭독회임에도 결코 낭독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오직 “요동치는 침묵”만이 있다. “관객들”은 이 무대 위에 “요동치는 침묵”을 “두 눈으로 필사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고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야지만 비로소 “가장낭독회”는 실현될 수 있다. 낭독자의 낭독을 기대하는 일반적인 관객은 이곳에 입장할 수 없다. 이 시집은 “가장 적막한 홀”과 같고 이곳을 채우는 낭독은 독자의 입술에 의해서 완성된다. 시집은 활자화된 죽은 문자이며 그 자체로 완성체가 아니다. 시집은 독자가 개입하여 낭독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시집은 다르게 발화될 수 있는 무수한 가능태로 존재한다.
다섯 편 혹은 열한 편의 시가 무대에 오를 것이다 그들이 고개 숙여 독자에게 예의를 갖추고 자리에 앉자마자 시가 시작될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원고를 꺼내어 동시에 읽고 누가 제지할 틈도 없이 뒤섞일 것이다 단어들이 드문드문 들리고 한 편에 집중하려고 치면 다른 한 편이 목청을 높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편치 않을 것이다 각자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에게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튜토리얼」 13쪽 부분
[시를 쓰는 법에 대한 기밀]
언어의 와해와 사고의
망상 기술하기
행간을 최대화하기
이를테면 새벽마다 한 줄씩
쓰기 자다 일어나서 쓰기 아무
페이지나 인용하기 그럴듯한 단어 연결하고
쓰기
인물 뒤섞기와 설정
갈아엎기
무수하고
다양한 방법들
―「CONFIDENTIAL」 부분
그리고 이 글은 시가 되지 않는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출판되지 못하는 비문들, 인용될 수 없는 덩어리들, 기억에 남지 않는 잡념들, 도태될 유전자들, 감각이 닿지 않는 살점들, 불쏘시개로 쓸 수 없는 데이터들, 읽을 수 없는 표지판들, 시대에 뒤처진 경구들, 찢어져 가라앉는 그물들, 껍질투성이의 오믈렛들, 오렌지를 쥔 주먹들, 휘두르지도 내던지지도 못하고 짓물러 가는
―「튜토리얼」 16쪽 부분
『가장낭독회』는 시가 무대에 오르는 형식 안에서 “언어의 와해와 사고의/ 망상 기술하기”나 “인물 뒤섞기와 설정/ 갈아엎기/ 무수하고/ 다양한 방법들”(「CONFIDENTIAL」)을 통해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언술을 보여 준다. “시가 되지 않는 문장들”로 ‘시’를 완성하려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시의 본체와 본질은 사라지고 ‘가장假裝’된 인물과 사물이 화려한 언어의 춤사위를 펼친다. ‘가장假裝’은 얼굴이나 자신의 본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게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의 언술이 고정된 1인칭 주체의 발화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통일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환상이다. 시에서 고정된 1인칭 주체가 등장한다면 그것 또한 가장假裝된 것이다. 미래파 이후 한국시가 외연을 넓힐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1인칭 주체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낭독회』는 더 급진적이다. 무수한 가장행렬의 끝에 인칭이란 개념도 벗어나 무인칭의 언어로 작동하는 Non Player Character가 등장한다(“이윽고 나 역시 하나의 NPC가 되어”, 「튜토리얼」, 76쪽). 그것은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처럼 시의 매뉴얼로만 작동하는 가장假裝 캐릭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진정한 가장낭독회가 된다. 다른 한편, 시집 제목인 ‘가장낭독회’는 시 낭독회를 부르는 다른 말이다. 시 또한 본체가 없이 온갖 가장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이다. 시는 곧 ‘가장’이다. 기원석 시인은 시집의 ‘가장낭독회’를 위한 튜토리얼을 작성하면서 동시에 생성되는 언어를 탐험한다. 이 재기발랄한 언어 소동극騷動劇을 보고 있으면 어느덧 현실의 독자인 ‘나’도 가장낭독회의 무대 위에 서 있게 된다. ‘가장낭독회’라는 시집의 기획은 신선하고 성공적이다.
