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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월간 악스트 | 2024년 11-12월호(제57호)

당신도 이름을 가졌다면

장은정 문학평론

2009년부터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비평집 『침투』(사각, 2021)가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가장 많이 상상한 것은 공론화와 직/간적접으로 연루된 모든 이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온라인 매체를 통해 각자의 계정으로 독백처럼 말했더라도 결국은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상상하는 것은 내게 중요했다. 이 글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독자라고 밝히며 기꺼이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고 해도 공개된 대화를 성실히 따라 읽어온 조용한 사람들을 상상하며 작성되었다. 누군가는 그건 대화가 아니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평가조차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대화는 합의나 설득을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말하고 듣는 과정과 더불어 유동하며 우리를 다르게 이룬다. 비평은 판결문이 아니다. 더 나은 대화를 원하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름에 대한 이야기이다

2024623, 방송인 김현지가 게시한 김현지, 김현지 되기는 총 열네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7년부터 20246월에 이르기까지 김현지에게 일어난 일들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글의 구성에 따르면 김현지에게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2017년에 겪었던 스토킹 사건이지만 정지돈 작가의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 2024)이 김현지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는 것은 여덟 번째 단락에 서술된 사건을 통해서이다. 다음은 여덟 번째 단락 전체를 직접 인용한 것이다.

 

20244, 저는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정지돈이 새로 발표한 소설에 제가 있으니, 소설을 당장 확인해보라는 연락이었습니다. 지인은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는 웃으며 도리어 그를 다독였습니다. 흥분한 건 알겠지만 정지돈이 나를 쓴 것은 이미 오래 전이라고. 정지돈에게는 창작의 권리가 있지 않냐고. 지인은 잠깐 침묵하다가 알겠다고 했고 우리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저는 소설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적어야 할 글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소설을 보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 일부러 피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피하고 피했으나, 저는 은행나무에서 발간하는 <AXT>라는 잡지에서 정지돈이 새로 발표한 <브레이브 뉴 휴먼>이라는 소설의 비평을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비평을 다 읽고 난 저는 바로 약을 삼켜야 했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현지였기 때문입니다.

 

위 서술에 의하면 김현지는 지인으로부터 브레이브 뉴 휴먼네가 있다는 요지의 제보를 받고 이를 곧장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즉 처음부터 직접 작품을 찾아 읽지 않았고, 우선 지인으로부터 제보를 받았으며, 제보를 받았을 때에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즉 이 소설이 자신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은 작품에 대한 리뷰 비평(악스트Axt54호에 실린 황예인 평론가의 리뷰로 짐작된다)을 읽다가 등장인물의 이름이 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 물론 2019년에 출간된 야간 경비원의 일기의 경우에도, ‘에이치가 가진 특성들에게서 자신을 읽어냈지만 친구가 말한 창작의 권리로 이해했다.

공론화 이후, 625일에 공개된 정지돈 작가의 공식적인 첫 입장문에서는 캐릭터 권정현지의 이름을 보고 김현지씨가 받을 충격과 아픔을 깊이 고려하지 못했, “흔한 이름이라는 이유로 상처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점 역시 깊이 사과드리고 반성한다고 밝히면서 그럼에도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권정현지라는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한 바 있다. 작가는 해당 소설의 배경이 인공자궁이 상용화된 미래이며, 국민들이 기증한 정자와 난자를 수정해 태어난 체외인중 한명이라는 소설적 기획 하에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양성쓰기를 차용하고 자신의 이름 중 일부인 정지를 합쳐 권정현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문제를 제기한 쪽이나 그것을 해명하는 쪽이나 이것이 어떤 이름인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정지돈 역시 작가로서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한 인물의 정체성과 소설적 형상화에 있어서 등장인물의 이름이 왜 중요한지 명료히 인식하고 있다. 이 해명은 양성쓰기 인물이 필연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제도가 갖는 의미(“그는 가족이 없는 자신의 존재를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성쓰기를 하면 외국 이름을 가진 다른 체외인 캐릭터와 대비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를 정확히 환기한다. 공론화를 위해 게시한 글의 제목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김현지, 김현지 되기인 김현지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김현지가 브레이브 뉴 휴먼을 자신의 서사라고 생각하게 된 과정에서 이름은 지인에게서, 잡지를 펼친 리뷰에게서, 주고받은 메일에서, 계속되는 호명의 역할을 한다. ‘이름이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고 응답하는 연속적인 행위들 속에서 작동한다. 작가가 직접 나서서 권정현지김현지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순간조차도 다른 사람, 즉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정지돈을(“그래서 권김현영 선생의 이름에 제 이름 정지돈을 합쳐 권정현지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호명해야 한다. 호명은 호명하는 사람의 지시 의도와 별개로 누군가를 불러낼 수 있음을 기억하자. 만일 인간에게 이름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면 이름에 의한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름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열렬히 침묵하여 망각될 때까지 기다리기. 아니면 자신에게 주어진 호명이 부당하다고 말하고 또 말하기.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공론화는 말하기의 사건이다.

 

출간 이후

말하기의 사건에서 듣는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택하는 태도는 당사자들을 심문하는 것이다. 김현지에게는 말하기의 진정한목적이 작가의 명예를 박탈하여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론화를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과 비난, 추궁이 이어지며, 정지돈에게는 창작 과정에서 실존하는 이의 여러 삶의 요소들을 허구와 섞는 과정에서 실제로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추궁과 심문이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지켜보는 이들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도록 침착하고 빈틈없이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이름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통제 불가능한 호명들 속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누가 침착할 수 있는가?

2024625일에 공개된 정지돈 작가의 첫 입장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저는 사과나 인정이 두려운 게 아니라, 진실이 아닌 일이 진실이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개념을 다루는 일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 문장에서 가장 매혹적인 단어는 아마 진실일 것이다. 특히나 문학이 갖는 가치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이들에게 진실이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다면성과 입체성을 갖는 것이기에 우리를 손쉬운 해석과 피상적인 논쟁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 대화가 말하고 듣는 행위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면 그래서 대체 그 진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듣기보다 말하기에 가깝다. 말하는 이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둔 질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순간조차도 그것은 심문의 형태를 띤다. 이때 진실입증이기 때문이다.

정지돈 작가는 입장문을 통해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에이치는 허구 속 캐릭터이지 김현지씨가 아닙니다.” “제 소설은 김현지씨의 삶과 다른 허구이기 때문에, 김현지씨 본인이 먼저 암시하거나 주장하지 않는 이상 그의 삶으로 생각할 여지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작가가 입장문에서 이와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이와 유사한 사안들을 재현 윤리’, ‘창작 윤리혹은 무단 인용이라는 의제로 논의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명명들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겪었던 경험보다는 작가가 실제로무엇을 했는지 밝히기 위해 동원되기 쉽다. 두 사람이 만난 시점, 작품이 집필된 시기, 창작 과정에서의 동의 여부 등 모두 출판 이전의 시간을 문제 삼을 때, 우리의 읽기는 오로지 작가의 과거를 심문하는 형태로만 작동한다.

그러므로 그동안 문제 해결의 방식으로 작품의 회수와 폐기, 절판이 선택된 것은 필연적이다. 출판물이 세상에 공개되기 이전에 문제의 원인이 있다면 잘못을 바로잡는 것 또한 출판물이 없었던 그 시간으로 되돌리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폐기하는 행위 자체가 무조건 옳거나 혹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처럼 평가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나누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시간과 비교한다면 출판물이 출간된 이후에 성립되는 독자들의 읽기시간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 아니, 좀 더 나아가 독자들은 책에 대한 조치를 결정하기만 하면 모든 역할을 다한 것일까? ‘쓰기의 책임과 구분되는 읽기의 책임은 없는가?

