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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돌멩이, 한국문학에 대한 성찰
서론2024년, 이상문학상의 주관사 <문학사상>은 재정난으로 인해 휴간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상문학상의 주관사도 문학사상에서 다산북스로 변경되고, 표지 디자인도 바뀌게 되었다. 이상문학상이 가지는 한국 문학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문학상 하면 거론되는 3대 문학상은 다음과 같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물론 ‘상’ 하나가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이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도 아니고, 작가는 상 하나를 받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상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적어도 현재 한국 문학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한국 문학을 접하는 일반 독자의 경우에도 현대 한국 소설을 읽기 위해서 문학상 작품집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예지와 같은 문학 잡지들의 경우에는 일반인이 접하기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로 문학상 작품집이 독자들의 첫 현대 한국 문학 작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이상문학상이 2026년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눈과 돌멩이>에 대한 코멘트를 보던 중 흥미로운 코멘트를 발견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겼다. '순수 문학은 더 이상 대중문학이라 볼 수 없는 것일까?'“한국 소설에서 부족했던 순전한 재미 요소가 느껴진다. 장르 소설 순문학 나누는 거 웃긴데 장르 소설 같은 면이 있어서 재밌음. 글고 눈과 돌멩이는 너무 조은 순소설 같다. + 뒤에 작가 인터뷰가 있는데 소설가를 하나의 셀럽으로 만들기 위한 혹은 하나의 소설을 진득하게 같은 느낌이었음. 다른 마케팅이 시작된 느낌. 민음사 tv로 촉발된..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모든 사람이 책을 중요히 여긴다고 살다가 이게 아주 극소수의 리그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다. 대중문학이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일단 이 코멘트는 사용자 한 명의 의견으로 한국 문학 전체를 대표하진 못한다. 그러나 한 독자의 의견으로 충분히 얻어갈 수 있는 부분이 존재했다. 하나씩 문단을 끊어 보면,1) 한국 소설에서 부족했던 순전한 재미 요소가 느껴진다.-> 이 사용자가 바라 본 한국 소설들은 아마 매우 최근의 것으로 추측되는데, 비교적 적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2) 장르 소설 순문학 나누는거 웃긴데, 장르 소설 같은 면이 있어 좋았음.-> 최근 자주 거론되는 문제인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소설집은 장르 문학처럼 보이는 소설도 많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누는 것이 웃기다면서 구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는 있지만,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별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3) 그리고 웃기게도 나는 모든 사람이 책을 중요히 여긴다고 살다가 이게 아주 극소수의 리그라는 걸 확실히 깨닫게 된다. 대중문학이라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순수 문학은 극소수의 독자들이 읽고 있다고 인식하며, 순수 문학이 대중 문학적이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두 문구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사용자가 주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1. 한국 문학은 재미 요소가 비교적 덜하다. 2. 그럼에도 이번 작품에는 장르 문학적 요소가 있어 더욱 재미를 더한 것 같다. 3. 그러나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순수 문학이 가진 대중 문학의 요소는 사라진 것 같다.이러한 인식이 왜 생겨났으며, 어떤 부분에서 조심해야하고, 어떤 관점에서는 타당한 한줄평으로 여길 수 있는지 분석할 예정이다.두 번째 흥미로운 점은 인문 360에 올라온 주원규 평론가의 글이다. https://inmun360.culture.go.kr/content/538.do?mode=view&cid=2373256이 글에서는 장르문학에서 철학적 사유가 가능한지, 장르문학이 어떤 차별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위에 나와 있는 한 사용자의 평론과 상당히 연결지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눈과 돌멩이에 대한 분석, 그리고 왓챠피디아 사용자의 평론과 주원규 소설가의 글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예정이다.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총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국문학적 의의, 2. 철학적 의의(문학평론의 관점), 3. 번역의 의의 현대 문학 작품이 이 세가지 기준에 모두 부합하는지가 이번 보고서의 핵심이다. 