『가장낭독회』의 무대는 자폐적이지만 유쾌하면서 기이한 언어극을 펼쳐 보인다. 시 낭독을 위한 지시 사항과 시 낭독을 위한 준비물 자체가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시집의 독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여기서 보면 당신들은 모두 어둠에 가려져 있어서, 어디에서 날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소”(「제목을 입력해 주세요」). 저곳이 객석이고 이곳이 무대이다. “시를 읽던 당신을 데리고 정글짐으로 들어”(「과묵한 이발사」)가고 누군가는 “시집 밖으로
끌려 나와 펜을 든다. 셋은 모르는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하나도 모르는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그것은 한 편의 시가 되고 있으며, 한 편의 시가 되어 있으며, 이것은 그 시집의 내용이다”(「암시집」). 여기서 시인(낭독자)과 독자(관객), 발신자와 수신자라는 관계는 전도된다. 시인이 독자를 가장하고 독자는 시인을 가장한다. “기원석은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나는 등장인물의 여정을 전달하는 독자 가운데 하나이”(「튜토리얼」, 4부 10쪽)다. 독자인 “나는 이제 작가와 구별되지 않소”(「제목을 입력해 주세요」). 시인 속의 독자와 독자 속의 시인이 서로 마주 보는 형국이다. 무엇보다도 이 가장낭독회에 참석하는 독자들은 기존 시에 대한 인식을 고수하다가는 된통 혼나고 만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제/ 바게트로 그의 독자를 두들겨 팬다 …(중략)… 그의 시집은 바게트/ 골프채보다 투명한 바게트/ 콘트라베이스보다 거대한/ 흉기를 공원에서 휘두르고/ 바게트에 두들겨 맞은 독자들”(「바게트」). 바게트로 흠씬 두들겨 맞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그동안 편하게 시집을 읽었던 독자를 기존과는 전혀 다른 독자로 만들어 준다. 『가장낭독회』라는 바게트로 기쁘게 ‘빠따’를 맞을 독자들은 속히 줄을 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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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살아가는 것은 살아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두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동일한 인식이다. 다른 이들은 바쁘게 저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삶을 잘 살았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삶은 곧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진다. 죽고 사라지는 것들을 돌아보는 행위가 시를 쓰게 한다. 여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시집은 세계의 사라짐에 대한 감각을 공통분모로 한다. 중요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소멸의 속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세계의 소멸에 대한 응전으로써 이들은 각기 다른 사랑의 일을 도모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일을 꾸민다. ‘곁’의 사랑 김지윤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지구상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사물들을 그냥 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자신의 눈동자에 맺히도록 지긋이 바라본다. 그 목소리가 몸 안에 담기도록 한없이 귀 기울인다. 그것들이 죽고 사라진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그는 “꽃이 시들고 노을이 지듯/ 지금 아름다운 것도/ 끝날 것이다”(「오늘의 하늘」)라며 소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기우는 햇살 아래 꽃 그림자/ 희미하게 남은 노을의 자취/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지”(「피로의 필요」). 시인은 소멸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시를 쓴다. 시인의 임무는 찰나에 피었던 짧은 생을 죽음에서 건져 올려 끊임없이 기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이 죽어서 이름이 없어진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작은 씨앗의 뿌리는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 푸르러질 준비를 하고 바람은 속삭이지, 네 차례야그러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나 우리는 그것들을 신록이라고 부르지 어차피 역사란 그런 것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는 것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을 쓰다듬는 바람, 입술을 적시는 빗방울 젖은 노래들이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깊어지면 찰나의 빛을 품은 침묵이 땅에 묻히고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여 한동안 고요해져도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를,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지 -「봄」 전문 시인은 지금 이 땅에 없는 것들을 떠올린다. “지난해의 꽃들은/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 찬찬히 바라본다. “잃어버린 시절의 흔적을 감추는 겨울 흙” 때문에 그 자리를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꽃”의 존재가 사라지고 “이름”도 알 수 없지만 “봄”이 오면 어김없이 “낡은 땅에서 새 풀이, 늙은 가지에 연한 잎이” 자라난다. “작은 씨앗의 뿌리”가 “지난해”에 죽은 “꽃들”의 “죽은 이름을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피는 꽃들은 “지난해의 꽃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낡아질 줄 알면서도 한철 마음껏 돋아”날 것이다. 