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네틀 & 수잔 로메인,「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중에서
- 작성일 2013-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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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네틀 & 수잔 로메인,「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중에서
몇 년 전, 언어학자들이 테비크 에센크라는 어느 쇠약한 농부의 말을 녹음하려고 하시 오스만이라는 터키의 농촌 마을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카프카스 북서부에서 한때 사용되던 우비크어의 마지막 사용자로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그 당시에는 불과 네댓 명의 부족 노인들만이 우비크어를 몇 마디씩 기억하고 있었는데, 에센크만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세 아들조차 터키어를 쓰며 살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모국어로는 자식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에센크는 이미 1984년에 자기 묘비에 새기고 싶은 비문을 써 놓았다. “이것은 테비크 에센크의 묘지이다. 그는 우비크라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최후의 인물이었다.” 1992년에 에센크가 죽으면서, 우비크어도 갈수록 늘어가는 사어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4년 후, 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붉은천둥구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메리카 원주민이 죽었다. 그 역시 사라지는 언어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남아 있던 마을 사람들과도 모국어로 대화할 수 없었던 그는 죽음과 동시에 자기 부족의 언어도 함께 무덤으로 데려갔다. 붉은천둥구름은 자기 부족 안에서는 외톨이였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 가운데는 동지들이 있었다. 1987년, 캘리포니아 주의 팔라에서는 쿠페뇨어의 마지막 사용자였던 로신다 놀라스케스가 94세의 나이로 죽었다. 와포어의 마지막 사용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로라 소머설은 1990년에 죽었다.
영국령 맨 섬에는 맹크스어를 할 줄 알았던 마지막 인물인 네드 매드럴이 197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옛 맹크스어도 세계의 살아 있는 언어들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매드럴이 태어나기 얼마 전인 백 년 전만 해도 맹크스어를 쓰는 사람이 만 2천 명 정도 남아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맹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죽기 2년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 북부에 사는 아서 베넷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음바바람어를 몇 마디 이상 할 줄 아는 마지막 인물이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20년 전에 세상을 뜬 뒤 그도 이 언어를 쓰지 않았다.
(……)
지난 5백 년 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의 언어들 중 거의 절반 가량이 사라졌다. 에트루리아어, 수메르어, 이집트어 등 고대 제국의 언어들은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 그들의 무덤에 새겨진 비문은 오래 전에 문화와 언어가 사라져 버린 잊혀진 민족들을 어렴풋이 일깨워 주는 흔적일 뿐이다. 아프리카 수단 지역에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사이에 존재했던 메로에 제국의 공용어였던 메로에어는 오늘날까지도 해도되지 못한 채 비문으로만 남아 있다. 영국의 고대 언어인 컴브리아어는 겨우 세 단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자기록을 남기지 않은 다른 수많은 민족들의 언어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세계를 잠시 돌아보면, 지난 수세기 동안 실개울처럼 진행되어 온 사멸 현상이 이제는 홍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두에서 제시한 예들은 언어의 사멸이 고대 제국이나 낙후된 오지에 국한된 현상이 아님을 보여 준다. 언어의 사멸은 바로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세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 작가_
다니엘 네틀 - 영국의 정신생물학 분야의 권위자로서 인류 진화의 맥락에서 언어와 문화를 살피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북부 나이지리아의 피엠어』『언어의 다양성』『강렬한 상상: 광기, 창의성, 그리고 인간 본성』등.
수잔 로메인 - 영국의 언어학자로 사회언어학과 다중 언어 사회, 언어적 다양성에 대해 연구하였고, 성(性) 언어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저서로『이중 언어』『언어, 교육, 그리고 개발』『사회 속의 언어』『의사소통하는 성(性)』등.
● 낭독_ 김형석 - 배우. 연극 <블랙박스>, 뮤지컬 <천상시계> 등에 출연.
● 출전_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 배달하며
전북 김제의 한 초등학교에서 ‘까막눈’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치려고 사용한 교재는 시선했습니다. 시방, 쇠때, 남정내, 하나씨(할아버지), 가새, 에미(며느리), 거시기와 같은 노인들이 생활 속에서 접하는 단어들인, 그 고장 방언으로 꾸며졌습니다. 평생 까막눈으로 산 노인들이 당장 읽고 쓰시려면 외국어 같은 표준어보다는 당신들의 입말들을 익히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겠죠. 할머니들의 반응도 좋았다고 합니다. “아따 선상님, ‘거시기’는 못 배운 촌사람만 쓰는 말인 줄 알았당게. 핵교서도 이런 말을 쓰니 훈짐나부러요(마음이 훈훈해요)”(경향신문 2005, 6, 9). 표준어정책과 언어의 다양성을 동시에 생각해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즘 국어교과서들에서도 방언에 할애하는 단원들이 눈에 띄어 반가웠습니다. 미국 ‘사멸위기언어연구소’의 언어학자들은 지구상에 남은 6000여 개 언어가 2주에 하나씩 사라지고 있으며, 백 년 뒤에는 절반이 사라지리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아끼는 작가로서 어느 방언 하나를 문장에 옮길 때마다 최후의 문장을 쓰는 심정이 되고는 합니다. 최근 들어 박형서의 「아르판」이나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와 같은 수작들이 직접적으로 언어의 다양성을 상상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도 그런 심정의 반영이 아닐까요.
