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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소설_HOTEL④] 코 없는 남자 이야기

  • 작성일 2015-08-01
  • 조회수 2,238


[기획소설_HㆍOㆍTㆍEㆍL ④]



코 없는 남자 이야기




김경희



삽화-코없는-남자이야기


아주 가끔은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여자가 코를 찡긋하며 무심히 말했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본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기댄 여자는 호기심 많은 강아지를 닮았다. 여자가 홑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간다. 호텔 창문에는 암막 커튼이 쳐져 있다. 살짝 커튼을 들추자 한 움큼의 빛이 새어든다. 해가 진 후에도 희미한 황금빛이 감도는 이 방은 북극의 밤을 닮았다. 여자는 ‘달6호실’ 팻말이 붙은 이 방에서 한 달째 머물고 있다. 여행자의 숙소라는 호텔이 그녀의 거처인 셈이다. 언제 이곳을 떠날지 혹은 어디로 가려는지 남자로서는 아는 것이 없다. 이를테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자라는 이야기다. 한번은 그녀가 이런 말도 했었다.
- 여행자들은 결국 남극이나 북극으로 가게 되어 있대.
남자는 여자가 곧 춥고 먼 나라로 가려 한다는 것 정도만 예감할 뿐이다. 물론 그도 가끔씩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매번 상상에 그치고 만다. 남자가 유별나게 소심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보통의 중년 남자라면 다들 그렇게 산다. 가정을 떠난다는 생각 자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중년 남자라면 가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한다. 남자도 딱 그랬다. 집은 아니지만 안락한 느낌을 주는 곳,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집이라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가장 낯설고 불편한 곳이 집인 사람들도 있다. 남자도 전에는 그것을 몰랐다.


달6호실은 명동에 있는 P호텔의 객실 중 하나다. 말끔한 외관의 P호텔은 명동 중심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남산이 가깝고 오래된 음식점까지 걸어갈 수 있어 편리한 위치다. 호텔은 전체적으로 소박한 분위기였는데 밝은 색조에 녹색과 오크 소재가 매치된 고전적인 가구를 배치한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아늑하면서도 경쾌한 공기가 감도는 이 방에서 남자가 머무는 시간은 대략 두어 시간 정도, 그는 이 공간에만 들어서면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면서 뼛속까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머릿속에는 매번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다짐과 이 방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남자는 더운 숨을 내쉬며 습관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흥미롭게 바라보았고 그는 중년 남자란 그저 피곤하기 마련이라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 다 사라져버렸어. 좋았던 날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남자는 중얼거리며 홑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긴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선홍색 립글로스를 발라서인지 여자는 자몽처럼 생기 넘쳐 보였다. 싱그러운 여자의 얼굴 위에 권태가 밴 아내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때 여자가 무슨 말인가 했지만 남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귓가에 들리는 것은 아내의 원망과 질타, 그것뿐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마흔일곱의 중년 사내가 스물다섯의 젊은 여자를 만나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것을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여자는 결혼하지 않았고 남자는 이미 결혼한 몸이다. 결혼한 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침대를 같이 쓰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부가 일반적으로 택하는 침대 사용법은 대략 세 가지다. 한 방에서 한 침대를 쓰는 법, 한 방을 쓰되 침대는 각기 쓰는 법, 그리고 방도 따로 침대도 따로 쓰는 법이다. 남자의 경우는 세 번째 방식으로 살고 있다. 물론 처음에 그도 첫 번째 방식을 고집했었다.
- 그래도 침대만은 같이 써야 하지 않을까, 명색이 부부인데.
그런데 아내의 생각은 사뭇 달랐다.
- 당신한테서 냄새 나. 불쾌한 냄새.
아내는 단호하게 답했다. 남자는 약간 마음이 상했지만 구차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 방도 침대도 각각 쓰잔 말인가?
- 왜? 무슨 문제 있어?
- 나쁠 것 없지. 그렇게 하자고.
아내는 냄새에 민감한 여자였다. 그리고 남자 역시 첫 번째 방법을 고집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그런 데다 남자는 지난한 결혼 생활을 이어 오면서 화를 내거나 욕심을 부리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 온 터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아내가 먼저 선심 쓰듯 말했다.
- 돌침대라도 하나 구입하지 그래? 침대가 푹신해야 한다는 건 고정관념이잖아.
- 아무렴. 고정관념이란 깨라고 있는 거니까.
돌이켜 보면 부부 사이가 더 멀어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공간을 나눠 쓰되 선을 허용하지 않는 관계, 남자는 그것이 외롭다고 생각되면서도 한편으론 편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은 아내가 아프면서부터다.