세가지를 기준으로 잡은 이유는 이 작품의 가능성을 평가하는 가장 객관적인 기준이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문학적 의의와 철학적 의의를 통해 이 작품의 작품성을 입증할 수 있으며, 번역의 의의를 통해 해외로의 진출, 즉 더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해외의 유명 작가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많은 국가에서 읽히기도 하지만 한국 문학의 경우에는 특정 작가를 제외하면 그런 사례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얽혀있는데, 먼저 작품이 번역의 의의에서 우위를 갖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연구의 목적은 결국 한국문학의 성찰에 달려있다. 202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한국문학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현재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대상작 <눈과 돌멩이>와 그에 따른 독자의 반응, 그리고 현재 한국문학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이번 연구에서 제시해볼 예정이다.본론1. 국문학적 의의1) 위수정 작가의 작품들위수정은 『은의 세계』, 『우리에게 없는 밤』을 통해 안온해 보이는 삶 이면의 욕망과 균열을 응시해온 작가이다. 「눈과 돌멩이」는 이 작가적 관심, 본능과 욕망, 금기에 대한 관심을 애도와 상실이라는 주제로 확장하면서 더 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요소는 재한의 세심한 내면 묘사에서 볼 수 있다. 재한은 코요의 집에 온 뒤로 샤워를 하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진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낯선 풍경 속에의 하루가, 수진이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마당에 친구의 유골을 낯설고 차가운 곳에 뿌려주고자 왔다는 사실도, 재한에게는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영화의 장면처럼 이상하게 느껴진다. 유미와 재한은 영화 속 장면을 코요의 집에서 떠올린다. 봉준호,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큐브릭 영화 속의 한 장면 같다고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저 이곳에 남은 것은 기묘한 감각과 이상한 기분만 남을 뿐이다. 어쩌면 일종의 부조리의 감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위수정 작가는 이러한 기묘한 감각과 이상한 기분이 등장하는 소설로 우리를 매혹시키곤 했다. 2) 메타포작품의 메타포는 2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제목에도 등장하는 ‘눈’ 그리고 ‘돌멩이’이다. 놀라운 점은 이 눈과 돌멩이는 너무나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먼저 ‘눈’은 이 작품의 차가운 배경을 형성해 준다. 눈은 그들의 방해꾼이 되기도 한다. 유미와 재한이 빌린 차는 예약의 오류로 인해서 스노우 체인을 달지 못한 상태이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눈은 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눈은 그럼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형성한다.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보는 것만 같이 눈은 이 작품의 차가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동시에 따뜻한 분위기를 형성해주는 것 같다. 중간에 재한은 코요의 정원에서 일부러 눈을 훼손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는 마치 어릴적 수진이 유리창을 실수로 깼던 것처럼 순전하고 무결한 것을 깨뜨리는 충동을 직접 재한이 이해하도록 하는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재한은 그 일화를 떠올리며 아직도 수진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코요와의 대화를 통해서 ‘세계가 나뉘는데 한 발짝이면 충분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수진이 느꼈던 당시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도록 한다. 수진도 유리창을 깨뜨리면서 분명 이 세계의 나누어짐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겨우 살짝 건드린 것만으로 깨지는 유리창과 갑자기 도망을 치는 수진의 감정은 재한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돌’도 매우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된다. 돌멩이는 그 단단함 때문에 파괴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재한이 돌멩이를 쥐고 "이것을 힘주어 던지면 저 창이 깨어진다. 간단한 힘의 원리"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돌멩이는 재한 안에 잠재된, 평소엔 억누르고 있는 파괴적 충동, 단 한 번의 결단으로 모든 걸 망가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손에 쥐어보는 경험이다. 이건 수진이 유리창을 깼던 순간, 그리고 궁극적으로 스스로 삶을 끝낸 순간의 마음과 겹쳐지기도 한다. 또한 소설 마지막 문장이 "재한은 주머니 속 돌멩이를 꼭 쥐었다. 그것은 단단했고 언제든 만질 수 있었다"이다. 이건 코요가 "떠난 사람을 위해 매일 기도"하며 그 상실을 견디는 방식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코요에게는 기도라는 반복 행위가 있다면, 재한에게는 이 돌멩이라는 물리적 대상이 있는 것이다. 눈처럼 사라지는 세계 속에서, 언제든 손을 뻗으면 만져지는 유일한 확실성, 그게 재한이 이 여행에서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소설은 확실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은 모호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수진이라는 타인을 그들은 결국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기에 그들은 더욱 더 애도와 추도의 방식으로 수진을 떠나보낼 수 있다. 각자에게 애도와 추도의 방식은 다르기 마련이다. 