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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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폭염 외 1편
폭염 최지은 약속은 잊은 채 거실에 누워 있는 일요일 오후 거북이 한 마리 발목을 스치고 검은 머리칼 사이로 숨어든다 가끔씩 새우가 튀어 오르기도 하는 여름날의 투명한 꽃병 반만 열린 창밖에서 하얀 올빼미 떼 하염없이 날아들 때 내 머릿속 가득 짖어대는 내가 잃어버린 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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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폭염주의보 외 1편
폭염주의보 하채연 노랗게 끓는 이마를 쓸어 넘기며 걷는다 조금만 더 뜨거워지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다 더 예보한다면 뭔가 있을 것만 같다 조금 더 팔을 뻗어 침대 밑 비밀 하나를 집듯이 햇살에 허상들만 더 또렷해진다 건물의 모서리를 직각으로 세우며 태양이 우릴 비웃는 날 파란 불이 켜져도 건너지 않는 양산과 여자 검푸르게 말라 가는 나뭇잎들 늘 가능할 것처럼 손가락 개수를 세다가 손가락은 열 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적이 있다 그것을 세는 손가락은 끝내 셀 수 없으니까 손가락 너머 저기에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고 먼지가 쌓인 쪽지를 펼치면 흰 백지가 다시 쓰여 있다 펼치는 것의 이유엔 다음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다시 백지 비밀에 자주 화상을 입고 뜨거운 빛을 맞으면서 나날이 촉수를 곤두세우는 선인장을 상상한다 건물 꼭대기 위 박제된 망자들이 들끓고 있다 저기 올해는 매미가 울지 않는다고 그러나 끈질기게 들려오는 울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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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칠월, 어느 아침 - 폭염 외 1편
칠월, 어느 아침 최지은 어머니는 곁에 누워 나를 재웁니다 아이를 달래듯 뜨거운 이마를 한 번씩 짚어 주며 너를 가졌을 때 이야기야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겨울 숲의 자두 직박구리가 찌르고 달아난 자리로 단내가 풍기고 살짝 침이 고이기도 하는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는 열을 내려 줍니다 이내 나는 자두 꿈을 꾸며 더 깊은 잠에 빠지고 어머니의 벌어진 앞니 사이로 직박구리. 흰 눈. 붉은 자두. 나의 여름이 시작되는 곳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에선 통조림 뚜껑을 따는 소리가 들려오고 늦은 저녁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 문득 내가 세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다른 사랑을 찾아 집을 떠났는데 저녁을 하고 있는 어머니는 누굴까 생각하는 사이 또 한 번, 통조림 뚜껑이 열리는 소리 붉고 통통한 강낭콩이 우르르 쏟아집니다 하얀 식탁보. 투명한 유리 화병. 흔들리는 스카비오사 흔들리는 여름 고요가 생겨납니다 나는 등 돌린 어머니의 몇 걸음 뒤에 서 신이 나도록 떠들어 보기도 하지만 어머니께 무슨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있는 것인지 나는 나만은 영영 알지 못합니다 눈을 뜨자 내 곁엔 검은 개가 배를 드러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고 오늘은 나의 생일 시큼하고 달콤한 향기가 섞이어 풍겨옵니다 이 여름이 한 번 더 지나가도록 짧은 꿈의 손님은 모른 척 숨겨 두기로 합니다 어두운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