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 월간 현대시 | 2024년 1월호(제409호)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들

임지훈 문학평론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평론 부문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문학의 윤리, AI시대 문학작품의 역할, 예술 작품의 정치성 등을 중심으로 연구와 비평을 수행합니다. 현재는 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 이론·비평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복순이와 자두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함께 삽니다.

  1. 조건은 어떻게 위기를 규정하는가 –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


  애덤 맥케이 감독의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2021)은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으로 인한 일련의 해프닝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임박한 재앙이라는 극단적 상황 탓에 재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인류에게 임박한 재앙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앞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자본의 흐름에 떠밀려 최악의 선택을 반복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딥 임팩트>나 <아마겟돈>과 같이, 하나 된 인류가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는 서사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혜성을 발견한 연구팀으로, 혜성의 위험성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룹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재난 앞에 도움을 구하고자 다른 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소식을 알린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두 번째 그룹인 정치인들을 접한다. 철저하게 정치 공학에 입각해 사태를 바라보는 이 정치인 그룹은 지구 멸망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어떻게 선거에 이용할 것인가에 골몰한다. 그 결과는 우스꽝스러운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와 같은 재난 방송이다. 대통령은 자신을 둘러싼 추문을 덮기 위해 사태를 이용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지구 멸망이라는 위기를 막고자 헌신하는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하여 핵미사일을 실은 우주선이 혜성의 궤도 변경을 위해 이륙하는 순간, 사태는 세 번째 그룹의 사람들에 의해 중단된다. 그들은 고도의 기술 산업을 이끄는 거대 자본으로, 이들은 첨단 기술에 사용되는 희귀 자원이 혜성에 매장되어 있다는 이유로 궤도 변경을 중단시킨다.

  이와 같은 세 부류의 그룹의 순차적인 등장에 따라 영화의 맥락은 크게 3번 변화한다. 1.위기의 감지 2.정치 공학의 개입 3.자본에 의한 정치적인 것의 중단. 중요한 것은 세 단계 속에서 혜성의 의미가 점차 굴절된다는 점과 그럼에도 객관적이며 실체적인 위기는 여전히 파국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단계는 객관적 사물인 ‘혜성’의 의미를 규정짓는 조건으로 기능하며, 조건의 변화는 곧 혜성의 새로운 의미 창출로 이어진다. 혜성 충돌이라는 사태조차도 객관적이며 실체적인 사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들 하에서 의미를 부여받으며 구체화되는 것이다.1)

  이 지점에서 영화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한다. 궤도 변경 시도의 중단 이후, 정부의 입장에 서서 방송에 출현해 프로파간다 활동을 하던 주인공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별안간 분노를 토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아동용 프로그램과 속류 교양 프로그램에서 혜성의 위기에 대해 설명하며,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프로파간다 활동을 하던 그는 별안간 사태에 대한 분노를 광기에 가깝게 표출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보자면 다가오는 멸망 앞에 정치 공학과 자본의 논리를 앞세운 다른 인물들을 향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가 표출하는 분노는 시청자들을 향해 있다. 그는 시청자들을 향해 일갈한다. 마치 대의를 위해 자유를 희생하라고 성토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인민을 향해 분노하는 독재자의 모습처럼.

  설명하자면 이렇다. 혜성 충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가운데, 민디 박사는 점차 패닉에 빠져든다. 하지만 혜성 충돌을 보일러 파열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속류 교양 프로그램의 진행자들 앞에서 민디 박사는 점차 분노에 빠져든다. “혜성은 존재합니다”라는 말로부터 시작된 그의 분노는 점차 가속화되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조차 최소한의 합의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으로 접어든다. 다들 정신이 나간 것 아니냐, 고장나버린 것이냐 등등 분노를 쏟아내던 그는 이윽고 시청자들을 향해 ‘미국 대통령이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이라 소리치며 분노한다.

  민디 박사의 분노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실에 대해 말하면서도 개인의 정치적 신념의 자유를 존중하던 그가 자신의 분노로 점차 빠져들수록 자유를 강하게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최종지점에 이르러 그의 분노는 자유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곧 당도할 진실 앞에 자유는 무력해지리라는 저주 섞인 선언으로 뒤바뀐다. 시청자라는 인민을 향하던 그 분노가 별안간 미국의 대통령을 향하는 모습, 이는 마치 전체주의 국가의 독재자가 인민과 미국을 향해 분노하는 모습을 방불케 한다.

  표면적으로 바라볼 때 그의 분노는 정당해 보인다. 급박한 파국 앞에 문제 해결을 위해 단결하라는 그의 제스쳐는 어떤 의미에서는 탈-정치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치적 논리를 떠나 눈앞의 문제에 집중하라는 선언은 그 자체로 이미 정치적인 것이 아닐까? 목적 달성을 위한 정치적 자유의 포기를 주장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지난 세기에 목격했던 전체주의를 향한 정치적 결단의 제스쳐와 닮아 있지 않은가. 그런 민디 박사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혜성이라는 문제와 문제를 막기 위한 수단들, 심지어 ‘나’라는 인간조차도 정치경제적 조건 하에 붙들려있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일련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한 거부를 선언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탈-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극단적인 정치적 선언이며, 임박한 파국 앞에서 요구되는 유일한 정치적 자세이다.



  2. 소박한 존재론으로서의 속류 객체 중심주의


  이러한 민디 박사의 모습 속에서 정치적 선언을 식별하고, 독재자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것은 어쩌면 과도한 해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또한 임박한 위기 앞에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현실에서 거듭 실패를 반복하도록 만드는 요소, 우리가 정치경제적 조건들에 붙들려 거듭 놓치고 마는 요소가 바로 이와 같은 극단적인 정치성인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민디 박사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혜성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박한 예정된 파국이며, 피할 수 없는 재난 사태이다. 우리는 모두 파국의 이름을 알고 있다. 거듭 흐린 눈으로 애써 모른 채하던 오래된 미래가 기후변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부쩍 다가왔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문제의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기후변화의 문제조차도 각기 다른 정치적 입장과 경제적 조건 하에 사유되며 문제의 본질을 계속해서 놓치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도 기후변화라는 이름의 파국은 성실하게 우리의 현실을 가로지르고 있다. 최근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급부상하게 된 까닭에는 이러한 이유가 존재한다. 팬데믹에서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마주하게 된 오래된 미래 앞에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임박한 파국에 대한 사유의 응답인 셈이다.

  그 가운데 객체 중심주의는 인간 중심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데, 이는 우리의 고착된 사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그레이엄 하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객체 중심주의는 모든 존재를 지식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객체로 정의하며 개별적인 객체가 지닌 자율성을 명시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2)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먼의 관점에서 객체는 구성 요소와 행위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성을 소유한다. 객체들은 자기에 기반한 고유한 실재성을 바탕으로 맥락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지니기에, 객체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인간적 맥락에서 벗어나 객체의 무관계성과 자율성에 기초해 사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 보기에 이와 같은 객체 중심주의는 전적으로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대상을, 심지어 인간조차도 하나의 객체로 바라보는 이와 같은 평등한 위계의 존재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서 언급한 <돈 룩 업>의 민디 박사의 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서는 객체 중심주의가 실제 해석을 위한 틀로 기능할 때 발생하는 미묘한 굴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분명 객체 중심주의는 객체들의 실재성과 그로부터 발현되는 자율적인 맥락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인간을 비롯한 존재 일반이 동등한 위계에 놓여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해석의 준거로 작동할 때 자율적인 맥락에 대한 고려는 별안간 인간의 인지 너머에 객체의 ‘진정한’ 상태가 있으며 그에 따른 ‘진정한’ 관계가 있으리라는 속류적 해석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주장을 이미 수없이 반복적으로 목격해오지 않았나? 예컨대 자연이나 그에 속한 특수한 대상은 인간의 시선 너머에 자율적인 영성을 지니고 있으며 인류가 해야 할 일은 그와 같은 자연의 영성을 식별하고 이로부터 삶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라는 식의 속류 자연주의적 해석의 형태로 말이다.3)