각자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돌멩이를 움켜쥔 채로 연약한 유리창 앞에 놓여져 있는 존재이다. 가끔은 그 돌멩이라는 확실성으로 유리창이라는 불확실함을 깨어버리는 충동을 가지고 살아가고, 수진은 결국 그 유리창을 깨고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다. 너무나 불확실한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폭설을 맞아야 할 것이다. 스노우 체인도 없는 자동차를 타고 5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가며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위수정 작가의 <눈과 돌멩이>는 상당히 전형적인 단편 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하면서, 매우 독창적인 소재와 다양한 문학, 영화의 인용으로 가득하다. 특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 실제 영화 감독들을 인용하는 부분은 매우 특이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현대 한국 소설은 인물 내면의 세밀한 묘사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 면이 있다. 위수정도 아마 이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한과 유미 그리고 수진의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관계, 그러면서도 재한과 유미의 내면은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다.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그들은 서로 미스터리한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마치 코요가 그 둘이 친구가 아닌 것 같다고 농담을 한 것처럼 말이다. 거리감이 느껴지면서도 아닌, 이 모호함을 소설은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점은 이 작품이 애도의 방식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눈과 돌멩이>에서 코요라는 인물이 수행하는 애도는 서사의 주된 축인 재한과 유미의 애도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재한과 유미가 실제로 죽은 수진을 애도하는 반면, 코요가 애도하는 대상은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떠나 멕시코로 간 사람이다. 그럼에도 코요는 그를 죽은 사람으로 상정하고 매일 불단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이 설정은 애도라는 행위가 반드시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코요에게 애도는 상실의 실재 여부보다,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주체의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코요의 애도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애도의 본질, 그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의 크기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은 자가 상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견뎌내는가에 달려 있다는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코요는 죽지 않은 사람을 애도하고, 재한과 유미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지만, 두 사람도 모두 결국 남겨진 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 소설이 코요라는 인물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애도란, 떠난 이의 부재를 증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남은 이가 그 부재를 살아내는 방식이 아닌가.2. 철학적 의의작품 내내 등장하는 돌멩이는 마치 종교적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철학자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이 특정한 사물이나 장소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을 '히에로파니'라 명명하며, 돌이야말로 이러한 성현의 가장 원초적인 매개체 중 하나라고 보았다. 돌은 그 자체로는 세속적인 사물이지만, 특정한 순간 그것이 인간에게 성스러운 것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단순한 물질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 <눈과 돌멩이>에서 재한이 눈 덮인 정원에서 우연히 발견한 돌멩이를 손에 쥐는 장면은 바로 이 히에로파니의 구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돌 가운데 하필 이 돌멩이가 선택되고, 그 순간 재한의 내부가 달아올랐다고 서술되는 것은 세속의 사물이 돌연 성스러운 무게를 획득하는 순간의 감각적 재현이라 할 수 있다.엘리아데에게 성스러운 돌은 흔히 세계의 중심으로 기능하며 하늘과 땅, 신성과 인간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눈과 돌멩이>에서 돌멩이가 발견되는 장소가 다름 아닌 코요의 정원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코요는 죽지 않은 자를 죽은 자로 상정하고 매일 기도를 올리는 인물, 즉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사는 인물이다. 그런 코요의 정원에서 주워진 돌멩이는, 재한에게 있어 죽음과 삶, 수진의 부재와 자신의 현존 사이를 잇는 축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후 재한이 삼나무 숲, 곧 수진의 뼛가루가 뿌려진 장소를 떠나며 이 돌멩이를 챙겨가는 행위는 성스러운 장소의 힘을 물질적 매개체에 담아 일상의 세계로 가져가려는 시도, 엘리아데식으로 말하자면 성의 파편을 속의 영역으로 이행시키려는 몸짓으로 읽을 수 있다.또한 엘리아데는 성스러운 사물과의 접촉이 곧 시원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경험을 매개한다고 보았다. 