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르누스 사투르누스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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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무제, 소위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검은 그림 (pinturas negras)" 연작
사투르누스 사투르누스
동생은 화장실 세면대에 해파리가 산다고 했다.
그러면 앞으로 세수는 어떻게 하지. 내 말에 동생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는 해파리보다 세수하는 게 더 걱정이구나. 때때로 자신의 팔이며 얼굴에 길고 붉은 자국이 올라오고 손목에 가로로 여러 번 찢긴 자국이 새로 생기는 것은 다 그 해파리의 짓이라고, 동생은 말했다. 예컨대 아버지가 해파리였고, 커터칼을 쥔 동생의 오른손이 해파리였고, 남들 눈에는 투명한 해파리들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동생은 자주 세면대에 피를 쏟았고, 코피는 더 자주 흘렸고, 해파리들은 그 붉은 피를 먹고 점차 몸집을 불리고 있는 것이었다.
세면대에 살고 있다던 해파리는 날이 갈수록 그 군락을 늘려 나가, 저번주경 세면대를 넘어 화장실을 점령하고, 이제는 화장실 문턱을 비집고 나와 좁은 집을 꽉 채웠다고 했다. 반투명한 진줏빛의 해파리들이 둥둥 떠다닌다는 단칸방 한복판에서는 사나흘에 한 번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가 대자로 누워 술냄새와 담배 냄새와 땀냄새가 섞인 악취를 풀풀 날리면서 잠을 잤다. 우리가 지나다니다 아버지의 몸을 건드리기라도 하는 날엔 몸 곳곳에 울긋불긋하고 뜨거운 상처들이 부풀어 올랐다. 언니, 해파리가 독침을 쏘는 원리는 말이야……. 무언가가 해파리를 건드리면, 그게 방아쇠 역할을 해서, 반사적으로 독침이 발사되는 거래. 그동안에 해파리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 멋대로 독침부터 튀어 나가는 거지……. 그러니까 알고 보면 아버지도 원해서 우리를 때리는 게 아니라…….
내버려두면 끝도 없이 떠들 듯한 동생의 얼굴에, 나는 반투명한 연고를 펴 발랐다. 동생이 얼굴을 찡그리자 벌겋게 부어오른 광대가 꿈틀거렸다. 나는 동생의 입술 아래에 방울져 흐르려는 피를 휴지로 훔쳤다. 그래? 그게 말이 되니……? 그럼 우리는 원해서 맞은 거니? 어머니는 원해서 맞으신 거야? 잘 생각해…….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어머니는 한 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젊을 적 아버지에게 몹시 맞아 두 번이나 고막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첫 번째 수술을 받을 때에,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수술대에 누운 어머니의 배는 죄수의 발목에 묶인 쇠구슬처럼 둥글었다. 부푼 배가 무거워, 어머니는 도망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는, 내가 어머니의 해파리였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겨우 한 달 전의 일이다. 아침 일찍 마트로 출근하다 쓰러지셨다고 했다. 사인은 갑작스런 뇌출혈이었지만, 방음이 되지 않는 단칸방 너머로 매일같이 우리집의 소음을 전해 듣던 이웃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다. 쓰러지지 않으셨으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지도 몰라. 나는 아버지 등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동생의 입을 막았다. 캐셔 한 명이 사라진 마트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성행이었다. 문제는 우리 쪽에 있었다. 마트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건네 준 약소한 위로금은 아버지의 입을 만 하루 동안 헤벌쭉 벌려 놓고는,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그깟 푼돈이 뭐라고 아버지는 그렇게 웃었을까. 그깟 푼돈이 뭐라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욕지거리를 내뱉었을까. 정말, 그깟 푼돈이 뭐라고. 성난 아버지 얼굴이 언뜻언뜻 비치는 눈 앞에 별이 튀고 귀 안에서 먹먹한 이명이 맴도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진 어머니처럼, 위로금처럼, 아버지의 이성처럼, 나도 사라지고 싶었다. 사라질 것 같았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 끼어들었다 발길에 채여 숨죽이고 있던 동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내 얼굴에 연고를 바르려던 동생의 손을 뿌리쳤다. 내 상처에 연고를 바르지 않게 된 지는 벌써 몇 년째였다. 아무리 연고를 덧발라도 아문 살 위로 새로운 상처가 생긴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나는 동생쪽으로 연고를 밀었다.