6개월 전, 유방암 판정을 받고 나서 아내는 부쩍 짜증이 늘었다. 가슴 절제 수술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는데 신경안정제나 수면제의 용량을 늘려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내는 먼저 바깥출입을 끊었다. 꽤나 애착을 갖던 사진 동아리에도 발을 끊으면서 아내의 삶은 날로 척박해져 갔다. 냄새에 대한 아내의 집착이 도를 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내는 김치나 반찬은 물론 일상의 모든 냄새를 역겨워했다. 물집이 잡히도록 수없이 손을 씻었고 천연 방향제라면 출시되기가 무섭게 사들였다. 남자는 아내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밖에서 돌아오면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욕실로 향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항균 및 냄새 억제에 효과가 있다는 특허 샴푸에 발을 담가 씻는 것은 물론 대나무 숯으로 정제한 천연수로 헹궈낸 후 드라이어를 이용해 발가락 사이의 물기까지 남김없이 말렸다. 그럼에도 아내는 번번이 코를 싸쥐며 외쳤다.
- 지독해, 너무 지독해서 견딜 수 없어!
그럴 때면 남자는 독촉에 시달리는 채무자처럼 저 깊은 곳에서 비참한 심정이 치밀어 올랐다. 마주 앉아 가시 돋친 저녁을 먹은 부부는 밤이 되면 각자의 방으로 건너가 스마트폰을 뒤적이다 잠이 들었다. 솔직히 지내다 보면 그리 나쁜 생활은 아니었다. 다만 어두운 방에 누워 있을 때 남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남은 것이 있을까? 긴 시간을 뒤척이던 남자가 웅크려 돌아눕는다. 본능인 듯 외로움이 느껴졌다.


*


주말 아침 남자가 눈을 뜬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가 들려온다. 집 안 공기는 눅눅하고 싸늘했다. 남자가 방문을 열고 슬그머니 나온다. 머리가 헝클어진 아내가 싱크대 앞에 서 있었다. 반찬이 담긴 유리그릇을 내려놓다가 아내는 어김없이 코를 싸쥐었다.
- 정말로 지독해서 못살겠어!
남자는 겁을 집어먹고는 티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모름지기 가정이란 포근해야 하지 않나, 라는 불만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것은 에너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처음에 남자도 불만이나 반감을 슬쩍 표출하곤 했지만 그런 경우 아내는 모멸감을 동반한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뿐만 아니라 남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미소가 아내에게는 있었다. 웬만큼 자존감이 높지 않고서야 맞설 수 없는 미소, 그럴 때면 남자는 재빨리 건성으로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여보’라고 꼬리를 내렸다.
- 그저 입만 살아 가지고.
아내의 비난이 극에 달하면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상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승리를 거머쥐는 아내가 어리석은 것인지 쉽게 패배를 인정하는 자신이 못난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집안싸움이 무수히 반복되는 동안 부부 관계가 산산조각 나고 있음은 분명했다. 그때 주방에서 밥솥의 김빠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남자는 어떤 의문에 사로잡힌다. 왜 냄새가 안 나는 거지? 정말이지 이상했다. 코가 마비된 것처럼 도통 밥 짓는 냄새가 나질 않았다. 설마 코가 없어져 버린 건 아닐까? 그는 다급히 손을 뻗어 얼굴을 훑는다. 다행히 거기, 정 가운데에 코는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 아주 가끔 개가 된 상상을 하곤 해.
마른침을 삼키던 남자는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어디선가 여자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잠시나마 기분이 상쾌해진 탓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를 쳐다보는 사람은 아내였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밥주걱을 허리춤에 든 채로 아내가 한심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싸늘한 아내의 표정에 그는 몸이 오그라들 듯 주눅이 든다. 미안해, 너무 피곤해서 말이지. 남자는 말끝을 흐리며 욕실로 향했다. 아내는 고개를 내젓더니 완강한 동작으로 밥 한 그릇을 퍼서 홀로 식탁에 앉았다. 가스락. 아내의 수저질 소리가 그의 심장을 후벼 판다. 킁. 이번에는 아내가 코를 푼다. 왠지 모르게 비위가 상한 남자는 샤워기를 세게 튼다. 남자는 요구르트가 첨가된 보디밀크를 꺼내 타월에 적당량 덜어내어 거품을 낸다. 노골적으로 코를 벌름거려 보지만 낭패감만 들었다. 다급해진 남자는 보디밀크 한 통을 바닥에 모조리 부어버린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지? 별안간 아내의 신랄한 목소리가 욕실 문을 넘어왔다.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 내 말 안 들려? 제발 그 빌어먹을 문 좀 열라고!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곤 차가운 바닥에 앉아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 속에는 한 남자가 웅크리고 있다. 그 남자는 벌거벗었고 야위었으며 몹시 초라해 보였다. 껍데기만 남은 몸은 너무나 앙상해서 말라붙은 나뭇가지 같았다. 돌연 거울 속 남자가 히죽 웃는다. 얼핏 봐서는 웃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울상을 짓는 것이 분명했다. 예나! 남자는 속으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 당신은 내가 산송장으로 보이지?
남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고는 수압을 최대한 높이 올렸다. 더운 물이 사방으로 튀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그는 앙상한 몸을 숨겨버린다. 남자의 몸이 완전히 젖고 나서야 아내의 목소리는 겨우 잦아들었다.