재한이 숲에서 나오며 주머니 속 돌멩이를 만질 때마다 "코요의 눈빛과 그의 정원"이 떠오른다는 서술은, 이 돌이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만질 때마다 그 근원적 순간, 성스러움이 처음 현현했던 그 밤의 정원으로 그를 되돌려놓는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것은 단단했고 언제든 만질 수 있었다는 서술은, 돌멩이가 반복 가능한 성현의 통로로서 재한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음을 뜻한다. 이는 곧 세속의 시간 속에 성스러운 시간의 파편 하나를 영구히 이식해두는 행위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돌멩이는 애도라는 사건을 일회적 경험이 아니라 손을 뻗을 때마다 재현 가능한 종교적 체험의 층위로 격상시키는 도구라 할 수 있다.엘리아데는 비종교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을 구분하였다. 비종교적 인간은 흔히 볼 수 있는 자신이 ‘무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종교적 인간은 기독교나 불교 등 실제 교회, 절에 다니는 신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종교적 인간도 어쩔 수 없이 종교적 인간처럼 성스러운 것들을 믿고, 경험한다고 이야기한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관습이 모두 이런 종교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결혼식, 장례식 같이 대표적인 인간의 관습도 모두 종교적인 성격을 띈다. 그러나 비종교적 인간도 결혼식과 장례식은 모두 경험한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나무에 수진의 유골을 뿌리는 장면이라던가, 코요의 정원에서 느끼는 신성함 모두 비종교적 인간이 속된 것에서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엘리아데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터뷰나 다른 여러 자료를 찾아보아도 그런 근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분히 돌의 의미를 성스러운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자연물로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3. 번역의 의의먼저 번역의 필요성부터 이야기 해볼 수 있다. 번역의 가장 큰 의미는 한국 문학의 문화적 의미 확장이라 볼 수 있다. 한국 문학은 당연히 한국 사람에게 더 잘 읽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의 문화권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작가의 언어 또한 한국어이기 때문에 작가가 전하고 싶은 어투나 말 하나, 하나가 정확히 전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번역이 된다면 많은 어려움을 맞이할 수 있다. 그 어려움은 아래 더 서술하기로 하고, 번역의 의의는 문화적 확장이 될 텐데, 과연 <눈과 돌멩이>가 번역이 되어야만 하는 가치가 있는지 한 번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한강의 작품들의 경우 번역이 노벨 문학상 수상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처음 번역을 할 때 노벨 문학상 수상을 의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원초적 목적은 단순히 한국 문학의 문화적 확장에 있을 것이다. 한국 문학이 외국 사람의 마음 또한 공감시킬 수 있을지, 눈이라는 아름다운 풍경과 돌이라는 신성성을 전달할 수 있을지 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눈과 돌멩이>는 번역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앞서 말한 국문학적, 철학적 가치를 모두 지녔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이 작품의 배경은 일본이라는 점에서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히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오히려 눈이라던가, 마치 설국과도 같은 풍경은 일본의 홋카이도 사람들에게 더 익숙해서 한국인보다 더 배경에 몰입할 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일본어로의 번역은 오히려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가 해당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엘리아데의 해석처럼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철학을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소설이다. 그러므로 번역될 가치는 충분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눈과 돌멩이>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소설이 번역되기 이전부터 이미 스스로 번역의 문제를 서사 내부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배경이 일본이며, 등장인물들은 서투른 영어와 어설픈 일본어 발음으로 코요와 소통을 시도한다. 재한이 '히쓰마부시'를 잘못 발음해 '비통'이라는 전혀 다른 한국어 단어로 미끄러지는 장면, 혹은 '마부시'가 '눈부시다'는 형용사로도 읽힐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 장면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의미가 미끄러지고 어긋나는 순간을 소설의 형식 그 자체로 체현하고 있다. 이는 번역이라는 행위가 이 작품에 사후적으로 부과되는 과제가 아니라, 이미 원작 안에 내재된 주제라는 점을 시사한다.이 지점에서 번역자가 마주하게 될 근본적인 난제가 발생한다. 