네 얼굴에나 많이 발라.
됐어, 난 언니만큼 심하지도 않은데.
동생은 오래도록 내 옆에 서서, 벽에 기대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장례식은 조촐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형제도 친지도 없이 타지로 시집온 어머니의 장례에 어머니가 알던 사람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띄엄띄엄 찾아오는 아버지 손님들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라 주면서, 자신의 잔에는 더욱 넘치도록 술을 따르면서, 아버지는 쉰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다. 호상이야, 호상…….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동생의 검은 머리를 곱게 빗어 하나로 묶었다. 동생은 울지 않았다. 나 역시 울지 않았다. 어머니도 울지 않았다.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액자 안에서 환하게 웃는 어머니는 학사모를 쓰고 있었다. 모든 것이 엉성한 드라마의 각본처럼 흘러가는 중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동생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 보였다. 내 얼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입관식 날, 어머니는 곱게 화장을 하고 일곱 겹 매듭으로 묶인 채 관에 눕혔다. 동생은 어머니만큼이나 핏기가 가신 얼굴이었다. 엄마가 답답하실 것 같아. 관 안에서 어머니 몸이 흐트러지지 말라고 묶어 놓은 거야. 죽어서도 묶여 계셔야 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어머니의 얼굴에 검붉게 맺혀 있던 멍이나 손톱자국 따위는 화장에 묻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곧 어머니도 흙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그리고 흙속은 안전할 것이다. 그곳에는 모진 폭언이나 무자비한 발길질도 없다. 오로지 안식만이 있을 뿐이다. 그토록 긴 시간 우리의 방패를 자처했던 어머니는 죽어서야 당신의 오롯한 방패를 얻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세요. 장례지도사가 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차가운 귓가에 입술을 바싹 대고 속삭였다. 어머니, 이제 쉬세요. 그러나 어머니는 쉬지 못할 것이다. 나와 동생과 아버지가 전부 이 땅에 살아 숨쉬는 한은, 어머니는 죽어서도 편히 저승으로 떠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영혼이 아직도 그 육체 속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면 어머니는 곧 일어나 앉아 길게 한숨을 쉬고는 우리를 껴안고 울 것이다. 내 새끼들, 무서웠지……. 그리고 우리는, 어깨에 젖어드는 어머니의 피와 아버지의 현관 너머로 멀어지는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느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머니에게 못할 짓이었다. 나는 관을 덮고 관뚜껑 위로 나무못을 박을 때까지 어머니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입관식이 시작하기도 전에 정장과 완장을 벗어던지고 사라진 아버지는, 어머니의 관이 땅속 깊숙이 내려가고서야 벌게진 눈으로 나타났다. 아버지에게서 나던 온갖 냄새가 한층 더 심해져 있었다. 동생이 해파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다.
언니, 해파리는. 해파리가. 해파리랑. 해파리의. 해파리를. 해파리 때문에. 해파리. 해파리. 해파리.
동생은 내가 듣든 말든 아랑곳없이 해파리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읊으며 이상할 정도로 열을 올리곤 했다. 해파리의 종류, 해파리의 생태, 해파리의 분포, 해파리, 해파리……. 그만하고 이제 자자. 내일 어떻게 일어나려고 그래. 동생을 가볍게 타박하며 싱크대 앞의 물기를 닦고 이부자리를 폈다. 우리가 잠드는 자리는 싱크대와 냉장고와 화장실로 삼면이 둘러싸인 좁은 공간이었다. 붙박이 싱크대가 달린 북쪽 벽면은 항상 축축하여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사시사철 잔뜩 피었다. 단칸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자는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그곳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처럼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밤에도, 나와 동생은 집 한가운데에 널브러진 이부자리가 오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 이 구석에 물러나 서로를 향해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서 익숙한 습기가 느껴졌다.