문학집배원 전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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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이 사는 곳은 용희가 익히 경험해 본 장소였다. 대학 시절 같은 과 동기의 자취방이 꼭 저랬다. 여름에 동기의 자취방은 주변에 햇빛을 가려 줄 만한 큰 건물이 없어 작은 냉장고에 몸을 쑤셔 넣고 싶은 집으로 탈바꿈했고,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는 동면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뼈 시리도록 반성케 하는 집으로 변모했다. 도경의 집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가림막 하나 없는 여름 한낮의 옥탑방은 재난 지역으로 선포해도 무방했다. 딱 한 가지 좋은 점은 상쾌한 가을밤이 내려앉았을 때 옥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캔 맥주가 손에 들려 있으면 더 좋았다. 용희는 옥탑방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도경에게 캔 맥주 한 박스를 몰래 사다 주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용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언덕길을 내려다보았다. 도경이 검은 봉지와 막대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서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도경이 용희를 알아보는 데 쓰인 10초는 용희에게 머나먼 북극의 바다를 두어 번 갔다 오는 시간만큼 길게 느껴졌다. 당황한 용희는 마찬가지로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경을 향해 소리쳤다. “제가 지구에 커튼을 쳐 드릴게요!” 도경은 입을 벌린 채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용희는 도경의 집 옥상에 놓인 평상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지난 5년간 얼핏얼핏 그려 왔던 일이, 지난 이틀간 문득문득 상상했던 순간이 눈앞에 당도했다는 기쁨에 용희는 이마에서 얼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잊은 채 자신의 심장 소리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정해진 트랙을 벗어나 날뛰는 소리는 아니었다. 용희는 심장이 악보 없는 음악에 홀려 무작위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천문대를 찾았을 때 광활한 우주를 탐사하며 느꼈었던, 거대하고 두려운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측불가능한 불안함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몸을 떨던 때의 심장 소리였다. 그때, 도경이 옥탑방에서 나와 유리컵 두 개와 감자칩을 담은 그릇을 평상에 내려놓았다. 도경은 평상에 편하게 앉더니 검은 봉지에 든 맥주 세 병을 꺼냈다. “병맥주 한 병을 마셨을 때 기분이 제일 좋아요. 그제 제 주량이에요. 더 마시면 정신 줄 놔요.” 용희는 물었다. 그런데 왜 세 병을 샀느냐고. “술이 술을 부르니까.” 용희는 빙긋 웃었다. 도경은 용희의 컵에 맥주를 따른 후 자신의 컵을 스스로 채웠다. 건배 없이 도경이 먼저 맥주를 들이켰다. 용희도 마셨다. 도경이 말했다.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었다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내 탓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r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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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미를 만나러 갔다. 오로라와 나비가 생긴 발로 내가 만나러 간 사람은 2031년의 수미는 아니고 2022년의 수미였다. 2022년이 막 시작된 겨울에 수미가 내게 어떤 협곡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수미가 일러준 협곡 입구로 가서 표를 끊었다. 그곳은 남한 최북단 마을에 있는 곳이었다. 매표소를 지나 들어서자 까마득한 암반 절벽 위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천천히 걸어서 나오면 자신이 일이 끝나는 시간대와 얼추 맞을 거라고 수미가 말했다. 나는 주상절리의 무늬들을 건너다보면서 절벽에 긴 선반처럼 매달려 있는 길을 걸었다. 벼랑길 밑으로 하얗게 언 강이 이어졌고 그 위를 사람들이 일렬로 걷고 있었다. 강 위를 걷던 사람들이 가끔씩 멈춰 서서 이쪽 벼랑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절벽 위를 한 시간 남짓 걷고 나서야 나는 넓은 공원이 보이는 곳으로 나갈 수 있었다. 공원 한쪽에 빨갛고 기다란 버스가 한 대 서 있었다. 방한 아웃도어를 입은 사람들의 줄 끝에 서 있다가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운전기사의 바로 뒷좌석에 앉고 싶었지만 누군가 이미 앉아 있어 대각선 쪽 좌석에 가서 앉았다. 버스가 몇 개의 정거장을 거치며 협곡 탐방객들을 내리고 태우는 동안 나는 룸미러로 버스 기사와 눈이 자주 마주쳤다. 그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마스크를 더 올려 써야 했다. 구독자가 2,01만명인 한 여행 유튜브 채널에 수미가 ‘친절한 기사님’으로 소개된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과연 수미는 버스가 설 때마다 승객들과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고 트레킹 코스가 엉켜 헤매는 사람들한테 막힘없이 대안을 얘기해주었다. 버스는 몇 정거장을 더 거쳐 내가 표를 끊었던 협곡 입구로 왔다. “끝났다, 일.” 그렇게 말하고 수미는 나를 강으로 데리고 갔다. 