피어남과 동시에 소멸해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한철 마음껏” 피는 “꽃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것으로 가득한 눈부신 봄날”을 온 힘을 다해 살다가 가겠다는 결심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땅”에 묻혀 있는 “지난해의 꽃들”이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를 위해, 죽음으로 스러진 지난 “꽃들”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아내기 위함이다. 그러하기에 꽃들은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결의를 보여준다. 가없는 생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바람”이 꽃을 쓰다듬고 “빗방울”이 꽃의 입술을 적신다. 하지만 꽃들은 곧 스러질 것이다. 결국 “땅에 묻히”게 될 터이지만, “우리”는 그 “꽃들”이 피었던 눈부신 “찰나의 빛”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정녕 끝나지는 않는 그런 노래”로 계속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년 “봄”이 오면 기적처럼 “언 땅을 뚫고 끝내 피고야 마는 꽃들”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곧 사랑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신록”은 매번 새로운 초록빛(新綠)인 동시에 새로운 행복(新祿)이고 또 새로운 기록(新錄)이 된다. 이것은 비단 “꽃”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쩌면 내가 아끼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를 길러낸 부모도 “죽은 이름이 산 이름을 기르”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나’라는 존재가 꽃피우기 전에 이 지구상에는 무수히 “아름다운 것들”이 피고 지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또한 ‘나’의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죽은 이름”이 되고 “산 이름”을 기르리라는 것을 예감할 터이다. 시인이 사랑하는 것들은 곧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라지는 것들이 곧 사랑하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대개 아름답지 고요하고 평안한 무감각 속에 너무 멀어 풍경이 되는 것들 가까이, 오직 가까이서만 볼 수 있지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도,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 선 이만 알 수 있는 것 고운 늦가을 단풍이 실은 아파하는 중이라는 걸 앓다가 긴 겨울을 준비하리라는 걸 그러니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고 낮은 속삭임은 가까운 데서만 들리는 것을 조그만 촛불도 가까운 곳에서는 밝고 보잘것없는 온기도 다가서면 따스하지 초라한 모닥불 하나 피워 나란히 앉자 그 작은 불씨마저 꺼진대도 입김을 불어 넣어 줄게,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가 돌 때까지 한참 후에야 우린 알게 되겠지,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우릴 살아남게 했다는 걸 -「가까이에서」 전문 ‘당신’의 삶이 “풍경”이 될 정도로 저 “멀리” 있다면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안”할 것이다. ‘나’는 먼 거리가 주는, 일종의 “무감각” 속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 거리를 포기해야 한다. “오직 가까이”에 있을 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의 “상처도 주름도 균열도 모든 낡아지는 것들”, “모든 티끌, 더러움, 떨림”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만 허락된다. 결점은 ‘당신’의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지키고 사랑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랑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당신’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특권이다. “곁”은 “낮은 속삭임”도 들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를 뜻한다. “작은 들꽃들도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어/ 험한 바람결에도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힘만으로도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조그만 촛불”의 “보잘것없는 온기”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밝고 따듯한 힘이 된다. 서로의 “곁”을 내어준 자들은 서로의 “작은 불씨”가 꺼져갈 때마다 “입김을 불어 넣어” 함께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까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은 “곁에서 서로 뿌리를 뻗”고 “낮은 속삭임”을 듣고 서로에게 “입김을 불어 넣어” 주는 일이다. 이 일들이 “창백한 시간의 푸른 얼굴에 핏기”를 돌게 하고 “우릴 살아남게” 한다.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지윤 시인의 사랑은 당신의 “곁”에서 오래도록 그 빈 자리를 지키고 기다리는 것이다.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는 너의 빈 곳을,/ 너는 나의 부서진 곳을/ 기어이 찾아냈고// 우린 망가진 채로도 하나가 될 수 있어”(「화음」).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서로의 결여가 포개져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 꽃이 흔들리는 소리/ 귓가에 속삭였던 아득한 그 말들”(「세상 모든 것들의 소음」)에 귀 기울인다. “나뭇잎과 꽃잎들마다, 져 버리고 시들어 버릴 모든 존재들에/ 이슬과 햇살과 바람으로 적혀 있는 희미한 진심을 읽는다”(<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피로의 필요』에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밀어가 가득하다. “나는 너를 살리겠어// 땅이 뿌리에게/ 숲이 나무에게/ 빛이 어둠에게 하는 말”(「스미는 숨」)처럼, 사라지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랑의 결의로 가득 차 있다. 