*


여자를 처음 본 것은 1년 전 P호텔에서였다. 좀처럼 사람을 사귀지 않던 아내가 남자에게 소개해 줄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취미로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아내는 동아리에서 스무 살쯤 어린 여자 아이를 만났는데 예나라는 이름의 그 친구를 썩 마음에 들어 했다.
- 예나는 사모예드(samoyed)를 닮았어, 여보.
- 사모예드라고?
- 왜 있잖아, 에스키모 인들의 애완견. 충실하지만 자유로운 느낌이랄까?
아내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내밀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풋풋하고 생기가 넘쳤다. 나도 이럴 때가 있었을까? 아내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했다.
- 아! 이젠 다 지나가 버렸어. 예쁨이란 게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아내의 눈동자에 슬픔이 드리워졌다. 감상에 젖은 것이 안쓰럽기도 하여 남자는 흔쾌히 저녁 약속에 동의했다. 아내는 곧장 P호텔의 이탈리아 식당을 예약했다.
- 예나, 호텔은 언제 생겨난 걸까?
와인 한 모금을 마신 아내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 음…… 정착지를 일시적으로 떠나야 하는 여행이 생기면서가 아닐까요?
- 아, 정착지! 나는 정착지를 떠나 본 적이 없어, 예나.
- 저는 어디에도 정착해 본 적이 없어요, 언니.
식사 분위기는 그런대로 활기찼다. 어린 채소를 넣은 샐러드와 구운 빵이 먼저 나왔고 적절한 시간에 오징어먹물 빠에야(paella)가 곁들여졌다.
- 우리 시칠리아 여행 갔을 때 참 많이 먹었는데, 그렇지 여보?
먹물이 밴 밥알을 입에 밀어 넣으며 아내가 말했다. 그런데 희미하게 웃을 때마다 아내의 잇몸에 검은 소스가 번졌다. 남자는 그것이 좀 거슬렸다. 메뉴 선택이 적절치 않았다는 생각마저 들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반면 예나라는 친구는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오로지 아내만이 먹고 마시며 쉼 없이 떠들었다. 아내는 요즘 찍고 있는 사진과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여자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는 쪽이었다. 평소보다 수다스러워진 아내는 마치 외로운 노인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귀밑으로 새치가 꽤 비어져 나온 상태였다. 품위 있는 삶과 예술을 위하여! 적당히 취한 아내가 감동한 듯 외쳤다. 그때 여자가 글라스를 내려놓으며 아내에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 궁금해졌어요. 품위 있는 삶이란 어떤 거죠?
- 글쎄…… 알아도 모르는 척,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여유?
- 그건 위선 아닌가? 권태를 견디게 하는 게 위선이었군요.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내의 얼굴에 불쾌함이 살짝 스쳤다.
- 모르는 소리 마. 여자의 삶에서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건 말이야 마치 통과의례처럼…….
- 중년이 되면 다들 왜 그래요?
귀는 닫고 입은 가르치려고만 들죠.
- 좋아. 하나만 물어보자. 넌 결혼하지 않을 거니?
- 아마도요. 인간의 밑바닥까지 볼 자신이 없어요.
-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예나는 아직 어리니까.
-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두 분은 왜 결혼하신 거죠?
여자가 남자를 빤히 보며 물었다. 남자는 그저 얼굴을 돌려 아내를 쳐다보았다.
- 그때 우리 남편은 참 착했어. 흡족할 만큼.
단지 착해서 결혼을 했다고요? 여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아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 결혼하는 데 그다지 많은 감정이 필요하진 않아, 예나.
하지만 부부로 산다는 건 정말 의미 있는 일이야.
- 남편분도 그 말에 공감하세요?
여자가 공격적인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비수처럼 남자의 마음을 찔렀다.
- 예나! 우리는 마흔 중반을 넘겼고 자긴 겨우 스물다섯이야.
무슨 말이냐면 인생을 논하기에 넌 너무 어리다고!
그 말을 들은 여자가 돌연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낮게 답했다.
- 정말 끔찍해요, 언니.
- 뭐가…… 말이지?
- 입가의 그 오징어 먹물 말이에요.
아내는 곧 웃음기를 거뒀다. 남자의 시선이 식탁으로 옮겨진다. 식어버린 접시에는 군데군데 검은 소스가 말라붙어 있었다. 여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도 얼떨결에 따라 일어났다. 오직 아내만이 미동도 하지 않고 굳어져 있었다. 그만 일어나자, 여보. 남자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아내는 혀 꼬인 말을 하더니 일어서기 위해 몸까지 휘청했다. 균형을 잡은 아내가 빈정대는 몸짓으로 여자에게 다가간다.
- 한 마디만 하자. 솔직히 네 사진들…… 최악이야. 쓰레기에 가까운!
입술을 꼭 다문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 담담히 대답했다.
- 잊지 않을게요. 품위 넘치는 충고.
세 사람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을 돌처럼 굳어 있던 여자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이내 자리를 떴다. 아내는 불안과 고통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남자는 그 순간 알아차렸다. 상대를 모욕하는 방식으로 얻은 승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