재한의 오역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우연한 겹침, '히쓰'와 '비통'의 발음적 유사성, '마부시'와 '눈부시다'의 의미적 이중성은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두 언어 사이의 음운적 우연성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어, 제3의 언어로 옮겨질 때 이 겹침은 소실될 수밖에 없다. 즉 번역자는 원문의 언어유희를 그대로 옮기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다른 형태의 언어적 유희를 목표어 안에서 새로 구축해야 하는 창작에 가까운 과제를 떠안게 된다. 이는 이 소설을 단순한 '내용의 전달'이 아니라 언어간의 어긋남 그 자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로 만든다.나아가 '눈'과 '돌멩이'라는 제목의 두 시어가 번역어에서 얼마나 대비적 질감을 유지할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돌멩이'가 지닌 손에 쥐기 좋은 작은 크기의 뉘앙스는 언어마다 대응어의 형태와 무게가 다르며, 이는 제목이 표상하는 사라짐/남음의 대비가 번역어에서 얼마나 선명하게 전달되는가와 연결된다. 결론적으로 「눈과 돌멩이」는 향후 번역이 이루어질 경우 원작이 담고 있는 언어적 겹침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가 그 번역의 우수성을 가늠하는 핵심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4. 대중문학과의 괴리여기까지 눈과 돌멩이에 대한 분석을 세 분야에서 진행해 보았다. 이제 왓챠피디아 사용자의 평을 다시 한 번 이 작품과 비교를 해보도록 하겠다. 평론을 다시 되짚어보면, “장르 문학과 순문학 나누는거 웃긴데, 장르 소설 같은 면이 있어 재밌음. 글고 눈과 돌멩이는 너무 조은 순소설같다.” 일단 화자는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의 구별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뒤에서는 '장르 문학적 요소=재미'로 이야기하고 있고, <눈과 돌멩이>는 결국 순수문학적으로 좋은 소설이라고 해석된다. 화자 본인도 나누는 것에는 비판적이지만 이 작품의 매력을 쉽게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두 문학 장르의 구분 지음이 있어야함을 의미한다. 두 장르의 구분은 필요한 부분이다. '구별 짓기'와는 다른 것이다. '구별'은 질적 차이를 의미하고, '구분'은 수평적 차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용자가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별' 하려는 것인지 '구분' 하려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사용자가 무엇을 의도했든, 올바른 방향은 '구별'이 아닌 '구분'으로 향해야 한다.사용자는 순수문학이 비교적 재미가 덜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줄평이다보니 너무나 근거가 빈약하여 정확히 사용자가 어떤 경험에 의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순수문학이 재미없다는 인식은 너무나 주관적인 인식이다. 장르문학에서 말하는 '재미'와 순수문학에서 말하는 '재미' 또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 표현에 대해서는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만, 왓챠피디아 특성상 사용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부분이니 참고 정도는 할 만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이 평을 쓴 왓챠피디아 사용자는 순수 문학이 대중 문학으로 치환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하면서도, 순수 문학이 대중 문학과 가진 괴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앞서 말한 '장르 문학적 요소, 재미' 이러한 키워드가 결국 <눈과 돌멩이>를 비롯한 이상문학상 우수작들에 대중 문학적 요소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럼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또 생긴다. 대중 문학적 요소는 존재하나, 왜 대중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결론 부분에서 문예지의 접근성을 언급하며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두 번째로 주원규 평론가의 글을 발췌하도록 하겠다. “복수환생물이란 장르 키워드가 가진 재미 동력에서부터 시청자나 독자의 마음가짐을 역사적 궤적의 회고와 결을 함께 하게 만든다. 복수를 위해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거나(어게인 마이 라이프), 처음부터 다른 출생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신생출생경험(재벌집 막내 아들)을 통해 복수환생물은 우리가 경험해온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보는 재미를 위해 무리수가 느껴지는 변수 설정으로 인해 일부 훼손된다 하더라도 스토리텔링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온 것은 철학적 화두, 곧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가.’라는 식의 인문학적 질문 던지기만큼은 효과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결국, 복수환생물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우리 삶의 재점검 내지는 반성적 회고란 철학적이며 인문학적 사유를 제공한 적절한 활용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장르문학과 순문학은 플랫폼으로 인한 차이, 곧 수평적 차이만 존재할 뿐, 철학적 사유의 농밀함 여부를 ‘구별짓기’ 하는 수직적,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이야말로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결론적으로 순문학과 장르 문학 간의 수평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수직적, 계급적 차이는 없다고 주장하는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나오게 된다. ‘굳이 장르 문학에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가?’ 