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들 2024년 겨울호(제78호)
의미의 과잉과 시어의 탄생
과잉이라는 환상
자본의 흐름을 따라 구성되는 우리 사회의 특징적 면모들을 세세하게 따져볼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 ‘과잉’이라는 점은 틀림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성립의 역사적 과정을 돌이켜보아도 그 직접적 계기는 항구적 잉여의 발생이었다. 자본주의 이전의 경제 형태였던 물물교환을 보면 구체적 개인들의 생활 터전인 지역-공간과 경제적 삶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도입 이후 그 연결 지점이 단번에 끊어지게 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단절이 발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의 두 측면에서 각각 발생하게 된 잉여는 두 요인의 결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지금의 경제 영역이 물리적 범주만을 의미하지 않고 심리적·추상적 영역까지 포함된 것 역시 이와 연관되어 있다. 자본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필요를 넘는 잉여를 상상하고, 또 그것의 실현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과잉’은 이처럼 자본주의의 결과물이자 원인이며, 나아가 자본주의적 구조 그 자체이다. 인간적 삶의 조건들이 쉽게 무시되는 경제 구조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로 지속되는 모순이 가능한 것 역시 잉여 생산이 목표가 된 현실 속 개개인들의 내면에는 이미 ‘과잉’에 대한 환상이 현실적 목표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경제학이 자본주의 구조를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설명했다고 비판한 베블런(T. V. Veblen) 역시 ‘과잉’의 속성을 그 핵심으로 지적했다. 그는 먼저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유한 계급(Leisure Class)’의 소비 행위에 주목했는데, 이들은 일상적 필요의 범주를 초과하는 방식의 소비를 통해 스스로 구별적 지위를 가지고자 했다. 유한 계급은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로도 직접 알 수 있는 것처럼, 궁극적으로 ‘시간’을 소비하기에 이른다. 근대 이전의 ‘시간’이 선험적이며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신의 영역이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변모된다. 따라서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곧 노동과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여가 활동처럼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들이 유한 계급들만으로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을 포함해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는 가치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여전히 노동과 무관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소비는 필연적으로 노동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그 빈자리를 소비 활동으로 대체한다.
이처럼 자본의 속성에서 비롯한 ‘과잉’은 일종의 환상을 제공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가치 체계가 전복된 삶의 방식을 확산시켜 나간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잉의 양상은 매체의 발달과 상업 광고를 통해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 영역인 언어 활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잡음어’, 언어 과잉과 소통의 부재
언어의 과잉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언어의 기원에서부터 생각해보자. 정확한 언어의 기원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에 대한 많은 논의들은 대체로 실재에 대한 은유를 언어 발생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언어 소통 이전에 그 언어적 기호에 상응하는 특정한 가치가 선험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이같은 언어의 선험성을 두고 세계를 창조한 신의 흔적이라고 말한 사람은 피카르트(M. Picard)이다. 그는 이것이 바로 언어에 힘을 부여하고 또 인간은 그런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대의 언어는 이물질의 침입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 선험성을 상실하고 결국 특유의 치유력마저 잃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과잉 상태의 언어는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폭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영원하다’는 말의 한 사례를 통해 이해해보자. 앞서 확인한대로 이 말은 ‘영원(성)’의 선험적 개념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 말이 발생한 것은 곧 그 가치를 재현하기 위한 의도의 결과이다. ‘영원’이라는 기호를 발화한다는 것은 그것이 지칭하는 개념 그대로 인간의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명명으로 시작된 언어의 사용을 사건 그 자체로 봤던 아감벤(G. Agamben)은 이를 두고 ‘이름(nomen)’이 곧 ‘정령(numen)’이며, ‘정령’이 곧 ‘이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원’이라는 말이 광고에 사용되면서 개념과 언어의 기원적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된다. 당시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기업이었던 드비어스(De Beers)가 사용한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A Diamond Forever)”는 광고문구를 통해서 말이다.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단어는 내재하고 있던 선험적 가치와 결별하게 되고, 상품과의 새로운 결합 방식을 통해 그 의미를 무차별적으로 확산시켜나가게 된다. 그 결과 “(다이아몬드를 구입하지 않는다면)어떻게 두 달치의 월급이 영원할 수 있을까요?(How else could two months’ salary last forever?)”라는 또 다른 광고 문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 다이아몬드와 함께 유통되는 ‘영원성’은 필요를 넘는 소비를 오히려 절약으로 강변하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시장의 가치로 측정 가능한 사랑을 표현하는 의미로도 전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의 속성에서 비롯한 ‘과잉’이 언어를 거쳐 우리 일상에 미친 영향은 가늠조차 불가능해졌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매체의 발달은 소비 가능한 형태로의 언어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좋아요’와 ‘해시태그’로 대변되는 SNS의 확산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것과는 상반되게도 그에 대한 언어적 반응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데, 이때의 언어는 마트의 진열대에서 필요한 상품을 찾는 데 필요한 정도의 지시적 기능에 국한된 채로 그 생명력을 잃고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을 뿐이다.
실시간과 쌍방향의 차별점을 내세운 뉴미디어들이 기존의 미디어를 급속하게 대체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험적 가치와의 내재적 관계에서 멀어진 언어는 유통에 더 적합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잉-소비하는 물건들로 내면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는 것처럼, 과잉-언어의 사용이 진정한 소통과 대화를 이끌 수 없음은 물론이다.
설사 인간이 없을지라도 잡음어는 스스로 공간을 가득 채워버릴 기세다. 잡음어는 인간으로부터 튕겨져나와 인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그 상태로 독자적인 조직인 양 인간에게 작용한다. 오직 덩어리로서, 오직 질량만인 존재로서,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한다. 단지 정신의 하부구조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반사신경에만. (…중략…)
잡음어에는 자아와 상대방이 없다. 잡음어는 대화에 적대적이다. 하나의 잡음어에서 다른 잡음어로 저절로 옮아가며, 이때 자아와 상대방은 분리되지 않는다. 잡음어는 하나로 뭉친 덩어리와 같다. 그러나 자아가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하며, 뒤엉킨 덩어리로부터 강제로 급격하게 떨어져나오게 된다. 자아는 균형을 잃는다. 그리하여 자기 본위와 독재로 기운다.1)
피카르트는 이같은 가치 하락의 언어를 두고 ‘잡음어’라고 불렀다. 개개인이 정보의 발신자가 된 현대 사회에서 정작 소통 관계에서의 소외가 발생하는 언어 과잉 상황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한 진단은 없을 것 같다. 특히 아감벤 역시 동일한 지적을 한 것처럼, 소통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입법 장치들이 힘을 얻게 되면서 우리의 삶 전반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진다는 경고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 보인다.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의 과잉은 단순히 개인들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시, 이름을 바로잡다.
‘언어’에 초점을 맞추어 시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 글에서 먼저 자본의 과잉을, 그리고 언어의 과잉으로 인한 문제적 현실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내본 것은 시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문학의 영역에 그치는 ‘비현실적 행위’에 국한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잘 알려져 있는 『논어』의 한 부분을 떠올려보자. 잠깐 동안의 관직을 거친 후 자신의 뜻을 실현해볼 수 있는 군주를 찾아 다시 떠돌이 생활에 나선 시기의 공자와 그의 제자인 자로(子路)간의 대화이다. 제자로서는 중용된 이후 스승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무척이나 궁금했을 것이다. 이에 공자는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단언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정치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바로 잡는다’는 어떤 의미일까?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논어』를 더 살펴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여기에서는 벤야민을 경유해 보고자 한다. 역사적 유물론과 신비주의적 종교의 관점이 결합된 벤야민 특유의 사유 저변에는 ‘언어’에 대한 그만의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언어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언어를 수단이나 매개로 생각한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언어는 본질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언어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정확히 상응하는 정신적 본질 그 자체였다. 유대 창세의 이야기에서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했던 것처럼, 언어는 그 근본적 차원에서 분리되지 않고 있던 본질적 가치들을 발산시키는 ‘마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특성을 가진 언어를 두고 벤야민은 ‘이름언어(Namensprache)’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이름’은 언어의 핵심인 동시에 세계의 본질인 것이다.
공자의 눈에 혼란스럽게만 보였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목했던 ‘이름’은 이처럼 벤야민의 맥락 속에서 좀 더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이상적 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자연적 질서를 내포하고 있는 언어의 사용이 혼란스러운 사회를 회복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해가는 최선의 방편이 된다. 이를 위해 벤야민이 대상과 이름이 분리되지 않은 ‘이름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처럼, 공자는 일상 언어의 사용 환경 속에서 ‘이름’이 혼란되지 않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이야기 한 것이다.
일상어는 계속해서 전진하려 한다. 하나의 어휘는 다른 어휘들로 진행한다. 일상어는 전진을 통해서 생존하고, 말을 시작해야만 탄생한다. 시어는 본질적으로 이미 거기에 있다. (…중략…)
시어는 일상어 위로 펼쳐진 궁륭이다. 일상어의 역동성과 목적지향성은 그로 인해 제지된다. 시인이 “현장”언어를 시에 사용한다고 해서, 그의 시어가 “현실”에 더욱 격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시어는 시적인 말이 보유하는 완전히 다른 것의 영향을 받으며, 오직 그것으로 인해 “현실”에 격렬한 효과를 발휘한다.2)
피카르트 역시 ‘이름’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으로 시어를 강조했다. 시의 언어는 과잉을 본질로 하는 일상어와 다르기 때문이다. 시어는 일상 언어의 활동을 초월하고, 결국 언어와 분리되지 않았던 선험적 가치를 자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과잉된 현실의 거품을 꺼뜨리는 힘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현실의 말들이 잡음어로 전락해버린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시의 언어를 자각하는 일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같은 시어의 운동성을 두고 옥타비오 파스는 ‘마법적 가치’와 ‘혁명적 소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해해보자면 그것은 곧 개인적 차원에서 현실을 넘는 윤리적 가치를 감각하는 일이며, 사회적 영역에서는 공감과 연대를 통해 타자를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마이너스 언어
그렇다면 김언 시인의 시적 전략을 살펴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시인도 자신만의 언어 사용에 골몰하고 있지만, 김언의 경우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대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의미 구조의 재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특히 시집 『한 문장』(문학과지성사, 2018)에는 이같은 그의 시적 전략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갖는다. 먼저, 상징적 언어 체계로 유지되어온 방식의 해체가 그 첫 번째이다.
나는 슬퍼하고 있고 슬퍼지고 있고 슬프고 있고 그래서 슬프다. 사이사이 다른 감정이 끼어든다.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기쁨이 있고 환희가 있고 절망이 있고 분노가 있고 비굴함이 있고 순식간이 있고 나는 다 빠져나왔다. 다 빠져나와서 빠져 있다. 사이사이에 낀 찌꺼기를 빼내려는 노력도 빠져 있다. 한꺼번에 들어가 있고 조금씩 나오고 있고 구석구석 빠지고 있고 겁에 질리고 있다. 고뇌에 차고 있고 소름 끼치고 있고 해롭고 있다. 그것은 불안인가? 불안하려고 있다. 불안하고자 있다. 비참하고자 있고 참담하고자 있고 담담하고자 있었다. 그것을 슬퍼하고자 있는 사람에게 슬퍼하려고 있다. 슬퍼하려는 공간에 있다. 가득하려는 공간에 있다. 그래서 슬픈가? 나는 다 빠져나왔다. 다 빠져나와서 비고 있다. 죽은 것이 죽고 있다.