당사자들에게 공론화가 말하기의 사건이라면 우리에게는 듣기의 사건이다. 김현지는 문제를 제기한 첫 입장문에서 말하기를 결정한 후 다음과 같이 쓴다. “저는 사회에 이 판단을 맡기기로 한 것입니다.” 정지돈 역시 듣는 우리들에게 부탁한다. “제 글과 김현지 씨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 모두를 꼼꼼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문제 삼은 소설의 내용도 잘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억측과 비방이 아닌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듣는 우리들의 차례다. 세상에 공개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며 듣게 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출간 이후의 일이다. 작품을 폐기하라는 요구 외에도 읽는사람들이 이 문제를 경청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설이라는 출판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말이다.

 

은교

글의 도입부에서 언급했듯 김현지, 김현지 되기2017년부터 20246월에 이르기까지 김현지에게 일어난 일들을 총 열네 개의 단락에 걸쳐 시간 순서대로 서술한다. 이 글의 진짜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추궁과 심문을 이어가는 대신 이 이야기가 우리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며,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우리 역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당사자들이 공개한 자료들 속에서 증거를 찾아내려고 하는 대신 이들의 말하기가 우리 사회를 이루는 이야기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성찰할 수는 없을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엄격한 실증적 의미로서의 증거(prove)’와 대비되는 말로서 가능성(possibilit)의 역사를 지향하는 미시사(Microstoria) 연구의 방법론은 작은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듯하다. 20세기 역사학적 흐름이 맑스주의 역사학, 독일의 사회구조사, 프랑스 아날학파가 주도한 거시경제·사회라는 키워드로 설명될 수 있다면, 미시 문화사는 사회적/경제적 행위들을 문화적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적 리얼리티의 관계망을 구체적 개인을 통해 규명하고자 한다. 미시사가들은 익명의 거대 집단이나 평균적 개인을 도출하기보다 개인의 이름과 관계망을 추구하는 실명적·집단 전기학적 역사 서술을 추구하며 실증적 검증보다는 가능성에 중점을 둔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위해 연구자들의 상상력을 활용한다.

물론 미시사는 문헌기록을 남길 수 있는 엘리트 문화와 달리 구전에 의존해 온 산업기 이전의 민중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도입된 학술적 방법론이므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말하기를 어떻게 들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이 지면의 성격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유사 사례를 모아 계량적 전형성을 양적으로 측정하여 평균을 추상적으로 추출하기보다, 한 사람의 이름을 중요한 역사적 단위로 설정하고 그 인물이 살아가는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의 리얼리티를 상상력에 의해 겨우 비집고 생겨나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한 사회의 유동하는 성격을 포착하는 방법으로 허구의 이름을 활용한다면 그동안 한국소설에서 가상의 인물로 등장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사회의 어떤 상징으로 통용되는 이름의 역사를 짧게 돌이켜보는 것은 지금 문제시 된 권정현지라는 이름이 놓인 난처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박범신 작가의 은교(문학동네, 2010)에서 사제 관계인 시인 이적요와 소설가 서지우의 욕망에 의해 묘사되는 은교는 두 사람의 죽음 후 남겨진 미발표 노트를 가진 변호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제발 좀 빼달라고 부탁한다. “할아부지 노트에도 제 얘기 나올 거예요. 서지우 선생님 글에도 저, 나와요. 솔직히 다 지우고 싶어요. 그 노트랑 공개되면 제가, 또 신문에 나고 할지 모르잖아요? H라고, 이니셜로 불러도요. 가까운 친구들 결국 다 알게 돼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시인과 소설가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자신을 부디 삭제해달라고 요구하는 이 목소리보다 너 내 은교 할래?”로 요약되는 작가의 성추행 사실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은 현재의 시점에서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누군가에겐 그저 농담거리에 불과한 이 질문을 듣게 된 이들이 불쾌감을 느낀 것은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어떤 서사의 역할로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은교가 성적 대상화와 타자화의 시선에 의해 포박당한 여성 인물이 아니었다면 전혀 불쾌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 느끼는 불쾌감은 이름이 비하와 폄하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호명 행위가 권력관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나코

누군가는 이 공론화에 대한 일정한 판단을 위해 문제제기를 받은 작품들을 읽지 않아도 된다혹은 더 나아가 읽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론화에 의해 이 서사가 김현지 개인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고 선언된 이상, 독자의 읽기는 김현지의 삶을 더욱 훼손하는 것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때 독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호명을 하는사람과 호명을 받는사람에 놓인 권력의 낙차이다. 누군가는 쓰는자이지만 누군가는 재현 되는자이다. 이름을 정할 수 있는 사람과 어떻게든 이름을 부여받는 사람 사이에 놓인 간극을 읽지 않기를 통해 보완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한편 누군가는 브레이브 뉴 휴먼에서 등장하는 권정현지가 단순히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영웅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읽으면 이 문제의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혹은 애초에 이 문제제기가 왜 성립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없다고도 말한다. 물론 권정현지는 여성인물에 대한 일차적인 수준의 성적 대상화라는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은교와는 전혀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 공론화 사건을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듣는방법은 작품 내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의 층위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돌파되지 않는다. 공론화라는 사건 자체가 작품의 내적 연관들을 찢으며 돌출하는 의미를 사유해줄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듣는 방법이 오로지 단 하나일 수 없다. 각자 놓인 입장과 위치에 따라 듣기의 자세 또한 다양하게 모색될 수 있다. 공론화 이후, “매일 독자들을 만나며 한국문학을 직접 전달하는 독립 서점의 위치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응답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싶다는 취지로 리브레리아Q, 무명서점, 한낮의바다, 한쪽가게 독립서점 여성운영자들이 소규모 비공개 독자모임을 진행한 것은 나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그렇다면 읽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나는 읽기행위를 통해 어떻게 듣기를 실천할 수 있을까? 어느 한쪽의 목소리를 완벽히 도려내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들을 듣는 우리들로부터 격리시켜 심문하는 것이 아니라, 김현지, 김현지 되기브레이브 뉴 휴먼이라는 두 텍스트를 어떻게 겹쳐 읽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읽기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작가는 작품에 대해 소설에 등장하는 체외인은 아미, 애드, 리젠쿠이, 권정현지 등입니다.”라고 요약한 바 있다. 나는 브레이브 뉴 휴먼(‘권정현지가 아니라) 작가가 으로 분류한 인물 중 하나인 가나코를 중심으로 두 텍스트를 동시에 읽기를 제안한다. 가나코 역시 인공자궁에서 태어난 체외인으로 애드와 함께 자랐다. 가나코는 양육출산부가 독점하는 인공자궁 시스템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뉴 휴머니스트 단체의 한 구성원이며 DNA 데이터 뱅크의 경비원으로 일하는 애드에게 정보를 넘겨줄 것을 지속적으로 부탁하지만 애드는 가나코의 부탁을 거절한다. 이 소설에서 가나코가 등장하는 곳은 딱 두 챕터다. 애드의 평소 가치관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16, 왜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가나코라고 지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 17장이 그것이다.