  물론 객체 중심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대단히 과도한 것이다. 그레이엄 하먼과 브루노 라투르, 혹은 래비 브라이언트에 이르기까지 객체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신유물론자들의 본질적인 목적은 기존의 철학적 조건들에서 벗어나 존재론을 재구성하는 것에 있으며, 예외적인 존재자 없이도 가능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러한 이론을 실제 대상을 해석하기 위한 틀로 활용할 때 미묘한 굴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그것은 객체 중심주의가 근본적으로 고려하는 바와 달리, 해석에서 활용되는 속류 객체 중심주의는 객체들의 자율적인 맥락이라는 외양으로부터 진정한 상태라는 외양의 외양을 산출해내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기에서 속류 객체 중심주의라 부르는 태도의 문제점은 우리의 시야 너머에 “진짜”가, 문제의 해결책이 있으리라는 환상에 매달린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사례는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 속에서 무수히 식별 가능하다. 예컨대 비-인간 존재를 화자로 삼는 작품들에 대해 이것을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에 자주 출현하는 사례인데, 여기에서 집중되는 것은 타자 그 자체가 아니다. 실상 타자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 메시지는 지나치게 인간적이며, 그 과정에서 돌출되는 것은 다시금 이와 같은 발화 구조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태도의 배면에는 환원론적 태도가 다시금 도사리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비-인간 존재는 존재들의 위계에 있어 특권화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러나 심지어 그것은 타자 자체에 대한 특권화가 아니라 인격화되고 의인화된 존재로서의, 다른 형태의 인간에 대한 특권화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여기에서 엄밀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속류 객체 중심주의적 해석은 객체들의 위계 없는 존재론이라는 본질을 유지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인격화되고 의인화된 새로운 형태의 대타자이며, 이를 승인하는 해석 주체의 특권화이다. 예컨대 속류 객체 중심주의적 해석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예외를 통한 구조화라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구조를 답습하며, 단지 예외적 존재의 위치에 인격화된 비-인간 존재라는 새로운 형상을 위치시킬 뿐이다. 따라서 기존의 조건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는 필연적인 실패를 마주하게 되며,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다른 형상을 지닌 지나치게 인간적인 오래된 존재론에 불과해진다.

  이야기를 정리하자. 인간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객체들의 관계를 규정하고 맥락화 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을 객체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함으로서 새로운 관계와 맥락을 형성하는 것 : 이것은 한편으로 전적으로 타당한데, 주체를 비롯한 사물 일반이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관계적 체제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논의는 어디까지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관점 너머에 객체의 진정한 모습과 그에 따른 관계가 있으리라는 상상은 속류적인 뉴에이지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데란다와 브라이언트, 그레이엄 하먼 등의 객체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신유물론자들의 논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담론에서 여전히 재생산되는 속류적인 주장이다. 외관 너머에 진정한 중핵이 있으리라는 이와 같은 주장은 진정한 중핵에 대한 환상이 외관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며, 그러한 생산이 현재의 조건들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를 보다 자세하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유기체적 관점에 대한 거절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유를 벗어나는 것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것으로, 사회를 비롯한 여러 구조체를 유기적으로 상상하는 관습이 새로운 객체들의 관계에 대한 상상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들은 구조체 일반을 유기체에 비유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무관계적 사물들의 관계로 새롭게 상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누엘 데란다와 레비 브라이언트의 통찰4)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여기에는 인간 사회를 비롯한 구조체 일반이 정말로 유기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를 비롯한 상징적 구조 일반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다. 언어는 발화의 관점에서는 소리의 매끄러운 이음을 통해 유기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 언어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집합체이자 “간격과 불일치로 가득 찬 브리콜라주”5)에 불과하다. 언어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발화 행위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특정한 기표가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요소와의 간격과 차이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반-유기체론의 입장은 바로 이 지점을 놓친다. 때문에 반-유기체론적 입장은 개별 구조가 유기적이지 않으며 그로 인해 유기적 관점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인간 사회를 예로 들자면 사회 구조는 불연속과 불균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별 요소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과 불일치에 압점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중층 결정이다. 이는 하나의 개별 요소가 여러 모순되는 요소들과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 구조는 그 정의상 상이한 요소들의 이접을 통해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구성은 근본적인 불완전성, 사회의 내적인 적대, 결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조화란 바로 이와 같은 불완전성을 둘러싼 상이한 요소들의 이접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때문에 모든 구조는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불완전성-내적인 적대를 감추기 위한 환상으로서 유기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유기체적 논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핵심은 ‘왜 사회 구조를 비롯한 구조체 일반은 유기체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가’이다. 때문에 반-유기체적 논의를 비롯한 속류 객체 중심주의는 겉보기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 구조를 상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정반대이다. 그것은 구조의 유기체론에 대한 필요를 무시함으로써 사회적 불균형과 분출되지 못한 적대를 여전히 배경에 남겨둔다.

  다시금 최초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의 일환으로써 우리가 객체 중심주의를 살펴보는 까닭은 자명하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가 기존의 사유방식과 조건들 속에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객체 중심주의는 기존 사유방식으로부터 탈피해 새로운 조건들을 구성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을 해석적 사유의 틀로 적용할 때 미묘한 굴절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속류 객체 중심주의이며, 겉보기엔 우리가 처한 조건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와 같은 태도는 기존의 체제에 걸린 조건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하고야 만다는 점에서 기존의 문제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악무한의 사슬인 것은 아닐까?

  조금 더 근원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포스트-휴먼 담론이 인류가 마주한 문제에 대한 응답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속류 객체 중심주의가 주장하는 탈-인간중심적 태도는 과연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보았듯 특권을 포기하는 주체이자 새로운 전제를 정립하는 주체라는 새로운 특권화된 인간상을 구현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자연’이라는 새로운 형상을 대타자로 정립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여전히 기존의 철학적 사유 구조를 답습하며, 그 배경에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들을 방치하는 것이 속류 객체 중심주의라면, 그러한 형상을 과연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이라 말할 수 있을까.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 :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사태 앞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포스트-휴먼 담론의 목적성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가 기존의 사유방식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담론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항목들이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찬가지의 맹점이 하나 숨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Post’의 의미를 사유하는 방식과도 상동적이다. 표면적으로 바라볼 때 ‘Post’의 의미는 ‘탈(脫)’의 의미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다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과연 ‘인간’을 벗어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돌려 말하자면, 우리가 문제를 식별하고 관측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은 아닌가. 또한 문제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스스로의 ‘인간됨’을 통해 그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체제가 지닌 문제는 오히려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발생한 것이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고유한 한계로 인한 것이라면, 우리가 탐색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한계 지점, 인간을 규정짓고 사유하는 틀인 것은 아닐까.