당신이 가! 아내가 흑백으로 인쇄된 초대장을 던지며 남자에게 말했다. ‘여자의 빛 4인4색 사진전’ 초대장은 아내가 활동하던 사진 동아리에서 보내온 것이다. 전시 장소는 P호텔 로비의 오픈 갤러리였다. 참여 작가 란에는 아내와 예나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 있었다.
- 내가 거길 왜 가?
- 그럼 내가 가니? 이 꼴을 해가지고?
아내는 참담한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수개월 전부터 아내는 사진 동아리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유방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으면서부터다. 암 덩어리를 떼어내기 위해 곧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었다. 독한 약물 치료가 병행되는 사이 아내는 암 덩어리와는 작별할 수 있어도 우울증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 당신 말해 봐! 이게 여자 몸이야?
똑바로 좀 봐! 앞인지 뒤인지 구분도 안 되잖아!
남자는 맥없이 시선을 피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아내의 여성성에 대한 부분이라 가타부타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 입이 없어? 왜 말을 못 해? 남자니까 무슨 생각이 있을 거 아냐?
아내의 음성은 섬뜩하고도 뾰족했다. 놀란 남자는 얼떨결에 이렇게 말했다.
- 글쎄…… 담당의사 말이 보형물을 넣으면 자연스럽고 또 보기에도…….
쩍! 순간 아내의 마르고 거친 손이 남자의 볼을 강하게 훑었다.
- 보형물? 오라…… 상관없다 이거구나. 어차피 만지지도 않을 거니까?
- 제발 그만 좀 하자 우리!
- 우리? 나하고 눈도 안 마주치면서 우리라고?
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초대장을 낚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아내는 오래 통곡했다. 밤새 뒤척이면서도 남자는 아내 방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