브레이브 뉴 휴먼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아미를 중심으로 애드와 가나코는 일시적인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다. 가나코의 계속 되는 요청을 무심히 거절해 온 애드가 아미의 요청 앞에서는 큰 위험을 감내하기로 결정한다(124). 이후 가나코는 체외인의 아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하는 아이들을 구하다가 경찰에 의해 살해(155)되는데 이 인물의 죽음 역시 애드가 아미에게 전달하는 소식으로만 구성되며 애드의 변화와 죄책감에 좀 더 극적인 긴장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되는 인물이다. 김현지가 자신의 이름이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 황예인의 리뷰에서도 가나코는 언급되지 않는데 이는 이 작품의 서사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상상해보자. 가나코의 1인칭 관점으로 작품을 아예 새로 쓴다면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 ‘가나코미친 여자라는 소문(111) 달고 다니는 인물이고 죽은 아이라는 뜻의 이름을(113) 스스로 짓는다. 가나코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알고 싶다면 읽는 자들은 작가가 쓰지 않은것을 상상해야 한다. 허구는 작가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당연히 창작 의도를 가지며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그 서사 하에서 동등한 성원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나코라는 인물이 재현된 방식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김현지권정현지’, 그리고 정지돈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은 이미 사건에 각자 단단히 붙들렸으므로 그들을 이 포박으로부터 풀어내기 위한 시작점으로서 현재 놓인 상황과 무관해 보이는 가나코라는 인물을 읽기상상력으로 재구성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공론화를 그저 비정상적이고 미친 짓으로 취급하는 목소리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브레이브 뉴 휴먼이 왜 김현지에게 폭력으로 경험되었는지를 복원해보려고 노력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누구나 납득 가능한 합리적인 언어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김현지의 사적인 정보들을 유추하고 그것이 서사와 맺는 관계를 분석해야 했다.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조건을 낱낱이 파헤쳐서 앞뒤가 맞도록 구성하는 것이 경청의 방법일까? 마찬가지로 정지돈의 입장에서 겪은 당혹감이나 작가로서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을 제3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듣기설명하기로 온전히 대체되는 일을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듣기와 상상력

가나코가 김현지, 김현지 되기브레이브 뉴 휴먼을 읽는다면 이 텍스트들은 어떻게 읽힐까? 다소 뜬금없는 이 질문은 소설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들이 공론장에 함께 있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와 같은 엉뚱한 상상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창작된 허구의 인물 역시 그것이 소설이라는 출판물로 출간된 이후에는 작가의 창작 의도에 의해 결코 통제되지 않으며 독자들의 읽기 행위 속에서 그 자신만의 이름으로 독자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은교김지영이 실제 인물이 아님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우리 사회 속에서 그 이름은 독자들의 호명 행위에 의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마치 2020년 이후, 문학 독자들에게 영우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특별해진 것처럼. 그렇다면 김현지는 공론화 사건을 통해 권정현지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호명함으로서 이 공론장의 중요한 행위주체자로 초대한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숱하게 반복해서 질문했던 권정현지는 누구인가(김현지인가, 아닌가)?’ 대신에 읽는 우리들은 권정현지의 삶은 어떤 삶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권정현지가 부당한 체제에 맞서는 영웅적 인물이라는 평가는 이 인물을 소설 속에서만 살아가는 존재로 보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브레이브 뉴 휴먼을 읽으면서 궁금했다. 왜 이 소설에서는 체외인들의 젠더를 중요한 차이로 다루지 않을까? 법적으로 체외인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규정하는 것은 체외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폭압인데도 왜 가나코와 권정현지라는 여성체외인만이 가족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김현지의 사적 정보를 캐묻지 않더라도 이 공론화를 경청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현지, 김현지 되기가 공개된 후, 온라인 매체에서 검색이 가능한 거의 대부분의 관련 게시물을 모두 찾아 읽었고 뜻이 맞는 동료들(무무, 아노윤, 아리갸또)과 누구나 열람 할 수 있도록 엑셀시트에 순서대로 기록해왔다. 나는 권정현지’, ‘김현지’, ‘정지돈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호명되고 있는지, 이 사안에만 온전히 집중하고 싶었음에도 듣는 과정에서 불쑥불쑥 나를 헤집어놓은 이름은 쯔양이었다. 읽고 듣는다는 것이란 어쩌면 이런 일인 것 같다. 내가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카메라를 마주하고 직접 설명해야 하는 한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 손톱으로 탁자를 계속 두드렸던 소리가 며칠간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 이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김현지는 공론화를 위해 따로 만든 계정에서 여성 방송인이 처한 열악한 환경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가 별개의 사안을 뒤섞는다며 많은 이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읽기와 듣기는 침범의 사건이며 경청과 듣기는 그 침범의 위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바꿔나간다.

정지돈 작가의 마지막 입장문이 게시되었을 때, 공론장의 한 구성원으로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온라인을 통해 마련된 공론장이 작가에게 최소한의 신뢰를 주는 것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공개적으로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다른 이들의 참여와 발화 방식을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폄하하는 일로 받아들여 질까봐 두려웠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스스로를 독자라고 밝히고 이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화해왔던 한 구성원(@jhmj0)이 자신의 말하기가 불신의 말하기는 아니었는지 반성적으로 돌아보면서 불신이 초래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했을 때, 내가 했던 고민이 비난받기보다 수용되는 경험으로 전환되었을 뿐 아니라 종결의 의미로서 논의되는 공론장의 실패가 아니라 성찰의 자리로서 잠시 상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서술이 누군가에게는 더욱 또렷한 배제의 말하기로 들릴 것을 안다. 공론장 내에서도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 있으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열며 이번 공론화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라고 썼다. 만일 인간에게 이름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면 이름에 의한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계속 말할 가치가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더 적극적으로 호명해야 한다고 느낀다. 저마다 각자의 계정으로 독백처럼 말했더라도 그 말들을 누군가 주의 깊게 듣고 있음을 표현하고 이것이 대화로 작동하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는 일은 물론 모두에게 서툴고 낯선 일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배워나가면 되지 않을까.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법을. 분명히 다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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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종이책 바깥의 문학