아버지가 있는 날에는 머리를 어느 쪽으로 두고 잘지 몇 분씩은 고민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배가 고픈 눈치면 화장실 쪽으로, 자기 전에 화장실을 가지 않았으면 냉장고 쪽으로 두고 자는 식이었다. 우리는 밤에 아버지가 냉장고를 뒤적이거나 화장실을 갈 때 발을 채여도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물러나 북서쪽 모퉁이에 기대어 칼잠을 잤다. 동생은 머리를 화장실 쪽으로 두고 자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다. 동향으로 지어진 집의 좁은 창문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문에 달린 쇠창살 사이로 간간이 소스라치는 별빛을 좇아, 동생의 눈은 꿈을 꾸는 것처럼 깜빡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동생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눈치였다. 언니, 우리 베개 냉장고 쪽에 놓으면 안 될까. 왜? 화장실 쪽에 놓는 거 좋아했으면서. 동쪽으로 머리 두고 잘래, 죽은 사람처럼. 말을 왜 그렇게 해. 그냥, 농담이야. 머리맡이 화장실인 것을 원래부터 꺼려했던 내가 동생의 보챔에 못 이기는 척 동쪽으로 머리를 뉘면 동생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잠들기 직전까지 조용조용 해파리 이야기를 뇌까렸다. 그중에서도 동생이 가장 천착해 있는 것은 단연 어느 순간 우리 집에 침투했다는 해파리였다.
언니, 온 사방에 해파리가 떠다녀.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 잘못하면 쏘일지도 몰라.
정말로 그랬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물을 마시려고 찬장의 컵을 꺼내거나 냉장고 문을 여닫는 순간조차 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어김없이 온몸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낙인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그것은 해파리의 촉수가 남긴 자국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톱과 주먹과 발길질과 술병이 만든 자국이었다. 기실 내가 시시때때로 건드렸던 것은 집안을 부유하는 해파리 따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신경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가장 거대한 해파리였다. 아니, 우리 집이 이미 거대한 해파리였다.
날이 갈수록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언제 아버지가 돌아와 있을지 모르는 집보다는 쥐죽은 듯만 있으면 그럭저럭 견딜 만한 학교가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한 손에 교과서를 든 미술 선생은 졸린 목소리로 끊임없이 말했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귀머거리 별장의 벽에……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를 그렸다……. 언니……. 우리는 해파리에게 잡아먹힌 거야……. 소화되어서 없어지고 말 거야……. 동생의 말은 잠꼬대처럼 나른했다. 밤새 이어진 구타로 기진맥진한 동생의 얼굴 위로, 나는 다 떨어진 연고를 힘겹게 쥐어짰다. 한 통에 4000원씩 하는 연고였다. 동생의 몸은 내가 뒤집으면 뒤집는 대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년이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을 동생의 조그맣고 가느다란 몸은 아직도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학교에서는 잘 지내? 또 괴롭히는 애들 있으면 말해. 동생이 힘없이 웃었다. 말하면, 혼내 주게? 동생의 가장 심한 상처를 골라 대일밴드를 붙이느라,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애들이 아버지보단 나아. 걔네는 잘못한 게 없으면 안 때려.
고야가 그려낸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이다……. 그의 아버지 우라노스는…… 가이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타르타로스에 가두어…… 가이아의 노여움을 샀다……. 너희 할아버지는 참전 용사였다……. 알고 있냐? 아버지는 술에 취해 꼬부라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국가유공자였어! 국가유공자……. 우리 아버지는 빨치산 새끼들을 열댓씩은 잡아다가 몽둥이로 패 죽여 버렸지……. 그리고 집에 돌아오고서부턴 어머니랑 자식새끼들을 팼어……. 서른 넘어 얻은 나를 어찌나 귀여워했는지…… 아주 죽어라고 팼지……. 산에 올라가서 빨갱이 새끼들을 잡아오라고 했어……. 전쟁은 이십 년도 더 전에 끝나 있었는데 말이야……. 너희, 너희 할아버지는 국가유공자였어, 으흐흐……. 아버지는 우는지 웃는지도 모를 소리를 내면서 밥상으로 쓰는 플라스틱 상 위에 엎어졌다. 상 아래로 술병들이 나뒹굴었다. 산발이 된 어머니는 아버지가 곯아떨어지자마자 우리를 품에서 떼어놓고 부서진 가구의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평온하게 코를 고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온화한 얼굴의 할아버지와 늘 독기 어린 눈을 하고 있던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품고 돌아온 독은, 할아버지에게서 할머니와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와 우리에게로, 끝도 없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자르고…… 또 다른 형제들마저 타르타로스에 가두었다……. 어머니 가이아는 분노하여…… 사투르누스에게 예언을 남겼다……. 찢어 죽일 놈……. 저거이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드냐. 할머니는 기와집 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가슴을 두어 번 쳤다. 