김지윤의 시는 “내 입술에서 흘러/ 너에게 스미는/ 희미한 숨”(「스미는 숨」)이다. 그것은 ‘당신’의 소멸 이후에도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곁’의 사랑이다. 사랑의 ‘둥지’ 강백수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어두운 터널과 같은 청춘의 뒤안길을 사랑한다. 이 청춘이 시를 쓰고 기타를 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힘이다. 한 손에 시, 다른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엉망진창 온몸으로 살아낸 사랑의 기록이다. 시집 『가라 인생』의 제목은 가짜(fake) 인생이자 고고(go go) 인생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시집의 결론에 도달하면 알겠지만, 이는 선후관계이다. 시인은 “블로그와 유튜브와 여행책이 아니더라도 대충 어떻게 살다가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굳이 산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시부야」)라며 생에 대한 차가운 냉소를 언뜻 내비친다. 또한 “삶의 의미가 고작 담배냐고/ 그렇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워크에식(Work ethic)」)라면 생의 의미를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가라 인생」)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결국은 “어쨌거나 삶은 주어졌고/ 어느 시점엔가 당신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게 삶이구나”(「시작점」)라고 무릎을 탁, 치는 순간에 도달하게 된다.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사랑한다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뒤늦게 사랑한다 그건 이를테면 아직 눈코입도 없는 태아를 벌써 사랑해서 이름을 짓고 이미 재가 되어 흩어진 고인이 아직 그리워서 이름을 쓰는 일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정사진을 공유하며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하는 일 지구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지만 지구상에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과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어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고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한다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미래와 현재와 과거 -「뒤섞인 시간」 전문 이 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사랑의 시차時差를 보여준다. 우리는 아기를 낳기도 전에 미리 뱃속의 태아를 찍은 “초음파 사진을 공유하며/ 벌써부터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을 때는 건네지 못한 말을, 이제는 죽고 없을 때 “아직까지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고백”한다. 우리는 왜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이미 지구를 떠난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시인의 궁금증은 “사랑”에 대한 특별한 깨달음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올 사람을 위해 예비된 공간”이 있고 또 “간 사람을 위해 남겨둔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미래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미래의 사랑’과 “과거의 사람과 사랑을” 하는, ‘과거의 사랑’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늘 “미래와 현재와 과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한”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 시인의 이 독특한 시간관이 곧 그의 독특한 사랑관을 말해준다. ‘나’의 사랑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 종결되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분리되지 않은 채 영원한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사랑하는 것들과 벌써부터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 의연히 커피를 내려 마셨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과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이 있대도 닿기 전에 죽어버릴 나의 생 그러나 바로 지금 별자리는 저기에 있다 일 년이건 백 년이건 그대도 나도 결국은 시한부 인생 두고 떠나건 홀로 남겨지건 결국은 예정된 이별 그러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청춘을 건너온 시인은 삶을 뒤돌아본다.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 그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과거의 그때는 이 사랑이 끝난다면 다른 삶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원할 것이라고 여겼던 과거의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사랑의 배신일까. 아니다. 강백수 시인이 말하는 사랑의 윤리는 이렇다.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사랑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까지 지속하는 사랑의 힘을 통해 무의미하게 사라졌을 ‘나’를 지켰고 과거에 “없으면 못살 것 같았던 것들”에 대한 ‘나’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온 사랑의 대상들을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이미 죽어버린 별들”, 혹은 이제 곧 사라질 “별들”이 뿜어내는 그 별빛이 지구에 닿기도 전에 ‘나’는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 삶의 조건은 죽음이다. “결국은”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시한부 인생”이고 우리는 모두 “예정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예감에 함몰되지 않는다. 