- 「있다」 전문.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어떤 상태와 결부시켜 보는 것이다. 이 작품의 도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슬픔의 상태는 곧 ‘나’를 말해주고 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시인이 제시하고 있는 첫 문장에서 ‘나는 ~ 슬프다’의 구조에 조금 더 집중해보자. ‘슬픔’이라는 어떤 상황도 사실은 현재 진행 중이거나, 이제 막 그 상황에 도달했을 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와 동시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상황이 비록 존재와 결부되어 제시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존재의 전부가 아니라 언제나 여러 복합적 맥락의 일부분 내지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슬퍼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사이사이 다른 감정”들이 얼마든지 개입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쁨, 환희, 절망, 분노, 비굴함’ 등 실제 여러 감정들이 개입된 이후 나오게 된 진술(“나는 다 빠져나왔다.”)은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했을 때 비로소 맥락 뒤로 가려지지 않은 ‘나’를 발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상황을 통해 존재를 주목했던 것만큼 우리는 그간 오해 속에서 의미를 받아들여 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다른 것들이 일체 개입되지 않고 실제 존재의 전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라 할 수 있는 ‘죽음’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있다’는 단어에 내재되어 있는 두 가지 속성, 즉 일정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적 속성과 어떤 것들이 실제 존재하는 상태나 발생 가능성을 말하는 형용사적 속성을 구별 없이 사용하는 아주 간단한 방식만으로도 발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존재+상태’ 또는 ‘제목+내용’의 공식처럼 오랜 시간 동안 강력하게 작용되어 온 인식의 도구들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언어의 문제로 전환된다. 물론, 안정적으로 답을 구할 수 있었던 맥락에서 벗어나 인과적 단계를 밟아 가고 있던 방향성에서 스스로 내려온다는 것은 막연한 두려움만 남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두려움이 정해진 답에서 벗어난 데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사실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의지야말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의지로 거기 있다. 거기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순전히 내 의지로 조종당하고 있다. 순전히 내 의지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순전히 내 의지로 기적에서 깨어났다. 순전히 내 의지로 눈이 내린다. 순전히 내 의지로 모르는 명단에 있다. 거기서 정착하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고 힘든 일인지는 순전히 내 의지로 모른다. 알아봤자 모르는 사람들이 순전히 내 의지로 들어왔다가 나간다. 순전히 내 의지로 기억되고 있다. 순전히 내 의지로 줄을 서고 멈출 수 없다. 순전히 내 의지로 기차가 온다. 순전히 내 의지로 버스를 출발했고 비행기는 멈춰 있따. 순전히 내 의지로 무관하고 무의미하고 무성의하고 어쩐지 축제 같다. 아침마다 오는 발기의 순간도 순전히 내 의지로 감퇴했다. 짜릿하게. - 「자유의지」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시종일관 자신의 ‘의지’를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작품의 내용에 서술되고 있는 행위들은 정작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순전히 내 의지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문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 안에서 ‘순전히’를 통해 강조되고 있는 ‘의지’는 오히려 자신의 작동이 가장 불가능한 상황과 맞닿아 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의지’가 일상적 의미에서의 해방을 촉구하는 하나의 오브제가 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의지’를 둘러싸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힘과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힘들이 부딪치면서 말 그대로의 ‘자유의지’로 변모된다. 가령 “내 의지로 조종당하고 있다.”는 문장에서 ‘의지’에 투영되는 힘의 방향과 “조종당하”는 힘의 방향은 서로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문맥상으로도 자신의 의지에 조종당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나)⇒ χ ⇐(조종)>처럼 ‘내 의지’가 전달되는 힘의 방향과 ‘조종’당하는 힘의 방향이 서로 맞부딪치는 그 자리에 힘의 공동(空洞)상태가 생겨나게 된다. 바로 이렇게 발생된 공간에 오브제로서의 의지 χ, 시인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이른바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것이다. 시 전체가 거의 비슷한 문장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이 작품은 ‘자유의지’를 무수히 내포한 다공성 구조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대상과 목적이 무화된 이 가능성의 구조물은 의도치 않았던 부정적 결과나, 또는 “기적”과 같은 일방적 우연 모두로부터 벗어나 “무의미하고 무성의(강조는 인용자)”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축제 같”은 “짜릿”함을 예비하게 된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차원에까지 이르는 맥락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언어의 해체와 더불어 시적 대상을 오브제로 만들기 위한 시인의 노력으로 인해 결국 언어 자체에 덮어 쓰여 있던 인식의 한계가 벗겨지는데서 오는 ‘짜릿함’과 다르지 않다.
인식의 한계를 자각하는 동시에 그것을 벗어난 ‘짜릿한 가능성’에 대한 주목은 일련의 예술가들에 의해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이 성립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전후 아방가르드적인 예술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상황주의자들은 자본과 결합된 ‘의미’가 스펙터클화 되어가면서 강한 위력을 행사하던 당시의 흐름을 비판하기 위해 이같은 ‘가능성’을 제시했다. 세계 전체가 자본주의적 교환질서의 체계로 급속히 일원화되어 가던 시기에, 그들은 일방적 맥락 속에 머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의 계기에 따른 환경을 구축하고 또 이것을 좀 더 상위의 열정적인 상태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의 계기에 따른 환경’, 즉 ‘상황’의 구축이며,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인식범주를 지속시키는 ‘맥락’과 결별하는 한편, 특정한 행동의 개입이 가능한 운동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믿었다.
김언의 작업이 이들의 모습과 상당한 친연성을 유발시키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살펴본 것처럼 의미의 위계에서 벗어난 각각의 문장들이 자유롭게 접속 가능한 네트워크 형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황주의자들의 실험은 대부분 구체적인 (도시)공간을 대상으로 했는데, 개인의 구체적 삶과 유리된 채 비대해져가는 도시의 구조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참여와 실험적인 놀이의 가능성을 제안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의 공간 탐사 방법을 ‘표류(dérive)’라고 불렀던 것처럼 김언의 시 역시 우리들을 문장들 사이에서 ‘표류’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시간과 문맥이 결합된 인과적 흐름 속에서 의미를 받아들였던 기존의 수동적 독서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시를 우리가 종종 실험적이라고 부는 이유는 이처럼 그간 묵인되어 온 의미 구성 요소들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재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의 사막을 건너가는 일
김언의 두 번째 전략은 인간 언어의 최초 모습, 그러니까 시적 언어의 기원을 향한 탐구이다. 언어의 역사적 변형태들을 따라 기원을 추적해나가는 일은 마치 화석으로 원형을 추측해보는 일처럼 여러 현실적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다. 다만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현실의 언어가 ‘과잉’으로 넘쳐나면서 오히려 언어에 내재된 특성들과의 단절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인간의 내면과 직접 맞닿기를 욕망하는 시어는 그 기원적 모습을 최대한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의 언어를 인간의 최초 언어로 여겼던 루소(J. J. Rousseau)는 이와 같은 시어의 특성을 ‘생기(de la force)’라고 불렀다. 그에게 ‘언어의 과잉’은 곧 ‘생기를 잃은 언어’인 셈이다.
해는 희다가 생겨났다.
불은 붉다가 생겨났다.
놋쇠는 노랗다가 누렇다가 눌러 붙으면서
생겨났다. 노을은 노랗거나 누렇거나 검붉거나
걷어가다가 생겨났다. 그믐은
눈을 감다가 생겨났다. 검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다가
생겨났다. 풀은 푸르고 꽃은 피다가 생겨났다. 잎도 생겨났다.
한 포기씩 두 포기씩 더 많은 연기가
올라가다가 생겨났다. 그 검댕이
그을다가 생겨났다. - 「어원」 전문.
인간 최초의 언어를 두고 루소가 ‘정념(passions)’에서 비롯되었다고 했을 때, 어떤 대상을 처음 지칭해야 되는 순간 그것의 이름보다 그와 관련된 상황이나 느낌이 앞섰을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품사로 비유해보자면, 동사나 형용사가 명사에 우선한 것이다. 고정된 대상이라고 할지라도 그와 연관된 주변 상황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가운데 이름은 지속적으로 유예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결국 그 뒤로는 무수히 많았던 상황들과의 단절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렇게 이름에 가려져 있었던 상황들을 되살려 내고 있다. 가령, 우리는 ‘해’와 연관된 색의 범주에서 흰색을 쉽게 떠올리지 않지만, ‘해’라는 이름이 탄생하기 이전이라면 그 어떤 색으로도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는 희다가 생겨났다.”는 구절에서 시인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해’에게 이름을 넘겨주게 되면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잃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불, 놋쇠, 노을’ 등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대상은 이름을 얻게 되지만 거기에는 다양한 색과 상태들이 어우러진 ‘생기’를 잃게 되는 언어의 역사적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이 작품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김언 시인에게 ‘어원’의 탐색은 대상을 좁혀가는 것이 아니라 누락되었던 것들을 다시 살려내는 복원을 의미한다. 작품에서 “생겨났다”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언 시인은 시적 언어의 기원에 대한 탐구 자체를 자신의 절박한 목표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문장 간의 인과관계에는 무관심한 채, 끊임없이 지속·반복되는 구조를 통해 현실의 의미 체계를 뛰어넘고자 한다. 따라서 그의 시들은 문장 단위에서 언제나 의미의 과잉이며, 작품 전체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의미의 결핍이다. 반드시 의미를 추론해내야 하는 현실의 언어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소통의 불가능 상황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이것이 김언을 따라 처음 걸을 수 있게 된 ‘생기’를 회복해가는 과정이라면 이를 통해 우리는 발신과 수신의 관계가 완전히 무화된 자유를 처음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 1) 막스 피카르트, 배수아 옮김, 『인간과 말』, 봄날의 책, 2013. 146~147쪽.
