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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의 형태
흰색 파스텔 하나만 있으면 구름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파스텔을 눕히고 종이에 밀착시켜 동글동글 문질러주면 된다.슥슥 칠하다 보니 어느새 일곱 번째 구름을 내 손에서 떠나보냈다. 구름은 흐르고 흘러 민들레를 닮은 태양 한 조각을 만났다.“선율아!”미술 선생님이었다. 깜짝 놀라는 바람에 주황색 파스텔이 바닥으로 떨어져 또각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놀랐어? 미안. 이제 구름 그만하고 바다 칠할래?”선생님이 두 동강 난 파스텔을 집어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며 말하셨다.나는 커다란 도화지로 시선을 돌렸다. 크다기보단 광활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도화지였다. 책상 4개만한 도화지를 단 3명이서 이만큼이나 채웠다는 사실이 놀라웠다.시작할 때는 분명 끝없는 설원 같았는데.미술 프로젝트라는 걸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참여하면 겨울방학 동안 도서관을 개방해준다길래,안내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이름을 써 냈다.두 달 내내 집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손이 저절로 움직였던 것 같다.바다… 바다는 참 깊다. 내가 칠하고 있는 바다에서는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바다는 깊다.바다의 깊이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걸까?나는 눈동자의 깊이나 마음의 깊이를 관찰하는 습관이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거나 설명할 수 있다.잘하면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그런데 바다의 깊이는 아직 어렵다.쓸데없는 상념에 빠져 있는데, 하루종일 고장나 있던 히터가 우웅- 소리를 내며 고쳐졌다.그제서야 미약한 온기가 공기로 퍼지기 시작했다.정신 차려 보니 좀 추웠던 것 같기도 하다.“집에 갈 시간인데 히터가 이제서야 되네. 얘들아 수고했어!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주 금요일에 만나자.”가빈이는 빠르게 짐을 챙겨 선생님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미술실을 나섰다.나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뒷정리를 안 도와드리기 뻘쭘해서 내가 썼던 파스텔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선율아, 정리는 선생님이 할게! 날도 추운데 얼른 집에 들어가.”“아, 그럼… 안녕히 계세요.”선생님 말을 안 듣고 계속 돕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미술실을 나왔다.프로젝트는 4시까지인데, 끝나고 나면 나는 항상 6시까지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운다.주로 구석진 자리에서 유튜브를 보거나 시집을 읽는다.도서관 창문으로 밖을 구경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것도 재미있다.가끔 좀 양심에 찔리면 수학 문제를 풀기도 한다.풀어봤자 10문제지만 말이다.오늘은 무언가에 깊게 집중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도서관을 돌아다니다 유난히 얇고 깨끗한 책이 눈에 띄어 집어들었다.<완벽한 울음>이라는 제목이 하늘색 바탕의 표지 위에 흰색으로 써 있었다.완벽한 울음은 무엇일까? 완벽한 울음은 동그라미와도 같다. 가장 완벽한 도형이 동그라미라는 말처럼,완벽한 울음은 가장 모난 곳까지 포용할 것이다.뾰족뾰족한 마음을 감싸 동그라미가 되도록 해주는 것이 완벽한 울음이라고 생각했다.오랜만에 마음에 꽂히는 시집을 찾아 기분이 좋았다.책을 품에 안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 책상으로 가 앉았다.책을 펼치는 순간, 도서관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사실 꽤나 이상한 일이다. 겨울방학 오후에 학교 도서관으로 책을 읽으러 오는 중학생은 아무도 없다.그동안은 나와 사서 선생님뿐이었기에,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누군가’의 얼굴을 자세히 봤는데, 미술 선생님이었다. 제대로 작동할 것 같지도 않은 두꺼운 노트북을 들고 내 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눈을 피하려고 책을 펼쳤고, 하필 펼쳐진 페이지가 작가 소개였다.‘경기도 평택에서 나고 자랐으며 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미술 선생님은 나의 옆옆 자리에 앉으셨다.가깝지도 멀지도 않고 맞은편도 아닌 자리였다.옆자리에 앉으셨다면 엄청나게 불편했을 텐데 마음이 놓였다.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그동안 누군가와 그렇게까지 가까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친구들, 심지어 엄마와도 가깝다고 느낀 때가 까마득하다. 마음의 거리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리도 그렇다.선생님이 나를 흘끗 쳐다보시는게 느껴졌다.그때쯤 나는 작가 소개를 8번째 읽고 있었으려나.