할머니의 힘줄 선 왼손은 구겨진 종이 뭉치를 더욱더 억세게 쥐었다. 주름이 잔뜩 잡힌 할머니의 눈은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어머니는 본체만체, 마당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뒷모습에만 붙박혀 있었다. 나는 동생을 껴안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다. 온몸을 뒤흔드는 칼바람에 살이 에었지만 방에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등 뒤의 창호문 너머로 할아버지의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미는 고개 들으라. 할머니의 말에 슬몃 고개를 든 어머니의 얼굴에 일말의 안도가 잠깐 스쳤다. 할머니의 손바닥이 어머니의 뺨을 내리칠 때까지의 잠깐이었다.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참는 어머니의 고개가 연거푸 돌아가는 동안, 아버지의 담배 연기가 길게 꼬리를 뽑았다. 집 어귀의 골목에 급히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친척들 대여섯의 벌게진 얼굴이 마당 안으로 불쑥 튀어나와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담배를 끌 새도 없이 얻어맞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다시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할머니 앞에 더 바짝 엎드렸다. 우는 소리를 내는 동생을, 나는 꽉 끌어안았다. 드잡이하는 아버지와 친척들의 틈바구니에서 도박, 빚, 아버지, 선산, 계약, 사채, 개자식 따위의 말들이 뚝뚝 끊겨 나왔다. 그것이 열세 살의 겨울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집안을 풍비박산 낸 아버지는, 봄이 오기가 무섭게 도망치듯이 시골집을 떠나 도시 외곽에 반지하 단칸방을 얻었다. 몇백 년째 물려 받아온 선산의 매매계약서를 보고 쓰러졌던 할아버지가 끝내 눈을 감은 것도 그 봄의 일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어머니도 이제 홀몸이시니 다시 합가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정장을 챙겨 집을 나섰던 아버지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곤죽이 되어 돌아왔다. 친가와의 연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퀴퀴한 단칸방에 장마철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빗물을, 나와 어머니와 동생은 바가지로 연신 퍼내었다. 그러나 우리를 밖으로 퍼내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상 모든 절망이 흘러드는 이 반지하 방에, 절망과 한데 섞여 휩쓸려 들어온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그날로 영영 이 자리에 고이고 만 것이었다.
가이아의 예언이 두려웠던 사투르누스는……. 레아가 낳은 자식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어쩌면 아버지는 사투르누스인지도 몰라. 우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해파리가 된 거야. 우리는 아버지의 계략에 놀아났어……. 내 말에 동생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나흘째,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 단칸방에 전기가 끊긴 지 이틀째였다. 전등도 선풍기도 켤 수 없는 집 안은 괴물의 뱃속처럼 뜨겁고 어두웠다. 캄캄한 열기로 어슴푸레하게 지워진 모든 것들의 속에서 벽에 기댄 채 제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린 동생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 앞에 마주 앉은 나는 눈을 떼는 순간 동생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희미한 동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언니는 아버지가 무서워……?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내가 무서워하는 건 따로 있어……. 뭔데……? 말해 봐……. 나도 해파리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거…….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 이것 봐.
동생은 킬킬 웃으며 말릴 새도 없이 등 뒤에 숨겨두었던 커터칼을 손목에 대고 내리눌렀다. 동생의 하얀 손목을 타고 새빨간 피가 길게 방울져 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동생의 뺨을 갈겼다.
때린 쪽은 나였는데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동생의 몸에 손을 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 손이 얻어맞기라도 한 양 오른손을 감싸쥐어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동생의 뺨도 뜨거우리라. 한참 적막 속에서 나의 가쁜 숨소리만이 흘렀다.
너, 너……. 이런 짓 그만하기로 했잖아……. 겨우 입술 새를 비집고 나온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동생은 멀거니 내 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동생의 손목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가 누런 장판 위에 점점이 핏자국을 남겼다. 한참의 침묵 끝에 나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미안해. 동생은 또 희미하게 웃었다. 언니, 왜 울어? 나는 다른 쪽 손으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차가운 손이 비틀리며 내 손으로부터 빠져나갔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언니도 때리고 싶어서 때린 게 아니잖아……. 알겠어, 언니?