물론 철학적 사유가 존재하는 순수 문학은 더 우월하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의 지향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장르 문학은 기본적으로 대중이 얼마나 더 많이 읽냐가 중요하다. 대중성이 있어야만 작품이 애당초 출판, 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유는 작가가 넣어도 그만, 안 넣어도 그만이다. 또한 철학적 사유가 독자들이 작품을 진부하게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넣어야 한다. 반면, 순수 문학의 경우에는 비교적 철학적 사유가 깊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순수 문학 계열은 ‘작품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작품성이란 무엇인가. 작품에 담긴 은유와 표현법의 정도, 소재, 그리고 철학적 메시지 등이라고 할 수 있다. 2026 이상문학상 작품집 p342에는 이렇게 나와있다.“모든 예심위원이 각자 모든 후보작을 살피는 중복 심사의 방식이었으며, 오직 작품성만을 심사 기준으로 삼는다는 대원칙하에 2025년 9월까지의 발표작이라면 그 어떠한 배제의 조건을 달지 않고 모두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순수 문학은 결국 ‘작품성’을 가장 우선시하는 것이다. 장르 문학에 비해서는 철학적 사유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당연한 차이가 주원규 평론가의 말대로 수직적,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장르 문학에서 철학적 사유를 찾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장르문학의 가치는 대중성의 요소를 지닌 그 가치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순수문학도 작품성 그 가치 자체의 존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요소는 언제든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정도로 구분짓기는 끝날 것이다.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에는 주원규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엄연한 수평적 차이가 있다. 그리고 처음 왓챠피디아 사용자의 말처럼 순수 문학에도 장르 문학의 요소가 들어갈 수 있고, 장르 문학에도 순수 문학의 요소가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둘에 대한 구분하지 않는 것은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일이다. 우리가 흔히 서점에 가면 장르 정도는 구분을 한다. 장르를 왜 구분하는가? 장르는 사람들의 편리성을 위함이다. 경제학 책이라면 경제학 책, 종교 계열의 책이라면 당연히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경전이 있는 책 분야로 가야할 것이다. 이 둘의 차이를 구분 짓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 차이점을 분석할 수도 있다. 이 둘에는 질적 차이가 없다. 누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질적 차이를 구별 하겠는가? 그러므로 주원규 평론가의 말대로 분명 이 둘의 구별짓기가 아닌 구분짓기로 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주원규 평론가의 저 글에 드러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바로 철학적 사유를 장르문학에서 '의도적'으로 찾으려는 점이다. 주원규 평론가는 <어게인 마이 라이프>나 <재벌집 막내 아들>에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드라마의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그 사유가 가능한 것인지 정확히 제시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인간 다운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저 두 드라마에서 효과적으로 제시했다는 언급은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저 두 드라마를 모두 시청한 사람으로서 저 질문을 떠올리기 어려웠고, 다시 생각해보아도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은 저 글의 화자는 정작 구별짓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장르문학에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사실 장르문학의 매력은 대중성에 있다. 대중성은 나쁜 것이 아니다. 작품에서 대중성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작가가 읽는 사람을 고려한다는 것은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문학에서도 대중성을 심하게 배제하고 쓴 소설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작가가 읽는 사람을 고려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글인가? 장르문학의 가치는 대중성과 재미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글의 화자는 장르문학을 철학적 사유에 연관지으면서 순수문학적 성격을 띈다는 이야기와 유사한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이 의견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으므로 무조건적으로 옳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오히려 역차별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장르문학의 대부분은 철학적 사유를 찾기 어려운 면이 많은 것은 사실 인정해야하는 부분이다. 웹소설 플랫폼을 당장 켜서 추천 작품 목록에 있는 것을 읽어보아도 철학적 사유가 주 주제는 아니다. 그것은 아까 말했듯이 장르문학의 생산과정에서 보일 수 밖에 없는 당연한 요소이다. 