- 2) 막스 피카르트, 위의 책,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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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석으로 남은 말 끝내 말하지 않아서, 끝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영원히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은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성의 일은 좀처럼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자이가르니크 효과—물론 심리학적 개념으로서의 정확한 정의는 다르지만 미완이라는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연민과 응시의 감각. 시는 언제나 그 완성되지 않은 어떤 것에 머무르며 우리를 흔든다. 비평이 그 흔들림을 정리하고 서열화하고 요약하는 방식으로 시에 접근할 때 무언가는 반드시 누락된다. 나는 그 누락된 자리,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문장 곁에 남겨진 것들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를 설명하지 않는다. 해설하지 않는다. 다만 응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응시의 자리에 주석처럼 붙는다. 최근 우리 비평은 점점 더 '자기 이야기'를 말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에세이적 비평, 1인칭 비평, 자기 서사의 회복. 그것은 오랫동안 구조적 불투명성 속에 머물렀던 비평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시도이며, 충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들이미는 행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떤 문장은 오히려 '나'의 감정을 철수시키고 대신 더 오래 응시하고 더 천천히 다가가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바로 그 요구에 응답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물론 거의 모든 비평이 한 편의 시 앞에서, 시가 말한 것과 침묵한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려고 문장 옆에 오래 머무르고 부단히 응시한다. 비평은 이미 '시 앞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전제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우리 비평의 부단한 출발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비평이 도달하기 위해 설정해둔 목적지를 '전달'이 아닌 '증명'으로 다시 지정하려는 시도다. 의미를 통과해 독자에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의미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결정이다. 그 결정은 말을 침묵으로, 해석을 응시로, 감정의 진술을 주의의 태도로 바꾸는 형식적 전환이며, 동시에 비평이 수행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의 윤리적 선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석적 평론은 단지 명명적 발명도, 마케팅 수사도 아니다. 그것은 평론이라는 장르 안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던 어떤 잠재적 가능성, 기존의 비평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었던 윤리적 감수성의 방향성을 명시화하고자 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요청하는 한 명의 윤리적 독자로서 실험해본 기록이다. 한 발 늦은 문장으로, 아니 애초에 너무 일러서 말을 멈춘 문장으로. 1인칭 비평이 감정의 진폭을 밀어 올리는 고백이라면 주석적 평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을 문장의 그림자처럼 걸어두는 일이다. 그래서 주석적인 평론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 글쓰기다. 나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한 문장의 여백에 오래 머물며 침묵의 밀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주석적인 문장은 호소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을 통과한 언어이며 끝내 도달하지 못한 말의 끝자락이다. 내가 머문 시간만큼 이 문장은 스스로의 침묵을 완성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처럼 쓰인다. 끝내 말해지지 않아서.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떤 시 앞에 주석처럼 붙을 것인가. 나는 류근의 『상처적 체질』(2010)과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를 선택했다. 한 시집은 등단 후 18년의 침묵 끝에 도달한 첫 문장이며, 다른 한 시집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언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도다. 두 시집은 서로 다른 시차와 온도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말할 수 없음'과 '도달하지 않음'을 전제한 채 끝내 문장을 선택한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고 도착하지 않을 말을 계속 써 내려간다. 단지 감정의 양태나 표현 방식이 다른 게 아니다. 류근은 고백한다.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상처적 체질』, 「어떤 흐린 가을비」) 이 고백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가 언어화되는 순간—누군가에게 들리는 순간—속되게 소비될 운명을 자각한 시인의 언어적 체념이자 그 감각의 응축이다. 『상처적 체질』의 슬픔은 그래서 '진짜'이기를 포기한 슬픔이다. 표현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끝내 표현되는, 그래서 감각으로만 읽힐 수 있는, 어떤 내부로 굴절된 상처의 언어다. 그러나 이 언어는 김근의 시 앞에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김근은 말한다.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 「에게서 에게로」) 상처는 폐쇄되지 않고 이동한다. 김근의 시 속 상처는 정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과 운동을 가진 감정이다. 그것은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문장 속에서 다른 구절로 옮겨가는 관계적 감염이다. 여기서 상처는 타인의 것으로 흘러들고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온다. 이 흐름은 류근이 거부한 바로 그 순간, "함부로 눈이 마주친" 순간(「어떤 흐린 가을비」)에서 출발한다. 김근의 시는 류근의 시를 주석한다. "왜 당신은 상처를 자기 안에만 가두는가?" "그 상처는 타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김근의 언어는 묻지 않으면서도 되묻는다. 류근이 선언한 '삼류화된 감정'은 김근의 감각을 통과하면서, 더는 감정이 중심이 아니라 감각의 궤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화한다. 고백은 더 이상 정서의 진실이 아니라, 감각이 거쳐간 자리의 구조가 된다. 이 전환은 해석이 아닌 잔여이며, 문장이 말한 것보다 문장이 말하지 못한 것에 머무는 응시의 방식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김근의 시 또한 류근의 시로부터 되묻는다. 타자에게 흘러간 감정은 끝내 다시 돌아오는가? 관계는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는가? 『상처적 체질』의 음울한 자족성은 『에게서 에게로』의 관계적 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에게서 에게로』의 파열된 리듬은 『상처적 체질』의 감정 구조를 되틀어보게 만든다. 김근의 '관계적 감각'은 류근의 '내면적 구조'를 질문하고, 류근의 '리듬화된 감정'은 김근의 '언어 바깥의 감정'을 불러낸다. 서로는 서로를 주석한다. 그러나 그 주석은 해설이 아니다. 불완전한 해석, 조각난 반응, 때로는 비틀린 되비침이다. 그렇게 두 시집은 하나의 장(場)에서 서로를 반사하며, 상처의 정의를 확장하고, 감정의 구조를 해체한다. 『상처적 체질』은 침묵의 주석이 되고, 『에게서 에게로』는 운동의 주석이 된다. 이 두 주석은 평행선을 그리듯 가까스로 닿지 않는다. 독자는 그 사이의 긴장에서야말로 오늘의 시가 상처를 견디는 방법을 다시 배운다. 2. 응시의 독법—감각의 작동 방식 감정은 언어 이전의 감각에서 시작되지만 대부분 재현되지 않는다. 감정은 말해지기보다는 누락되고 언어는 그것을 직접 서술하기보다 지연된 리듬으로 감각을 구성한다. 시는 종종 말해지지 않은 감정에 가닿기 위해 언어를 미루고, 여백을 건너며, 때로는 되묻는다. 말보다 오래 남을지도 모를 감각. 언어로는 끝내 증명되지 않을 감정의 궤적. 예컨대 김근의 「정류장」은 그러한 감각의 실패와 구성의 시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다.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들판이었던 적이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저 빈 들판이요. 고독하지도 않은데 이것참 남세스럽군, 정류장엔 다른 사람이 없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다.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생각해보시오. 곡식들은 저마다 열매를 매달고 눈부신 햇빛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삽 같은 농기구를 어깨에 걸치고 농부 하나가 들판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들판을 가로지르는 시냇물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을 거요. (……)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빈들판이 되자마자 나는 내가 들판이었던 때를 떠올릴 수 없게 되어버렸소. 들판이었던 때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소. 빈 하나만 내 몸에 달라붙었을 뿐인데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내게 끼얹어질 줄은 차마 몰랐지 뭐요. 그때 등뒤 가로등 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동자 두 개가 빛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길고양이일 것이 분명했지만 왠지 그 눈빛의 주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만 자꾸 생각되었다. 한 쌍의 눈빛은 이따금 동시에 깜박거렸다. 눈을 감을 때 짐승은 거기 없는 것 같았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히는 것처럼. (……) 처음부터 내가 기다렸던 게 버스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딘가로 가야 한다. 여긴 정류장이니까. 정류장을 버리고 정류장 혼자서 기다리라고 내버려두고. 나는 짐승의 눈빛 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어쩌면 이 시답잖은 알레고리의 바깥일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내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자 이내 눈빛은 사라졌다. 다시 눈뜨지 않았다. 다시 아무것도. 당신은 너무 일렀거나 너무 늦었소만, 그곳에 눈빛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다시 그곳은. 없어졌다. 다시 바깥은. 빈 들판이 되기에도 빈이 되기에도. 그의 목소리만이 어둠처럼 끈질기게 내 귀를 잡아당겼다. —김근, 「정류장」 부분 빈 들판이 “한때 들판이었던 적”을 회상할 때, 그것은 단지 지나간 풍경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다. 그 회상은 수동적으로 과거의 감각을 재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 현재와 미래의 감각의 재생 버튼은 자동적으로 눌린다. 회상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비어 있음’과 과거의 ‘비어 있지 않음’, 들판과 들판이 아닌 무엇, 그리고 그것 아닌 어떤 무엇으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들뜸 없는 기대, 또 그외의 어떤 개연성 없는 감각들이 점철되어 있다. 이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이르면 ‘그리움’이 될 것이다. 이 그리움은 실제로 있지 않았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한 미련과 연민의 정서를 일으킨다. 그는 “내 몸에 새겨진 감각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토록 심각한 망각이 끼얹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그 감각은 실상 여기에서, 있지 않았던 감각을 일으킨다. 있지 않았던 감각에 대한 감각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내 몸에 각인된다. 경험하지 못한 꿈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에 존재론적 분열을 치유하는 어떤 시에서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 감각은 어느새 “정말 있었던 것”으로 몸에 각인된다. 그러니까 감각은 복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다. 그 구성은 언제나 ‘빈’에서 시작된다. 상실의 자리에서, 결여의 틈에서, 감각은 다시 만들어진다. 과거를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다. 과거를 새로 쓰는 방식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감각이 실재처럼 작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각이 과거에 근거한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시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기억의 소환이 아니라 발명의 발견이며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무언가를—사실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무언가를—끝내 구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이 없던 자리를 통해서만 진실에 닿을 수도 있다. 