  따라서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은 단순히 어떻게 ‘인간’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에만 달려있지 않다. 오히려 문제의 해결이란 관점에서 바라볼 때 스스로 인간의 특권과 지위를 내려놓는 ‘탈’ 인간적 제스처는 포스트-휴먼 담론의 목적성에 완전히 부합한다 말하기 어렵다. 인간의 책임으로 인해 발생한 기후위기라는 문제 앞에, 인간 이외에는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가 없기 때문이며, 이미 생태계에서 인간 존재는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은 사태 앞에 요구되는 사유로부터 한 발 물러서는, 겸손을 가장한 항복의 제스처에 불과할 따름이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요청되어야 하는 문제는 어떻게 인간을 벗어날 것인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책임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다시금 숙고하는 것에 달려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스트-휴먼 담론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 너머에 대한 성찰과 사유가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논의를 함에 있어 비-인간 존재에 대한 집중만이 아니라 그러한 비-인간 존재를 마주하는 지점으로서의 인간의 한계 지점에 대한 탐색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을 재현해왔으며, 무엇을 인간적이라 말하고 무엇을 인간적이지 않다 논해왔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인간의 근본구조로서의 언어를 매개물로 삼는 문학에 대한 탐색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인간의 정신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 문학은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과 가장 맞닿아있는 예술 형식으로써 탐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들을 탐색함에 있어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형상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난이 벌어졌다고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재난은 처음이라고 우리들의 육체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다줄 것이며 이후로는 결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방송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울먹이기 시작했다 옆집의 누군가 악을 쓰며 저주와 욕설을 포부었다 밖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피할 곳은 없었다 불이 나고 지진이 나고 집이 무너지고 폭설이 쏟아지고 태풍이 몰려오고 혜성이 지구로 돌진하고 있다고 결국 모두가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며 재앙은 계속될 것이라고 1분 후 다음 재난 방송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더욱 경악할 만한 재난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끓였다 일요일 오후였다


  - 강성은, 「재난 방송」,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현대문학, 2018.


  강성은의 시 속에서 인간의 모습은 전형성에 대한 파괴를 통해 구축된다. 이전 시집들에서도 나타나듯, 강성은의 시 속 인간의 형상은 우리가 기대하는 상식적인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을 비롯한 극단적 상황 속에서의 파열을 통해 그려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강성은이 제시하는 인간의 형상은 그 한계 지점에 대한 탐색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에 대한 탐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인간의 형상은 더 이상 파열을 통해 그려지지 않는다. 그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작품이 바로 위의 「재난 방송」이다. 여기에서 파열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이며, 반면 인간은 재앙 앞에 평온한 모습으로 그려져 아이러니를 촉발시킨다.

  상황은 이러하다. 알 수 없는 대 재난이 발생했고, 이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재난 앞에 평등하게 고통 받을 것이며, 어디에도 도피할 곳은 없다. 재난 방송에 대한 도시전설을 연상시키는 종말론적 상황 속에서, 작품은 패닉에 빠진 인간의 모습과 그들에게 다가올 더 큰 재난을 예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패닉에 빠진 인간의 모습과 별개로 ‘나’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의 화자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커피를 끓였다 일요일 오후였다”고 담담하게 말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대조는 우리로 하여금 몇 가지의 흥미로운 상상을 부추긴다. 첫째로, 그는 이미 패닉에 빠진 것일 수 있다. 도피처 없는 평등한 재난 앞에 선택지를 잃어버린 인간으로써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신적 충격이 외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명백히 재난을 마주한 인간이 행할 행동의 범주 가운데 하나이겠으나 시집의 제목을 고려하자면 그와 같은 상상은 어딘지 핵심을 놓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두 번째로, 이러한 재난을 초래한 것이 바로 화자인 ‘나’라는 상상이다. 세계의 잔인한 권력 놀음과 광기에 가까운 열정적 현실에 억눌려 은둔 속에 머물던 ‘나’에게 있어 재난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만족스러운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상은 시의 구절이 지닌 극단적인 담담함으로 인해 부정될 것이다. 세 번째로, 그는 이미 이러한 육체와 영혼의 손상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왔다는 가정이다. 예컨대 그에게 있어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올 재난이란 예외적인 사태가 아니라 항시적인 상황이었기에 놀라울 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상상 가운데 화자의 담담한 태도를 만족시켜주는 것은 오직 세 번째 뿐이다. 겉보기에 이러한 인간상의 제시는 그가 이전 시집에서 보여온 태도와의 단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의 위치에 처한 인간의 미래적 형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이전 시집의 화자들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상 속에서 강성은이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완전무결한 육체와 영혼을 소유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손상 속에서 구성된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우리가 가진 정상적인 주체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손상 받지 않은 정상 상태의 주체가 있고, 극단적 상황으로 인해 병리적인 상태에 처한 비정상적 주체가 있으리라는 가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재난 방송」이 제시하는 인간상이란 구성적 존재로서, 거듭되는 육체와 영혼의 손상이야말로 인간을 구성하는 근본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재난은 별안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성을 위한 상시적 조건으로 의미가 바뀐다.

  이처럼 강성은의 시는 인간을 둘러싼 환상을 파열시킴으로써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에 대해 탐색한다. 이에 대해 신해욱의 시는 그 목적에 있어 인접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특히 「무족영원」에서 다양한 형상의 인격적 존재에 대한 조망을 통해 이루어지는 바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휴머니티」라는 시는 인간성을 시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인간성의 정의에 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그릇이 달그락거린다. 설마.


  이렇게 많은 인간이 한꺼번에 존재할 수 있다니. 이렇게 많은 염색체가 같은 색깔로 물들 수 있다니. 만지면 옮을 것 같구나. 십진법으로는 셀 수조차 없구나.


  외톨이 과학자의 홈 메이드 악몽인가.


  그 과학자가 시달리는

  색맹의 리얼리즘인가.


  아니면 못난 요정들에게나 어울리는

  협소한 영원의 상징인가.


  검류계의 바늘이 떨리고. 그릇이 달그락거린다. 그만.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촛농. 미지수 X와 헤모글로빈. 초페르뮴의 로렌슘. 제라늄. 안젤륨.


  순수한 인간성만을 추출하여

  정제된 의인화를 시도해야 했던 건가.


  맹물을 달여 만든 배양액에 담가

  때가 올 때까지

  달걀 껍질 안에 봉해두었어야 했나.


  물이 끓는다. 머리가 뜨겁다. 무너진 문장과 무너진 계통. 깨진 문장과 깨진 그릇. 상한 문장과 상한 양분. 난생 설화를 새로 휘갈겨 뒤죽박죽으로 지저귀는 새에게 바치고. 부르르 열패감의 쾌락에 무릎을 꿇고. 눈이 풀리고


  입냄새가 나고


  요물이 꿈틀거리고


  낄낄거리고


  - 신해욱, 「휴머니티」,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관측과 실험을 반복한다. 그가 살피는 것은 시의 2연에서 드러나는 ‘인간’ 그 자체이다. 그가 “순수한 인간성만을 추출하여/정제된 의인화를 시도해야 했던 건가”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무언가를 만들려 시도하고 있으며, 그것에 실패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과학자가 “순수한 인간성”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사유하는 부분이다. 비록 그것이 진술에 의해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불확실한 추측일 수 있겠으나,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가 실제로 존재한다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시의 내용과 그에 따른 정황을 화자의 입장에서가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비록 과학자는 인간성이 실체로써 존재하며 그것을 추출할 수 있다 말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는 그와 같은 인간성의 실체를 포착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화자의 진술 속에서, 그가 가진 믿음 속에서 관측 불가능한 대상으로서 포착될 수 있을 따름이다. 오히려 이 시에서 인간성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그의 목소리와 태도, 감정의 분출을 통해서이다. 이것들은 모두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성이라는 중핵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우리가 과학자의 인간성을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 부산물을 통해서라는 점에 주목하자. 이는 과학자가 제시하는 실체로서의 인간성, 존재의 중핵이 부산물적인 외관에 의해 산출된 것임을 의미한다.