다가온 주말, 남자는 택시를 타고 P호텔로 향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스산한 날씨였다. 택시에서 내릴 때 상당히 조심했는데도 빗물이 튀어 바지에 얼룩을 남겼다. 모든 게 꺼림칙했다. 아내의 부탁대로 인사만 하고 갈 예정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남자는 새치가 섞인 가르마 쪽도 솔직히 신경 쓰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때 반대편에서 누군가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였다. 남자는 당황했지만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 세상에! 다시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 아내가 몸이 아파서 대신 왔어요.
여자는 저런! 하고 탄식하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남자의 심장이 살짝 요동쳤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남자는 마침 바지에 튄 흙탕물 생각이 나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심한다고 해도 매번 이렇지 뭡니까. 바지를 툭툭 털고 나서 남자가 멋쩍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는 조금 불쾌한 내색도 비췄다. 그럼에도 여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러더니 별안간 이런 말을 던졌다.
- 좋은 냄새가 나요.
남자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당신한테서 지독한 냄새가 나!
그때 저만치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그녀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여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목례를 하고 나서 속삭이듯 그에게 말했다.
-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남자가 나도 그래요, 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여자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등이 깊게 파인 의상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 쪽으로 쏠렸다. 남자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체 뭘 바라는 거지? 그것은 중년 남자가 감히 바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별안간 오줌이 마려웠다. 남자는 급히 자리를 피해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실로 오래간만에 세차게 오줌을 누었다. 엉거주춤 선 채로 남자가 몸을 떤다. 서늘하면서도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