희미하게 미소를 띈 표정과 다르게 동생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동생의 검은 눈동자는 빛이 들지 않는 단칸방 안에서도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언니도 해파리가 되어 버린 거야.
동생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선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가 버렸다. 끝없는 어둠과 지독한 곰팡내와 흐늘거리는 해파리로 가득 찬 좁은 집에 나만을 남겨두고, 떠나고 만 것이다. 지독한 현기증이 일어 방 한가운데에 어지러이 널린 이부자리에 기어들었다. 동생의 뺨을 때렸던 손바닥이 여전히 홧홧했다. 어둠에 절여져 희미해진 시간 감각 속에서 자는 줄도 깨는 줄도 모르게 혼곤한 선꿈들이 지나갔다. 별안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동생의 가녀린 목을 억세게 붙잡고 집안에 끌고 들어왔다. 거친 수염이 돋아난 턱이 목까지 닿도록, 아버지가 입을 벌렸다. 아버지에게 목을 붙들린 동생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담배 냄새와 술냄새에 찌든 아버지의 누런 입속으로 밀려들어 가면서도, 평온해 보였다. 아버지의 눈이 섬짓한 안광을 발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꿈틀거리며 동생을 넘기는 아버지의 목과 벌써 거의 다 삼켜져 발만 보이는 동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생을 끝까지 삼키고서도 아버지는 여전히 찢어질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이제 내 차례라는 것이다. 나는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좁은 집에서는 도망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숨겨 놓았던 촉수를 늘어뜨린다. 아버지의 발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쇠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발소리다. 차해철씨!
차해철씨, 차해철씨……. 나와 봐요, 이 사람아……. 세차게 문을 두드리며 아버지를 부르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나의 목덜미를 잡고 꿈에서 끌어내었다. 땀에 절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창문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으나 집안은 여전히 깜깜했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문을 열자 바로 앞에 숨을 몰아쉬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죄송해요……. 다음 주까지 꼭 드릴게요…….
집세 때문에 온 거 아니다. 아버지 안 계시냐? 지금, 이 집 딸내미……. 느이 동생이…….
주인아주머니는 여전히 몽롱하게 휘청대는 나를 집밖으로 이끌었다. 건물을 나서자 마자 햇빛이 쏟아져 내려 눈이 시렸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대로변 한쪽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아주머니는 사람들을 함부로 헤치고 구경꾼들의 안쪽에 나를 밀어넣었다. 시멘트 바닥을 적신 피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꺾인 관절,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해파리에 쏘인 자국, 다리에 새겨진 붉은 흉터와 상처들, 가슴팍의 노란 명찰, 동생의 이름이 적힌 노란 명찰…….
아주머니, 제 동생이 아니에요.
아니라고?
제 동생은 아버지가 벌써 삼켜 버렸어요.
고장난 테이프처럼 늘어지는 미술 선생의 목소리가 사이렌 소리를 뚫고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식을 삼킨 사투르누스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레아는 몰래 빼돌린 자식, 제우스와 함께…… 사투르누스에게 토하게 하는 약을 먹였다……. 약을 마신 사투르누스는 자식들을 모두 토해내었고…… 그들에 의해 영원히 추방당했다……. 종이 쳤구나, 자……. 이걸로 끝내자…….
주인 아주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의 약이 필요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며 가져온 혼수라곤 외할머니의 것이었다는 자개장뿐이었다.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유일한 물건이었다. 좁은 집 구석을 떡하니 차지한 앉은뱅이 장롱은 기껏해야 내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데다 그 위에 허름한 이불들을 잔뜩 쌓아 놓고 있어 원래 크기보다 훨씬 더 작아 보였다. 옻칠 된 자개장의 겉에는 자잘한 흠집이 가득했다. 이것 역시 해파리에 쏘인 자국이었다. 자개장의 여닫이문은 투박한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열쇠가 있을 법한 곳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입고 있던 옷가지들은 장례가 끝나고부터 집 한 켠에 쌓여 있었다. 어머니가 사시사철 입고 다녀 다 해져가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잘그락거리는 열쇠 뭉치가 잡혔다. 하나는 집 열쇠, 하나는 마트의 직원 화장실 열쇠, 하나는 마트 창고 열쇠. 마지막 남은 하나를 자개장의 녹슨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자개장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그득그득 들어차 있었다. 나는 산더미 같은 잡동사니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반쯤 빈 비싼 샴푸 통, 낡아 빠진 반짇고리, 장미향 비누, 어머니가 아껴 입던 옷, 성냥갑, 금박이 벗겨진 반지, 여분 단추, 주민 등록 사본, 표지가 헤진 성경, 그리고, 그리고, 손때가 묻은 흰색 플라스틱병 하나. 이게 뭐냐고? 으응, 이건 엄마 약이다……. 엄마가 아플 때 먹는 거야. 너희가 먹으면 큰일 난다…….