1. 한 통계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 오디오북을 포함한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다.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매년 감소하고 있다고 하지만 2023년 기준 신간도서 발행 분포를 보면, 문학(20.1%)은 교육(20.9%)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 독자층의 도서 구매 상황은 다르다. 교보문고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소설과 시/에세이 부문의 판매 권수와 판매액 점유율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이다.2) 도서 소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교양 서적과 직업 관련 서적이라고 한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출판계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학이 독서 시장에서 유력한 장르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학을 떠받치고 있는 독서 시장이 위축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문학을 읽고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졌다. 문학이 특정한 매체, 특정한 직업군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걷어내면 문학은 어디에나 있다. 매일 접하는 인터넷과 SNS에 게시되는 문학 관련 정보들과 자기 표현 글쓰기에서 비평적 욕구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비평이 가장 활성화되는 곳은 문예지가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비전문적인 장소들인지 모른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문학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물론 그런 관심만으로 비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발견한 책에 매혹된 독자들이 비평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건 비평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그런 독자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직업 독자로서 비평가가 있지만 모든 문학 종사자들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독자이다. 최근 생태 비평의 화두인 ‘얽힘’(Entanglement)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문학과 독자의 관계에도 필요한 상상력이다. 문학은 독자와 함께 만드는 세계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2. 강동호의 「새로움의 경제」(웹진 『비유』, 2025. 3-4)는 독자에 관한 글은 아니지만 문화경제학의 관점에서 문학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새로움’을 일종의 경제로 바라보는 이 글은 상품경제와 구별되는 문화경제에 주목한다. ‘새로움’은 동시대 문화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작품이 지닌 가치를 측정하는 기호(화폐)로 “‘새로움의 경제’란 문화적 혁신을 독려하고 정당화하는 특수적 통화 체제”이다.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동시대 문화 현상은 새로움의 공급 과잉, 즉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인데 이는 시장과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글의 목적은 시장과 문화라는 ‘새로움’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저자는 문학의 가치 역시 작품을 현실에서 사용하고 체험하는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교환 행위를, 그리고 그러한 교환 원리가 현실 언어의 경제라는 광의의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과 “자본의 논리에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통상의 사회경제적인 원리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문학을 살펴보겠다는 것은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특히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독자와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뤄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교환 원리는 주목할 만하다. 강동호는 「새로움의 경제2(1)」(『문장웹진』, 2025. 4)에서도 유사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아직 ‘새로움의 경제’에 관한 가설이 있을 뿐 그 내용이 충분히 전개된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화경제 원리에 관한 여러 가정들과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논의로 검증 가능한 구체적인 사례나 예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문화경제는 이론인 동시에 실물경제이다. 작품의 가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자, 작품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교환의 원리를 문학 현장의 사례로 논증하는 과정 없이 ‘새로움의 경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강동호의 글은 독자가 포함된 문학을 역동적인 경제 교환의 흐름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 새로움의 발생지, 현장의 실체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노태훈의 「한국문학의 현장」(『자음과모음』 2025년 봄호)은 한국문학의 현장을 생산과 유통, 수용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어 강동호의 글과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한국문학의 생산은 ‘등단’과 ‘문학상’이라는 집단적 승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의 유통은 수용의 현장과 분리되어 있다. 특히 문예지가 단행본으로 발간되기 전의 작품들을 게재하는 것은 상품으로서 문학을 예비하는 과정이며 그 점에서 문예지는 생산 현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의 단계는 어떤가. 문학의 현장은 결국 수용자인 독자에게 그 핵심이 달려 있다. 문학의 현장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읽히고 공유되는 순간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곳만을 현장이라 칭한다면 사실 그것은 아주 왜소해질 것이다. 여타의 모든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생산자는 작품의 유통과 수용에 있어 결국 철저하게 보호적인 존재로 남게 된다. 작가의 강연, 낭독회, 사인회 등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학의 현장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문학에서 현장은 사후적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수용 이후, 작품의 감상 이후에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작가와 작품은 필요조건이 될 뿐, 현장의 주체는 오로지 독자의 행위에 달려 있다. 그런데 또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현장성이 생겨나지는 않아서 이를테면 도서관을 두고 문학의 현장이라 명명하기는 다소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3) 노태훈의 글에서 독자는 중요한 존재지만 작가와 작품, 독자가 만나는 현장은 아직 현장으로서 불충분하다. 이 글은 도서관을 비롯해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공간을 언급하면서도 문단 시스템을 벗어난 현장을 의미 있게 고려하지 않는다. 독자를 현장의 핵심에 두고 있으면서 독자와 현장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현장’은 비평적 태도의 유무인 듯하다. “핵심은 문학작품을 읽고 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비평’”이며 문학의 현장이 고민할 것은 “인정이나 승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는 비평적 태도, 즉 독자讀者/獨自적인 것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전통과 관습을 비트는 방식으로, 아카이브라는 저항의 형태로, 즉흥적인 아마추어리즘”으로 나타나는 문학 현장이지만 그 주체가 문예지와 전문 독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의 생산과 유통, 수용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전문/비전문, 중심/주변의 경계는 여전히 뚜렷하다. 3. 한국 문학의 생산과 유통에서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문학 제도의 오래된 관성을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스템에서 보면 한국문학은 ‘극소수’의 작가를 생산하고 연구하고 비평해 왔으며 ‘대다수’의 독자는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이 한국문학 연구에서 독자 연구가 희소한 이유이며 같은 이유에서 비평의 관심도 작가나 작품으로 향한다. 문학을 향유하는 현장에서 독자를 배제할수록 독자는 추상적인 집합명사로 취급될 확률이 크다. 이를테면 낭독회와 같은 문학 이벤트를 의미 있는 문학 현장으로, 작가와 독자 간의 수평적 연대의 실천으로 돌아보기란 아직 한국문학에서는 요원한 일이다. 황유원 시인은 최근 낭독회에 참여했던 경험을 놀랍고 반가웠다고 말한다. 직접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과 만나는 것은 다양한 목소리들이 겹치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에게 “낭독회는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시간이라기보다는 목소리들이 부유하는 시간”이며 서로 다양한 “목소리들이 구름처럼 희미하면서도 분명하게 시각화되는 시간”4)이었다. 아직 낭독회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는 시인의 소감은 중의적이다. 낭독회는 일회적인 문학 이벤트지만 작가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는 교감과 감응은 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를 다른 사람이 낭송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가 나를 떠났다는 것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다.