김근이 감각을 작동 시킬 때, 어떤 시들은 조용히 풀어진다. 감각이 말을 밀어내고, 말이 감정을 넘긴다. 그떄 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도 진실에 닿는다. 어떤 누명을 벗어낸다. 벗겨진 시는 우리를 더 예민하게 만들고, 예민한 감각은 더 오래 응시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이 글은 감각이 언어보다 앞서 있고, 시는 그 감각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하나의 비평적 실천이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독작(獨酌)」 전문 재회를 믿었고, 새끼 손가락 꼭 걸었다. 그러나 사랑은 또다시 나를 떠나간다. 그때의 같은 자리에 거듭 새겨진 상처는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헤어짐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고 고통의 반복은 그 감각을 무디게 만들지만 상처는 항상 새롭게 많아지거나, 깊어지거나, 비대해 질 것이다. 그건 너도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우리 지독하게 사랑한 만큼 지독하게 마음 먹고 단숨에 헤어지자. 라고, 예전의 나였으면 이 시를 이렇게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완벽히 지워내겠다는 감정의 독단처럼 들리도록 해석해버리기. 혼자 술을 퍼마시며(독작) 이별을 조금 멋스러운 쓸쓸함으로 포장하고, 새벽녘 sns에 올렸다가 다음 날 조용히 삭제하는 글처럼, 대학교에 하나쯤 있을 법한 센치한 선배처럼 만들기. 이런 해석은 정말 우리가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모든 이별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그것은 감정의 진폭을 서술하는 일에 불과하다. 이제는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보자. 자신의 감각을 믿고 문장 옆에 더 오래 머무르면서 응시하는 몸의 언어로 말해보자. 재회를 믿었을 때, 재회를 기약했을 때, 당신의 감각은 어땠는가. 만남의 끝이 결국 헤어짐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나는 예외일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모종의 다짐으로 희망적인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또다시 헤어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건, 감각을 잊어서도, 무뎌져서도, 그것이 멸해서도 아니다. 그 감각이 나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감각 버튼을 누르고 그에 따라 자동 재생되는 진실된 감각을 말해보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사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얼굴조차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걷던 공간 속 특정한 날씨와 냄새, 그리고 그 배경에 깔렸던 음악 같은 것.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이 몸 안에서 어딘가 동시에 켜지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직접 떠올린다기보다, 그 사람과 얽힌 감각들의 궤적을 따라간다. 이 궤적은 항상 비선형적이다. 마트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팝송의 한 소절, 커피잔을 내려놓을 때 손가락 끝에 전해지던 찻잔의 온기, 아니면 그 사람의 코트에서 나는 먼지 섞인 향수의 마지막 노트. 그때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감각’이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는 선언은 자동 재생된 감각 앞에서 질문으로 변모한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었어?’라고. 이 되묻기의 순간에 감각은 문장을 바꾼다. 반문이 아니라, 반향이다. 믿었던 그 미래, 품었던 그 목소리, 붙들었던 그 감각—그것들은 단지 실패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총체였다. 그리고 그 총체는 말로는 남지 않았지만, 끝내 당신의 몸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다. 감정의 절단처럼 들렸던 류근의 언어는 김근의 감각의 구조를 통과하면서 절단이 아니라 잔류였음을 드러낸다. 시가 말한 것보다, 시가 말하지 않은 여백, 그 여백에서 다시 떠오른 감각, 그 감각으로 인해 드러난 문장.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3. 에게서, 체질로—감각의 회로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은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거듭된 상처의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류근, 「상처적 체질」 전문 “상처적 체질”이라는 말에서 먼저 떠오른 건, 어쩐지 비관적인 단상들이었다. 체질이라,—그 말은 어딘가 책임을 유예하는 언어처럼 들린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변명, 몸에 그 책임을 전가하면서 정서적 면책을 꾀하는 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 언뜻 상처를 내면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몸의 감각에게 모종의 중압감을 짊어지게 하며 고통의 근원을 흐리고 상처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상처의 열망”이니, “거듭된 상처의 폐허”니 하는 미학적 언어는 상처 입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미화된 언어, 즉 자기방어의 수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이 시가, 상처는 체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감각은 그 체질 속에 갇힌 반복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상처에 대한 일종의 면책 기록일 것이다. 그때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말 거대한 병원이고, 시란 그 병증일 수밖에는. 응시하면, 시는 벗는다. 체질은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감각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구조다. 이 시에서 말하는 상처는 어떤 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반복되는 감각의 축적이고, 그 축적의 양상이다.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는 말은 그래서 사건의 인과를 제거한다. 상처는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닿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시인은 감각의 구조를 발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감각이 끝나지 않고 반복될 때, 다시 말해 상처가 현재진행형의 감정이 될 수 없을 때 그 감각은 고체화된다. 말하자면 감정은 굳어지고, 감각은 구조가 된다. 그 구조는 “체질”이다. 하지만 체질은 감각이 멈춘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되어, 말해지지 않으면서도 끝내 몸에 남아있는 상태다.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는 상처는 모두 감각으로서 켜켜이 쌓여 체질이 된다. 체질 때문에 고통은 받아도, 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내 생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그 유명한 말, 너무 유명해서 통속적인 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이 체질의 비유가 될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상처적 체질이라는 그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도, 상처를 잘 준다는 것도 아니라, 단지 감각이 만든 문장으로서 상처를 잘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구조의 이름이다. 정리하자면 류근의 언어는 감각을 하나의 구조로 고정한다. 반복되는 상처의 리듬은 체질이 되고, 체질은 상처가 감각으로 응고된 하나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감각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류근의 체질은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을 내부에서 되씹고 되풀이하는 구조이지, 타자와의 접촉에서 열린 흐름은 아니다. 그는 감각의 ‘패턴’을 만든다. 하지만 그 패턴은 고립된 채 순환하고 있다. 반면 2부에서 김근이 보여준 감각 구조는 그와 다른 흐름을 구성한다. 김근은 감정을 선형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해, 지금 여기의 감각을 구성한다. 그는 실재하지 않은 과거로부터 감정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 감각은 말해지지 않은 말, 망각된 장면, 잊힌 풍경 속에서 돌연 작동한다. 그리하여 류근의 감각은 되풀이되는 내부의 리듬이고, 김근의 감각은 되살아나는 외부의 흔적이다. 체질이 되기까지 감각은 응축되고, 되살아나기 위해 감각은 분산된다. 두 감각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의 회로를 완성한다. 말해지지 않은 말, 기억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응시된 감각이 하나의 회로로 엮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감각은 더 이상 한 사람의 내부에 머물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몸으로, 다른 말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회로 속에서 감정은 해석되지 않고 다만 응시된다. 이제 우리는 그 응시의 방식, 감각의 회로 속에서 김근의 시 「서러우니, 아프니,」(『에게서 에게로』)를 다시 읽어본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끝내 문장이 되지 못하고 중얼거림으로 남아 있는 시, 그 바깥에서만 감정이 반응하는 시. 감정의 진술이 실패한 자리에 감각이 어떻게 잔류하는지, 그 회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자.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가 교접하는 꼴을 지켜볼 참이었는데 서러우니, 는 어느 문장의 교접에서 빠져나와 여기 있나 아프니, 는 (……) 매달리는 것은 정작 나였더라는, 서러우니, 따위에 아프니, 따위에 매달려 바지춤이라도 잡아볼 양으로 꽉 쥔 손 더 꽉 꽉 쥐어는 쥐었으나 떨려나더라는 그만 떨려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서러우니, 중얼중얼 아프니, 중얼중얼 어느 문장의 교접에도 들지 못하고 숫제 까무러나 치더라는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 바깥은 아리고 아리더라는 서러우니, 아프니, 따위이게만 서러우니, 아프니, 바깥도 나도 당신도 완성되지는 결코 않고, —김근, 「서러우니, 아프니,」 부분 이 시는 문장이 완성되기 직전, 혹은 완성되지 못한 채 파열되는 리듬 속에서 감정의 부재를 감각의 형태로 전환한다. “서러우니,” “아프니,”라는 말들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정이 언어에 들어서지 못한 채 멈춰 선 쉼표의 흔적이다. 감정은 말이 되지 못하고, 문장은 감정을 담지 못한다. 그때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감각의 파편이다. 이 파편은 비문법적인 어형, 중얼거림, 반복과 흔들림 속에 잔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각들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문장 바깥에서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문장은 완성되지 않고 / 나는 그 문장의 바깥으로만 / 서러우니, 아프니, 로다만”—감정의 발화 실패가 곧 감각의 작동 개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고백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감각은 문장 밖에서 흐르고, 그 흐름이 반복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된다. 이 패턴은 류근의 시가 말한 ‘체질’처럼 하나의 리듬 구조로 굳어지기 직전의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떻게 감각의 회로를 만들고 있는가. 류근이 고정된 감각의 구조(체질)를 말한다면, 김근은 말해지지 않은 감정이 흘러다니다가 다시 몸 안에서, 말 바깥에서 감각으로 발화되는 장면을 기록한다. 하나는 응고된 감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지점—말하자면, 감정이 말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 깊이 감각되고, 감각이 언어 바깥에서 반복되며 하나의 회로를 만든다는 이 감각의 순환 구조—가 이 글이 추적하려는 “감각의 회로”다. 김근의 시 「에게서 에게로」(『에게서 에게로』)는 감각이 단일 주체 안에 고립되지 않고 ‘너에게서 또 다른 너에게로’ 흐르는 관계적 회로임을 보여준다. 감정은 어떤 ‘나’의 내면에서 발화된 것이 아니라, 이미 ‘너’를 통과해 온 감각이며, 또다시 ‘다른 너’를 향해 옮아가는 언어적 궤적이다. 이 감각은 멈춰 있지 않고 전이되며, 감정의 기원이 아니라 감각의 운동성으로 시를 구성한다. 너는 언제 눈이 멀까 네 입술의 거스러미들이 일어난다 네 말은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고 나는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로 이곳은 범람한다 감정은 여기서도 ‘말해지지 않음’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러우니, 아프니,」에서의 말해지지 않음이 문장 바깥의 정지라면, 「에게서 에게로」의 말해지지 않음은 감각의 흐름이다. 