  과학자의 태도를 보다 정밀하게 접근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이 지닌 목소리와 태도, 감정의 분출 따위는 실체로서의 인간성이라는 중핵이 만들어낸 부산물에 불과하다. 인간성이라는 중핵은 이러한 부산물의 외관 너머에, 추출 가능한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 중핵을 마주하는 것은 추출된 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외관에 불과한 부산물들을 통해서이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시에서 그러한 실체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부산물이라는 외관이 만들어낸 외관의 외관, 초감각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과학자는 그러한 중핵을 부산물의 요소와 관계없이 단독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추출은 영원히 실패하게 될 것이다. 외관 너머에 사물의 진정한 실체가 있다는 믿음은 바로 그러한 외관에 의해 생산된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강성은과 신해욱의 시적 통찰은 포스트-휴먼의 조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지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인간 존재를 상정함에 있어 ‘온전한 자아’ 혹은 ‘진정한 자아’의 존재를 가정한다. 우리의 삶과 현실이 지금과 같은 것은 현실이라는 맥락이 우리의 온전함과 진정성을 훼손시키거나 그것에 가닿을 수 없도록 가로막기 때문이라 오인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와 같은 실체로서의 온전함이나 진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외관, 즉 목소리와 태도와 감정의 분출 등의 부산물들에 의해 구성된 환영에 불과하다. 외관 너머에 객체의 진정한 의미와 관계가 있으리라는 상상은 단지 외관이 만들어낸, 재배가에 의해 구성된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진정한 실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부산물들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의미는 부산물적인 외관을 통해 구성된다. 포스트-휴먼에 대한 논의에 있어 ‘탈(脫)’ 인간을 강조하는 것은 그와 같은 외관 너머에 실체가 존재하리라는 환영에 입각한 태도이며 인간을 벗어난 자리에서 우리가 진정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無)일 따름이다.6)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종래의 포스트-휴먼을 위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규정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일련의 환상을 통해 구성된 픽션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예컨대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에서 전제하는 비(非)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포스트-휴먼 담론을 통해 제기되는 탈중심적 입장이 사실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존재의 양태라면 상황은 어떻게 뒤바뀌게 될까. 그렇다면 인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의도와 달리, 우리가 이미 성취한 손 안의 진실을 외면하는 태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강성은의 시가 보여주듯 태초부터 완전한 인간 존재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인간은 상처를 통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면, 혹은 신해욱의 시가 보여주듯 인간성의 실체란 것이 단지 외관을 통해 구성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인간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다시 규정하기 위한 관점의 전환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4.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 : 조건들에 대한 거절


  물론 많은 수의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형상은 자연과 문명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는 데카르트적 인간 모델에 가깝다. 자연에 대한 권리를 소유한 존재로서의 데카르트적 인간 모델은 오직 유일하게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비-인간 대상에 대한 착취의 권한을 지닌 것처럼 묘사된다. 비-인간으로서의 대상들은 오직 객관적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일종의 기계로 간주되며, 오직 인간만이 법칙의 예외로서 존재하며 그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7)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한 문제가 바로 이와 같은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적 배치 속에서 자연에 대한 권한을 소유한 인간 문명이라는 전제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인지하자면, 그러한 인간 형상으로부터의 탈피는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그러한 인간 형상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인간의 형상은 과연 무엇인가. 다른 객체들과 동등한 권리와 위상은 지닌 인간의 형상? 혹은 자연에 대한 권리를 그 자체의 객체에게 양보함으로써 특권적 권리를 내려놓은 인간의 형상? 하지만 이러한 상상들은 그 자체로 ‘포기’의 제스처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특권적 형상으로부터 기초하고 있지는 않은가. 더불어 그러한 ‘포기’의 제스처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엇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가. 인간에 의해 촉발된 사태 앞에서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포기’하는 제스처는 과연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의견은 객체 중심주의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촉발된 것이기는 하다. 객체 중심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에서 벗어나 다른 객체들과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새로운 관계망을 그려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는 데카르트적 인간 모델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구심은 남는데, 그러한 관계망 속에서 인간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실천을 행하는 것은 여전히 특권적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생각해보자면 우리가 마주한 범지구적 문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 ‘포기’의 제스처뿐일까? 오히려 그러한 특권과 그에 따른 책임을 무게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재 봉착한 문제에 대해 사태의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은 아닐까? 예컨대 인간을 객체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유함으로써 그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객체의 종적 차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제스처가 포스트-휴먼에게 요구되는 조건인 것은 아닐지 뒤집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종적 차이를 이해하고 그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적어도 현재와 같은 정치경제적 조건 하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유의 전환과 그에 따른 선택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강요되는 선택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단호한 거절이 필요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존의 정치경제적 구조와 그것을 구성하는 조건들에 대한 눈가림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보다 세세히 파악하고자 하는 시선이다.

  여기에 대해 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 문학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 가운데 일부를 돌출시켜 본래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낯설어지게 만드는 것을 형식적 방법론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존의 조건들 속에 배치된 대상의 익숙함을 부러뜨림으로써 대상이 가진 섬뜩함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행숙의 「다른 전망대」라는 시는 문학이 지닌 방법론의 효과를 적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저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를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앉은 까마귀를 다른 전망대라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당신의 전망대가 무너졌다고 탄식하기로 합시다.

  한 그루 나무가 뿌리째 뽑히면, 얼마나 많은 눈동자들이 한꺼번에 눈을 감았는지 온 세상이 다 캄캄해졌습니다.

  숲이 불타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활활 타고 있습니다.

  불이라면, 불의 군주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따라 서울의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불빛에 도취한 연인의 독백이 독재자의 것처럼 느껴져 나의 사랑이 무서워졌습니다.


  김행숙, 「다른 전망대」, 「1914년」, 현대문학, 2018.


  위의 시에서 화자는 대상이 지닌 기표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눈앞에서 익숙하게 벌어지는 현상들을 낯설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낯설어지기의 기법은 현상이 지닌 의미를 기존의 맥락 속에서가 아닌 새로운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구성되는 맥락 역시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한에서 이러한 낯설어지기의 구조는 탈-인간주의적인 것 혹은 객체들의 고유한 자율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에 가깝다. 이렇게 기표를 치환하는 행위만으로도 현상은 다른 의미를 돌출시키며, 인간은 그러한 의미 속에서 익숙한 대상이 섬뜩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나타나는 화자의 진술이다. 기존의 조건들이 형성한 언어적 맥락 속에서는 파악될 수 없었던 요소가 식별되는 이 경험은, 우리에게 익숙한 체제 속재 내재된 실재에 대한 지식과 여기에 내장된 섬뜩한 공포를 겨냥한다.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이 기존의 사유 체계와의 단절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존재론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해답은 탈-인간중심주의에 있지 않다. 오히려 위의 시가 겨냥하고 있듯, 새로운 존재론적 사유를 위한 해법은 인간적인 것–언어를 통한 새로운 맥락의 창출에 있다. 그것은 언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적이며 특권적이다. 바로 이 요소, 언어를 통해 새로운 맥락을 구축할 수 있다는 문학주의적 관점은 그 자체로 인간이 지닌 고유한 종차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논의에 있어 고수해야 하는 것은 탈-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언어적 존재라는 종적 특성에 대한 숙고이다.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것은 “까마귀”를 “까마귀”라 부르는 언어적 태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계속해서 “까마귀”라 부르며 특정한 의미를 산출하게 만드는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벗어나 새로운 명명과 호명을 반복할 때, 우리는 충분히 인간적인 한계 내에서도 새로운 방식의 사유를 도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포스트-휴먼을 위한 참조점은 비-인간존재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인간적인 요소, 언어적 존재라는 바로 그 특권적 지위에 존재한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이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구관조 씻기기」, 믿음사, 2012.


