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수몰
수몰 김지민 아버지와 경포호를 걷는다 요즘 어떻게 지내니? 그럭저럭요 호수는 지겹도록 넓다 근처에는 허난설헌이 살았던 집터가 있고 그는 내 나이에 죽었다 머리 위로 볕이 쏟아진다 나를 늙게 하는 햇볕 가능한 한 깊숙이 쬔다 만나는 남자는 있니? 그런 거 없어요 정말? 할 말이 바닥났는데 호수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술은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그럼 내가 무슨 재미로 사니? 아버지가 해쭉 웃으며 나를 앞지른다 재밌자고 사는 저 뒤통수가 내 아버지다 아버지의 그림자를 짓이기며 걷는다 호수가 참 온화하지 않니? 그런가요 호수는 빛을 받아 고요히 웅성거리고 바닥을 드러내는 호수를 보고 싶다 호수가 가려 둔 바닥을 난도질당한 빈터를 보여주고 싶다 아버지가 쩍 하품한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가능태
가능태 김지민 돌은 미치기 일보 직전 일보를 앞두고 돌은 돌로 가만하다 돌에는 깨어지려는 마음과 지키려는 마음이 단단히 도사리고 돌에 갇힌 것은 돌 하나 돌이 벗어나려는 것은 고작 돌 하나 새이면서 그 새가 갇힌 새장이기도 한 돌 하나 돌에 갇힌 돌이 온몸으로 돌을 부딪는다 그러나 돌이 돌을 놓아 주지 않아서 돌은 돌로 있다 여기 울고 있는 돌 하나 누군가가 저를 멀리 던져 주었으면 누군가가 저를 깨트리고 그 속에서 저를 꺼내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돌 하나 돌을 벗어던지고 싶고 완전히 다른 돌이 되어 보고 싶고 돌 아닌 것이 되고 싶지만 언제나 돌과 함께 있는 돌 하나 돌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돌로 귀결되는 슬픔을 안은 돌들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깨어지기 직전의 기미를 온몸으로 붙들고 있다 전진하는 실금 하나 낳고 있다 돌이 깨어지는 것은 일보 전진한 후의 일이다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모색 여름날
故김지민. 나는 은이 자신을 ‘은’이라고 소개한 후부터 자주 그 이름을 불렀다. 은, 하고 혀끝이 앞니 뒷면을 스치는 그 이름이 아름다웠다. 착한 사람일 것 같았다. 예쁜 사람일 것 같았다. 내가 가끔 은, 이라고 부르면 은은 왜?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냥 불러봤다고 이야기했다. 싱겁긴, 은이 웃었다. 이모티콘으로든, 목소리로든. 나는 내 핸드폰에 저장된 ‘김은’의 전화번호를 내려다보았다. 통화시간 0분 20초. 장례식장 입구에 서 있다가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냉장고에 넣어둔, 굳어가고 있을 생크림 케이크와 무알콜 샴페인이 떠올랐다. 지민이는 중학교 때 어떤 애였어요? 커다란 손을 내민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우물거렸다. 그냥, 뭐, 얌전하고…… 가끔 쾌활하기도 하고……. 빈소를 채운 사람들 중 나는 유일하게 은, 아니, 지민의 중학교 시절 친구였다. ‘잘 몰라요’ 라고 빠져나갈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