여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정확히 이주가 지나서였다. 남자는 동그란 얼굴 윤곽이나 오물거리는 여자의 입술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늦은 밤 여자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영화 보지 않을래요? 남자는 솔직히 눈물이 날 뻔했다. 진실로 말하자면 그는 줄곧 그녀를 생각해 온 터였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여자가 명랑하게 물었다.
-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말이지.
- 어린애처럼 감기라고요?
- 중년이 되면 다 그래. 면역력이 약해졌다고 해야 하나?
- 아, 나이든 남자는 정말 안쓰러워요!
주말이 되어 두 사람은 시내에서 만났다. 함께 본 영화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라는 예술 영화였는데 여류 사진작가의 감춰진 인생에 관한 내용이었다. 상영관은 대학가 주변의 작은 소극장이었다. 여자는 베일에 싸인 여류 사진작가에게 적잖이 감동을 받은 듯 보였다. 반면 남자는 영화에 몰입하지 못했다. 영화가 지루해서가 아니라 그저 여자를 훔쳐보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영관이 어두웠기 때문에 곁눈질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몰래 바라본 여자의 볼은 동그랬다. 흐트러짐 없는 선명한 윤곽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은 활기 넘치는 거리를 걸었다.
- 이런 데 불편하시죠?
- 편하진 않지. 나이 들면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거든.
- 언제나 그놈의 나이 타령! 그럼 집으로 갈래요?
- 집이라고?
- 거기만큼 안락한 곳은 없으니까요.
집으로 가자는 말에 남자는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고 당황스러움과 불순한 기대감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는 집으로 남자를 유혹할 부류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다만 궁금했다. 젊고 매력적인 여자가 중년 남자를 집으로 초대하는 불가사의한 이유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여자가 말한 공간은 집이 아니라 여행자의 숙소였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P호텔이었다.
- 설마…… 여기 산다고?
- 사정상 한 달간 머물게 되었어요. 살던 집이 팔렸거든요.
- 그럼 살 집부터 구해야 하지 않나?
- 슬슬 생각해 봐야죠. 어디서 살지, 어디로 가게 될지.
- 어떻게 대책도 없이…….
나이든 남자의 노파심이 우스웠는지 갑자기 여자가 크게 웃었다.
- 대책 있는 삶은 어떤 건데요? 그것도 품위랑 같은 의미인가요?
-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 고리타분한 충고는 그만둬요.
그런 말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으니까.
여자가 달6호실 문을 활짝 열었다. 남자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 촌스럽게 굴지 말아요. 그냥 차 한 잔 마시자고요.
남자는 촌스럽다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운다. 촌스럽다는 말은 왠지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을 가졌다. 그는 세련된 사람이고 싶었기에 그저 헛기침을 하며 그 방에 들어섰다.
달6호실은 생각보다 훨씬 안락했다. 이런 호텔은 장기 투숙하기에 그만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남자는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무심한 척 방을 둘러보았다. 여자가 일상적인 동작으로 포트에 물을 올렸다. 작은 공간에 물 끓는 소리가 퍼지면서 남자의 가슴에 따뜻한 일렁임이 일었다. 그것은 부드럽고 포근한 온기였다. 동시에 남자는 자신이 기대하는 것의 정체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그녀로 인해 젊어지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하루라도 조용히 쉬고 싶은 것인가? 남자가 창가에 놓인 1인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은밀하게 떨리는 것도 잠시, 중년의 남자는 피로를 거스르지 못하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퍼뜩 눈을 떴을 때 그의 두 팔은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 미안해요, 너무 피곤해서 말이지.
-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는 것 같아요.
- 그러니까 내 말은…….
- 긴장 좀 풀어요. 쉬고 싶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러자 남자의 콧등이 붉어졌다. 그의 결혼 생활은 위태로운 상태였고, 남자는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어디에도 드러낼 곳이 없었다.
- 죄가 아니라니…… 그 말을 누가 믿어 줄까?
- 자신을 믿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잖아요.
-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 고약하지 않아요. 좋은 냄새가 났거든요.
- 정말 재밌는 아가씨로군. 사실 나야말로 냄새를 맡지 못해.
- 설마요. 감기 탓은 아니고요?
- 모르겠어. 어느 날부턴가 도통 냄새가 느껴지질 않아.
- 자장면이나 비누 냄새 그런 것도요?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이렇게 말을 이었다.
- 여기 이렇게 오래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어.
- 편하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난 남자 친구도 있어요.
-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난 아내가 있으니까…….
- 그럼 죄책감이 덜하나요?
여자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남자에게 선뜻 두 팔을 벌려 가슴을 활짝 열어 주었다. 여자의 따스한 행동에 갑자기 남자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 세상에! 중년의 울보 사내라니!
그래 봐야 세 번째 보는 사이였다. 공식적으로 단둘이 본 것은 처음이었고 더욱이 그녀는 아내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까마득히 어린 여자 앞에서 그것도 호텔 방까지 쫓아와 눈물을 쏟는 남자라니, 그는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남자의 등을 톡톡 서너 번 두드렸다. 그러고는 달6호실의 카드 키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 젊었을 땐 썩 괜찮았을 외모예요.
-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겠지?
-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여자가 방긋 웃었다. 그러더니 카드 키를 다시 들어 보였다. 남자는 손을 뻗어 충실하게 그것을 받아 쥐었다. 그러곤 복잡한 감정으로 뒤돌아 그 방을 나왔다. 마흔일곱 중년의 남자에게 생애 처음 비밀이란 것이 생겼다.


