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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독후감
1 삶. 또 한번 숨을 들이킨다. 눈을 깜박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지금 이 순간은 곧 지나간다. 현재는 이내 과거가 되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싶어서. 과거의 수평선 위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어느 한 점을 보게 된다. 그땐 그랬지, 그래서 행복했거나 슬펐거나 화가 났거나 어쨌든, 내 삶을 바꿔놓았다고 말할만한 어느 사건. 너의, 나의 과거엔 무엇이 있었나.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고 한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우리의 삶을 움직여 온 과거의 그 어떤 보석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2 스스로 대답을 찾기 위해 그녀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된 바로 그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발등에 흉터를 남긴, 우물 속에 던져버렸던 쇠스랑을 찾아서.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 시절, 삶의 터전이었던 외딴방을 찾아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는 그녀. 3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것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씁쓸함이 그녀의 글에서 느껴진다. 나무의 뿌리가 언제나 깊고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있듯 그녀의 글쓰기의 뿌리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소태처럼 쓴 맛이 나고 파면 팔수록 딱지 앉은 상처처럼 새 피가 솟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낫지 않는 상처로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용감하게 우물 속의 쇠스랑을 끄집어낸다. 끌어내면서도 정신이 없는지 이 얘기 하다가 저 얘기 하고 다시 돌아가는 정신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마치 밀란 쿤데라를 필두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형식을 따르듯 글이 정신없이 자신의 생각이 미치는 대로 손가락이 가는 대로 흘러간다. 의식의 흐름, 자동기술법, 평론가들은 새로운 소설의 형식에 대한 말들을 많이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다. 그녀가 무엇을 끄집어냈는지, 그녀의 뿌리엔 무엇이 있었는지,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보석은 무엇이었는지 봐 달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4 외딴방에서의 삶은 지치고 피로했다, 라고 그녀는 적었다. 큰오빠는 생활비를 벌고, 외사촌과 그녀는 낮에는 공장, 밤에는 학교를 다니며 정신없이 살아갔다. 하루하루가 살아가야 할 나날들이었다고. 네 사람이 자기엔 방은 너무도 좁았고, 삶은 너무도 고단했다고. 큰오빠는 겨우 20대에 그의 꿈이 두 동생의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치워버리고 돈을 버는데 열중한다. 서울대생처럼 보이려고 가발을 쓰고 학원 강사로 나가고, 그나마도 과외금지령 이후로는 여의치 못하다. 그럼에도 가장 역할을 도맡아 ‘너희들은 돈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한다. 가끔 좁은 외딴방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데모만 따라다니는 셋째오빠에 참다못해 화도 내 보지만 좌절보다 그가 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아니, 더 큰 것은 남매간의 사랑이 아니라 네 사람 분의 삶의 무게이다. 5 1980년대를 살아온 그녀에게 정치적 격변은 피해갈 수 없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그녀의 셋째 오빠, 그리고 그녀의 고향 친구인 창은 그 시절의 피 끓는 젊은이답게 데모에 참가하는 것으로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운다.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박정희가 죽었다거나,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학살했다거나 하는 정치적인 것들이 아니다. 실제로 소설 안에서도 간략히 사건을 언급하는 정도로만 지나갈 뿐,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1980년대는 분명 우리나라 역사의 혁명적인 기간이었지만 혁명 안에서도 삶은 특유의 그 무게로 여전히 사람들의 등허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고단하고 가난한 삶. 뼛속까지 스며드는 찬바람과 쫄쫄쫄 수도꼭지를 흐르는 얼음물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에 대해 입을 다물거나 언급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그녀 주변에서 불의에 대항하는 인물들에게 동조하거나 그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셋째오빠의 등에 멍은 왜 난걸까, 하고 능청스럽게. 6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며 잠시 숨을 고른다.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말해주겠노라고, 내 인생의 도화선에 불이 붙은 이야기를 해주겠노라고. 한참 뜸을 들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한다. 사랑하는 희재 언니의 방에 자물쇠를 채웠다고. 그 사건을 마지막으로 외딴방을 떠나왔다고 고백하는 그녀. 비로소 그녀 자신의 유년 시절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변명은 해명으로서의 설득력을 얻는다. 쇠스랑은 우물을 떠났고 그녀는 이제 과거에 놓인 보석의 광채를 마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녀는 묻는다. 열여섯의 그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녀 마음속의 순결한 한 가지로 남아주었던, 그녀가 그토록 비밀스레 품어왔던 보석을 찾아준, 그녀 인생의 크나큰 상처를 어설프게나마 치유해준, 글쓰기란 그녀에게 과연 무엇인가. 7 답은 소설 곳곳에 있다. 소설을 손 가는 데로 쓰다 보니 그녀의 글쓰기 철학이 담긴 부분도 적지 않다. 문학은 결국 뒤돌아보기라고 그녀는 말한다. 세찬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응시하는 눈빛.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나에 대하여, 그래서 내가 무엇을 느꼈나에 대하여. 모든 언어가 그렇듯 분명하고 완벽하게 모든 사실과 느낌을 전할 수는 없지만, 데생을 하듯 조금씩 덧칠해야겠다고, 그물을 짜듯 촘촘히 날실과 씨실을 엮겠다고 말한다. 다양한 삶에 다양한 감동을 불어넣고 싶다고.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오롯이 그녀 자신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외딴방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도 그녀만의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8 ‘나는 당신이 주신 목소리로 말했고,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르쳐주시고 또 그들이 내게 전해주신 말로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 4장을 프란시스 잠의 이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기 몫의 짐을 짊어지고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걸을 수도 있고, 짐을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을 수도 있다. 종착지에 대해 떠들며 한껏 들뜬 채로 걸어나갈 수도 있고, 아까 오는 길에 보았던 것에 대해 말하며 갈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길 위에 서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내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값진 일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일은 끊임없이 과거를 만들어내는 일인 것이다. 나의 과거엔 무엇이 있었나, 나는 돌아보았다. 방금 또 한번 숨을 들이켰다. 이 순간도 과거가 되겠지. 다가올 나의 과거에 나는 무엇을 새겨 넣어야 하는가. 그녀처럼 나도 내게 질문을 던져본다. 삶. 그래, 내게 삶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