그것은 “자리를 잡지 못한 네 말들”이 범람하는 풍경이고, 이 범람은 감정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감각의 홍수다. 고백이 실패했기 때문에 감정은 여전히 감각으로 유예되고, 그 감각은 관계 속에서 옮아간다. 감정은 감정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감각의 패턴이자 언어적 관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류근의 감각이 몸에 각인되어 고체화된 것이었다면, 김근의 감각은 타인의 말에 의해 범람하고 이동하며, ‘자리를 잡지 못한 말’로서 끊임없이 재배치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의 회로는 감정의 전유가 아니라 감정의 유실을 전제로 한다. 말해지지 못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 감각은 계속 이어진다. 감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나’를 통과한 감각은 언제나 ‘너’를 향해 열려 있고, 그 감각이 언어를 통해 완결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 감각을 감지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관계 속에서 돌아오고, 흘러가고, 감염된다. 그것이 감각의 회로이고, 시가 끝내 감정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결국 이 글은 감정을 진술하지 않기 위해 감각을 오래 붙잡았고, 감각을 붙잡기 위해 시에 더 오래 머물렀다. 우리가 읽어온 시들은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이 감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용히 보여주었다.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상처가 남긴 리듬을 반복했고, 말하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그 반복과 전이의 흐름 속에서 감각은 체질이 되었고, 체질은 끝내 관계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감각의 회로는 단일한 자아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늘 ‘너’의 존재를 전제하고, ‘또 다른 너’에게로 건너가는 경로다. 시는 그 경로를 하나의 언어로 완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한 말들,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도달하지 못한 언어의 잔해들 속에서 더 정확하게 살아 있다. 비평이 그 잔해 앞에 머문다면, 그것은 해설이 아니라 응시이고, 설명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감각의 지속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문장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을 추적하려 했다. 감정이 아니라 감각을, 설명이 아니라 구성된 흔적을, 하나의 완결이 아니라 끝내 돌아오지 않는 반복을. 그리고 그 반복의 한 가운데에서 시는 말해지지 않았던 사랑을 다시 감각하게 한다. 감각은 다시 살아 있는 문장이 된다. 4. 감각 이후의, 시대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마저 예의주시한다. 상처는 쉽게 고백되지만, 그 고백은 종종 감각되기 전에 소비된다. 이미지로, 이모지로, 몇 초 만에 반응하는 감정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 슬픔은 감정 이전에 태그가 되고, 상처는 경험 이전에 서사화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자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간 속에서, 말함은 곧 존재의 증명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슬픔은 말한 뒤에도 남고, 상처는 고백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자주 말하는 일만이 아니라, 더 오래 감각하는 일이다. 말함은 윤리의 출발이지만, 감각은 그 윤리가 지켜지는 방식이다. 말함이 고통의 첫 번째 증명이라면, 감각함은 그 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두 번째 언어다. 이 글은 그 두 번째 언어로서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여, 묻게 된다. 감각한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해지지 않은 것의 윤리를 오래 응시했다면 이제 그 감각의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새로이 감당해야 하는가. 이 글은 끝내 말해지지 않은 어떤 문장 옆에 머물렀고, 그 여백의 떨림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러나 세계는 끊임없이 말하라고 한다. SNS에서, 인터뷰에서, 기록에서, 고백의 형식에서—슬픔은 표현되기를 요구받고, 상처는 빠르게 이해되기를 강요받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리는 시대,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주 망각된다. 우리는 안다. 상처는 말해져야 한다. 말해지지 않은 상처는 더 깊은 침묵으로만 남았고, 그 침묵은 누군가가 말하기 전까지 결코 메워지지 않았다. 또한 안다. 말은 때로 너무 빨리 잊힌다. 말이 많을수록 오히려 감각은 증발하고, 감정은 마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무거운 감각이다. 그 감각이 말을 떠받치고, 그 말이 끝내 다시 감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윤리의 회로. 이 글은 그 회로를 만들기 위한 다만 아주 작고 느린 실험이었다. *부록 시가 감정의 언어라면, 그 감정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동일한 슬픔도 같은 말로는 다시 불릴 수 없고, 같은 고통도 똑같은 문법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시는 종종 세계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도착하지만 때때로 세계보다 먼저 아프다. 세계가 아직 체감하지 못한 감정을 시는 미리 감각하고 그 감각의 구조를 가장 먼저 언어화한다. 그래서 시는 지나간 감정을 말하면서도, 다가올 슬픔을 증언하는 언어다. 이 평론이 주석한 류근과 김근은 그 감정의 시간성에서 서로 다른 리듬으로 같은 고통을 구성해낸 시인들이다. 류근은 감정을 반복과 리듬의 구조로 정제했고, 김근은 실패와 결여의 구조 속에서 감각을 잔류하게 만들었다. 이 부록은, 그 두 언어의 병렬을 통해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말해왔고, 어떻게 끝내 말하지 못했는지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2010년대 전반의 한국 시는 고백의 서정성을 유지하면서도 감정을 직접적으로 발화하기보다는 정제된 이미지와 절제된 문장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뚜렷했다.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는 일상의 슬픔을 산문시와 서정의 경계에서 절제된 말투로 조직했고, 하재연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2012)은 침묵의 감정을 조용히 응시하며, 감정의 과잉 대신 감각의 압축을 선택했다.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는 원래 1995년 출간되었지만, 2014년 복간되며 재조명된 이후, 감정의 리듬을 신화적 상상력과 병치해 해체한 언어로 다시 독해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시는 감정을 고백하거나 날것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응축하고 조율하려는 윤리를 견지했다. 감정은 직접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 속에 미루어지고, 독자는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의 미학이자, 서정의 윤리였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시의 문법은 균열을 맞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감정은 언어에 대한 회의와 감정의 발화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고, 시는 감정의 고백보다 감정의 불능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안미옥의 『온』(2017)은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가장 조용한 언어를 실험하며, 감정을 직접 호명하지 않고 그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 자체를 오래 응시한다. 이소호의 『캣콜링』(2018)은 페미니즘적 시선을 통해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각하게 하는 시학을 구축하며, 사회 구조 속 침묵의 감정을 가장 급진적인 형식으로 표출한다. 언어는 더 이상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며, 감정은 더 이상 말로 재현되지 않는다. 시는 감정의 실패를 감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시가 모두 파열로만 향한 것은 아니다. 김행숙, 이문재, 김복희 같은 시인들은 여전히 정제된 말 속에서 감정을 환기하며, 느린 서정의 리듬으로 시대를 반사했다. 심보선, 장이지, 함기석 등은 형식을 실험하면서도 감정을 비틀거나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서정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결국 이 시기의 시는 파열과 구조화, 고백과 침묵, 직접화와 간접화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다층적 국면이었다. 202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시는 감정의 언어를 더욱 신중히 의심하게 된다. 감정은 더 이상 말해지지 않기보다,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감정은 문장 바깥에서 흔들리고, 잔류하며, 실패한다. 김근의 『에게서 에게로』(2024)는 그 전환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감정은 이제 고백되지 않고, 시는 감정의 실패 자체를 감각하는 쪽으로 밀고 들어간다. 쉼표, 중단된 구절, 어긋난 문법은 감정이 표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 방식을 감각하게 한다.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고립되지 않고,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동한다. 감정은 감염되고, 옮겨지고, 끝내 다시 말해지지 않는 자리에서만 증명된다. 이 시집은 감정이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말해질 수 있다는 모순을 가장 극적으로 감각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이 2010년의 류근과 2024년의 김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어떤 대표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둘은 각자의 시기를 압도한 시인은 아니지만 각자의 시기가 요청한 감정의 구조에 가장 날카롭게 반응한 언어들이었다. 류근은 감정을 리듬과 반복의 구조 속에서 조율하며 상처를 체질화했고, 김근은 감정의 결여와 실패를 끝내 감각으로 환원하며 언어의 파편 속에서 응시했다. 하나는 감정의 정제이고, 하나는 감정의 잔류다. 이 둘이 나란히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병렬 속에서 지금-여기의 감정 구조가 어떤 언어를 필요로 하는지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이 글은 바로 그 물음의 옆에 붙는 문장이다. 시를 해설하지 않고, 감정을 분석하지 않으며,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각의 흔들림에 오래 머문다. 이것은 설명이 아니라 응시다. 주석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대의 문장을 바꿔왔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는 하나의 문장. 말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끝내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에도, 여전히 문장 바깥에 남아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결국 언어를 다시 부른다는 것. 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1. 정택진의 소설 『곳』은 기억의 심층에 박힌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을 소환하면서 시작된다. 청산도의 어느 낡은 집, 윗목 모서리에 걸린 등잔에는 ‘초꼬지불’이 졸고 있는 저녁이다. 대대로 가난했을 것이 분명하건만, 여느 때와 달리 걸게 차려진 밥상이 풍성한 밤이다. 밥상머리 앞에 한 꼬마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서 있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꼬마를 재촉하는 밤이다. “아들, 얼른 노래 한 자리 해 보니라.”(7쪽) 어른들의 재촉을 못 이기는 척 꼬마는 시시하고 젖내 나는 노래 대신 자랑스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가사를 선율에 싣는다. 특별할 것도 없는 노래건만, 그 순간만큼 이 가족과 청산도의 모든 존재들이 힘껏 숨죽여 귀 기울이던 시간이다. 어떤 언어로도 재현할 수 없는 그 시간의 온도를, 소설의 그 어느 장면에서도 다시는 쓰이지 않은 그 시간의 아련함을, 아마도 작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보존되었을 원형적 시간의 이미지를,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기록해 두었다. 꼬마는 노래의 강변에서 빠져나와 살며시 눈을 뜬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이다. 아마도 물이 찐 저 아랫동네 모랫벌에, 노을은 져 꼭두서니로 붉은 그 모래밭에, 호미로 금을 그어가며 캐내던 하얀 무명조개와, 소금을 넣으면 구멍을 솟구치던 맛조개와, 갯벌을 헤적여 캐내던 바지락과, 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 가득 고이던 기다란 진줄과, 모래톱의 석양에 어우러졌던 이웃들과, 그리고 생각하면 다사롭고 아늑했던 옛날을 거닐고 있는 모양이다. 