그러니 굳이 억지로 철학적 사유를 엮기보다는 그저 장르문학을 그 자체의 가치로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몰입하게 해준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 순수문학을 읽는 독자도 순수문학만 고집하는 경우는 잘 없다. 가끔은 철학적 사유라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생각을 비우고 볼 수 있는 콘텐츠도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구분 짓기는 하자는 의견을 더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다.결론지금까지 「눈과 돌멩이」를 국문학적 의의, 철학적 의의, 번역의 의의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살펴보았다. 세 층위를 종합해보면, 이 작품이 단순히 한 회차의 문학상을 수상한 화제작에 그치지 않고, 여러 방면에서 논의될 만한 가치를 지닌 텍스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먼저 국문학적 의의 측면에서 <눈과 돌멩이>는 위수정 작가가 그간 고찰해 온 삶 이면의 욕망과 균열이라는 주제의식을 애도와 상실이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한 작품이었다. 특히 '눈'과 '돌멩이'라는 두 메타포가 서로 대립하면서도 겹쳐지는 방식으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코요라는 인물을 통해 애도가 죽음이라는 객관적 사실보다 남은 자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을 드러낸 점은, 이 작품이 기존 애도 서사의 문법을 모방하지 않고 새롭게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서사적 완결성을 거부하면서도 인물의 내면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위수정 특유의 문체적 성취와도 맞닿아 있다.철학적 의의의 측면에서는 엘리아데의 히에로파니 개념을 통해 돌멩이라는 사물이 세속과 성스러움 사이를 잇는 매개체로 기능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다. 다만 이 작품이 엘리아데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표방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전제해야 하며, 어디까지나 비평적 해석의 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작품이 특정 문예사조나 이론적 틀을 통해 다양하게 재해석 될 수 있는 개방성을 지녔음을 나타낸다.마지막으로 번역의 의의 측면에서는, 이 작품이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언어 간 소통의 어긋남을 이미 서사 내부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번역이라는 행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물론 언어유희의 소실이라는 근본적 난제가 남아 있지만, 이는 번역 불가능성의 증거라기보다 번역자의 창조적 개입이 요구되는 지점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그리고 왓챠피디아 사용자의 평론과 주원규 평론가의 글을 통해서 최종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순수 문학에도 장르 문학적 요소가 들어갈 수 있다. <눈과 돌멩이>에서도 장르 문학에서 주로 보이는 ‘재미’의 요소가 일부 추가되어 있고, 장르 문학에서도 순수 문학적 요소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에는 수평적인 차이일 뿐, 질적 차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이상문학상 대상작을 통해서 한국 문학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순수 문학은 대중 문학의 역할을 잃었는지 말이다. 결론적으로 순수 문학은 대중 문학의 역할을 잃지 않았다. 아까 언급했던 부분, 그리고 왓챠피디아의 사용자의 평론만 보아도 한국 소설에는 재미의 요소가 충분히 담겨있다. 대중성을 온전히 배제한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왓챠피디아 사용자의 의견처럼 평소 한국 순수 문학에 재미 요소가 조금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은 순수 문학을 하되, 일정 부분에서는 대중성의 요소도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작가는 자신의 신념은 지켜야 하지만, 그만큼 읽는 사람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은 한국 문학이 앞으로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문예지의 인기가 떨어져왔던 이유는 접근성에도 원인이 있다. 순수 문학은 문예지를 통해 작품을 주로 공개한다. 그러나 장르 문학은 드라마, 웹소설 플랫폼 등 정말 다양한 곳에서 볼 수 있고, 마케팅도 많이 하는 편이라 대중에게 비교적 익숙하다. 순수 문학이 아까 말했듯이 가장 큰 지향점은 ‘작품성’에 달려있는 것이 옳지만 그 작품성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는 적당한 마케팅과 접근성 향상이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이 접근성 향상을 위해서는 다양한 방안이 존재한다. '문학광장'이라는 사이트, 그리고 '문장' 이라는 웹진도 그것에 대표적인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웹진은 새로운 방식의 문예지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문예지가 가진 구독 서비스의 불편함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문예지가 발간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맞춰 어떻게 접근성을 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다음 조사는 글티너 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문예지 관련 조사이다. 