*


그날 이후 남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P호텔에 들렀다. 주로 머리가 복잡하거나 숨 막히는 일상이 견딜 수 없는 날 그렇게 했다. 두 사람은 남산을 산책했고 명동까지 걸어가서 따끈한 교자에 차가운 맥주를 나눠 마셨다. 달6호실로 돌아온 남자는 일주일 동안 꾹꾹 참았던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여자에게 털어놓았다. 체력이 받쳐 주지 않아 회사 생활이 힘들다는 말을 했고 재미 삼아 시작한 주식의 수익률 이야기도 했다. 아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여자가 특히 관심 있어 한 것은 냄새를 잃어버린 코에 대한 부분이었다.
- 냄새를 못 맡으면 어떤 기분이에요?
- 상상도 못 할 거야. 인생의 맛을 잃어버린 기분이라고나 할까?
- 불쌍해라. 코 없는 남자라니!
한번은 여자가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눈을 감은 여자가 상자에 코를 가져다댔다. 남자는 숨죽인 채로 여자의 코끝을 바라보았다. 콧방울이 오목하게 수축되는 모양을 보자 남자도 냄새 맡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두툼한 콧등을 문질러 본다. 피지 탓인지 코의 표면은 우툴두툴했다. 남자는 상자에 코를 대고 조심스레 숨을 들이마신다. 그러나 곧 체념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만다.
- 이러다가 영영 냄새를 못 맡으면 어쩌지?
- 잃어버린 코부터 찾아야겠어요. 더 끔찍해지기 전에.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당신 어디야? 아내였다. 그는 얼떨결에 회사라고 둘러댔다. 회사? 수화기 너머에서 아내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당장 들어와! 분노에 찬 아내가 말했다. 그러기 싫어. 남자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순간 억울하고 슬픈 감정들이 치밀어 올랐다. 남자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할 말 있어, 여보. 아내는 남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들을 말 없어, 지금 당장 기어 들어와! 뚜- 전화는 차갑게 끊겨버렸다. 불쌍한 사람. 여자가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몸을 숙여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댔다.
- 당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요.
그와 동시에 아내의 신랄하고 매서운 목소리가 겹쳐졌다.
- 지독해, 당신한테서 지독한 냄새가 나!
남자는 고개를 심히 흔들었다. 그리고 여자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해. 난 못난이에다 겁쟁이야.
- 당신은 겁쟁이가 아니에요. 양심이 있기 때문이지.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남자의 늘어진 뺨을 어루만졌다.
- 그만 가봐야겠어. 난 늘 이런 식이었어.
- 언젠가 아버지가 그랬어요. 중년이 된 남자들은 용기를 잃게 된다고.
- 당신이 열 살 정도 많았으면 좋았을 걸…….
- 아니면 당신이 결혼하지 않았거나?
남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었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어 여자를 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우린 어떻게 하지?
-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면 돼요. 그리고 나는 북극으로 갈 거예요.
- 왜 거길 가려는지 물어봐도 되나?
- 냄새가 없는 곳이니까요. 그뿐이에요.
남자는 그대로 서서 몇 분간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속내를 숨기려는 듯 작게 뜬 눈을, 그리고 아몬드 모양의 검은 구멍이 박힌 그녀의 봉긋한 코를.


남자가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은 몹시 어두웠다. 북극의 빙하처럼 아슬아슬하고 차가운 공기만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자는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간다. 별안간 허기가 밀려온 그는 인스턴트라면 한 봉지를 꺼냈다. 가스 불에 냄비를 올리자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내가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냄비의 물이 끓는다. 남자의 속에서도 자괴감 같은 것들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 썅! 여기가 당신 하숙집이니?
남자는 크게 놀라 숨을 멈췄다.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자기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그의 식욕도 사라지고 만다. 기운이 빠진 남자는 냄비의 물을 버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길게 누워 TV 리모컨을 집어 든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북극의 자연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펼쳐졌다. ‘2부작 그린란드의 사냥꾼’화면에 등장한 털옷을 입은 남자가 얼음 위의 개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 북극의 개들은 자기 이름이 걸린 집을 가지고 있어요.
혼자 있으면 심심할까 봐 두 마리가 한 지붕을 이고 살아가죠.
잠시 후 충실한 눈빛의 개 두 마리가 얼음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 개가 되는 상상을 할 때가 있어. 문득 여자의 목소리가 남자의 귓가에 스쳤다.
- 예나는 사모예드를 닮았어, 여보. 충실하지만 자유로운 느낌이랄까?
남자는 그녀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더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벌떡 일어선 남자가 문을 박차고 나간다. 식탁 위에 놓인 자동차 키를 집어 드는데 아내가 길을 막아섰다. 못 나가. 아내의 표정은 불길하고 음산했다. 남자가 뒤로 한 발 물러서는데 아내가 섬뜩한 얼굴로 가슴팍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둔탁한 울림이 남자의 가슴을 후벼 판다. 남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 좀 내버려둬. 나도 살아야겠다고!
그 순간 아내가 웃옷을 벗어던졌다. 남자의 시선이 아내의 가슴께로 옮겨갔다. 거기, 야윈 몸 가운데에 가슴을 도려낸 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있었다.
- 왜 시선을 피해? 흉해서 못 보겠니?
아내가 바투 다가와 남자의 손을 가슴에 가져다댔다. 만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댄 것처럼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남자는 솔직히 손을 떼고만 싶었다. 하지만 아내를 모욕할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부드럽게 움직여 본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껍데기뿐인 두 사람의 관계처럼. 아내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진다. 더는 견디지 못한 아내가 먼저 남자를 밀쳐냈다. 언젠가 달6호실에서 여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 사랑했나요, 아내를?
-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
- 지금은 어때요?
- 전부 다 사라졌어. 우리에게 좋았던 날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남자는 도리 없이 아내를 등지고 나왔다. 집을 나와서 막 골목을 돌아서는데 눈앞에 몸집이 큰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털이 갈색이며 윤기가 흐르는 녀석은 거리의 흔한 개였다. 가까이 보니 그 개는 나이가 좀 들어 보였다. 남자는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늙은 개는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다가왔다. 저리 가!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두려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사나운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그런데도 개는 남자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드는 찰나 개가 남자의 몸을 그대로 덮쳤다. 악. 그는 비명과 동시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런데 사방이 너무 고요했다. 그리고 몸 어디에서도 아픔이나 고통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슬며시 눈을 떴다. 아까와 달리 개는 온순해져 있었다. 그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개는 남자의 젖은 머리와 어깨, 마르고 굽은 등에 코를 구석구석 가져다 대더니 포기하듯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당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늙은 개는 어둠 속으로 차츰 멀어져 갔다.