방 안의 풍경에 초꼬지불이 다숩다. (8~9쪽) 차라리 시에 더 가까운 인용문의 아름다운 풍경은 신화적이며 유토피아적이다. 다시는 복원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가혹한 세계의 문법이 이 가족의 작은 평화를 무참히도 뭉개버린 후, 다시는 세계의 숨결이 이들 가족의 삶과 공명하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그러니까 어느 깊은 밤에 “검은 잠바 차림”(12쪽)의 사내들에게 아버지가 끌려가고, 독한 매질에 몸이 굳은 아버지를 위해 “예로부터 장독에는 똥물만한 게 없다”(19쪽)면서 구덕에 고인 액을 모아 화덕에 달이던 할머니의 허리가 굽어지고, 골병을 치료하기 위해 뱀과 지네를 찾아 온 산을 헤집던 꼬마와 그 동생을 사람들이 “뱀 성제”(25쪽)로 부르던 시간 이후로는, 작가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보존되었을 것이 분명한 저 아련하고 그리운 시간들은 다시는 재현될 수 없었으므로 더더욱, 저 인용문의 풍경은 유토피아적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정택진의 『곳』이 재현하는 장소는 헤테로토피아적이다.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지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그 배치에 이의제기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박정희와 김대중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 아버지의 신념이 세계의 문법에 의해 무참히도 깨져버렸던 장소, 그로 인해 모든 가족의 꿈이 조각나 버린 장소, 갖은 상처로 단단한 옹이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트라우마적 장소, 역사의 문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기억의 연대기가 피 흘리던 장소, 바다의 짠 내를 머금은 해풍의 농도보다 슬픈 이야기들의 밀도가 더 높았던 장소, 거짓의 유토피아를 구획하기 위해 사회의 외부로 배치된 헤테로토피아의 장소, 그 곳이 바로 정택진의 『곳』이다. 2. 마르트 로베르는 프로이트의 『신경증 환자의 가족소설』을 이론적 출발점으로 삼아 ‘가족 소설’에서 소설의 기원을 규명했다. 어린 아이의 쾌락과 욕망이 현실원칙에 의해 억압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초자아와의 갈등을 겪으며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가족 소설’은 그 형식을 갖추어 간다. 이때 억압된 욕망은 스스로에게 ‘날조된’ 역사를 부여하면서 서사적으로 자아 형성 과정에 관여한다. 날조되는 서사는 현실원칙의 억압을 상징하는 현실의 부모를 가짜 부모로 격하시키고, 자신은 모종의 신적 존재의 자손으로 격상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아이는 진짜 부모를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모험을 겪으며 세계의 문법과 갈등하면서 성장한다. 스스로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이 과정은 자기징벌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자기만의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성장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대부분의 영웅서사가 그렇듯 이러한 서사의 마지막이 결국 귀환의 과정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행복했던 유년의 시간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아이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이러한 시련과 극복의 서사가 바로 가족소설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루된 인간의 심층적 욕망과 심리적 동기들이 ‘가족 소설’의 형태로 승화되는 통과의례의 입구인 셈이다. 로베르에게 소설은 의식의 어두운 곳에 감추어진 그 날조된 역사를 교묘하게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가족소설의 연장이자 그에 대한 사회적 환기의 서사인 소설의 양식은 사회적 금기와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한 자유와 절대를 갈망하는 영혼의 모험 양식이기도 하다. 3. 장택진의 『곳』은 이러한 가족로맨스의 경로를 두 가지의 방식으로 비틀면서 실현한다. 첫 번째, 소설은 아버지의 처절한 실패 서사를 그의 아들의 언어로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이의 무의식적 욕망이 현실 부모를 부정하고 모험을 떠나면서 성장하는 서사가 아니라, 그 아이의 아버지가 세계와 반목하면서 거대한 괴물과 맞서는 서사로 변화시키는 구조로 변주되고 있다.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와 부딪히고 갈등하면서 아버지를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신 아버지가 세계와 대결하고 상처받으면서 쇠약해진 신체로 깨지고 부서진다. 그러니까 자기 유년의 기억을 소설의 양식으로 재현하는 작가 정택진의 언어는 자기 대신 아버지의 서사를 통해 아버지의 욕망과 그의 백일몽을 대리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무참히 깨지고 무기력하게 부서졌던 아버지의 모험 서사를 통해 이 불합리한 세계의 문법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정상적 성장 과정을 겪으면서 자아를 형성할 기회마저 박탈당함으로써 아이의 성장 서사가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대한민국의 폭력적 시대상을 고발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쓰인 ‘나’의 언어들은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서 폭력적으로 유년을 거세시켜버린 시대에 대한 고소장이기도 하다. 덧붙여 이 비틀어진 가족로맨스에서 부정되는 부모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나’에게서 정상적 성장과정을 앗아가 버린 시대 또는 국가라는 이름의 존재들이다. 4. 의도적으로 가족로맨스를 비트는 소설의 두 번째 방식은 원양어선을 타고 돌아 온 아버지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 군부독재의 문법과 불화했던 아버지는 원양어선 선원들의 불합리와 부패와도 불화했다. 결국 구금과 구타를 겪은 후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현실의 부모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모험의 세계로 이끄는 가족로맨스의 경로에 『곳』의 화자를 강제로 진입하게 한다. 마치 스스로를 업둥이의 저주에 내모는 오이디푸스처럼 『곳』의 ‘나’는 스스로를 모험의 경로로 이끈다. 아버지의 패배와 죽음을 겪은 ‘나’가 중학교 입학을 미루고 뱃사람이 되어 거친 세계의 문법과 부딪치는 서사는 힘이 없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기징벌과 아버지의 빈자리를 자신이 메우고자 하는 성장과정에 준한다. 물론 미처 덜 자란 아이에게 세계의 문법은 거칠고 차갑고 매섭고 가혹하다. 할머니의 눈귀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란 걸 나는 안다. 식구들에 대한 안쓰러움과, 특히나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있는 손자에 대한 짠한 마음도 거기에 보태어졌으리라.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딱히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슬픔은 온 곳에서 밀려와 나를 울게 했다. 나는 나만의 현실은 얼마든지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학교에 안 가고 배를 타고 있는 것이나, 얼떨결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발목이 잡혀버린 담배의 늪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엄니와 동생들을 둘러싼 것들은 끝내 나를 눈물짓게 했다. 그것들은 도저히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내 키 너머의 것들이었다. 마당에 팽개쳐져 짓밟히는 할머니를 보면서도 이빨만 갈고 있었듯, 쇠기둥에 묶어 놓고 때리는 그 사람에게 용서해 달라 빌기만 했듯, 세상에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선창 여기저기에 버려진 삼치대가리만큼이나 많았다. (120쪽) 아버지의 공백은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세상의 벽 높이로 체감되고, 불합리한 세계의 문법 앞에서 아직 여물지 못한 ‘나’의 신념과 육체는 무기력하고 허약하기만 하다. 얼떨결에 배우게 되어버린 담배와 배가 쉬는 중간간조 때 선배 선원들을 따라 간 색싯집 등과 같은 어른 흉내 또한 자신의 뒤를 파고들었던 어느 남성동성애자의 성폭력 앞에서 한 번도 저항하지 못했던 무기력함으로 무너져 버렸다. 무엇보다 이러한 무기력은 장소상실(placelessness)과 연관되어 있다. 배를 타고 오는 길에서 우연히 중학교에 진학한 동무들이나 여자애라도 보이면 시나브로 걸음을 늦추거나 길을 에돌아 시선을 피하던 장면들은 ‘나’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장소를 갖지 못한 존재, 자신이 속한 곳이나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존재, 머물러도 좋은 자리나 마땅히 점유할 위치를 가지지 못한 존재, 장소상실의 예외적 존재이다. 이러한 장소상실은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고, 다시 섬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원양어선을 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사정과도 연관되면서 이 가족들의 삶이 지속적으로 정상적 장소 바깥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의 장소에서 뿌리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은 근대적 자아가 경험한 근본적인 충격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처럼 시초축적의 과정에서 토지를 잃고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로 흡수되면서 장소를 상실한 농민들, 고향을 떠나 도시의 하층 노동자로 전락했던 1970년대 경제개발시대의 사람들처럼, ‘나’는 공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토대로서의 사적 영역을 상실한 정신적 외상의 경험자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맘껏 불러도 되는 가정 공간의 결여,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계획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배치 과정에서 제외된 채 다시 복습되는 누대의 가난, 아직 덜 자란 아이에게 가혹하기 만한 세상의 문법, 이러한 사정들이 허락한 ‘나’의 장소는 정상 공간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유토피아 건설의 환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헤테로토피아의 자리일 뿐이다. 즉 위의 인용문은 행복했던 유년의 유토피아적 장소를 상실한 예외적 존재가 경험하는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사생아의 위치로 격하하는 방식으로 가족로맨스의 환상을 비틀고 있다. 5. 연이은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불합리함으로 가득한 세계와 마주하던 소설의 어둡고 무거운 문장들은 교회에서 종을 치는 ‘진만이형’을 만나면서부터 고난 극복의 서사로 전환된다. 섬에서 한두 명만 가는 대학까지 나왔지만 군대에서 전기고문을 당한 후, “팔십 된 노인처럼 지팡이를 짚으며 는지럭는지럭 걸어 다녔고, 말을 할 때면 입귀로 늘축하니 침”(195쪽)을 흘리는 ‘진만’ 또한 자기 장소를 상실한 예외적 존재에 해당한다. 그런 ‘진만’이 불편한 몸으로 사지를 비틀어 줄을 당기고 놓는 “처절한 몸부림”(198쪽)으로 종을 치는 장면은 ‘나’에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성의 장소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턱대며 교회에 들어서서 보니 그 형이 종을 치고 있다. 그런데 줄을 당기고 놓는 폼이 좀 특이하다. 어지간한 국민학생도 두 손으로 줄을 당겼다 놓을 수 있고, 어른들은 한 손으로도 너끈히 종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형은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형은 온몸으로 종을 치고 있었다. 몸에 줄을 감아 오른쪽으로 비틀며 당기면 종이 울렸고, 몸을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줄을 주면 종은 또 소리를 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더니, 이번에는 왼쪽으로 몸을 틀며 똑같은 동작을 계속했다. 지팡이를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힘겨운 걸음마처럼, 는질는질 흐르는 침 사이로 간신하게 만들어내는 말의 마디처럼, 그 형은 몸 전체를 틀었다 바루며 종을 치는 것이다. (197~198쪽) 진만의 불편한 신체와 어눌한 말투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가 경험한 시대의 폭력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하면서 두 인물 간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불편한 몸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는 진만의 행위는 ‘나’의 무기력과는 대비된다. 따라서 소설에서 ‘진만’의 존재는 시대적 외상에 노출된 존재라 할지라도 사건 이후 자신의 주체성을 어떻게 재정립하느냐에 따라 삶의 복원가능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복원의 장치이다. 즉 ‘나’와 ‘진만’의 만남은 한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마주하면서 주체와 객체의 경계와 무화되고 서로 스며들며 변화하는 변곡점인 셈이다. 특히 “그런데 어떻게 날마다 그렇게 치요?”라는 질문에 ‘진만’이 “그,라,믄,너,같,으,믄,치,다,안,치,다,그,라,것,니?”(200쪽)라고 대답했을 때, 소설은 명백한 복원의 방향으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방향성은 ‘나’의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긴 말들(남이 훔칠 수 없는 자신만의 유산, 복수심보다 강한 집념, 반드시 지켜야할 어떤 신념을 가지라는)과도 맞닿아 있었다. 6. 