절벽 위는 걸었을 테니 얼음 위를 걷자고 하면서. 나는 수미를 따라 강으로 내려갔고 우리는 금세 얼음 트레킹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등산화에 아이젠을 착용한 사람들 틈에서 운동화를 신은 건 수미와 나뿐이었으므로 우리는 또 금세 대열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폭이 좁아지는 협곡에 다다라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양옆으로 현무암 절벽이 가파르게 서 있어 마치 하늘이 보이는 동굴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수미와 나는 눈이 희끗희끗하게 덮인 얼음 위를 걸어서 암벽 밑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나오며 좁은 협곡 안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운동화를 벗었고, 곧이어 양말도 벗었다. 맨발인 채로 얼음 위로 올라서자마자였다. 수미와 나는 뜨거운 불을 딛고 선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양 발을 번갈아 들어 올리다 신발을 벗어놓은 바위 위로 뛰어올라갔다. 참을성이 조금도 없는 서로가 웃겨서 한참을 웃다가 다시 맨발로 얼음 위를 디뎠고, 몇 걸음을 걷다가 또 비명을 지르며 언 강과 바위를 뛰어다녔다. 그러다 우리는 누가 더 오래 서 있는지 내기라도 하듯 얼음 위에 맨발을 고정하고 섰다. 일초가 지나고 이초가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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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목화에게 그분의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알 필요가 없다. 우주에 마음이 있는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목화는 선하면서 악한 사람을, 의롭고도 불의한 이를,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동안 목화는 줄곧 나무에게 질문했다. 대답은 없었다. 목화는 나무를 느꼈다. 나무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시를 바랐다. 그 나무는 어디에 있는가? 목화는 나무를 찾으려고 했다. 없애고 싶었다. 나무를 없애면 온전한 자기 의지로 자기만의 삶을 살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무는 정말 나무로서 존재하는가? 목화는 그 나무가 자기 숨통을 쥐었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구할 때도, 구토에 시달릴 때도 자기 수명이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스스로 사람을 구하는 순간에도 나무의 명령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 나무는 대체 무엇인가? 나무에게 집중할수록 나무의 의미는 비대해졌다. 나무에게 호소할수록 나무의 힘은 강해졌다. 목화의 질문과 호소에 개의치 않고, 고통스러워하거나 안도하거나 상관없이, 악하든 선하든 관심 없이 나무는 영원히 거기 있다. 그 나무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 존재했다. 그동안 엄청나게 많은 생물이 나타났다가 멸종했고 진화했으나 도살되었다. 돌로 만든 무기로 동물을 사냥하고 무리 지어 이동하며 빠른 소도로 다른 생물을 몰살시키던 인류는 순식간에 핵폭탄과 우주선을 만들었다.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학살하고 자연을 파괴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면 과연 인류라는 종을 돕고 싶을까. 살리고 싶을까. 나무가 주는 생명은 은총이 아닐 수도 있다. 삶이라는 고통을 주려는 것인지도. 그러나 삶은 고통이자 환희. 인류가 폭우라면 한 사람은 빗방울, 폭설의 눈송이, 해변의 모래알. 아무도 눈이나 비라고 부르지 않는 단 하나의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은 금세 마르거나 녹아버린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어쩌면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고. 생명체라는 전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이 아니라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죽음을 바라보는 일을 거부하고 싶었다. 사람을 구하고도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에 피하고 싶었다. 구한 자가 악인 같을 때는 마치 한통속인 것처럼 괴로웠다. 중개 때문에 자기 삶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 목화를 지배하는 것은 나무였다. 나무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구한 사람들처럼 단 한 명인 목화는,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오직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가는 신목화는 임천자의 죽음과 장례를 지켜보며 마침내 운명을 수긍했다. 기꺼이 받아들였다. 목화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이상, 온전히 자기 것으로 거둔 이상 이제 그것은 목화의 것이었다.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삶. 목화는 생각했다. 그건 바로 지금의 삶. 목화는 원하는 삶 속에 있었다. 다시, 목화는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죽음. 임천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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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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