어머니는 자주,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은 날이면 더 자주, 자개장에서 흰 병을 꺼내어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다. 어머니는 병을 이리저리 돌리며 꼼꼼히 살펴보고, 두어 번 흔들어 보고, 길게 한숨을 쉬고, 저 깊숙이 병을 넣고선 다시 자개장 문을 걸어 잠갔다. 그 병이 지금 내 손에 있다. 흔들어 보니 병 안의 액체는 기껏 해야 바닥을 적실 정도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뚜껑을 돌려 열었다. 역한 냄새가 났다. 축축한 푸른 빛이 병 바닥에서 찰랑대는 것이 보였다. 얹혀살던 시댁의 밭일을 돕는 동안에 어머니가 빼돌린 것이리라. 집안에는 반쯤 마시고 남은 술병들이 몇 개고 굴러다니고 있었다. 하나라도 치우는 날에는 죽여 버리겠다며 아버지가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집안에서는 언제나 찜찜한 술냄새가 났다. 술병들을 열어 세면대에 모조리 흘려보내 버린다. 술이 이렇게 많이 들어갔으니 세면대에 사는 해파리도 죽을 것이다. 남은 것은 한 병뿐이었다. 술병 주둥이에 대고 하얀 플라스틱 병을 기울이자, 반투명한 초록 유리병 안으로 천천히 흘러들어가는 푸른 액체가 보였다. 어쩌면, 외할머니의 자개장에 그라목손을 넣은 어머니가 진정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레아의 약을 마시고, 아버지는, 그러니까 해파리는, 아니 사투르누스는, 동생을 토해내리라. 방 한복판의 플라스틱 상 위에 술병을 올려놓고, 나는 집을 나섰다.
아버지의 입술은 새파랬다. 이틀 만에 돌아온 집안은 평소보다 훨씬 더 난장판이었다. 물약을 마신 아버지가 몹시 몸부림쳤던 모양이다. 파란 죽 같은 토사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지만 아버지가 토해내었을 동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면 숨은 것이겠다. 어렸을 적 숨바꼭질을 하던 기억을 좇아 동생이 숨었을 만한 곳을 떠올린다. 그러나 단칸방에는 숨을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동생은, 아직 토해지지 않은 것이다.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싱크대 밑 벽장의 문 안쪽에는 시퍼런 식칼들이 줄지어 매달려 있다. 어머니가 매일같이 곱게 날을 갈아놓은 칼들이다. 세상에는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독침을 쏘는 해파리처럼.
나는 해파리다. 한참 전부터 해파리였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조금씩 해파리다운 면모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해파리 따위가 아니다. 아버지 따위는 해파리가 아니다. 아버지는 해파리보다 더한 존재, 아니 해파리보다 못한 존재, 아버지는, 아버지는. 아버지는 제 뜻대로 자식을 먹어치운 사투르누스일 뿐이다. 자식을 먹어치운 사투르누스. 사투르누스…….