변화의 증거로 세 가지만 언급해 보자. 하나는 중학교에서 발생한 불합리한 사건(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의 불행한 죽음)에 대해 눈 감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응징을 한 것이다. 이는 ‘나’가 이제 덜 자란 아이에서 세계의 문법과 당당하게 맞서는 소년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자신만의 집념과 노력으로 섬을 떠나 육지의 고등학교로 국가장학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소년이 진학한 그 학교가 아버지의 죽음을 야기했던 박정희가 세운 학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섬을 떠나 육지로 모험을 떠나는 한 평범한 영웅이 자신만의 세계와 삶의 궤도를 만드는 길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 가족로맨스의 진정한 목적,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회복이라는 진정한 목적으로 소설이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증거는 다음의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소년은 몇 걸음을 더 걷는다. 마음속에 그런 꿈을 꾸고 있지만 그 길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과연 그런 꿈을 꾸어도 되는 것인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뭐가 되고 싶냐니까?” 돌멩이 몇 개가 발부리에 채여도 대답이 없자 소녀가 재촉한다. “소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원양에서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사다주었던 『노틀담의 곱추』나 『장발장』이나 『죄와 벌』 같은 이야기를 쓴 사람들의 이름 앞에, 개울가에서 만난 소년과 소녀가 소나기로 어우러지고, 몇 날을 기다려도 소녀가 안 나타나 소년은 애가 타고, 그러다가 소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누운 채 눈물을 흘리는 소년과 소녀의 슬픈 이야기를 쓴 사람의 이름 앞에, 분명히 ‘소설가’라고 붙어 있었다. 소년은 정말 그 이름이 되고 싶었다. (299쪽) 인용문의 문장들은 아버지의 꿈과 소년의 꿈이 다시 만나 공명하면서 소설의 초반에 배치된 행복했던 어느 밤의 시간들을 다시 복원하는 장면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상처로 무너진 한 소년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기어이 이야기꾼이 되어, 시대의 폭력성으로 인해 무너졌던 누군가의 꿈을 결국은 회복할 것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고가 현실로 실현되면서, 슬픔의 언어가 가득했던 장소는 언어를 초과하는 기억의 밀도가 가득 채워진 이야기의 장소가 되었다. 그 장소가 바로 정택진의 『곳』이다.
연말과 연초, 가까운 시기에 발간한 이번 시집 『고조곤히 서러운 마을 이름들』과 『동그라미』에서 김선태와 이대흠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남도의 웅숭깊은 언어와 율동을 언어미학 차원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시인 특유의 질박한 언어감각과 향토적 감수성, 남도의 의지와 혼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자긍심, 이에 따른 겸허한 부채의식이 은밀히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전국적 시인으로 널리 사랑받아 온 이들이 지역 언어/언어문화에 각별한 애정을 기울인 함의는 무엇일까.(둘 다 다수의 시에서 남도 방언을 맛깔스럽게 사용해 오긴 했지만) 몸은 오래 전에 고향에 두었지만 심리의 저변에 잠재해 있던 이향(離鄕)의 자의식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귀향한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서 남도는 단순한 추억이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앙감질로라도 신명나게 이르러야 할 근원적 종착지를 상징한다. 각박하고 혼탁한 세파를 함께 노 저어가며 이를 정화하고 잠재워야 할 미래지향적 귀의처인 것이다. 따라서 두 시인의 이번 시집은 남도의 유토피아적 지향성과 지난한 현실의 고뇌를 한데 아우른 법고창신의 날줄과 씨줄로 읽어야 그 본질에 선뜻 다가갈 수 있다. 이들의 남도에 대한 각별한 천착은 동향의 후배 시인 유진수에게서도 재확인된다. 상처를 고아 세월을 끓인 나주곰탕, "원래 가차운 데서 더 안 뵈는 뱁이어, 우짤 땐 멀리 떨어져 봐야 잘 뵐 때가 많어야"라고 곰삭은 속담 같은 경험철학을 귀띔해 주는(남도 사투리로) 할머니, 어느덧 아파트 단지가 다 된 망월묘역, 무등산 울리는 칼빈총 시민군, 돌에서 피가 흐르는 돌머리 해변 등, 향토적 감성과 서사, 낭만이 한통속을 이루는 시집 도처에서 남도의 어법과 굴곡진 사연을 다양한 형식을 빌려 노래한다. 한편, 남도에 새 터를 잡고 어느덧 고향 묵호에서보다 더 오랜 세월을 제2의 고향에 투자한 정영주도 남도와 운명적 인연을 공유한다. 오늘도 그는 광주 풍암동 집 뒤 금당산을 상징적 배경으로, 남도에 닻을 내린지 오랜 시간의 여묵(餘墨)(한곳에 발을 묶어 논 뿌리의 언어들)을 절절한 듯 담담하게 노래한다. 아니, 노래하려고 한다. 한곳에 발을 묶어 논 뿌리의 언어들! 산이 나를 쓰고 나를 읽어주는 일들을 열심히 지켜볼 참입니다. 또 그대라는 산이 이따금 나를 읽어주겠지요 금당산에 몸 부리다 - 「시인의 말」 전문 구체성을 담보로 한 리얼리티의 진수 ㅡ김선태 시집 『고조곤히 서러운 마을 이름들』(고요아침, 2024) 현대소설도 그렇지만 현대시는 그 주제와 배경이 주로 도시고, 도시의 문화와 정서를 통상의 표현 기제로 한다. 어쩌다 산중이나 농어촌을 주요 무대로 한다 해도 그 이면에는 도시적 감각의 언어가 주류를 이룬다. 이를테면 도시의 여행객들이 배낭을 짊어지거나 캠핑카를 몰고 와 잠시 시골에 여장을 푼 격이다. 이 경우, 시골은 입에 익은 도시 표준어의 그늘에 가려 음미할수록 사물의 원형에 가깝고 맛깔스러운 언어문화 자산이 속절없이 사어화 되어가는 사투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도시 중심의 문학이 시골의 전통과 문화, 언어를 유기한 지는 오래되었다. 농촌시의 급격한 퇴조에 반비례해 그 대체재로 부상한 도시 시는 마치 점령군처럼 부동의 텍스트로 일반화되었다. 한때 농촌은 물론 도시 안방의 시선을 사로잡던 장수 드라마 는 이제 흘러간 유행가처럼 회고적 향수로 잔존할 뿐 그와 맥을 같이하는 경향의 예술작품은 도시문화의 아스팔트 밑에 묻힌 지 오래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념할 것은 어떤 경우든 시골이 홀대받는 것은 자연이 그 본연을 망각한 것과 같은 치명적 우려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남도에는 시대의 조류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 이웃을 정서적 배경/주제로 독자적 시세계를 탄탄하게 구축해 온 시인들이 있다. 그 대표적 시인이 김선태다. 아홉 번째 결실인 이번 시집은 역사적 뒤안길에 얽힌 남도의 서사를, 숨은 주역들의 다양한 사연을 빌려 엮은 인명사전과 지명사전의 합작이다. 제 이름밖에 못 쓰는 선택이란 아이가 있었다. 그런 녀석이 유일하게 쓸 줄 아는 이름이 있었다. 내 이름 선태였다. 제 이름을 쓰기 전에 저절로 내 이름이 먼저 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녀석과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그런 선택이가 죽었다. - 「선택」 전문 온갖 풍상을 다독이며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나아가 남도의 전통과 역사를 일구어 왔다. 시집 속 대부분의 시가 각각의 이름 혹은 별칭을 지닌 구체적 사람, 사물, 공간을 주제로 하고 있다. 편편이 구체성을 담보로 한 리얼리티의 산실이다. 화자는 기구한 사연으로 얼룩진 사람과 공간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호명한다. 그에게 기억은 세월이 가도 퇴색하지 않고 오히려 생생하게 재생하는 출석명부다. 예부터 이름을 지을 때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예컨대, 성명철학은 철학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이며 항구적인 희원이 담겨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화자의 이름은 선태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선택이란 친구가 있었다. 그는 겨우 제 이름만 쓸 줄 알았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이름이, 제 이름을 쓰기 전 반드시 통과의례로 거쳐야 하는 선태였다.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이름을 써주는 그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지금은 아주 떠나고 없는 그는 때로 선태라고 쓰고 나서 ‘ㄱ’ 받침을 달까 말까 잠시 망설였을는지도 모른다. 혹시 아예 받침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이번에는 화자와 아예 이름이 같은 경우를 보자. 이름뿐 아니고 성도, 본도, 항렬도, 나이까지도 같은 기막힌 우연으로 점철된 인연이다. 같은 마을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살았다. 같은 나이에다 동성동본에 항렬도 같았다. 생김새와 성격만 다를 뿐이었다. (……) 아무튼 지금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가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걸 보면, 우리가 서로의 아바타였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이름으로 살았지만 일찍 유명을 달리한 그를 위해, 내가 그 몫까지 살아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삼 마음을 다잡곤 한다. - 「선태」 부분 이름이 비슷한 “선택이”와는 죽마고우지만, 동명이인인 “선태”와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쌈싸우고 벗 싸우며 끈끈한 공동체를 일구어 온 나름 소중한 인연이기에 죽은 그의 몫까지 살겠다는 각오를 새삼 다진다. 그렇게 화자에게 자기 몫 이상의 책임감을 심어 준 인연들은 도처의 시에서 주제로 등장한다. “열여덟 살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 / 서른세 살에 본가로 돌아”와 “차중이 장개 보내줘잉~”을 입에 달고 사는 차중이 아재(차중이아재) 유년 시절 나만 보면 노래를 시키던 홍식이아재(홍식이아재) 집집마다 똥간이 비면 똥을 퍼주는 게 직업이던 평리아재(똥장군)과 그런 똥장군의 큰딸로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식모살이를 하던 점순이누님(점순이누님) 오전에 혼자서 애 낳고 오후에 밭 매러 가던 강남골댁(강남골 댁) 버버리(벙어리의 남도 방언)에다 천치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밥 먹는 일과 담배꽁초를 피우는 일밖에 모르던 목깽이(목깽이) 밤이 오면 마을 앞 강둑에 오도카니 앉아 /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던 아이(어린 가수) 이어서 이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나름의 생활미학을 가꾸어 온 남도의 골골샅샅을 살펴보자. 거센 풍랑이 남정네들을 삼켜버려 한때 때과부섬으로 불리던 맹골 곽도(맹골 곽도) 천지간의 둥근 몽돌들이 둥글게 몸을 맞대고 둥근 울음을 우는 정도리 몽돌밭(천지 간의 둥근 울음) 서해 비바람 산전수전 몰아쳐 / 뼈마디 쑤시는 골산(유달산) 갯벌에 쳐박힌 폐선 같이 내륙으로 예인된 바다가 호수처럼 갇혀 있는 목포(목포에 살다) 맹골파도 하도나 거칠게 으르렁거리며 거쳐가는 거차도(동거차도) 이제 『만인보』의 약도와도 같은 지상의 별세계에서 김선태 자신으로 그 범위를 좁혀보자. 미당과 김현승은 각각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미당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며,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는 허무주의적 자기 비하와 세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주조를 이룬다. 반면 김현승은 “내 목이 가늘어 회의(懷疑)에 기울기 좋고 / 혈액은 철분(鐵分)이 셋에 눈물이 일곱”이라는 해학과 자조를 섞어, 거울 속의 자신을 마치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듯 스케치한다. 김선태도 이번 시집에서 자화상을 제목으로 한 ‘고백 시’를 세상에 내놓는다. 아버진 밖에다 함부로 몸을 내다버리고 어머닌 안으로 자꾸만 다친 마음을 끌어안는다. 천형이로구나! 가끔씩 취중에야 내 안의 웅크린 상처가 뛰쳐나와 내 밖의 무구한 표정을 사납게 찢기도 한다는 것을 알 때 환멸스럽구나! 아무도 저 골 깊고 안팎이 어긋난 행간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 - 「자화상」 전문 미당의 아버지는 마름이었지만, 식모(점순이 누님)를 둘만큼 형편이 나은 화자의 아버지는 자꾸만 집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는 그 화를 안으로 끌어안아 천형을 키운다. 와중에 화자는 감탄형 종결어미 “~구나”를 빌려, 2연과 4연에서 “천형이로구나!”, “환멸스럽구나!” 등, 6음절의 그늘진 추임새를 넣는다. 그 속내는 마지막 연 “아무도 / 저 골 깊고 / 안팎이 어긋난 행간을 /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에서 감추듯 드러난다. 마지막 연 2행 “저 골 깊고”에서 관형사 ‘저’를 ‘이’로(이 골 깊고) 해야 제삼자에게 화자 자신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저 골 깊고”로 원격화해 차마 이루 다 말 못할 심화를 객관화/비인칭화한다. 천상 숨길 수 없는 남도인(남도 시인)의 성정이다. 불과 물을 혼융한 신화적 상상력의 결집 ㅡ이대흠 시집 『동그라미』(문학들, 2025) 회령진성(會寧鎭城)·천관산성·고장성 등, 많은 성이 말해주듯 변란 시마다 호남의 수문장 역할을 해 온 장흥은 동학혁명군이 최후의 격전을 치르고 비장하게 산화한 의향이다. 또 백광홍, 백광훈,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등, 걸출한 시인과 소설가를 배출한 문향이기도 하다. 직간접적으로 이곳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한강 역시 이들과 남도의 서정과 정신이 면면이 고인 집단무의식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고 자라, 잠시 서울 유학을 마친 후 줄곧 고향에 터 잡고 온몸으로 남도의 잠재력과 가치를 키우고 높이는 데 주력해 온 이대흠은 명실상부한 남도 토박이이자 지킴이이다. 생전에 정진규 시인은, 한국 시단에서 보기 드문 남성적 힘을 지닌 시인으로 이대흠을 꼽았다. 