  황인찬의 시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은 우리가 지닌 언어가 어떻게 사유를 전환시킬 수 있는가를 ‘백자’라는 대상의 의미 변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이는 김행숙이 「다른 전망대」에서 시도한 기표의 전환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황인찬이 보여주는 것은 기표의 반복 속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전환이다. 최초의 구절에서부터 나타나는 ‘백자’는 시의 모든 연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데, 이렇게 제시된 백자는 각 연에서 시어를 둘러싼 시어와의 관계성 속에서 거듭 의미가 변화한다. 존재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 있던 객관적 사물로서의 대상은 이윽고 주체의 호명에 응답하지 않는 대상으로 그 의미가 전환되며, 이윽고 주체의 현실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대상으로서 그 의미가 변화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주체의 관점이 변화함에 따라 대상은 객관적 사물이 아닌 주체의 외밀한 대상으로 전환된다. 대상을 둘러싼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대상은 새롭게 규정되며, 이는 주체에게 있어 대상과 맺어질 수 있는 관계의 양상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전제 속에서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가능성의 지점을 가리킨다. 예컨대, 포스트-휴먼을 위해 우리가 시도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조건 속에서,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이 지닌 명징함과 익숙함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대상을 새로운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단지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대상이 지닌 의미는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이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전제가 인간 존재에 대한 머무름과 벗어남의 측면이 아니라 배치의 문제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배치의 문제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의 의미와 그것의 고유성이 경제정치적 조건에 의해 배치된 기표들과의 관계성으로부터 산출된 픽션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탈’-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의 양태와 그것을 결정짓는 조건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그러한 조건에 대한 변화를 통해 얼마든 다른 의미를 지닌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포스트-휴먼을 위한 담론이 인간이 직면한 현실의 문제에 대한 대안이라는 목적의식을 상기할 때 보다 명확해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특권적 지위를 받아들이며 그 지위를 구성하는 요소를 식별해내는 능력이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적 존재라는 사실 자체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변화란 바로 이러한 특권을 활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인간이 지닌 특권에 대한 거부는 인식론적 전환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사물의 익숙한 배치, 그러한 배치를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거부이며,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포스트-휴먼이 지시하는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5. 포스트-휴먼을 위한 조건 : 인간으로서, 인간으로써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결정짓는 조건들을 인식하고 그것이 유일한 인간의 조건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러한 조건으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조건을 창출할 수 있을까. 이를 김행숙과 황인찬의 시적 태도로부터 찾아본다면 필요한 것은 전환과 반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전환하고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를 둘러싼 배치들, 그러한 배치를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해 사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인간은 많은 게 필요해서 장소를 만들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은 지옥에 사는 사람을 보지 못해서

  세 번 잘못을 하면 마음에 총성이 울린다고 낮게 명령하는 소리를 전하고 있다.

  살아서 나의 불행을 빼앗고 있다.

  자, 아는 대로 말합니다. 어젯밤에는 왜 경계하지 않았는지.

  땅은 꽁꽁 얼어 있었으며 삽이 들어가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새로운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야만 했다.

  당번은 책에서 보았던 온갖 주의를 떠올렸다.

  그는 마음에 드는 단어가 있을 때마다 지침서 귀퉁이에 적어 두는 습관이 있던 것이다.

  어제 적은 단어. 바다 천장, 발광 구름, 노역, 비호, 굴착기.

  주의는 없었다고 당번은 생각한다. 그는 가장 증오하는 주의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인종입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고? 당번은 지침서 3장 1번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당번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지침서는 귀퉁이나 겨우 쓸 수 있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은 지침서 내용을 모두 확인하였고 숙지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모든 지침서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당번은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을 경계하고, 지키는 것인지는 지침서에 나와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어디에서든 가장 극명하게 보이는 것이 적이고, 그들에게 자신도 적으로 보일 뿐이라서

  땅을 파고 있다, 승패와 무관하게, 자유에 복종하는 자유민이 되어 가고 있다. 잘못은 우리 모두의 준칙이니까.


  - 이서하, 「모르는 지침서」, 「진짜 같은 마음」, 민음사, 2020.


  이서하의 시 「모르는 지침서」는 인간을 둘러싼 사물들의 배치와 그것을 결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할 뿐이지 앎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한 조건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익숙하게 제시되지만, 그러한 익숙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조건들 그 자체에 대한 사유를 멈추고 만다. 그러한 조건들은 실질적이고 명시적인 인간의 필요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정작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필요는 망각된 지 오래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가장 광범위한 조건에서 식별할 수 있는데, 최초의 필요로부터 탄생한 체제는 더 이상 필요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본의 증식을 위한 자체적인 확장으로 자신의 목적을 전환한다. 이서하의 시에서 나타나는 “지침서”라는 표현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조건 짓지만, 정작 그 “지침서”에는 그러한 조건의 이유도, 목적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러한 익숙함에 속아 자신을 둘러싼 조건과 지침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 개념에 “복종하는 자유민”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하여 파국에 점차 가까워지는 인간의 존재 양태를 이서하는 “잘못은 우리 모두의 준칙”라 표현한다.

  이는 우리가 속류 객체 중심주의를 비롯한 탈-인간적 태도에서 거듭해서 만나게 되는 증상과도 같다. 우리는 우리를 규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은 자유에 복종하는 자유민이라는 역설처럼,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서 벗어나라는 준칙에 복종하는 인간이라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다른 존재마저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유하는 역설이다. 우리가 기존의 사유체제와 단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탈-인간적 자세가 아니라 우리를 규정짓는 조건들에 대한 앎이며, 그러한 조건들이 인간을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이서하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이것은 인간에 대한 유일한 지침이 아니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지침의 허구성과 내적인 불일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익숙함이 만들어내는 무결성에 대한 환영 너머로 체제의 불완전성을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을 반복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이다.

  이서하의 시가 우리가 놓인 조건들에 대해 사유하며 그것이 가진 속성이 익숙함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지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김현의 「생명은⚛」은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을 새롭게 창출해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름을 이해하기 위해

  뽀뽀한다


  뽀뽀함으로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생명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면

  입술이 넓어지고 좁아진다는 것을

  공부한다


  공부할 때

  생명은 이런 숨을 쉬는구나

  처음 느끼고


  생명에는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어야 하는구나

  배워서 알지 않는다


  숨구멍이라는 말을

  콧구멍이 아니라

  입술의 구멍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뽀뽀


  아가와 검둥개와 단호한 돌

  술에 취한 사람과 내몰리는 노동자들과 투석꾼들


  입술을 찾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같다


  입술을 쑥 내민다

  입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과 나는

  원에서 태어났고


  입술소리로 한평생 진실을 읽는다

  뽀뽀의 순리


  생명은 뽀뽀함으로 가볍다


  우리는 그 길로 사람을 이해하므로

  생명의 첫 지름을 깨우친다⚛


  - 김현, 「생명은⚛」, 「입술을 열면」, 창비, 2018.


  ⚛ 처음 그가 첫 사람의 입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첫 사람은 그 숨을 코로 내쉬었다. 그 일이 그 둘이 이룬 첫 노동이었다. 첫 연대였다. 첫 역사였으며, 처음부터 좋은 일이었다.