*
남자는 경찰서의 의자가 불편하기라도 한 듯 몸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막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앉은 남자였다. 그는 험악한 인상과 달리 퍽 겁에 질린 양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으로 연신 무릎을 두드렸다. 남자는 물 한 병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키고서야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저어, 그게……. 진술을 하라시니까 합니다. 차해철 씨와는 채무관계가 있었습니다. 18일 오후 다섯 시까지 원금과 이자를 합쳐 380만원을 상환받기로 했고, 오늘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어 집에 찾아갔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이게 기본적으로, 채무자가 상환일을 지키지 못하면, 자택에 강제로라도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계약서에 명시가 되어 있거든요. 대출 당시에 이미 합의된 사항입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같이 갔던 사람하고 문을 따서 들어갔는데, 그리고, 그……. 아시겠지만, 저도 직업이 직업인지라 살면서 별의별 광경은 다 봤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그러고 있었죠. 애 옆에 식칼이 있었는데, 아마 그걸로 배를 갈랐던 것 같습니다. 예, 차해철 씨 배를요……. 배를 갈라서 헤집고 있었어요. 일단 가까이 가서 애 옆에 있던 식칼부터 가져갔죠. 누가 봐도 애가 미쳐 있는데, 칼이 거기 있으면 저희까지 찌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지문은 그때 묻은 겁니다……. 칼을 뺏고 보니까, 차해철 씨 아랫도리가…… 다 벗겨져 있더군요. 그리고……. 씨이…… 그곳이 잘려 있었습니다……. 애는 계속 누운 사람 배 안에 내장을 뒤적뒤적하면서 피를 튀기는데…… 저희가 기겁해서 애를 건드리니까, 갑자기 그 미친 애가…… 막 웃는 거예요……. 내가 이겼다, 사투르누스, 사투르누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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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자무늬 창문을 통과한 10월의 멀건 햇빛이 망막 위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짙은 락스 냄새 덕분에 머리는 아찔했다. 바깥은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건만, 수영장의 공기는 한겨울처럼 서늘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착각이다. 물의 온도는 적절하게 조정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객석에는 관객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들이 뱉는 숨은 지나칠 정도로 뜨거워,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외투 아래 숨은 피부가 비명 질렀다. 너무 추워, 너무 춥다고. 똑똑히 봐. 그 별것 아닌 부탁, 혹은 협박, 혹은 권유 탓에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관심도 없었던 청소년 수영체전을 관람하기 위해 왕복 2,000원가량의 차비를 지불하고, 지금 이곳에 있다. 우스웠다. 대체 무얼 바랐던 건가. 나 자신에게 건네는 질문이었다. 동시에,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K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너는, 무얼 보여주고 싶은 건가.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풀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국가와 함께 선수들이 풀 라인을 따라 걸어 나왔다. 그중에는 K도 있었다. 팔 언저리가 파랗게 멍든, 방어흔을 가진 소녀가 객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똑똑히 봐. 그의 말이 나를 옥죄었다. K를 살펴야한다. 이 경기를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기억해야한다. 그건 분명히 '의무'였다. K를 포함한 선수들은 하나같이 앳된 얼굴이었다. 동시에 명확했다. 그 또래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망설임, 기색 따위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기록 종목 선수 특유의 담담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별다른 안내 없이, 체계적으로 단련된 육체는 각자의 라인 앞에 줄지어 섰다. 허리를 숙여,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고른 숨을 쉬었다. 훈련으로 확장한, 비대한 허파를 진정시키는듯했다. 그들의 가슴 속에 타는 파란 불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덩달아 나까지 몸에 힘이 들어갔다. 침묵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감 시간은 무한대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달려라, 달려. 속으로 수십번을 되뇌었다. 총성과 함께 선수들은 탄환이 되었다. 수면으로 몸을 찔러넣었다. 상어처럼 수중을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공기 방울이 떠올랐다, 허망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폭발할 것처럼 부풀어 오른 승모근, 팔뚝, 오목하게 모인 손바닥이 눈에 들었다. 내가 지금 그들에게 품는 감정은 무엇인가. 동경인가, 사랑인가. 동경이다.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박애도, 성애도 아닌 감정이 가슴을 두드렸다. 와중에 나는 눈알을 굴려 가며 K를 찾았다. 4레인이었다. 검은색의 민무늬 수모, 그 안으로 깔끔하게 말아 넣은 머리칼, 무엇보다도, 가녀린 육신이 가진 말도 안 되는 생명이 내 고삐를 잡아챘다. K는 빨랐다. 다른 누구보다도. 순식간이었다. K의 손이 먼저 난간에 닿았고, 체육관 한가운데 달린 커다란 전광판이 차례로 선수들의 기록을 비췄다. 나는 잠자코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K는 크게 내 이름을 소리쳤다. 순식간에 흩어져서,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분명 내 이름이었다. K는 활짝 웃었다. 수경을 벗고