죽거나 말거나 “우리는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육탄전으로 “예정된 이별”에 뛰어든다. 첫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은 어쩌면 시인이 삶에 장착한 제1의 신조일 수도 있겠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지구 최후의 벙커는 진정 사랑이라는 듯이, 온갖 세상의 풍파도 이별도 죽음도 다 막아내겠다는 듯이, 키스한다. “모든 생은 단 한 번”(「사후세계관」)이다.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저마다 힘겨운 삶을 산다/ 그 힘듦으로부터 어떻게든 몸을 숨긴다”(「버러지」)라고 썼다. 연약한 우리의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두 연인이 서로 몸을 포개고 어루만지며 키스를 하는 사랑의 둥지이다. 이 사랑의 둥지가 시인이 찾은, “거의 무의미한 내 삶 속의 유일한 의미”(「무임금 노가다」)이다. 그는 죽음마저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둥지를 노래한다. 나는 그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싶다. “사랑의 끝을 알면서도 스로틀을 당기던 그 밤”(「110cc」)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알아,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거. 그래도 나쁘지 않아. “우리 가족에게는 종교가 없지만 단 하나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후세계관이 하나 있단다 죽고 나면 반드시 돌아가신 엄마를 만날 거라는 거 그걸 생각하면 어떤 이별도 나의 죽음도 최악의 일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곤 한단다”(「명견 강삼돌」). 그의 솔직한 위로 앞에서 마음은 무장해제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꼭 그의 노래 <타임머신>과 같이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강백수의 시는 세계가 무너져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둥지’이다. 자크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애도도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 사랑은 한없이 덧없고 슬프다. 사랑의 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도 함께 껴안는 것이다.
1. 시선의 연금술: 사랑의 집요한 쓰기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소설 『풀베개』(송태욱 역, 현암사, 2015)에서 양갱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모든 과자 중에서 양갱을 가장 좋아한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지만 그 표면이 매끈하고 치밀한 데다 반투명하게 빛을 받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파란 빛을 띠게 이겨서 훌륭하게 다듬은 것은 옥과 납석의 잡종 같아 아무리 봐도 기분이 상쾌하다.”(66쪽) 소설의 화자가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속에서 일본의 양갱을 서양의 과자들과 대조하며 그 빼어남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읽다 보면 독자에게까지 푸른 양갱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작가의 글에는 독자를 그 사랑에 동참시키는 힘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만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보원의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민음사, 2024)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싫음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한 탓에 그 자신의 싫음이 가장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128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소세키의 경우와 달리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쓰기가 갖는 힘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일이란 결국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쓰기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쓰기를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세 번째 시집을 펴낸 김연덕의 작업 역시 그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요한 쓰기의 연속이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요컨대 ‘자기만의 작은 공간’과 그 확보에 대한 것으로서 지속되어 왔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작은 공간은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와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줄곧 탐색되었다. 그 작은 공간은 대부분 유리나 구슬, 얼음처럼 “표면에 맺힌 상이 제각각/다르게 반사되”(「재와 사랑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는 투명한 물체의 모양을 띠고 있거나, 오래된 주택의 거실(「폭포 열기 열기」, 『폭포 열기』)이나 부엌(「유리빛」, 『재와 사랑의 미래』), 혹은 책상과 의자, 소파(「잘못들」, 『폭포 열기』)처럼 집의 공간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김연덕의 화자들이 주목하는 이러한 공간은 모두 작고 투명해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작음으로 인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공유한다. 