  ⚛ 생명 있는 것이 생명 있는 것과 입을 맞춘다. 가장 진실한 승리를 말한다. 오늘도 4월 16일입니다. 호흡한다. 호흡하는 인간으로서 믿음이 있다. 우리는. 지금 서 있는 시간으로부터 더 먼 시간까지. 떠오를 것입니다. 가라앉는 인간이기를 주저함으로써 생명은 생명에게 입술을 내민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규정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뽀뽀함으로/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고 답한다. 이때 “뽀뽀”를 한다는 행위는 대상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상호적인 규정을 가능하게 해주며, 개인이 지닌 인식의 범위를 보다 확장시켜주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뽀뽀”를 은유로 받아들이느냐 혹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느냐와 관계없이 이와 같은 행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짓는 것이 기존의 정치경제적 조건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의해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상상이다. 이러한 상상은 타자성을 드러내는 시어들, 계층적 분류를 나타내는 시어들을 통해 암시되는 관습적인 분류와 격차, 이에 따른 위계를 거부하는 것과 상동적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규정이 오직 정치경제적 조건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다.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은 앞서 제기한 바와 같이 언어라는 일반적 요소를 통해서도 가능할 수 있으며, 위의 시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존재의 직접적 접촉을 통해서도 가능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조건이 경제적인 위계와 정치적 입장 차이를 통해 존재를 규정하며 식별 가능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면, 김현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접촉은 판단이 아닌 이해와 믿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변화된 조건 속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시도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인간의 행위 일반의 의미 변화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관점이 있기에 노동은 상품 생산을 위한,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한 의식적 행위라는 기존의 의미에서 벗어나 사람의 입으로 숨을 불어넣는 창조적 행위로 탈바꿈하게 되며, 인간은 침잠하는 자기 존재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창조적 존재로 규정된다.

  예컨대 이 시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인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인간을 반복하는 사례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규정짓는 조건에 관여할 수 있으며, 조건은 오직 근거에 따른 판단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이다. 또한 이와 같은 사유는 인간을 규정짓는 초월적인 외부적 타자를 요청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 일반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상상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속류 객체 중심주의와도 구분된다. 이러한 전제가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다시금, 인간이 언어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규정할 수 있는 특권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스스로에 대해 규정할 수 있는 특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실에 덧붙여 인간이 지닌 특권적 지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자. 위에서 언급하였으나 세세히 밝히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모든 사태가 인간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문제는 인간에 의한 것이며, 그러한 한에서 문제는 인간의 한계 바깥이 아니라 그 범주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시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사태의 원인이라는 특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녀야 하는 책임이다.


  세계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세계를 원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는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창조자는 자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두두 너의 시간이 있는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내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서 함께 걸었을 뿐인데. 늙은 두두. 썩은 두두. 네가 차에 치였을 때 넋이 나간 채 들은 말. 주워, 네 거잖아. 실수와 잘못. 네가 모를까 봐 잘못은 못하고 저주를 하고 있다. 악마가 찾던 몸이 당신이길. 네가 죽는다면 악마에게 네가 했던 말을 있는 그대로 할 것이다. 주워, 네 거잖아. 빨간 지렁이. 실수는 예측할 수 없다. 잘못은 실수와 반대로 작용한다. 낙엽을 모조리 먹어 치워서 길이 깨끗해졌군? 저 자그마한 동물을 잡아다가 청소를 시키자. 영 못하면 낚싯밥으로 팔아 버리면 되지 뭐가 문제야. 권력자. 문제는 유추하면 크게 보인다. 선한 것을 믿는 것은 악한 것을 믿는 것과 같은 사람이 쓴 대본 같다. “……권력은 나의 것이고 이 사태에 대한 원인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사태 또한 나의 것이다.”* 다른 입장. 믿음은 어디 가서 부정하나. 그것은 과연 좋은 소재였고 제작에 공을 들였으나 연기를 할 만큼의 진심을 아니었다. 언제나 결론이 문제였다. 결국엔 존재론으로 귀결됐기 때문에. 출생. 나는 버려졌으나 버려지지 않은 것과 같을 것이며 낳은 것이 아니지만 낳은 것과 같이 식탁에 오를 것이다. 축하받기 위해 인간이 가장 많이 낭비하는 것. 고마워. 주인공은 소비하기 위해 거기서 발생하는 외부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 선물 상자에 묶여 있던 리본 하나까지도.


  - 이서하, 「있는 그대로」, 「진짜 같은 마음」, 민음사, 2020.


  * 한나 요나스, 「책임의 원칙」.


  위의 시에서 화자가 한나 요나스를 인용하며 강조하는 것은 사태는 사태의 원인을 가지고 있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재난에 대한 책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와 같은 재난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태의 해결을 인간 바깥에서 탐색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그러한 원인의 제공자로서의 인간 자체에 대한 재탐색의 과정이다. 인간, 그것은 사태의 원인을 소유한 자이면서 스스로를 규정짓는 조건들에 관여할 수 있는 자이며, 언어적 존재라는 특권적 지위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객체들의 배치에 관여할 수 있는 적극적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종차에 눈감음으로써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속류 객체 중심주의와 대별되는 자세로, 오히려 인간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적극적 승인을 요청한다. 필요한 것은 세계의 중심에서 물러나는 자세가 아니다. 우리의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것이며, 그러한 통감으로부터 실천적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포스트-휴먼의 유일한 정의이며, 인간은 바로 그러한 한에서만 마주한 재난 사태로부터 가능한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와 같은 책임을 수행할 수 있을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돈 룩 업>에서 나타났던 정치적 요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으므로 그 책임 또한 인간의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 외의 것들은 오직 불필요할 따름이며,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책임에 부응하기 위해 그 밖의 가치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와 같은 태도가 전체주의적이며 교조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태를 소유한 특권적 존재로서 그러한 태도를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태도가 전체주의라는 사실도, 그러한 태도로 인해 민주주의적 가치가 손상될 수 있다는 지점도 아니다. 직면한 재난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법한 태도는 바로 대의를 위한 전체주의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영화에서 민디 박사는 아동용 교양 프로그램에 출현해 자신의 분노를 참지 않고 표출하며 인민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얘들아 부모님에게 전해, 올린 대통령과 이셔웰 회장은 사기꾼이라고! 그들은 파시스트라고!” 민디 박사의 이와 같은 분노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핵심을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표현한다. 문제는 전체주의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사태를 규정하길 원하는 속물들이라는 사실 말이다. 과거의 파시즘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을 통해 권위주의적인 집권 체제를 구성하였다면, 현재의 파시즘은 정치경제적 조건을 기반으로 삼아 권위주의적인 집권 체제를 구성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며, 현실의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디 박사의 분노처럼, 정치경제적 조건에 함몰된 속물들이야말로 진정 파시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이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다가온 파국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결시켜 총동원해야 한다는 발상이 얼마나 쉽게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전유되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목격해 왔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 전체주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대의를 위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라는 주장 속에서, 독재자가 그러한 대의를 자신의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전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입장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전체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체제 밖에 스스로를 예외자로 위치시키려는 구체제적 망령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전체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존재도 체제 바깥에 예외로서 존재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체제 내부의 모든 존재는 오직 대의의 실현과 사태의 해결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

  나는 이것이 포스트-휴먼의 진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포스트-휴먼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기존의 사유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사유방식을 지닌 인간 존재에 대한 요청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보자. 이에 대한 적어도 한가지의 대안은 우리가 실현하지 못한 대의를 위한 전체주의적 단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역사이다. 그와 같은 실패를 새로운 조건 속에서 다시금 반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요청되는 포스트-휴먼의 자세이지 않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포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적 지위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조건 하에 개념 지어진 자유에 복종하는 관습적 자세이며,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이 지닌 특권적 지위와 그로부터 말미암은 고유한 책임에 대한 각성인지도 모른다.

  이전 세기의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말했던 것을 전유하여, 이제는 다음과 같은 외침이 필요하다. 만국의 인간이여, 단결하라. 구체제에 따른 정치경제적 조건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이 모든 사태가 ‘나’의 것임을 받아들여라.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재발명하라. 이것이 지금 사태의 해결을 위한 본질적인 인간학이며, 사태를 소유한 자가 마땅히 치러야 할 책임으로써 우리에게 요청되는 포스트-휴먼의 핵심이다.