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다. 이유는 굳이 따져보지 않았는데, 사실 나는 내 시를 낭송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늘 거리 조준에 실패하고 마는 느낌이다. (중략) 참석하신 분들이 낭송해준 8편은 좋았다. 호흡과 리듬이 나와 달라서, 시에 첨가된 이질적인 분위기가 시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다. 낭송이 끝나고 토크가 이어졌다 (중략) 나는 난감한 질문을 선호하고, 난감함 속에 생각이 촉발되는 울퉁불퉁한 흐름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의 대답은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에 힘입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5) 낭독회는 작품이 독자에게 건네지는 시간이다. 낭독회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만나고 말하고 새롭게 듣는 시간이다. 현장의 즉흥성은 다른 생각을 촉발시킨다. 낭독회는 서로 함께 참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발신자가 수신자가 되고 생산자와 수용자의 자리바꿈도 일어난다. 이수명 시인이 말하는 “독자에게로 시가 이동하는 현장”, “현장이라는 자리에서만 가능한 생산성”은 문학의 현장이 상호적이고 역동적인 공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산성에 힙입어 나아가는 문학의 현장이 문예지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문학의 현장을 생기 있게 하는 것은 기존의 제도가 아니라 ‘작가-작품-독자’의 연결을 만드는 이질적인 리듬과 시간이다. 낭독회를 기획한 이성주 평론가는 시민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을 때 종종 ‘요즘 문학’이 ‘그들만의 문학’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시민들은 동시대 문학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문학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6)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낭독회에 관한 수많은 후기와 감상은 모두 그런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지금 문학 독자가 문학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크고 작은 낭독회와 강연, 독서 모임과 함께. 더 많은 작품이, 더 다양한 작가와 일반 독자들이 문학 현장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 문학에 유익한 일이지만 이런 교류를 기획하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제한이 따른다. 문학을 경험하는 일은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와 연계되어 있다. 2024년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한국의 독서량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책을 선택할 때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서 책을 직접 본다고 응답한 비율(26.8%)은 제일 높았다. 인터넷과 SNS의 책 소개나 광고를 본다는 비율(21.2%)은 그 다음으로 높다.7) 그러나 문학 현장의 전망은 밝지 않다. 2023년 정부는 지역서점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앞으로 서점 문화활동 지원 예산 역시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다.8) 코로나 상황의 종식 이후 다양한 도서 행사들이 활기를 되찾았지만 서점을 중심으로 한 도서 문화활동은 위기를 맞고 있다. 잡지 산업 역시 지속되는 경제 침체로 부정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AI 기술과 디지털 시대라는 변환점을 준비하고 있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증진할 것인가는 앞으로의 발전에 중요한 기준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변화가 현행하는 문학 생산과 유통 방식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지는 아직 더 지켜볼 일이다. 핵심은 독자와의 상호 작용이다. 문학을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고민은 더 필요하다. 5. 기존 문단의 시스템이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익숙하다. 한 좌담에서 육호수 시인은 최근의 SNS를 통한 문학의 확산이 등단 제도를 거친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향유자’로서 현대시에 대한 진입장벽과 문턱을 낮추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한국 시에 유입되어야 한국 시도 활성화된다고 말한다.9) 김건영 시인은 SNS에서 매체의 홍보나 자본을 업지 못하면 아예 독자의 손에 닿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SNS의 과도한 상업주의 경계한다. 모든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김연덕 시인은 홍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면 SNS가 시 쓰기나 운용 방식에서 개개인의 질서나 미감을 즐기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좀더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모두 일리 있는 발언들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문학은 디지털 시대와 얽혀 있다. 한국의 독서 문화에서 종이책 선호도는 월등히 높지만 정보 습득 선호 경로는 포털 사이트와 유튜브, TV/라디오, SNS 순으로 나타났다.10)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책을 선택할 때 정보를 얻는 방법에서는 서점이나 도서관 다음으로 SNS의 영향이 컸다. ‘종이책’과 ‘디지털 문화’의 공존 속에서 한국 문학에 필요한 것은 문예지의 쇄신만이 아니다. 한국 문학은 ‘종이책’ 바깥의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좌담에서 알 수 있듯 SNS는 창작자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를 생생하게 마주하는 곳이다. 단순히 홍보를 목적으로 한 경우라도 SNS는 문학의 존재감을 알리는 편리한 수단이며 그 안에서 자기 표현의 매력과 홍보의 경계가 언제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와사상』(2025년 봄호)에 실린 「동시대 패러디스트의 밈적 욕망」(최다영)과 「사람이 사는 무인도-시와 패러디, 육호수와 고선경의 시를 중심으로」(하혁진)는 변화된 문학 환경에서 시가 어떻게 동시대의 문화와 교류하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 인터넷 밈을 섞어놓은 ‘힙한’ 시가 그 자체로 또 다른 밈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싸이월드’의 ‘감성체’를 활용한 시는 학습을 요구하는 대신 비슷한 시대와 문화 감각을 지닌 독자를 초대한다. 이 글들은 현대시와 패러디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대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의 변화로 읽는 것이 유용하다. 디지털 시대의 파편화된 문화를 수용하는 시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인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먼저 존재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만드는 문학 현장이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저변을 축소하기는커녕 더 독특한 취향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입구처럼 보인다. 보편성과 진지함, 엘리트주의와 전문 독자에 둘러싸인 시가 아니라 비록 소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가벼움과 귀여움, 사랑스러움, 놀이와 유머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그 안에서 전파되는 중이다. 전문 독자에게 다소 부족했던 자질들, 문학 제도가 배제해 온 요소들이 새로운 호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가 밈이 되고, 문학이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감성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을 향유하는 시대적 현상이다. 누군가는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거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통의 보편성이나 대중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만드는 일은 이제 능동적인 문학 행위이다. 시가 자신의 독자를 스스로 불러 모으는 일도 그러하다. 그것은 시에 좋은 일이다. 매일 접하는 수많은 콘텐츠들 사이에서 문학이 잠시 눈길을 끌고 멈추는 순간이 되는 일, 문학이 독자에게 이동하는 울퉁불퉁하고 즉흥적인 현장이 되는 일은 문학의 다양성, 문학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에드거 앨런 포는 시의 목적이 불확실한 즐거움에 있다고 했다. 종이책 바깥에서도 시는 그 목적에 충실하다. 작지만 다양한 문학들의 난립과 행진 속에서 그 즐거움이 커진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로서의 문학도 그리 먼 얘기는 아닐 것이다. 1)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출판시장 통계」, p.67.(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2)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p.154. 3) 노태훈, 「한국문학의 현장」, 『자음과모음』 2025.봄, p.27. 4) 황유원,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는 중-소하서점 낭독회 후기」, 『포지션』, 2024.겨울호, p.248. 5) 이수명, 「소하의 밤」,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소하서점 낭독회 자료집, 2024, pp.75-77. 6) 『모든 일들은 항상 우리가 없는 시간에 일어났고』, p.172. 7)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292. 8)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 한국출판연감』, p.181. 9) 김건영·육호수·김연덕, 「이달의 시 현장점검-그 평론가는 이제 출판사 마케터 아냐?」, 『현대시』, 2025.3, p.53. 10)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독서정책연구소, 「2023년 독서문화 통계」, p.17. ( https://www.kpa21.or.kr/kpa-data/report-resource/)