- 탈퇴 회원
- 2022-03-16
성게를 가르면 외롭고 쓸쓸한 내장이 터져 나온다 어떠한 소스도 없이 당신은 비린 것들을 잘만 삼켰다 가시에 찔려도 아파하지 않았던 당신 손가락 끝에선 초장빛의 피가 지문을 비집어 나오고 당신은 문득 나는 바다에서 죽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한다 물거품들의 축제에 당신은 초대받았고 하얀 거품이 되어 익사하는, 우리는 종종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어서 고립된다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하고 바다는 하늘의 색으로 물들고 당신은 초장도 없이 뛰어든다 바다는 당신의 그림자로 물들고 온 몸에서 비린 향이 났다 너는 나보다 횟집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생각했고 관 위에서는 레몬즙 냄새가 났다 당신은 언제 추억이 될까 언젠가의 수산시장에서 먹었던 잊지 못할 성게의 맛처럼 횟감 없는 수조 혼자 남은 철 지난 방어 도마 위를 수십 번 오르내리며 칼날을 구경하고 죽어서도 팔딱대는 꼬리들이 있어 식어버린 심장과 여전히 뜨거운 마음 저런 사랑은 조금 부럽다고 생각해버리게 되는데 가끔은 살아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들이 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도마가 때론 너무 차가워서 등을 기대 눕는 것 조차도 두려워질 때가 있다
- 탈퇴 회원
- 2021-03-23
“그동안 내가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왔는지, 지난날에 후회는 없는지. 오늘 밤 기숙사에 돌아가 잠이 들기 전, 한 번쯤 되새겨보세요. 내 허벅지를, 내가 마구 소리 지를 수 있을 정도로 꼬집을 수 있는지. 그렇게 뚝뚝 눈물을 흘리다 내일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만납시다.” 그런 말을 들었다. 내 스스로 소리 지를 수 있을 만큼 허벅지를 꼬집어보라는 말. 나는 곧바로 기숙사에 돌아가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하얀 허벅지가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흐느껴지지도 않았다. 크흠. 한 번 헛기침을 했을 때 내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도 맑고 카랑카랑했다. 빨갛게 부어오른 허벅지를 뒤로 한 채, 나는 샤워를 했다.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스스로가 괴로운 것인지, 환경의 탓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돈이 없어 굶어본 적은 없고, 원하는 걸 다 갖진 못했으나 풍족하게 살았고, 어릴 적 유행하던 닌텐도도 주말마다 해보았으며, 학원도 다녀보았고, 영어 원어민 선생님과도 만나보았으니 분명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고통 받고 매일 같이 우는 이유가 억울했다.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가 복에 겨워 이런 생각에나 빠져산다고 느꼈다. 샤워를 끝낸 뒤, 구석에 쳐 박힌 콘센트에 전선을 꽂았다. 구닥다리 헤어드라이기가 털털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나는 뜨거운 바람으로 재빠르게 머리를 말리고는 방 불을 껐다. 하루 종일 공부만 했더니 온 몸이 피곤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옆으로 돌아누웠다. 텅 빈 침대 하나가 보였다. 룸메이트 친구의 것이었다. 그 친구는 독감에 걸려 3주전에 퇴소해서, 겨울방학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어두운 방에서, 나 홀로, 마음껏 생각하고, 흐느껴 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낮에 들었던 그 말을 들으며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했다. 채 2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인생을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봤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가. 이상했다. 나는 분명 전교 1등도 아니고 모든 시간을 공부만 하며 알차게 보냈던 것도 아닌데 지난날이 후회되지 않았다. 분명 후회로 가득 차 눈물을 또옥 똑 흘려야 하는데,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더 정곡을 찔렀다. 속으로 말을 마구 내뱉었다. 넌 지금까지 한 게 없잖아. 고작 그 성적 가지고 뭘. 일부러 더 상처 되는 말을 했다. 진정으로 마음에 찔리는 무언가가 있어야 제대로 된 반성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 더 심장이 아파오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나는 도저히 후회하지 않았다. 더 날카로운 말, 뾰족하고 예리한 말. 나는 그런 말들을 찾아 나섰다. 그런 말들이 도저히 찾기 어려워지면 일부러 말을 더 날카롭게 갈았다. 끝끝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화가 나는, 그리고 내 스스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말에 도달했다. ‘고작 열등감에 눌린 네가 뭐라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후회되
- 탈퇴 회원
- 202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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