문예지에 대한 인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실제로 문예지를 접한 바가 있는지, 들어본 적이 있는지, 구독을 하고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구독 중인 사람이 0명에 불과했다.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글티너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문학에 매우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주를 이룰 것이다. 앞서 조사한 질문에서 한국 문학을 접한 횟수를 물어보았을 때도 88.1%가 5회 이상 접했다고 답했다. 즉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도도 매우 높다. 그리고 문예지를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실제로 도서관에서 읽어 본 경험이 38.1%나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속적으로 이용하는가?'의 문제이다. 문예지는 구독제로 주로 운영된다. 웹진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지만 문예지는 매달 돈을 지불하고 문예지를 배송받는 경우가 많다. 문예지를 지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구독을 해야하는 것인데, 정작 구독을 하는 사람은 1명도 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웹소설, 장르문학 종류의 플랫폼을 접한 사용자는 훨씬 많았고, 이용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이것이 단순히 대중성의 차이일까? 물론 그 차이 또한 존재하겠지만 웹소설 플랫폼이 훨씬 접근성이 수월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웹진 또한 접근성이 높다고는 할 수 있지만 웹소설에 비해서는 떨어진다. 웹진의 경우에는 많이 홍보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플랫폼이라고는 이야기하지만, 정작 어플리케이션으로 나온 경우는 잘 없다. 웹소설은 모바일로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과 깔끔한 ui, ux가 모두 이러한 접근성에 기여하는 것이다.문예지의 접근성 문제에 대해서 글티너들은 여러 원인을 지적했다. 구독의 번거로움, 오프라인 서점에 가야하는 문제, 마케팅의 문제 등 다양하다. 이번 조사는 단순히 조사로 끝나서는 안되고, 이러한 실태가 실제로 보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웹진은 어쩌면 오프라인 문예지의 일부를 보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문학의 가능성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웹진을 조금 더 편리하게 바꾸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할 수 있다면 한국 문학은 새롭게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물론 발전하고 있지만 말이다.이번 탐구에서는 왓챠피디아의 사용자가 남긴 한줄평이 출발점이 되었다. 왓챠피디아는 본래 영화 평론을 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영화광, 흔히 말하는 씨네필들이 자신의 영화 목록을 저장해놓고, 시청 후에 별점을 남긴다. 유명 평론가들도 왓챠피디아에 평론을 남기면서 자연스럽게 비전문가도 평론가의 평론을 참고하거나, 댓글을 달면서 관객들간의 소통이 가능하다. 이러한 개방성과 넓은 범위의 소통은 왓챠피디아를 플랫폼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여기서 들었던 의문점은 한국 문학에도 비전문가가 평점을 남길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었다. 눈과 돌멩이는 여러 편을 엮은 소설집이다. 그러므로 한 작품에 대한 한줄평보다는 주로 소설집에 전반적인 평가를 사람들이 한줄평으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책 평론은 이 플랫폼의 주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도 매우 적은 편이다. 앞서 올린 한줄평도 좋아요가 단 5개밖에 없지만 눈과 돌멩이 관련 한줄평 중에는 꽤나 많은 좋아요를 받은 평론이었다. 한국 문학에도 자유로운 비평 시스템이 필요하다. 문학 평론, 작품론이라는 전문가의 영역도 중요하지만 비전문가가 한줄평을 남길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다 생각이 든다. 작가는 독자의 의견을 알기 어렵다. 아무리 영화의 거장이라 할지라도 관객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관객들은 그에 대한 평가와 이유를 한줄평을 통해 게시한다.(한줄평이 아닌 긴 글로 평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 문학에서 독자와 작가가 활발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왓챠피디아와 같은 평점 시스템도 도입하면 좋지 않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게 되었다. 물론 영화와 소설은 형식이 조금 다르기에 이것이 적합할지는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하나, 영화와 소설이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 영화에서 한줄평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처럼 문학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별을 넘어 이제는 서로가 함께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시간이라 생각한다. 눈과 돌멩이 속에 새겨진 수 많은 인간사와 메타포, 인간은 눈이 계속 쌓여가는 공간에 고립된 채 소설 속 재한처럼 두려움의 감정에 종속될 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세계, 그럼에도 아주 조금의 차이로 세계는 바뀔 수 있다. 희망을 놓지 말고, 한국 문학은 올바른 방향을 향해,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독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