계간 파란 김주원 독자문예지얽힘수용현장교감디지털 시대 2025
김미정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비평 작품론1) 2) 1. 전환 서사들과 포스트 비평 최근 ‘포스트 비평’의 담론 지형3)에 동물·몸·정동·존재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환(turn) 서사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사유 및 원리와 부대끼는 과정에서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이어가는 와중에, 잠정적으로는 사물 세계의 ‘얽힘·연루됨’을 언어화하는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질문을 전환해 가던 차였다.4) 문제는, 이 전환의 사유들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볼 실마리를 명백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글쓰기로 육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체감에 있었다. 우선 어떤 이론이 근본적으로 사유의 관점을 조정케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시키는 글쓰기는 여전히 근대의 제도적 지식 체계나 원리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러한 조건과 교섭하며 쓰는 몸 스스로의 행위 도식이 바뀌어야 가능할 터이지만, 몸이야말로 결코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관성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개인적 딜레마로 여겨진 것이 실은 어딘가에서 차근차근 내파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 것은 문학평론가 백지은의 작업을 다시 살피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내내 ‘독자’ ‘읽기’ ‘쓰기’ 등의 문제를 통해 오랫동안 한국문학 비평 현장을 풍요롭게 증거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그 비평 행보를 찬찬히 살피며 새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독자-읽기-쓰기를 주제화해 온 그녀의 작업이 실은 스스로의 몸을 바꾸고 그 몸과 연결된 배치를 바꾸는 과정 자체이기도 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개인적 문제의식 하에서 조금 구부러뜨리는 일이 허용된다면, 예컨대 어떤 연루됨(이때의 연루됨은 주체/객체를 넘어서는) 속 자기 위치를 감각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드는 과정을 글쓰기 자체가 수행해 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잠시, 과거 그녀의 말도 떠올려본다. 그녀는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5)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때는 평범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거느릴지는, 이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백지은 글쓰기의 이러한 수행적 의미를 ‘비평’이라는 장르의 특징과 관련해서 좀더 생각해본다. 비평이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주체/대상(객관)이라는 근대적 도식이 선명하게 구현되는 장르인 것 같다. 비평의 ABC에 대한 글들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듯, 비평은 대상(객관)으로 놓여 있는 텍스트를 경유하면서 말해지는 주체의(주관적) 형식이라고 여겨져 왔다. 즉, 자기를 말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출발하더라도 거기에는 늘 ‘주체/대상’ 구도의 긴장과 역학이 놓여 있는 것이 비평이다. 대상이 선행되어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의미가 감상하는 이의 주관과 연동된 장르라는 특징 탓에, 종종 비평에 덧씌워진 고압적 이미지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백지은 비평에서 언젠가부터 이러한 ‘주체/대상’의 도식성이 여러모로 미미해지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었다. 예컨대 (본문에서 다루겠지만) 역사를 ‘감각’하는 방식으로서의 ‘산책’을 주제화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의 도입부는, 대상 텍스트와 필자가 어떻게 얽히고 서로 스며들어 가는지 생생하게 감각시키는 퍽 드문 대목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다 읽고 나서도 그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산책이 뭐가 좋은 것일까”와 같은, 평범한 말들인데다가 어딘지 비평의 단호하고 명료한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이 진술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상의 호흡에 밀착한 이 조곤조곤한 말들은 읽는 이마저 부지불식중 그 활자에 스며들게 한다. ‘주체(필자)/대상(소설)’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서술 장면, 그리고 그러한 문장에 읽는 이까지 연루시키는 장면에서 누군가는 ‘비평은 텍스트와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식의 말이나 최근 에세이적 비평 경향 같은 것을 얼핏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녀의 문장은, 어떤 망설임이나 흔들림이 감추어지지 않은 상태를 언표화할 때가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명료하게 의미화하기 이전의 웅성거림을 감지시킨다. 기존의 장르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백지은의 글에는 여느 비평에서와 같은 단호하고 결연한 어조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확신에 찬 말로 스스로를 주장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향도 백지은의 비평과 거리가 멀다. 이런 특징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백지은의 글에서 ‘마음’ ‘감정’ ‘기분’ ‘정동’ ‘객체’ 같은 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유물론의 사유가 백지은의 비평을 관통하고 있음도 확인해 두자. 그것은 ‘글 속 내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글 자체로 체화’되고 있는 중이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종국에는 ‘비평이라는 장르’의 성격마저 갱신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앞서 적었듯, 비평 장르가 강하게 전제해 온 주체/대상의 근대적 도식은, 그녀가 천착한 ‘마음론’이 오히려 질문하는 것에 다름아니고, 그녀의 글쓰기는 곧 그러한 마음론의 사유를 체현한(emboded)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쓴다’는 일을, 자기로부터 무언가를 발생시키고 그것이 다시 자기를 세우는 과정으로 설명했던 백지은의 말은 지금 스스로의 비평 궤적에서 활물적으로 증거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글쓰기의 특징이 그녀 자신이 골몰해 온 비평 주제와 관련해 필연적이리라는 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살펴보겠다. 2. ‘마음’의 조건에 대해 :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2024) 읽기 백지은 비평의 주제와 방법을 최전선에서 확인시키는 글의 하나가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이다. 이 글은 김화진의 『나주에 대하여』에 수록된 소설들을 중심으로 ‘마음’의 존재론을 그려간다. 마음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을 통해 작동하는지 고찰하는 글이다. 이 글의 화두인 ‘마음’은 장르를 불문하고 최근 한국문학의 여러 작품을 통해 언표화되어 왔다. 그것을 ‘감정’ ‘정동’ ‘감응’ 같은 개념을 통해 접근하고자 한 비평적 논의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백지은의 글은, 그러한 개념, 이론들을 두드러지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마음’의 정체를 섬세히 풀어나간다. “적다보니 ‘마음은 대체 뭘까’ 싶은 의문이 소박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다루는 주제에 스스로 연결되는 과정을 솔기없이 노출하기도 한다. 물론 그녀의 글에는 마음을 둘러싼 최근의 인지과학, 정동이론, 문화연구 등의 사유가 행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경하게 전경화하지 않으며 정합적 논리로 이어가는 이런 장면에서, 비평도 하나의 작품(이라 말해지는 것)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새삼 환기하게 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는 마음이나 감정 등과 같은 것이 어떤 개체적 신체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온 우리의 통념을 먼저 뒤집는다. 이 글에 따르자면 마음은 단지 개인의 내부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다. 마음은 “누군가의 가슴속이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존재한다. 마음이나 감정이 누군가의 배타적 소유가 아니라 실은 어떤 무수한 타자들과의 마주침과 연결 속에서 빚어지는 산물이라는 통찰이 저 말에 담겨 있다. 이때 “마음”이란 “이러한 연결 작용 및 상호 조절의 무수한 경우의 수로 된 결과물”에 가깝다. 즉 “마음은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그녀는 이렇게 적는다. “내 마음은 물론 나라는 한 사람의 성격과 내가 처한 상황과 나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생겨난 사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생겨나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개인에 귀속되지 않는 집단의 또는 공동의 조건 안에서 복잡하게 출몰하는 다른 요소들과 함께 움직인 결과이므로 또한 사회적인 산물”이다. 단,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다. 첫째, 백지은이 말하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은 어떤 균질적 덩어리(mole)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마음론은 마음의 보편성이나 균질성이 아니라, 고유한 마음들이 단지 개인적, 사적인 것으로 귀속되기 이전 구체적인 마주침과 연결을 통해 각각 다르게 발현되는 것에 주목한다. 그녀는 “우리가 몸짓이나 표정으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마음에 보편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주요 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녀의 말처럼 구체적 조건과 무관한 보편적 마음이나 감정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마음, 감정, 정동 등은 살아있는 존재 모두가 지니고 있다해도, 그럼에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나 특정 조건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발현되게끔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점을 확인하지 않는 마음 이야기는 어딘지 불순하고 불철저한데, 백지은이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마음을 말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그녀의 마음론이 존재의 자기구성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글에 따르면 마음은 분명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정동이나 역량과 무관하게 그저 수동적으로 결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론’은 기계적 구성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관련하여 ‘나’라는 감각 행위자의 고유성 역시 각별히 강조되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잠시 이런 대목을 보자. “우리의 마음이 사회적 구성물이라 해도, 어떤 공동의 지평에서 바로 그러한 마음이 ‘내’게 지어져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내’가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고유한, 중요한 사실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으로 인해 ‘나’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과거 백지은의 말, 즉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발화의 주체 혹은 발화의 근거이자 제재로 삼아 어떤 것을 발생시킨다는 뜻이고, 또한 그 발생을 자기 자신으로 세우는 일”이라고 했던 것이 오버랩된다. 자기 원인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단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세계관은 여기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이러한 마음론이 어떤 사유와 고민으로부터 전개된 것인지 그 시간의 궤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의 마음론은 단지 비평에 소용되는 이론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자 그것이 만들어낸 세계관의 한 발현인지 모르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내 몸 어딘가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신체 활동에서 구성된 산물이고, 사회적으로 공유된 코드나 경험을 통해 해석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시 나를 움직이고 또한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간다는 이 논의의 정합성은 ‘이론’이라는 말에 대한 항간의 오해를 교정하는 데에도 큰 참고가 될 것 같다. 