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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카다레,「부서진 사월」중에서

  • 작성일 2013-04-11
  • 조회수 2,524



이따금 그조르그는 날짜의 흐름을 생각하곤 했다. 그로서는 시간의 흐름이 괴상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았다. 나날들은 어느 시간까지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다가도, 복숭아 꽃잎 위에서 한동안 파르르 떨다가 갑자기 굴러떨어져 부서지고는 마침내 죽고 마는 물방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월이 왔다. 그러나 봄은 정착하기가 매우 힘든 모양이었다. 이따금 알프스 산자락에 드리워진 푸른 띠를 볼 때면 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드디어 사월이 왔군요, 주막에서 서로 소개를 하면서 길손들은 그렇게 말했다. 올해의 봄은 너무 늦게 찾아온 감은 있었지만 환영을 받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휴전 날짜의 종료에 관한 아버지의 충고가 떠올랐다. 충고 전부는 아닌, 그렇다고 충고의 일부도 아닌, 단지 “얘야” 하던 그 말만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만의 사월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그의 사월은 두 동강 나 반쪽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 그가 길을 떠난 것은 산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여인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전에는 멀리 마차를 향해 ‘나비 마차야, 왜 이 고장을 헤매고 다니니?’라고 중얼댔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고원 지대를 쉬지 않고 달리던, 유달리 눈에 띄던 그 마차를 찾고 있었다. 실제로 그 마차는 침울한 외관과 구리로 만들어진 차문 손잡이와 지나치게 장식적인 선들 때문에, 그가 최근에 딱 한 차례 쉬코데르에 머무는 동안 교회의 장례 행렬에서 육중한 오르간의 멜로디가 울리는 가운데 보았던 관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밤색 머리의 여인의 눈길이, 그가 이제까지 어떤 사람과 접촉했을 때도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감미로움과 감동으로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나비―관―마차의 내부 때문이었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많은 여인의 눈을 보았다. 강렬한 눈, 수줍어하는 눈, 뇌쇄적인 눈, 섬세한 눈, 간사한 눈, 오만한 눈 등 많은 눈들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런 눈길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은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친근한 것 같기도 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동정 어린 것 같은 눈. 그녀의 눈길에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과 함께 사람을 옭아매 먼 곳으로, 삶 너머로, 저 세상으로,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곳으로 실어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밤(너무도 적은 별들이 검은 가을 하늘을 채우려 애쓰듯 그가 잠으로 그럭저럭 채우려 애쓰곤 하는)이 되어 잠으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빛이 소모되었던 천지창조 때에 잃어버렸던 다이몬드가 되어 그의 내부에 박혀 있었다.

그랬다. 그가 대고원 지대를 향해 길을 나섰던 것은 그녀의 그 눈을 다시 보기 위함이었다. (……)

주위의 편도나무 위로 둥실 뜬 밝은 달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한동안 반쯤 눈을 감고 그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몇 년 전 어느 구월의 축축했던 날 도청의 옥수수 창고 앞에 길게 늘어섰던 줄 속에서 들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도시 여인들이 입술에 키스를 해주는 것 같네…….”



● 작가_ 이스마일 카다레 - 1936년 알바니아에서 태어나 엔베르 호자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직전인 1990년 프랑스로 망명, 지금까지 파리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63년 첫 장편소설 『죽은 군대의 장군』을 발표한 이래『돌에 새긴 연대기』 『꿈의 궁전』 『부서진 사월』 『H 서류』 『아가멤논의 딸』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광기의 풍토』 등을 발표했다.

● 출전_ 『부서진 사월』(문학동네)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김태형

● 낭독_ 변진완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배달하며 

이 소설은 15세기에 만들어진 알바니아 관습법 ‘카눈’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일명 ‘복수와 피의 회수’로 알려진 이 율법에 따르면 살인을 당한 피해자의 가족은 상대 집안사람들에게 피해자가 당한 그대로 되갚을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됩니다. ‘피의 복수’는 집안의 아들들에게 대물림되어서 이에 연관된 가족들은 평생을 숨어 지내야 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먼 과거에 한 건의 살인이 일어납니다. 그 후 연쇄적인 살인에 수많은 후손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희생됩니다. 주인공 그조르그는 피의 복수에 나서고 다시 제 피를 내놓아야 할 운명에 놓인 청년입니다. 이 소설은 율법에 따라 죽임의 유예기간을 갖는 이 청년이 4월 한 달간 고원을 떠도는 여정을 몽환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비극적 운명 곁으로 한 여인이 스치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공명은 참으로 잊히지 않습니다. 분단은 카눈처럼 우리 민족의 무자비한 굴레입니다. 한반도의 4월도 부서질까 두렵습니다.


문학집배원 전성태




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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