  • 1) 그렇기에 영화는 굴절된 혜성의 의미와 실체적 위기 앞에 두 부류로 나뉜 인류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스트 룩 업(Just Look Up’)과 ‘돈 룩 업(Don’t Look Up)’이라는 두 부류인데, 이들은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심볼로 활용한다. 여기에는 세 번째 부류인 중도파 또한 등장하는데 이들은 위와 아래를 동시에 가리키는 화살표(↕)를 자신들의 심볼로 사용한다. 이들은 첨예한 의견 대립 속에서 평화와 화합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실체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 상품으로, 변형된 형태의 ‘돈 룩 업’에 불과하다.
  • 2) 그레이엄 하먼, 김효진 옮김, 「예술과 객체」, 갈무리, 2022, 76쪽.
  • 3) 비인간을 재현하는 최근의 소설과 그에 대한 해석의 방식에 대해 이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물론 최근 소설에 비인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점이나 비인간을 재현하는 방식에 깊은 윤리적 고민이 담겨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분석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신유물론을 경유하지 않아도, 심지어 일정한 수준을 갖춘 휴머니즘의 시선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비평이다. ” 이소, 「나의 아름다운 사물들」, 「자음과모음」 가을호, 2023, 282쪽.
  • 4) 레비 R. 브라이언트, 김효진 역, 「객체들의 민주주의」, 갈무리, 2021 참조.
  • 5) Slavoj Žižek, Incontinence of the Void, The MIT Press, 2019, p.41.
  • 6)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인간성이라 지칭하는 것이 비인간적 대상을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된 가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이 이분법적 분류는 인간을 중심항으로 놓음으로서 구성된다는 점에서 이때에 가정되는 비-인간적 대상 역시 인간이라는 개념에 오염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과 완전하게 구별될 수 있는 객관적 사물의 양태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 지점을 그려내기 위해 가정한 경계선에 불과하기에 이미 너무나도 인간적인 대상이다. 이것은 속류 객체 중심주의가 대상을 그려내는 방식과도 동일한데, 이때 그려지는 객체의 모습은 ‘그 자체’로 다뤄지지만 실상은 인격화되고 의인화된 사물의 양태에 불과하다. 인간 중심주의의 환영에서 벗어나 객체들의 자율적인 관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지나치게 인간적인 시도인 셈이며, 그러한 탐색을 시도하는 관측자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다.
  • 7)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문예출판사, 1997, 216쪽 참조.

추천 콘텐츠

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월간 현대시 류수연 서윤후나쁘게눈부시기어둠양안다이것은천재의사랑불안 2025
이은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올 때

