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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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월식의 세계
월식의 세계 이병일 중랑천의 수면이 잠시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본다. 물결은 흔들리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청둥오리의 물갈퀴는 왜 얼지 않을까. 그것보다 청둥오리의 피가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저 힘으로 지평선을 접었다 폈다 했을 거다. 날개를 접고 물에 잠기니까 호리병 같기도 하다. 중랑천은 흘러가고, 물고기는 자꾸만 상류로 올라간다. 물이 고이면 어둡고 파랗다. 웅덩이를 끌어 앉은 채로 흐르는 중랑천, 무심코 바라본 것들에겐 작은 비밀이 있다. 이를테면 산수유꽃은 노란데, 열매는 왜 이렇게 붉은가. 그 열매를 떨어트리지 않고 꽃망울을 틔우는 산수유나무. 딱히 그늘도 샛노랄 것 같은데 노랗지는 않았다. 사월. 천변도 간지럼을 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천변엔 물비린내와 옻나무와 가죽나무와 라일락이 봄밤으로 섰다. 그때 너구리를 쫓는 사람이 있고 너구리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있다. 어쩌자고 너구리는 사람을 믿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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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이응의 세계
이응의 세계 최문자 침묵할수록 입술은 이응처럼 순한 발음이 필요했어 창밖에는 내다버릴 발음으로 가득한데 나무들은 그대로 자랐어 거대하게 이응을 빼버리면 난 쓸 말이 거의 없어 이응의 세계는 한없이 부드럽지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이응 이응” 여러 번 소리 내서 읽어 봐 나무가 보여 터지고 싶은 풍선 사이로 헤어지기 싫은 마음도 생겨 너와 나 사이 헤어져야 살아나는 것들이 무지무지하게 많은 알을 까고 있는데 어제 저녁 개미들이 이응같이 생긴 둥근 빵을 물고 돌아왔어 물고 온 분홍 꽃잎들이 개미들이 나를 함부로 건너 다녔어 새끼 개미가 물어도 내 피는 둥그렇게 엉겨 있었지 종일 사람들이 꾹꾹 밟고 지나간 자국을 보다가 발자국이 되었던 발등은 무겁다가 그냥 슬프다가 이응 같은 자국이 생겼어 이응은 상처까지 둥그랬어 하다 포기한 생각처럼 저녁 8시 이응이 아닌 개미들에게 끝, 끝 하고 말했어 물고 뜯는 것도 끝만 남았지 불이 꺼지지도 켜지지도 않는 거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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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가능의 세계
가능의 세계 이언주 3교시 벨이 울리기 전에 나는 가방을 메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수업 들을 기분이 영 아니었다. 보호 관찰 대상이라는 소문이 난 후 아이들 시선은 애매하게 나를 피했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켰다. 유튜버 웅이가 큰 냄비에 끓인 라면을 집게로 입에 쓸어 넣었다. 부엌 수납장을 뒤져 보았지만, 컵라면도 하나 남은 게 없었다. 콜라를 꺼내 마시며 냉장고에 붙여 놓은 낱장 달력을 보았다. 카드 결제일과 자동 이체되는 날짜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볼펜을 들고 내일 날짜가 보이지 않게 검은 칠을 해버렸다. 이런다고 순정씨가 내 생일 따위를 알아줄 리 없지만. 그래도. 현관문 여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순정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별말이 없었다. 자기가 다니는 보험 회사처럼 학교도 출석 체크만 하면 외출이 되는 곳이라 믿고 있는지. 아침에 교문 앞까지 데려다준 사실을 까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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