이에 더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들에 의해 이것이 일상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디서든 자신이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해 내는 시선, 곧 무엇이든 귀중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른바 ‘시선의 연금술’이라 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 이르러 이 시선의 연금술사들은 그 탐색의 영역을 과거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이번 시집의 화자들은 집, 특별히 화자가 전에 살았던 옛집과 그에 관한 기억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해 내기 위해 옛집의 구석구석을 차분히 살피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집을 나설 때 혹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다시금 살펴보는 누군가의 미지근한 눈길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집이라는 공간은 그런 화자들의 눈길 아래 자본화할 만한 대상을 긁어모으는 착취의 현장이기보다 애정의 온기가 훑어나가는 보살핌의 자리, 사랑의 경작지가 된다. 2. 오래된 이야기들의 집 『재와 사랑의 미래』가 얼마간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는 과거라는 시제가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다 식은 검은 재를 마신 채 그때의 여름 마당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같은 구절은 “재”라는 첫 시집의 시어를 직접적으로 경유하며 이를 통해 과거의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과거에 대한 이 시집의 관심은 첫 시에서부터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집의 대문이라 해도 좋을 「소품 가정집」은 거기에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째서 과거의 공간으로 나아가는지, 그것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종이를 열어 나의 오래된 집으로 아직 죽지 않은 먼지 나는 이야기들이 방마다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 「소품 가정집」 부분 화자가 “걸어 들어”가는 “오래된 집”은 그곳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공간, 구석구석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의 잔여물들이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종이”나 “파본”과 같은 시어들이 책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견인하며 이 시를 시적 기원에 관한 것으로 읽힐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배경이 되는 “오래된 집”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시적 작업이 태동된 곳으로서의 근원적 공간으로 이해되기에 적절해 보인다. 이때 시인은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랑의 탐색을 지속해야 할 일종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을 역설하는데, 그 방법은 시적 기원과 비교적 무관했던 기존의 작업들에 대해 거리를 두며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단절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 재채기는 나지 않는 옷이었던 거야. 하자 없는 이야기는 내가 그랬듯 언제든 나를 버릴텐데. - 「소품 가정집」 부분 아무래도 화자는, 적어도 이 시집에서만큼은 “하자 없는” 말끔한 이야기보다 책이 되지 못한 채 파본으로 남은 어딘지 미진한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 모양이다[“나는 새 코트보다 이것이 좋다.”(같은 시)]. 그것들은 “유통되기에는 컨디션과 완성도가 부족했”지만 “파본 한 권 한 권마다의//야성”(같은 시)이 매혹적으로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야성”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름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된 그들마다의 계단을 떠올리며”(「sparkle」)]. 이번 시집에 유독 옛집에서 화자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엄마와 아빠,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존재는 여러 시편들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며,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 형상화되는 화자의 유년기 기억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오래된 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오래된 이야기로 구축된 집[“비현실적인 주택의 언어”(「my mushrooms」)]에서 과거에 함께 살던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화자들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나간다. 보다 정확히는, 옛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으로 재의미화되는 것이다. 가령 「구슬과 번개」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이 “거실에 놓인 자라 박제”의 “눈에 박힌 싸구려 구슬”로 축소되어 나타나며 이후 “구슬은 가족들의 피부나 얇은 거실의 창” 같다는 화자의 서술이 이어지고,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는 「앵두 따기」 속 화자의 진술 역시 가족들과의 기억이라는 맥락 위에서 투명한 구슬 모티프를 다시금 변주한다. 이처럼 화자들이 저마다 작은 공간들을 확보해 갈 때, 김연덕의 시는 정확히 그 공간들의 크기만큼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또박또박 수집하며, 김연덕의 화자들은 그렇게 사랑의 경작지를 넓혀간다. 3. 