더욱이 대상으로 다뤄진 김화진 소설이 마음론의 매개, 도구로만 소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히 소중하다. 백지은의 글은 쓰는 이(주체) 스스로 소설(대상)에 스미고 얽히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대상(소설)의 고유성은 내내 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따뜻한 공감을 상찬하거나 낭만화하는 식으로만 읽히기 쉬운 김화진 소설을 구출하고, 작품이 지닌 “‘마음’에 관한 탐구 서사”로서의 의미를 풍부히 드러내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각 텍스트가 지니고 있을 고유한 의미를 발하도록 하면서, 그럼에도 저변의 관통하는 논리를 발견-전달하는 이 장면은 오늘날 비평적 글쓰기 자체가 전환(turn)하는 한 사례로 읽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3. 감각하는 역사에 대해 : 「안으로 나가는 역사」(2019) 읽기 한편 백지은 식의 마음론은, 역사를 보는 관점과도 흥미롭게 연결된다.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보다 앞서 발표되기는 했으나, 텍스트를 따라 걷는 이의 심상과 호흡을 그대로 노출하며 시작하는 「안으로 나가는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이 글은 박솔뫼 장편소설 『미래 산책 연습』을 통해 역사와 나/우리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찬찬히 짚어간다. 이 글 역시, 무언가를 장악하고 자기화하여 독자에게 보여주겠다는 비평적 자의식 등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백지은 글의 특징, 즉 텍스트와 나란히 혹은 그것에 스며들어 발화를 이어가려는 비인칭적 발화자의 흔적도 이 글에서 어김없이 엿보인다. ‘비재현’ 사유와 역사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특정 개념이나 이론이 박솔뫼 소설을 압도하거나 유리시키는 법은 없다. 『미래 산책 연습』에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제재로 등장하지만 박솔뫼 소설이 그러하듯 그것은 직접 재현되거나 의미화되지 않는다. 단지 ‘산책’이라는 행위와 그 동선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백지은의 결론부터 적어두자면, 소설 속 산책은 단지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라 “다리로 하는 명상”이고 사유의 기반이자 감각-접촉의 형식이다. 그녀의 분석을 통해 주인공의 산책은 부산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과거 사건과 접속하고 미래를 기억하며 현재를 질문하는 역사적 행위성으로 의미화된다. 여기에서 부산 역시 단순한 소설적 배경이 아니다. ‘부산’은 사건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고 교차하며 구성되는 유동적 장이다. 부산은 과거의 역사-현재의 만남-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서로 얽히는 시/공간적 밀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세계가 복수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을 증거하는 장소다. 박솔뫼 소설 속 자기, 나, 역사 등에 대한 백지은의 설명은 예컨대 일종의 연결신체(assemblage)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것이 그녀의 ‘마음론’과 연동되는 것임도 물론이다. 이 글의 출발지점은 ‘이야기가 곧 역사/세계가 아니’라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소박한 지점이다. 도입부는 “소설에 드러난 역사/세계는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일뿐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본격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때, 박솔뫼 소설과 역사 제재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레 등장함직한 ‘재현’ ‘표상’ 같은 개념은 일절 구사되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백지은의 글에서 개념이나 이론은 구사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감각과 경험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이 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스스로의 글을 포함하여, 그간 많은 비평은 강단(논문)의 언어와 친연성을 떨치지 못하며 본의 아니게 개념과 이론의 생경함을 별로 의식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그 점은 비평의 독자와 장(field)을 제약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도 여겨진다. 또한, 오늘날 많은 비평 논의가 근대적 재현·표상 너머를 역설할 때조차, 어쩔 수 없이 재현·표상의 언어를 경유하고, 의도치 않게도 다시 기존 재현·표상의 원리가 강화되거나 재생산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앞서 적었듯 여전히 비평이 근대의 제도적 글쓰기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탓이 우선은 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백지은의 글은 이러한 곤경을 가뿐히(물론 치열한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 분명한) 넘어서는 듯 보인다. 아예 비재현, 비표상의 언어를 고안하고 발명하는 과정 자체가 그녀의 글쓰기에 함축된 듯 보인다. 예를 들어 그녀의 글은, 박솔뫼 소설 속 ‘역사’는 “생각-가정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가정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백지은 식 조어(造語)인 ‘생각-가정’은 단지 “상상으로 꾸며진 가상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우주의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음과 불확정의 상태를 가정한 채로 존재하여 알 수 있음과 확정의 상태를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고, “다른 위치의 역사/세계”다. 기록, 증언과 같이 익숙한 재현 개념의 한계를 사유하면서 그 너머를 말로 움켜쥐려는 그녀의 고투는 분명 박솔뫼 소설을 포스트 재현, 포스트 메모리의 개념을 통해 읽는 방법과 닿아 있지만 그 목적이나 효과는 분명 다르다. 이 “생각-가정하는 역사”는 어떤 유일무이한 진실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이탈시킨다. 그리고 그 다양한 감각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이때 ‘역사적 사실’은 “다만 느슨하게 연계되어 세계 ‘속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로서 전체를 의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통상, 부분의 합이 전체라거나 전체가 곧 부분의 우주를 품고 있다고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통념은 이 글에서 낡은 것이 된다. 백지은이 부상시키는 이러한 연결적 관계들은 어떤 중심/주변의 위계도 없고 총체성으로 수렴되지 않는 병렬적인 흐름으로 이미지화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이른바 주체/대상 도식 속에 배치되어 사유되던 이 세계를 다르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인다. 백지은은 박솔뫼 소설 속 “‘나’의 생각-가정”은 “대상에 대한 통제나 지배의 가능성을 거의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한 “자기의 관점을 주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것도 중심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이 곧 ‘자기’에 대한 근대 이래의 서사를 다시 쓰는 장면의 하나임도 기억해 두고 싶다. 그녀가 말하는 ‘생각-가정’은 흔한 ‘자기’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너머로 개방되며 연결되는 활동이다. 여기에서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거나 중심적이거나 주변적이거나 하는 상이한 위상”이 두어지지 않는다. ‘안으로 나가는 역사’라는 제목의 수수께끼도 이제 풀리는 듯하다. 공식 기록 혹은 객관화된 기록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 역사는 그녀의 글에서 오히려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을 향해 접속하려는 움직임, 방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 개개의 기억이나 내밀한 것은 어떤 진공 상태의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산책자 역시 단지 걸으며 보는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안의 감각, 사유, 몸의 미세한 반응 속에서 사건을 감지하는 자다. 이때 역사는, 바깥에 그저 놓여 있는 진실이 아니다. 역사는, 삶과 함께 유동하며 점점 안으로 향해오는 감각의 기원에 가깝다. 거칠게 말해, ‘역사/내면’이라는 말처럼 정반대의 벡터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범주들이 이 글에서는 서로를 향해 작동하고 있고, 그 얽힘의 관계가 섬세하게 가시화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이제까지 살핀 백지은의 글과 말에도 상응한다. 그녀가 밀어붙인 비재현·비표상의 말들은 곧 이 세계의 원리를 찬찬히 응시해 온 그녀의 마음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만든 것이 또한 재현·표상을 흘러넘치는 어떤 세계였을 터였다. 비록 재현 체계 안에서 쓰여지는 글이지만, 그럼에도 재현 체계·제도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감각시키려는 고투가 백지은 비평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4. 균열을 내고 거기에서 장소를 만드는 비평 백지은의 글들을 읽으며, 이 세계 속 존재나 사건의 연루됨을 발견하고 또 다른 연루됨을 만들어가는 글쓰기에 대한 개인적 고민을 더 밀어붙여도 될 용기를 얻는다. 읽기-쓰기의 순환적 수행성에 대해서도 큰 자극을 받는다. 읽기(듣기) 없이 쓰기(말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당연하지만 오늘날 새삼 중요한 사실도 다시금 곱씹게 된다. 사실 전환(turn)을 둘러싼 이론, 담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면 말과 담론은 자주 인플레였고, 정작 그것이 제대로 체현, 수행되어 본 일은 썩 많지 않았다고도 생각된다. (과거라면 ‘실천’ 같은 말로 표현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체현과 수행이 어쩌면 늘 이 세계의 궁극적 과제이자 관건일 터였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좀처럼 관성과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글은 종종 제자리를 맴돈다.지금, 백지은 작업의 극히 일부분만 읽은 셈이지만, 제도적 비평의 현장에서 그 전환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게 엿보았다고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장르에 대한 유례없는 고민이 이어진 지난 십여 년을 백지은의 행보가 이렇게 증거해 주는 것 같다. 포스트 비평의 형질 변환이 선언이나 논쟁이 아니라 이렇게 글자의 안쪽에서부터 차분하게 진행되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 제도의 관성, 시스템의 회로에 균열을 내고 빈틈을 만들며 그곳을 장소화해 온 그녀의 작업에 많은 언어들이 닿고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것을 기존 방식의 ‘비평’ 같은 말로 반드시 명명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생각하는 편이어서 적는 말이기는 한데, 분명한 것은 늘 각 시대마다 요청되거나 그 시대와 정합적인 글쓰기 양식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백지은의 작업에서 엿본 것도 바로 그에 대한 도약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른다. 1) 「체현하는 비평 : 백지은 작품론」(『현대비평』, 2025년 여름호)을 수정 보완한 글임을 밝혀둡니다. 2)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백지은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 /「안으로 나가는 역사」(『문학동네』, 2022년 봄호)이다. 3) ‘포스트 비평’이라는 말의 문제의식 및 그 정황에 대해서는 2010년대 이래 영미 비평-이론계 맥락에서의 논의가 선행한다. 예컨대 브뤼노 라투르의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Critical Inquiry Vol. 30, No. 2, Winter 2004)이 제기한 쟁점이 서구 비평-이론계에서 본격 맥락화되는 것은 Elizabeth S. Anker, Rita Felski, Critique and Postcritique(Duke University Press, 2017)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론을 한국적으로 맥락화하고자 하는 최근의 논의들(이희우, 「비판이 오래 가르쳤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들」, 『쓺』 2023 하권 / 인아영, 「비평과 사랑 : 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을 포함하여, 현재 한국어 문학 비평에서 기존과 다른 패러다임의 글쓰기가 전개되고 있는 양상 전반을 지칭한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비평, 플러스 알파 : ‘얽힘’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관점에 대해」(『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 「마음의 유물론」(강우근 시집『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해설) 등. 5) 백지은, 「독자 시대의 문학과 쓰는 개인의 형식」, 『자음과모음』, 2019년 겨울호.