동물의 사육제 김기형의 다섯 편의 시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것은 ‘사육제’였다. 각각의 시에는 동물의 형상(양, 강아지, 새, 잉어)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동물이 아니거나 동물인 가면을 쓰고, 털로 뒤덮인 날짐승의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을 양껏 뜯어 먹는 사육제. 얼굴이라는 외피를 감춤으로써 평시에 보이지 않던 내면을 폭발시키는 행위, 겉이 아닌 속을 먹는 행위가 갖는 의례적인 성격을 떠올려보면 그러한 단순한 연상이 영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가면의 힘을 빌려 존재의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오랜 속성을 전복시키고 그 운행을 잠시나마 뒤얽어보는 데서 오는, 천진하기에 파괴적인 사육제의 위력이 김기형의 시에서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소설에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지만 명료한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1) 민낯과 전혀 다른 속성을 띠는 듯하지만 민낯과 더불어, 혹은 민낯과 분리됨으로써 그 주인을 거꾸로 규정하기에 이르는 가면의 신비로운 성질은 화자와 독립된 존재로 등장하면서도 화자와 무관하지 않게 운용되는 동물들이 시 속에 존재하는 양상, 시로부터 행동하는 양태를 헤아려보게 한다. 시인의 첫 시집에서 인상적이었던 권두시 「자두 f」를 떠올려보면, 봉지가 뜯어져 “계단을 타고 다 터지면서 나타”난 자두가 “몸 전체로 힘을 주”고 “안으로 근육을 일으키”며 일거에 분출시키는 폭발적인 ‘힘’, 삼천원어치 자두를 봉지에 담아 어딘가로 보행 중인 화자와 완전히 무관한 운동성을 발산하며 자두와 화자의 역능이 역전되는 찰나를 포착하고 그 안으로 무한히 쪼개어 들어가고자 하는 시인의 집요함을 발견할 수 있다.2) 이 집요함은 손을 없게 하고 손을 “손이 아닌 것”3)으로 떼어내고자 하지만 완전히 그리할 수 없는, 손과 ‘나’의 관계 양상을 그야말로 물고 늘어지던 등단작 「손의 에세이」에도 선명한 자국으로 찍혀 있다. 한 마리 맹수처럼 으르렁대는 자두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손의 운동성은 금방의 비유가 상기하듯이 지극히 동물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약동하는 생의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서 인간 사회의 시계(視界)로는 온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흡사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를 생성하는 동물의 움직임은 인간 민낯의 대행자이되 정물에 머무르는 가면의 역치를 비상한 수준으로 끌어올렸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이기도 할 테다. 오래전 사육제의 가면들이 다양한 동물의 형상을 꾸며내었던 것도 그러한 상상을 조형적으로 추구한 결과였을 테다. 「공사」에 등장하는 ‘사람’과 ‘개’를 살펴보면 김기형이 그리는 존재와 그 대행자의 관계 양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공사로 무너지고 주저앉아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지붕 없고 문 없는 집”에 살던 ‘그 사람’은 이제는 집의 “속살이 어떻게 잠들어 있는지 다 보”이는데도 “저 없는 문 열고 저 없는 문 닫”으며 거주자의 관성을 섬기고 있다. 반면 그가 키우는 ‘개’는 “화도 냈다가/꼬리를 흔들며 아저씨 목장갑에 털도 부비다가/어느 방으로 가야/그 사람 있는”지, 베란다는 어디였고 사료가 있던 곳은 어디인지, “꺾이고 내려앉은 집안”을 곧이곧대로 탐색한다. 그 사람은 분명 개의 주인이고 개 또한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할 테지만, 눈앞의 현상에 즉물적으로 맞닿은 개와 달리 그에게는 한꺼풀의 관성과 관례가 입혀져 있다. 그는 이미 밖으로 훤히 다 보이며 안이 곧 밖이 되어버린 “집 밖,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와”서야 개의 이름을 부른다. 안팎이 뒤집힌 집의 민낯을 실컷 부비고 온 “개의 혓바닥으로 얼굴이 닦이고”(강조는 인용자)서야 “얼마나 오래 비워야 돌아올 수 있을까” 한마디 한다. 표지판 위 동물-대행자의 능동, 대행을 부과한 인간-주체의 피동이 시 속에서 얽히며 일으키는 주객의 역전은 표면상으로는 주체의 무기력으로 드러난다. 「한 가지」에서 세계가 기표로 이루어져 있음을 규정하는, “설명이 너무 크”게 박혀 있는 “표지판 위로 새는 그저 앉을 뿐”임을 일별하는 화자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것이 묻어 있다. 기표의 의미는커녕 그 존재조차 모른 채 기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새가 표지판 위에 앉기도 하고 표지판 위를 날기도 하며 보이는 종횡무진은 화자가 “이런저런 자세로 (…) 가장 잘 맞는 도형처럼/콕 박”힌 지하철 안에서 각자 알아서 도형이 되고 서로에게 형틀이 되어 맞춰지는 사람들의 일사불란과 대비된다. 「자두 f」의 ‘자두’에 상응하는 “귤 하나”가 “주황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소파 아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것에 화자가 마음을, 시선을, 즉 “영혼이 가는 길”을 빼앗길 때, 거기에는 어떠한 규정도 질서도 없이 생 그 자체에 닿은 운동성을 향한 경애가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의 피동은 대행자의 능동에 앞서는 것이자 다분히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귤이 떨어져 바닥을 구르기에 앞서 “식탁 위로 귤 하나를 굴리”는 “나”가 선행한다. 주체의 피동을 대신 드러내 보여주는 귤의 운동이란 주체의 결행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한 가지도 등에 업고 가지 않”는 새와 “한 명도 새처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견주는 것도 어디까지나 화자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심지어 화자는 “날아갈 때는 가르는 창처럼 내 마음을 가르”는 새들조차도 날기 전에는 “기우뚱하게 걷”는다는 것을, 즉 중력의 예속에 놓여 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처럼 주체의 피동이 ‘능동의 피동’임은 “그 옛날 목동처럼” 양들을 대하는 「양들에게 고백하기」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한 마리의 울음이 얼마나 빠르게 번질 수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너희를 지키고 있지. 양과 나의 언덕처럼 드높은 우정을 하늘이 알고 있다. 양들이 내 앞에서 잠도 자고 이갈이도 한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온 일.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네. 나 너희에게 빚진 잠을 갚으러 왔다네. ― 「양들에게 고백하기」 부분 잠이 오지 않으면 양을 세는 출처 불문의 관습이 가리키듯이 양은 잠으로 빠져드는 행위의 대리자인바, 화자는 양들에게 잠을 ‘빚’지고 있다. 그런 동시에 화자는 “양들이 이리 떼의 두려움 없이 잠들기”를 원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는 목동이기도 하다. 양들의 목동을 자처하기에 앞선 그의 삶에는 “죄 많은 자가 죄 지은 자를 (…) 두들겨” 패는 폭력에 관성적으로 동참했던 시절이 놓여 있다. 당시 그는 “얼굴을 까고 벗고 도마 위에 올려두었지만”, 참회를 스스로 대리하려던 화자의 노력은 어쩐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양들이 사는 들판으로 도망쳐온 것이 민낯을 벗겨 도마 위에 바치는 것보다 속죄로서 유효한 지점이 있다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조급하게 대리하기보다 양-대행자의 평안을 수호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화자를 비롯한 인간에게 주어진 지난한 “숙제”이기 때문일 테다. 죄와 폭력으로 얼룩졌을지라도 기왕에 몸을 담근 기표의 세계로부터 얼굴을 까 벗기듯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으면서도, 양을 치듯이 기표 너머, 기표 바깥의 세계를 보살피는 일에 김기형은 발이 묶이고자 한다. 화자가 목동을 자처하는 일이 “세상을 등지지 않고 등지자고 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도망쳐온 세계의 도마 위에 여전히 무언가가 썰리고 있을지라도 양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주는 일은 무용하지 않아 보인다. 기표 바깥의 세계(시)가 기표의 세계(현실)에 대한 속죄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행은 그저 양들을 잠재우는 일처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민낯의 참회보다 훨씬 힘이 세다. 물속의 폭발 가면이 민낯은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하고 새로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숨죽여 지켜보면서, 가면 아래 민낯은 무엇을 도모하고 있을까.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민낯은 가면의 대행을, 민낯과 독립된 듯이 굴었을 때만 벌일 수 있는 난장을 가면의 뒷면으로부터 흡습하듯이 감지할 것이다. 민낯은 민낯과 가면 사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작은 틈을 매개로 눈과 코를 찡긋거리거나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자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대리자의 행위에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감응하고 있을 것이다. 민낯과 가면 사이의 좁은 틈을 하나의 세상으로 확장한다면, 이 감응은 결코 미세한 수준이 아니게 된다. 그 좁은 틈에서 벌어지는 일을 김기형의 시로 환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시인이 하는 일이란 기표의 세계와 기표 바깥의 세계를 매개할 뿐 아니라 그 지점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하는 일일 테니까. 「잉어가 와요」에서, 자신을 둘러싼 물(세계)을 모조리 삼켜 제 속을 물로 만들어버린 잉어의 형상은 두 세계를 매개하는 시인을 대신하여 새로 뱉어낼 세계를 뱃속에 저장하고 있다. 물을 삼켜 “불어 터진 입속에서 안으로도 밖으로도 가지 않고/둥둥 울리기만 하는 이명/메아리, 기척, 진동”을 머금은 잉어가 새까만 입을 벌린 채 “식탁을 덮쳐”올 때, 기표의 발화도 전달도 흩어지고 뭉개지는 그 뱃속 세계를 “감지”한 “우리”가 “침수하는 몸”이 되어 물속을 냉큼 유영하고자 할 때, 잉어는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잉어는 우리의 몸이 침수되기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아는 척하며” 화자가 쓴 문장을 제 속에 실어 “폭탄처럼” 터뜨린 뒤 부드럽게 뱉어낼 것이다. 나는 이후의 미래를, 조금 뒤의 목격을 아는 척하며 써요 꾹꾹 눌러쓰고 함께 하는 자들이라고 읽어요 맨 뒤의 문장이 잉어의 뱃속에 실려요 실려서 폭탄처럼 터져요 ― 「잉어가 와요」 부분 물속의 폭발은 그 파장과 파편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화시켜준다. 사육제의 난장이 의례에 불과하다는 사실 속에 용인되듯이 지금 이후의 문장, 여기 바깥의 문장이 당장에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격을 잉어가 삼켜낸다. 물로 채워진 잉어의 뱃속에서 터진 문장은 기표의 세계가 모르는 질서, 아직 만들어본 적 없는 형상으로 꿈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내려오지 않는 별들이 하늘에 무수한 것은/그곳에/지어졌기 때문”이듯이, 잉어의 뱃속에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처럼 “순서를 가지지 않고/멋대로 쓰”인 글씨가, “엎어진 물”에서 일순 드러나는 “형상”처럼 아직은 이곳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세미한 소리」). 시인이란 뱃속이 흡사 일찍 온 미래의 소용돌이와 같이 된 잉어를 도마 위에 놓이지 않게 연못에 잘 풀어놓는 이다. 가끔 수면 위로 올라온 잉어의 뻐끔거리는 입속에서 현실이 모르는 문법으로 그려지는 글씨들을 발견하고, 몇 마디 문장을 먹이처럼 던져준 뒤 다시 물속으로 돌려보내는 이다.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잉어의 뱃속에서 자신이 던져준 문장들이 소화되면서 나는 폭발음이 이따금씩 물의 저항을 뚫고 귓전에 닿을 때, 그 소리는 지극히 ‘세미’하지만 결코 미약한 것이 아님을 퍼뜩 알아차리는 이다. 먼 물속의 폭발을 제 발밑의 지진처럼 감지하는 일, 세계 너머의 난장을 대행하는 이들을 기르고 보살피는 일을 자처하면서 끈질기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가 김기형이다. 그는 그렇게 “불화도 분노도 없는 고요한 싸움”4)에 끝도 없이 매진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옮김), 「사육제(Carnaval)」,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9쪽. 2) 김기형, 「자두 f」, 『저녁은 넓고 조용해 왜 노래를 부르지 않니』, 문학동네 2021, 13쪽. 3) 김기형, 「손의 에세이」, 같은 책, 48쪽. 4) 안희연, 「기형의 시」, 같은 책, 120쪽.

월간 현대시 이은지 김기형사육제동물능동성폭발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세요.
  • 욕설, 비방, 혐오 표현 및 과도한 홍보성 내용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 운영 정책에 위반되는 댓글은 사전 안내 없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