커튼 치기 흥미로운 점은 시 속에 묘사되는 옛집의 공간들이 많은 경우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일찍부터 시선의 연금술을 체화함으로 “오랜 내구성”(「구슬과 번개」)을 갖추어 둔 김연덕의 화자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의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오래된 어둠”이야말로 이번 시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이 사랑의 탐색전을 벌이는 주 무대가 된다. 요컨대 어둠까지도 사랑을 경작할 수 있는 영토로 기어이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집에서 과거나 어둠이라는 단어가 현재나 미래, 빛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커튼이라는 소재는 어둠과 빛이 맺는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화자들이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이 다중 우주적 옛집에서, 커튼은 주로 할머니의 방에 둘러쳐져 있다[“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브로치」), “할머니는 모직 커튼이 쳐진 낮의 방에 앉아서도”(「낮의 옥상」)]. 그리고 그것은 종종 옛집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고발하며 김연덕의 시들이 내장하고 있는 여성주의적 면모를 내비치기도 한다[“평소 모직의 두꺼운 커튼이 사방으로 쳐져 있던/대부분 비어 있던 그들의 어두운 거실에서 언니의 바이올린 선율은”(「낮의 성벽」), “누군가의 부모/아내/친구도 상사도 아닌/딸로 이어진 자만 가볼 수 있는 곳이 있다.”(「새가 되어」)]. 하지만 기본적으로 커튼이란 빛의 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공간의 따뜻함은 커튼을 통해 미세하게 조정된다. 빛을 차단해 어둠을 만들어 내는 이 도구는 반대로 공간에 빛을 초대함으로 어둠을 차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서 커튼은 기억의 주체인 화자들에게 옛집의 각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의 조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주어진다. 화자들은 옛집의 곳곳에 커튼을 칠 수도 걷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해당 기억을 어둡게도 밝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안방의 커튼이 화자의 기억에 따라 쳐져 있을 때도(「브로치」), 반대로 걷혀 있을 때도[“나는 빛이 나른하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안방 안에 들어와 소반 위의 호떡을 먹는다.”(「낮의 크레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의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커튼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둠과 빛의 이분화가 만들어 내는 평면성에서 끝내 해방되어 그 자체로 어느 한 가지 성질로만 표현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맥락 위에 “한 평 남짓한 크기 그 안의/어둠”을 보며 그것이 “꼭 고해성사실 같았다”(「철사 천사」)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언니를 떠올릴 때면 그 장면이 “항상/해와 그림자가 기쁨과 후회가 같은 빈도로 길어지던 여름 한가운데서 시작된다”(「sparkle」)는 화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가치 초월적 발화의 구체적인 예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커튼은 어둠을 옹호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브로치」의 커튼이 쳐진 안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 그릇”과 브로치들이었고,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튼이 만들어 내는 어둡거나 밝은, 혹은 ‘어둡고도 밝은’ 공간에서 이제 화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슬픔과 즐거움, 어둠의 시간을 좋아한다”(「천국의 개들」)고. 한편 커튼은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개념적 층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어둠과 빛에 대해 그러했듯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연금술을 시도하는, 이른바 ‘커튼을 치는’ 식의 발화가 화자들의 서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슬픔”(「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숨 막히게 행복하고 억눌린 느낌으로”(「비좁은 불」), “마당에서 가장 아끼고 무서워하던 꽃”(「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재라는 기쁜 슬픔”, “따뜻하고 슬픈 빛”(「새가 되어」), “얼룩덜룩한 의기양양함으로/눈부신/자신 없음으로”(「낮의 크레페」) 같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커튼을 쳐서 어둠과 빛을 섞고 그 농도를 흩트리듯, 이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들이 수행하는 시적 발화들은 언어의 부정성과 긍정성의 구분을 지운다. 이들에게 좋고 싫음의 문제는 밝음과 어두움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이나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이다. 4. 현관을 나서기 전에: 과거에서 길어 올리는 사랑의 미래 옛집과 거기 방치돼 있던, 시적 기원이 되는 오래된 기억들을 부지런히 톺으면서 화자들은 이제 더 넓은 사랑의 경작지,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미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해 되짚으며 화자들은 과거의 미래, 곧 현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주로 결과론적 반추의 형태로 나타난다[“나는/내 사랑이 한 번에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사랑에서 오는 즐거움을 내가/많이 낭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앵두 따기」), “진동하는 기쁨과 수치라는 과일나무들 사이를 지나게 될 내가 앞으로 어떤 과일들을 먹게 될지 (…) 미리 알고 있었지만”(「vague frame」)]. 