계간 현대비평 김미정 포스트 비평체현독자신유물론정동 2025
함윤이 월경(越境)하는 걸음, 문 두드리는 손짓 ― 이은용『우리는 농담이 (아니)야』

흑백의 표지를 본다. 정면을 보는 이의 옆얼굴이 먼저 보인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있다(무엇이 들어있을까?). 그가 걷는 중인지, 잠시 멈춰 있는지, 혹은 아주 오래도록 서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가방과 모자와 같은 색으로 칠해진 검은 눈이 어디/누구/무엇을 보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다섯 편의 희곡을 연달아 읽고 나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이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수많은 갈림길일지도 모르겠다고, 움직임의 여부가 분명치 않은 발 역시 흑백의 세계에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경계를 건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은용 작가의 희곡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이루는 다섯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총 여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장막 희곡이다) 「세상의 첫 생일」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엄마, 엄마」 「가을 손님」. 각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문성”과 “아성”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사람1(A)”처럼 숫자 혹은 알파벳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로 적힐 때도 있으며, (「우리는 첫 생일」의 ‘사람 2’처럼) “아마도 여성”으로 소개될 때도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에 수록된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Metamorlphosis)’의 주인공 설명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스물여덟 살의 에프티엠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열여섯 살 시스젠더 소년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사람.(65쪽) 이은용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소개되는 방식은 이처럼 다양하며 세부적이다. 각 이야기에서 인물들이 그려지고 행동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에프티엠 트랜스젠더이자 아마도 여성이며 하나의 이름 또는 기호를 가진 인물인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이고 여행하는 “아티스트 앤 트랜스젠더”이자 어른이 사라진 세계에서 노동의 주체가 된 십대들이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사회에 나뉜 구획들을 끊임없이 월경(越境)한다. 나아가 경계를 나눈 벽에 난 문을 연신 두드린다. 이 소리는 책 전체를 관통하여 울리고 있다. 넘는 걸음이나 문을 두드리는 손짓 모두 삶에서 잦게 벌어지는 일상적인 ‘동작’이다. 여기에 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계를 넘거나 문을 지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다섯 편의 희곡에서 이러한 ‘동작과 반응’은 장면과 움직임 그리고 수차례의 질문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의 장막 ‘월경’에서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진희는 국경을 지날 때마다 그의 성별에 혼란을 겪는 검색대 직원들을 마주한다. 진희는 독백한다. “그들은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월경하기 위해서는 겨우 이것이 끝이다. 그리고 월경은 농담이 맞으니 웃어도 된다. 웃어라.” 그는 뒤이어 월경의 과정과 그 의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딘가에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은 때로 벽 같아서 그걸 지키는 사람들이 늘 서 있다. 그들은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국가를 떠나는, 월경하는, 나는 누구인가?”(31쪽) 독백의 마지막 질문은 진희와 만나는 검색대 직원들이 반복하는 질의이자, 이은용의 인물들이자기 자신에게 반복하여 던지는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현실에서 트랜스젠더에게 반복되는 질문(“너는 누구인가?”)의 주어를 비튼 이 물음을,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 또 서로를 향해 거듭 던진다. 이는 그들 앞에 벽으로 우뚝 선 세계를 더듬는 몸짓이기도 하다. 진희의 벗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인 친구2는 “진희야, 자궁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이니?”(37쪽) 하고 질문함으로써 그가 겪지 못한 신체, 벽으로서의 세상이 “들어올 수 없다”라고 주장하던 공간을 알아가고자 한다. 「세상의 첫 생일」 속 사람1의 “왜 스무 살이 넘는 어른들만 없앤 건데?”(141쪽)라는 물음은 그들의 세상이 겪은 중대한 ‘변신’(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의 증발)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작가인 준영이 꿈속에서 스무 살의 엄마 희수와 서로 “몇 살이야?”(161쪽) 하고 묻는 과정은 일시적으로 교차된 ‘이해의 시간대’의 주파수를 조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의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로써 세계가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들’을제안한다. 한 가지 형태와 성질로 고정된 세계에 던져진 질문은 흑백으로 명확히 구분된 세계의 표피를 관통하여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심층까지 파고든다. 바로 이 과정에서 금과 균열은 생겨난다. 얼핏 ‘균열’은 ‘경계’와 비슷한 선(lin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면의 선으로 이뤄진 경계와 달리, 균열은 다양한 방향의 선과 층층의 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러 갈래로 나뉜 선과 면은 공간을 형성한다. 이 공간을 ‘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틈의 형태와 성질은 다양하다. 계속 두드린 끝에 열린 문틈, 수많은 발자국이 만든 조그만 골,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구분지(너무도 명확히 나뉘어 있기에 오히려 한 덩어리로 보이는 땅)를 어그러뜨린 궤적 역시 틈으로 볼 수 있다. 실제의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틈은 많은 가능성을 품은 장소다. 환경의 제한으로 미처 움트지 못했던 몸이 틈바구니로 자라나거나, 새로운 장소로 통하는 사잇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은용의 언어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이자 무대에서의 상연을 위한 텍스트이면서, 세계의 변신을 불러오는 움직임이 된다. ○ 덧붙이는 말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고(故) 이은용 극작가가 남긴 다섯 편의 작품을 한데 묶은 희곡집이다. 표제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2020년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초연으로 그해 한국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과 제57회 동아연극상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22년에는 백상예술대상의 ‘백상연극상’을 수상했다. 2019년 신작희곡페스티벌의 당선 소감에서 이은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첫 작품은 절대 정체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체성은 내 삶의 한 부분일 뿐, 나를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이 늘 그렇듯 존재하는 것을 외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정체성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체성을 떼어놓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 또한 불가능합니다.”*

격월간 악스트 함윤이 이은용퀴어희곡집창작희곡백상연극상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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