책을 덮고 가방에서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오늘은 아무 문제도 풀지 못할 것 같았지만 시를 읽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시를 읽으려면 중얼중얼 혼잣말도 해야 하고, 가끔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봐줘야 하기 때문이다.그때, 갑자기 선생님이 주머니에서 핑크색 사탕 두 개를 꺼내시더니 내 필통 옆에 놓으셨다.놀라서 선생님을 쳐다봤더니 선생님은 빙긋이 웃어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고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업무를 하셨다.지금 먹어도 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사탕 포장지를 뜯고 입에 쏙 집어넣었다.딸기맛인 것 같으면서도 포도향이 나는 이상한 사탕이었다.입속에서 열심히 사탕을 굴리다보니 어느새 문제집을 두 장도 넘게 풀었다.선생님은 시종일관 같은 표정으로, 가끔은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업무를 보셨고 나는 오랜만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그렇게 선생님과 6시까지 같이 있었다.이제는 속이 울렁거리거나 불안하지 않았다.도서관 운영이 끝날 시간이 되자,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선생님은 짐을 다 들고, 미소인지 아닌지 모를 표정으로 시계를 보고 계셨다.같이 가면 내가 부담스러울까봐 나를 먼저 보내시려는 것 같았다.문득 아까 주신 사탕에 대한 감사 표시를 하지 않은 게 생각나서 선생님께 다가갔다.“감사합니다.”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사탕 하나 더 줄까?”선생님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나는 얼떨결에 그 이상한 핑크 사탕을 하나 더 받아서 바로 입에 넣었다.사탕이 또륵또륵 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집에 가는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왠지 모르게 미소도 지어졌다.선생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마음의 거리 말이다....오늘은 미술 프로젝트의 다섯 번째 날이다. 나는 어김없이 동글동글 파스텔을 문지르고, 문지르다 때때로 상념에 빠지는 것을 즐겼다.일주일 중 이 시간만 유독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벌써 4시였다.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저… 이거 끝나고도 여기 좀 더 있어도 돼요?“”그럼 선생님도 좀 있다 갈게.“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용기를 내어 말했다.”선생님, 저는 여기가 좋아요.“…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그니까…”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만 봤다.“이거 끝나면… 좀 아쉬울 것 같아요.”…“선율이는 여기가 편한가 보다.”선생님이 그렇게 말하셨다.입가엔 미소가 있었지만, 나는 선생님의 눈동자에 옅은 슬픔이 비치는 것을 알아챘다.나는 엄마와 단둘이 산다는 것도, 엄마가 밤이 깊어서야 집에 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선생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한동안의 침묵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생각이 많은 것 같더라.”침묵을 깨는 한마디에 살짝 놀랐다.선생님은 잠깐 말을 멈춘 뒤, 덧붙이셨다.“그게 너의 힘이 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네 마음을 지치게 할 때도 있어.”“…그런 것 같아요.”애꿎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대답했다.선생님은 내 얼굴이 아니라 그림 쪽을 보고 말했다.“생각을 줄이라고 말하면선율이는 더 답답해질 것 같아서.”나는 작게 웃었다.“그럼, 선율이가 조금 더 가벼워지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같이 생각해볼래?“풀리지 않는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날 이후로 선생님의 말이 자꾸 맴돌았다.며칠을 그 생각에 빠져있다가, 집에서 먼지 쌓인 거울을 찾아 내 앞에 세워놓았다.…"안아주세요."개미만한 목소리로 내뱉었다."안아주세요."이번에는 눈에 힘을 주고 씩씩하게 말해보았다.어떻게 말해도 다 이상했다."하...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돼?"지난번에 선생님과 헤어진 후 뇌가 터질 만큼 많이 생각해 보았다. 진짜로 생각을 좀 줄여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생각들의 결론은,나는 누군가의 포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선생님이라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연습하고 있다. 안아달라는 말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마치 "키스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선생님이 엄청 당황하시겠지? 선생님은 나를 안기 싫은데 억지로 안아주실 수도 있고 너무 당황해서 자리를 피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역시 안아달라고 하는 건 무리인가.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우울증을 이겨내려면 이렇게 하세요!'라고 외쳐대는 인스타 게시물에서 본 것이다.