특히 「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에서 이러한 발화들은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주로 여성주의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어린 내가 본다 어느 쪽을 응원할지 그래서 미래에 어느/유형의 여자로 클지”, “송출된 화면 속 관중은/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치만큼//다정한 허무만큼 많았어”, “내가 원 안에서 쏠리고 넘어지는 여자 어른으로 클 줄은”(「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 이때 해당 시의 중심에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서 할아버지가 가부장적 위계를 집안에 흘려보내는 이로 그려지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시는 그가 옛집에서 화자를 포함한 집안의 여자들에게 줬던 불편함에 대해 화자가 뭔가를 말하길 시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어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바, 그것은 더 많은 사랑이 가능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김연덕의 화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을, 다시 말해 이들이 옛집이라는 어둠-빛의 공간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브로치」를 읽어볼 수 있다. 해외에 다녀오면서 할머니에게 브로치들을 사준 이는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였다. 그는 따뜻한 사랑의 말들을 “할머니에게 해준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화자는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무심한/사랑”을 발견해 내며 그를 이해하길 시도한다(“할아버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애석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브로치들은 화자의 엄마와 작은 엄마들에게 나누어지고, “중요한 것들 몇 개는 나의 오래된 거울 속에” 들어와 화자를 구성하며 그를 자신만의 이야기, 시적 기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한다(“잠에서 가끔 깨어나는 이야기는//나를 종종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둠 속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김연덕 화자들의 연금술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둠을 대면해 이해를 시도하고 끝내 그것과 화해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화자들은 「낮의 서재」와 「tiny hole」을 비롯한 이후의 몇 시편들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5살 무렵 깊은 우물에 빠졌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덮개 위로 올라가 어린 할아버지의 가장 약한 부분 옆에 누워 있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tiny hole」 속 화자의 모습은 그가 과거의 어둠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우물 속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할아버지를 나의 햇볕 아래 누인다”). 시적 기원을 형성하는 과거의 이야기들로 구축된 오래된 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은 이렇게 사랑할 만한 것들을 끈질기게 길어 올린다. 그 과정에서 파본으로만 굴러다니던 그곳의 이야기들은 커튼을 치는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수행성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어둠/빛의 영역과 시적 언어의 한계를 이중으로 타파함으로써 이제껏 쓰이지 않았던 시의 여러 가능태로 새롭게 의미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김연덕의 화자들은 사랑의 미래로 뻗어나갈 일단의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옛집을 떠나는 화자가 그곳에 남기는 끝인사처럼 읽힌다.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썩어나가던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쉴 수 있을 때, 마지막 사람이 난방을 끄고 나오며 뒤돌아보지 않을 때 괴로운 행복을 좀 늦게 알아채는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자존심 강한 파본들을 주워다 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이제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을 시간. -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부분 마지막 연의 “코트”는 물론 첫 시에 등장했던 코트의 변형일 것이고[(“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소품 가정집」)], 이 수미상관의 구조는 곧바로 이 시집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한 채의 집, 예컨대 ‘시로 세운 집’으로 인식되게 하며 독자에게 시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다가 문을 닫고 나오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인 김연덕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행하는 집요한, 그리고 구체적인 쓰기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나의 음악은 이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사랑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1)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현대문학, 2025. 이후 인용하는 시들은 제목만 적으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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