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광장

▶염승숙, 「지도에 없는」 감상하러 가기 ▶[기획]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조경란, 「응원의 방식」 안중경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2024년 『현대문학』 등단.

시간을 넘어 되살아난 문학의 순간들과 함께, 그 의미와 감상을 새롭게 나누며 문장웹진의 아카이브를 확장합니다.조연호, 「저녁의 기원」을 읽고(《문장웹진》 2005년 8월호) 김민주(리피워크스) 김민주(리피워크스) 작가 한마디 기원을 좇는 여정 ▶조연호, 「저녁의 기원」 감상하러 가기 ▶[기획]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신용목,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김민주(리피워크스) 다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일상의 순간들을 그림으로 담아 냅니다.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 감상하러 가기 ▶ [기획]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 서경석,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김민주(리피워크스) 다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일상의 순간들을 그림으로 담아 냅니다.

   나는 무심코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다    고장난 라디오 다 떨어진 슬리퍼 너를 만날 때 입었던 청바지처럼  이제는 빛바랜 너의 사진,  사진 속에 담긴 낡은 사랑 온 세상이 잠든 새벽 3시  라디오 앞에 앉아  나는 무심코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다  찍,찍,찍,찍,찍-.   고물 테이프가 되감긴다 유리창을 타고 흐른  빗물이 되감긴다 찌이익 내 슬픔도  찌이익 내 눈물도  찌이익 모두 되감아지고 있다    눈물이여 흘러라 나의 사랑도 그대의 미움도 모두 젖어 버리길  옛 사랑의 노래가 흐르길  이 비가 그치길     

  탈탈 소야곡 1 낡은 음성으로 다용도실의 적막을 채우는 탈수기의 은색 옷가지를 흔들던 손이 고사리처럼 자라 내 머리를 원통 안으로 빨아들인다 기억들이 탈탈 풀어져 빨랫감에 얹히고 탈탈걸음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씨디의 뒷면처럼 선명해지기 시작하면 나는 탈수기의 리와인드 버튼을 눌러보고 싶다 2 흘러간 기억의 저편엔 탈수기가 없었는지 유난히도 습했던 여름비에 젖어 세탁을 잘못한 빛바랜 추억들이 예상보다 많이 배려있었다 비 맞은 만큼 부푼 가슴을 따라 습기 찬 눈물이 흘러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탈수기 안에서 배설된 물이 빠져나와 다용도실 바닥에 강줄기를 내어 나머지 또 다른 기억을 그려내고 있었다 3 엎질러진 눈물을 탈수기에 꽂아서 떨리는 가슴에 귀 기울여 보지만 씨디의 심장이 탈탈대는 그 소리에 기억은 이미 말랐는지 머릿속이 건조하다     

^ㅡㅡㅡ^ 5월 1주장원 나는 무심코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다                          Lejardin    고장난 라디오 다 떨어진 슬리퍼 너를 만날 때 입었던 청바지처럼 이제는 빛바랜 너의 사진, 사진 속에 담긴 낡은 사랑 온 세상이 잠든 새벽 3시 라디오 앞에 앉아 나는 무심코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다   찍,찍,찍,찍,찍-.  

리와인드 버튼과 스톱 버튼이 없는, 라스트신과 엔딩크레딧도 없는, 그저 무한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신(scene)과 신의 끊이 지 않는 연속…….    나는 꿈을 자주 꾸고 그 꿈은 대체로 나쁜 꿈이다. 그렇다고 기 이하게 뒤틀린 악령이 나온다거나 육체적인 고통이 있는 건 아니 다. 전쟁이나 지진, 교통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이 아프다거나 죽었다는 소식도 그곳엔 없다. 오히려 내가 꾸는 꿈은 무척 감각적이어서 때론 아름답다. 꿈에서의 빛깔, 소리, 감촉은 현실보다 더 정교하고 섬세하다. 가령 꿈에서 본 산호색의 원피스는 현실에는 없다. 꿈속의 산호색은 실제의 빛으로는 직조할 수 없 는 질감과 농도를 갖는다. 그곳에선 모든 것이 빛나고 청아하며 말 랑말랑하다. 그런데도 그 감각적인 무의식 덩어리를 나쁜 꿈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건, 꿈속에서의 내 감정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는 대개 슬프고, 꿈에서 깬 직후에 그 슬픔은 증폭된다.   

나른한 여름날 오후 팬티 바람으로 형편없는 영화를 보던 십대 소년이 낄낄대며 리와인드 버튼을 누른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리를 펴고 일어나 벽에 몸이 닿지 않게 주의하며 팬티를 올렸고 바지도 올렸고 조심스럽게 오른발을 거두어들이며 반쯤 체념했다. 하지만 아직 내게는 자유의지랄까, 제기랄, 아무튼 그런 게 있었다. 덕분에 나는 쭈그리고 앉는 동작을 반복하는 대신 오른쪽 주머니에게 전화기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정지돈 씨였다. 나는 그에게 다 왔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물도 내렸다. 우리는 모두 습관의 노예다. 계단을 오르는데 등줄기를 타고 더운 땀과 식은땀이 동시에 흘렀다. 곧이어 한여름의 뙤약볕이 쏟아졌다. 햇빛 속에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지돈 씨가 보였다. 어딘가 유령 같기도 하고 하얀 굼벵이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어디 아프냐고 얼굴이 창백하다고 묻자 정지돈 씨는 요즘 통 입맛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