*


달6호실은 체크아웃 하셨는데요? 한 달 후 남자가 P호텔을 찾았을 때 데스크 직원이 말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남자를 미심쩍게 바라보더니 다시 이렇게 물었다.
- 혹시 코 없는 남자 분이신가요?
6호 객실 손님이 코 없는 남자라는 분에게 쪽지를 남기셨거든요.
저희도 이러 일은 처음이라…….
남자는 울컥하는 마음을 누르며 자신이 코 없는 남자가 맞을 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잠시 위아래로 흘끗 내려다보더니 중대한 결심을 한 듯 쪽지를 내어주었다.


코가 없어져 버렸다네
이브의 타락한 후예들은……
오, 물의 행복한 냄새
돌의 용맹한 냄새!


- G. K 체스터턴의 시 「쿠들의 노래」


남자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괜찮으세요? 데스크 직원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직원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남자의 코를 빤히 보며 물었다.
- 이제 코는 찾으신 건가요?
- 찾고말고요. 정말 친절한 호텔이군요.
남자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 체크인을 하려고 서 있던 젊은 여자가 남자와 어깨를 살짝 부딪쳤다. 여자의 얼굴은 자몽처럼 싱그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동그랗고 생기 넘치는 볼 위로 사모예드를 닮은 그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 여행자들은 결국 남극이나 북극으로 가게 되어 있대.
남자는 김빠진 맥주처럼 기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깨가 굽은 그는 누가 보기에도 중년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어디야 당신? 아내가 나지막이 물었다. 북극이야. 남자는 무심결에 답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아주 가끔은 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내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 집으로 올 거지?
- 그럼. 난 당신 말 잘 들으니까.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여자는 정말 먼 곳으로 갔을까? 얼음뿐인 차가운 바다와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그곳으로 말이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옷깃을 파고든다. 그는 눈을 감고 떠올려 본다. 북극을 달리는 야생의 개가 된 자신의 모습을. 크림빛 흰털을 가진 남자는 장대하게 펼쳐진 눈밭을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오로지 냄새만으로 길을 찾아야 하는 곳, 싸늘한 겨울 냄새 싱싱한 피 냄새가 어우러진 눈밭 위를 그는 발이 시린지도 모르고 거침없이 달렸다. 쩡.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에 남자의 양쪽 귀가 바짝 섰다. 씽. 바람이 분다. 시린 코에서는 김이 뿜어져 분분이 날린다.



작가소개 / 김경희(소설가)

- 1976년 서울 출생. 2002년 KBS 라디오 드라마로 데뷔한 14년 차 방송 작가. 2010년 단편소설「코피루왁을 마시는 시간」으로 등단. 2012년 다큐에세이 『제주에 살어리랏다』가 있음. 현재 EBS 《하나뿐인 지구》 구성 작가로 활동 중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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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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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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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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