사소한 정한의 토로나 경박한 시류의 변화에 기울지 않고, 자신만의 참신하고 건강한 시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치열한 열정, 웅혼한 필치에 대한 찬사로 풀이된다. 이대흠의 시는 독창적 언어감각, 따뜻하면서도 담백한 서정, 불과 물을 혼융한 이미지와 은유의 행간이 머금고 있는 내재적 함축미가 특장이다.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감정의 과잉이나 이완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눈에 띄는 기교나 화려한 언어유희, 부박한 낭만을 생리적으로 싫어한다. 선이 굵고 진솔하면서도, 재미와 의미를 아울러 심화 확장하는 데 맛을 들인다. 그런 그의 시 도처에서 남도는 ‘포스트 서정시’의 메카로 재탄생한다. 그의 시는 남도의 언어미학과 토착적 율동미의 보고다. 그는 남들이 소홀하게 다루어 온 전통의 숨은 숨결을 정치하게 연마해 그윽한 정신문화적 향기를 새롭게 북돋운다. 단순히 고향을 찬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토속적 상상력과 알레고리, 참신한 이미지와 은유를 조합해 시공을 초월한 우주적 신화를 창조한다. 저 뜨거운 돌, 태양을 따서 그녀에게 주기 위해 나는 감나무 위에 올라갔어요 손을 위로 뻗어 나는 타오르는 별을 땄었는데 차갑게 익은 감이었어요 한 입 베어 먹으니 혀끝이 설탕처럼 녹아들었어요 그녀는 팔을 벌려 소리를 질렀어요 잘 익은 감을 따서 그녀에게 던졌지요 그녀가 받은 건 단단한 흙덩이였어요 나는 더 높이 올라갔어요 내가 올라갈수록 그녀의 몸뚱이는 납작해졌어요 나는 더 많은 감을 따서 그녀에게 던졌어요 - 「지나공주. 3」 부분 문명은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순수 자연만으로도(여기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원이다.) 얼마든지 무궁한 시가 가능하다는 텍스트 같다. 하늘에는 뜨거운 돌인 태양과 타오르는 별, 지상에는 감나무와 감, 흙덩이, 사람이라곤 지나공주와 화자뿐이다. 아담이 사과를 따서 이브에게 주는 에덴에서만큼이나 원시적이다. 그런데 시인은 시곗바늘을 현재로 돌려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다만 사과를 감으로 이브를 지나공주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이다. 시인은 시공을 초월한 마술을 통해 무수의 이야기가 담긴 신화를 재창조하고 있다. 이를 우주망원경으로 확대하면 그리스신화가 우리 은하계의 신성처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그 신화를 남도의 언어/율동으로 재구성한 권두시 「남도」를 보자. 강물이 리을리을 흘러가네 술 취한 아버지 걸음처럼 흥얼거리는 육자배기 그 가락처럼 산이 산을 들이 물을 물이 물을 흐을르을 흐을르을 전라도에서 절라도까지 리흘리을 리흘리을 목숨 줄 감고 푸는 그 가락처럼 - 「남도」 전문 10행 85음절로 된 짧은 시인데 그중 자음 ‘ㄹ’이(초성 17, 종성 24) 41개나 된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물은 상형문자로 ‘ㄹ’자 형태를 취한다. 술 취한 아버지 걸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강물도, 술도, 걸음도 ‘ㄹ’이 그 받침을 이루고 있다. 한글 자음에서 ‘ㄱ’은 가로를 세로가 막고 세로는 또 가로가 막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기에 ‘벽이 막히다’처럼 헉헉 숨이 막힌다. 반면 ‘ㄹ’은 앞과 뒤가 툭 터져 유유히 달리는 형국이다. 마치 죽음(ㄱ)에서 살아난 (ㄹ)듯 말이 달리고, 길이 열리고 불길이 살아오른다. 즐겁고 신날 때면 랄랄라, 루루루, 룰루랄라 등, 역동적 감탄사가 절로 어깨춤을 춘다. 이를테면 남도의 한이 흥으로 승화된다. ‘ㄹ’은 전형적인 남도의 지세다. 강이 그렇고 산이 그렇고 말이 그렇고 육자배기 가락이 그렇다. 여기에 시인은 “흐을르을”, “리흘리을”, 즉 ‘ㄹ’을 엿가락처럼 늘여 빼 감칠맛을 더한 가락을 새롭게 선보인다. 왜 제목이 “남도”인가를 단 두 개의 의태어/의성어가 설명하도록 한다. 이어서 ‘ㄹ’은 ‘ㅇ’으로 율동미를 완성한다. 더운 뱀 숨결이 바람 안치는 소리 랑랑랑 랑랑랑 불을 삼킨 뱀 랑랑랑 보리밭 가 라디오에 끓는 잡음 나를 무는 나를 무는 랑랑랑 랑랑랑 더운 뱀 숨결이 더운 뱀 숨결이 - 「아지랑이」 전문 “불을 삼킨 뱀의 불”은 ‘ㄹ’을, 랑랑랑은 제목 “아지랑이”와 함께 ‘ㅇ’을 분절음소로 하며, 각각의 상형문자를 상징하는 의미소로 기능한다. 제목 아지랑이는 분절음소 ‘ㅇ’이 세 개나 초성과 종성을 이루고 있다. 시인은 “나를 무는” “더운 뱀 숨결”을 “랑랑랑”이라는 주문으로 재운다. 굳이 원불교나 불교의 일원상을 이르지 않더라도 ‘ㅇ’은 공이나 강처럼 쉴 새 없이 구르는/흐르는 형태로 도형 중 궁극의 완성형에 해당한다. 최초의 모어인 엄마/어머니, 아빠/아버지도 모두 ‘ㅇ’을 초성으로 한다. 위의 시는 “더운 뱀 숨결”이 앞뒤로 세 차례나 반복되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다섯 차례나 반복되는 “랑랑랑”(더운 뱀 숨결이 바람 안치는 소리인)이 율동미 넘치는 시의 가락에 결정적 추임새를 넣기 때문이다. 마치 미당의 「화사」를 새롭게 리메이크한 듯하다. 이처럼 이대흠의 시에는 남도의 언어미학이 구구절절 맛을 돋우며 똬리를 틀고 있다. 그 언어미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막힌 것은 뚫고, 그 걸음걸음에 바퀴를 달아 함께 내달리는 공동체 정신(두레)의 언어철학으로 자리매김 된다. 감각적 언어와 모성적 흙의 교직 ㅡ정영주 시집 『달에서 모일까요』(시산맥, 2025) ‘모’가 가신다는 것이 시에서 꼭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니다. 일상적 상투성과 그로 인한 상호표절, 동어반복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전복적 사고, 형용모순의 반어법, 탈문법적 형식의 파괴 등, 일부러 날선 모를 문맥의 요소요소에 불협화음처럼 배치하는 전략은 상용화된 지 오래다. 비정상으로, 정상과 상식의 반시적 안일을 극복하는 것, 다시 말해 사고의 반역적 변환을 통해, 늙어빠진 사물과 사리에 대한 젊은 이해를 촉구하는 ‘낯설게 하기’는 이제 익숙한 전통보다도 오히려 더 낯익다. 둥글고 부드럽고 달콤한 무감각보다 날카롭고 맵고 껄끄러운 모는 심신의 요소요소에 자극을 주어 생소한 느낌과 깨달음, 싱싱한 공감의 파동을 부추긴다. 비가역적 폭력으로, 겹겹이 은폐된 진실의 궁극적 환원(본질적 언어 회복)을 도모해야 할 만큼 지상의 언어와 사고는 마비되어 있다. 시에서 모난 돌은 “정을 맞는 것”이 아니라 시적 나태와 안일을 부수고, 그 눈물로 썩은 물이 고인 웅덩이를 말끔히 부시는 도구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조로부터 사뭇 자유로운(자유로워진) 시를 새롭게 나투는 시인, 다채색 모를 다스려 담백한 수묵화의 부드럽고 섬세한 터치에 몰입하는 시인이 정영주다. 그는 등단 직후부터 마치 바늘로 후비듯 감각적이고 날선 언어를 선보였다. 모더니티 한 도시언어와 모성적 흙의 감성이 혼재해, 서정시의 좌표를 미래의 시간대로 이동시키는 독특한 시세계를 추구했다. 그의 불온한 상상력, 도발적이고 모난 언어는 두루뭉술하게 다듬은 어법의 일상적 답습에 안주하던 시단에 신선한 바람으로 작용했다. 헌데 이번 시집에는 그런 자극적 성향의 모가 많이 가시고(아직도 특유의 감각적 언어는 시의 중심언어로 기능하지만) 그 자리를 신앙적 사유와 친자연적 감수성의 곰삭은 향기가 대신하고 있다. 다소는 시간의 영향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남도의 정서에 고즈넉이 ‘영혼의 몸’을 적신 운명적 세례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아직도 묵호 앞바다에 두고 온 실낙원의 원형질이 남도의 깊고 곤한 품속에서 살갑게 발효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난 돌에 모나게 앉는다 돌에 핀 지천의 꽃이 흐르다 굳는다 산수유처럼 쉬이 지지 않겠다고 돌 속으로 파고든 이끼 꽃들 흐른 물 놓칠수록 돌에 새기는 물이 제 소리 조심할 때 돌이 돌을 껴안고 흔들어대는 노래 계곡을 도는 해그림자로 산수유 봉우리가 열리고 몸통이 거칠어진 어미나무의 잔소리가 지리산 능선까지 산수유를 터트린다 터져서야 보이는 것들 길 없는 길을 왔지만 꽃이 나누어 주는 지리산 낮고 높은 이야기 길 닫힌 입이 듣고 잠긴 귀가 말하는 계곡의 술렁임에 갇힌 발바닥 모두 일순간 꽃이 된다 - 「들꽃이 흐른다」 전문 “모난 돌에 모나게 앉는다”는 첫 행부터 심상치 않다. 겉으로 보면 모가 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를 바짝 세우고 있다. 그러나 “돌에 핀 지천의 꽃이 흐른다”는 2행은 통상적 어법과 다른 시 읽기를 주문한다. 돌에 꽃이 피고 그 “꽃이 흐르”는 초현실적 상상이 주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적 상징과 은유, 이미지가 특단의 탈일상적 장치로 기능하는 알레고리는 1행을, 모난 돌이니까 모나게 앉을 수밖에 없는, 이를테면 모를 모로 다스리는 이열치열 식 모순어법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모난 돌에 다소곳이 모를 지우고 앉는다고 한다면 상투적 사유가 시의 신선도를 반감하는 안일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돌에 피는 꽃은 딱딱한 광물에 부드럽고 아름다운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창조신화와 맥을 함께한다. 돌처럼 뾰족하고 단단한 모는 이윽고 “터져서야 보이는 것들” “길 없는 길을 왔지만” “닫힌 입이 듣고 잠긴 귀가 말하는” 등의 내밀한 사유로 다스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몸통이 거칠어진 어미나무의 잔소리가 / 지리산 능선까지 산수유를 터트”리는 ‘물화일체(物話一體)’의 천지개벽에 이른다. 여기에서 “어미나무의 잔소리”는 창조주의 육성과 맞먹는 언어 중의 언어를 가리킨다. 사물을 빌려 일련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전략은 아래의 시에서도 이어진다. 허옇게 뒤집어쓴 눈으로 강가에 홀로 앉아있는 나무의자 누가 쓸쓸한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차고 냉랭한 의자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안식이었을 터, 마치 혹한을 견디는 것이 사유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직은 성성한 네 다리가 의연하다 - 「누가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 부분 강가에 버려진 나무의자를 보며 “누가 쓸쓸한 저 사유를 내다 버린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의 안식”이었다가 외따로 버려져서도 “혹한을 견디는 것이 사유라고 말하는” 의자는 어쩌면 화자 자신의 화신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화자는 소외되고 낡은 사물/무정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새롭게 인간적 사유까지 부여하는 창조주(제2의 창조)의 특권을 누린다. 함축의 언어와 웅숭깊은 사유 -유진수 시집 『네가 우는 줄도 모르고 밤새 물들었다』(문학들, 2025) 아름다운 인연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 열정의 산물만도 아니다. 깊은 눈물을 함께 나누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원의 열쇠다. 시간은 태만을 부르고, 열정은 실망을 부르기 쉽지만 깊은 눈물은 이웃과 자신을 하나로 묶어 공동의 감성미학을 일군다. 평생에 걸쳐 한둘만이라도 자신의 가치를 먼저 알아주고, 아픔을 함께 앓아주며, 언제나 낙락장송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사실만으로 그의 생은 행복하다. 유진수는 그런 시인이다. 그런 이웃과 함께하며, 스스로도 이웃에게 그런 존재다. 그는 일상적 희로애락이 몸에 밴 감수성을 애써 감추거나 티 나게 꾸미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절제가 돋보이는 여느 시 못지않게, 안팎으로 분출하는 감정과 사고를 자연스럽게 다독이고 갈무리한다. 몸에 익은 함축의 언어와, 진솔한 사유로 자신만의 시풍을 다져나가는 비결이다. 그 유장한 정신문화의 배경은 역시 남도다. 세월을 삶으면 이런 맛일까 질긴 양지 사태 곰고 고아 말라 틀어진 중년의 생채기 초여름 가랑비 내리듯 담백하게 달랠 수 있을까 (.....) 밥알 쪼개 입에 넣어주던 어머니의 강이 약손처럼 흐르고 뒤를 품어 다독이던 아버지의 평야가 물결치는 곰탕 한 그릇 상처를 고면 이런 맛일까 깊을수록 맑아지고 아플수록 깨끗해지는 지난한 영혼들의 안식(安食) 다시 일어서는 힘 - 「나주곰탕」 “나주곰탕”은 영산포 홍어와 함께 나주를 대표하는 명물이다. 화자는 오랜 전통을 조리해 온 음식을 통해 지난한 남도의 삶을 조명한다. 첫 연과 마지막 연의 관문을 “세월을 삶으면 이런 맛일까”와 “상처를 고면 이런 맛일까”라는 두 개의 질문으로 연다. 그러나 실은 질문 속에 이미 절실한 해답을 담고 있다. 나주곰탕에는 “지난한 영혼들의 안식(安食)”으로 “다시 일어서는 힘”이 흥건히 고여 있기 때문이다. 그 따끈한 국물 속에서 (나주곰탕 국물이) “약손이던” “어머니의 강”과 물결치는 “아버지의 평야”라는 절창이 태어난다. 아래의 시 「곡강」도 나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름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사연이 주제이다. 그 강은 곡강(曲江)이면서 곡강(哭江)이기도 하다. 울며, 갈지자로 횡보해 본 적 있는가 곡강은 그런 강이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곡강은 바람도 모르게 굽이쳐 흐른다 등 굽어 찾아온 자들 오장육부 드러내며 소리쳐 울고 싶을 때 돌로 슬픔을 눌러두지 말라고 새벽안개 마중 보내 하얗게 흐르는 것이다 - 「곡강」 부분 “곡강”은 본류인 영산강과 함께 남도의 희로애락을 아우르는 영물이자 성소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바람도 모르게 굽이쳐 흐르”는 곡강은 강변 사람들의 만고풍상을 싣고 유유히 달린다. “등 굽어 찾아온 자들 / 오장육부 드러내며 소리쳐 울고 싶을 때 / 돌로 슬픔을 눌러두지 말라고” 남도의 뭉친 한을 대신 울어주는 곡비인 것이다. 그 강의 주인은 죽음 앞에서도 자식 걱정뿐인 “할매”다. 웅얼웅얼 우리 할매 주문을 거시네 엎치락 에구구구 내 빨리 죽어야지 뒤치락 에구구구 내 새끼 못할 일 시키네 죽어야지빨리죽어야지 죽어야지어서죽어야지 우리 할매 주문에는 마법이 살아있네 나죽고내새끼아프지마라 나죽고내새끼오래살아라 - 「주문(呪文)」 전문 화자는 정형적 운율로 주술 분위기를 한결 북돋우고 있다. 4연과 마지막 연은 음절을 단어 구분 없이 한데 붙여(띄어쓰기 없이) 주문의 시각적 효과를 더한다. 언어와 그 형식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기표에 해당하는 제목 “주문(呪文)”의 기의는 “아프지 말고 오래 살아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주문을 외울 때마다 순교(殉敎)를 거듭하는 할매의 절절한 희원이 읽을수록 목울대를 적시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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