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두 팔을 쭉 뻗어 자기 자신을 안아주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바보같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방 한 구석에서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두 팔을 쭉 뻗어 나 자신을 안아주었다. 잘 닿지도 않는 등을 두 손으로 슥슥 토닥였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막 눈물이 났다. 소리 내어 울지는 못했지만, 슬픔을 애써 삼켜내는 울음이 아니었다. 내가 동경해왔던 '완벽한 울음'에서 딱 소리만 빠진, '거의 완벽한 울음'이었다.선생님께 안아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이 경험을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너무 많이 울어서 잠에 들기가 편안한 밤이었다....오늘은 토요일이지만, 특별히 미술 프로젝트가 있는 날이다. 공사 때문에 내일부터 다음주까지 미술실을 못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여느 때와 같이 가빈이는 4시에 조용히 일어났고, 나는 오늘도 선생님과 조금 더 남아있었다.이제 얇은 색연필로 덧칠하고 그림의 입체감을 살리는 단계에 들어갈 차례였다.그런데 선생님이 색연필을 집에 두고 오신 듯했다.“그럼 다다음주에 하는 거에요?”“아… 아니야.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냥 지금 빨리 가져올게. 우리집 여기서 엄청 가깝거든.”선생님이 멋쩍게 웃으시며 말했다.선생님은 겉옷을 입고 미술실을 나서려다가,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 듯 갑자기 걸음을 멈추셨다.”아니다, 우리 그냥 같이 다녀오자.“선생님의 집은 정말로 가까웠다. 5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선생님이 색연필을 가져오실 때까지 현관 앞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추우니까 잠깐 들어와 있어. 배고프지? 핫초코 마실래?“나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선생님과 나는 좁은 식탁 위에 놓인 핫초코가 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말을 꺼냈다."선생님, 어제는 제가 저를 안아줬어요.""그래? 잘했네. 근데 어떻게 선율이가 선율이를 안아줬어?""알려드릴까요? 한 번 따라해 보세요. 되게 좋아요."선생님의 얼굴에는 당황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나는 거실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웅크리고 있느라 목소리가 먹먹해진 채로 말했다. "이렇게 동그랗게 웅크리고, 두 팔을 쭉 뻗어서 나를 안아주는 거에요. 두 손으로 등을 토닥이고, 그 다음에는 왼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야 해요."선생님이 내 곁에 따라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동그랗게 웅크리고, 두 팔을 쭉 뻗어서..."...한동안 고요했다. 너무 조용해서 자세를 고쳐 앉았는데, 선생님은 여전히 선생님을 안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어른스러운 척 한 마디를 건넸다. "괜찮아요. 어른들도 안기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그러고는 다시 '내가 나를 안아주는 자세'를 만들었다. 문득 눈물이 났다. 항상 밝고 씩씩하던 선생님도 마음에 낫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아온 것일까.외로워서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스스로는 강한 어른이라고 다그치며 아픔을 덮어 두었던 것일까. 불조차 켜지 않고, 보일러가 꺼진 지 오래라 차갑기만 한 거실 방바닥에서 한 아이와 한 어른이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엉덩이가 시렸을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시리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생님은 내가 걱정되셨는지 먼저 일어나셨다. 그리고 미지근해져버린 핫초코를 가져와 나의 앞에 내밀었다.선생님은 조금 우신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눈물을 흘렸든, 흘리지 않았든 선생님 마음의 뾰족한 부분을 안아주었다면 그건 완벽한 울음이었을 테니까.울음이 꼭 눈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나도 잔뜩 식어버린 핫초코를 한 모금 마셨다.식으면 식을수록 더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미지근한 음료의 애매한 감각과 코코아 가루 덩어리가 나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목구멍에서 울컥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오늘은 애써 참지 않았다. 평생 동안 쌓아왔던 외로움이 넘쳐서 그대로 흘러나가도록 두었다.그 순간 나의 '완벽한 울음'이 터졌다.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터져나오는 울음. 누가 보든, 누가 듣든 신경 쓰지 않고 감정을 마음껏 분출하는 울음. 몇 년 만일까, 오 년? 십 년?선생님의 집은 추웠지만, 내가 머문 그 작은 공간만은 참 따뜻했다. 벅찰 만큼 가득 따뜻함이 밀려왔다. 고요 속에 째깍거리는 시계침 소리마저 따뜻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