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 「옛일」
- 작성일 201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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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출처 :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 창비, 2011.
박성우 |「옛일」을 배달하며…
오래전 소중한 이에게서 받은 편지처럼 쓸쓸하고 적막할 때 꺼내보면 힘이 되는 시들이 있습니다. 편지와 시만 그런가요. 품었던 소망도 그런 것 같아요. 이룰 수는 없었으나 그 옛날 내가 그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망을 가졌었다는 기억만으로도 오늘을 새롭게 살아 볼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박성우 시인이 문학집배원을 시작하며 첫인사로 이 시를 인용했었거든요. 이젠 옛일이 되었지만 좋은 옛일이라면 자주 떠올리는 게 몸과 마음의 건강에 좋은 것 같아요. 오늘 시작하는 저의 일도 한참 뒤에는 옛일이 되겠지요. 제가 전하는 시들이 강가의 아침 안개처럼 부드럽고, 초저녁 별처럼 조심스레 환하고, 싸락눈처럼 고요해서 자꾸 떠올리고 싶은 옛일이 되도록 힘써보겠습니다.
시인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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봬요 숙희 내일 봬요 그래요 내일 봬요를 처리하지 못해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내일 뵈요 라고 썼다가 그건 또 영 내키지가 않아 그럼 내일 뵐게요 라고 적어보니 다소 건방진 듯해서 이내 그때 뵙겠습니다 라고 고치자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고 내일 봐요에 느낌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두 개를 붙였다가 떼었다가 갈팡질팡하는데 가벼운 인사를 가벼운 사람으로 당신이 나를 오해할까 잠시 망설이다 숨을 고르고 다시 봬요로 돌아온다 그런데 봬요를 못 알아보고 세상에 이렇게 한글을 이상하게 조합하는 사람도 있네 라고 하면 어쩌지 아니면 봬요는 청유형 존대어라 어색한 걸 모르냐고 되물을까 봐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싶어져 내일 봅시다 라고 따따따 찍어보니 참나 이건 정말로 더 아니다 싶어 결국 내일이 기다려져요 라고 보내버리고는 손목에 힘이 풀려 폰을 툭 떨어뜨렸다 『오로라 콜』(아침달, 2024)
- 관리자
- 2024-07-11
환한 집 강우근 나의 어린 조카가 나를 좋아한다고 한다. 누나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너의 그 칙칙함을, 무표정을 좋아해” 가족 모임에 불편하게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만화에 나오는 부기라는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고 많은 것을 무서워해 바깥을 안 나가는 부기 아저씨를 소피라는 꼬마가 매번 불러내어 모험이 시작된다고 나는 그런 조카를 하루 맡아주기로 하고 “나는 하얀 집에 살고 싶어” 조카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에 그린 집을 꺼낸다. 여름에는 태풍이 오고, 가을에는 은행이 터져 나가고, 겨울에는 폭설이 떨어질 텐데. 하얀 집은 금세 검어질 것이다. 우리의 테이블에 놓인 생크림 케이크는 작아질수록 포크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다. “삼촌은 어떤 집에 살고 싶어?” 나는 검은 집이라는 말을 삼키고 환한 집이라고 대답하며 애써 웃는다. 조카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고 환한 집은 어떤 집일까, 생각에 잠기는 사이 생크림 케이크에는 검은 파리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나는 서둘러 케이크를 치우고 조카가 돌아온 테이블에는 새롭게 놓인 생크림 케이크 “······삼촌이 배가 고파서” “삼촌에게 추천해 줄 케이크의 맛이 아주 많아.” 환한 빛이 우리를 비추는 동안 우리는 생크림 케이크를 아무런 근심 없이 나눠 먹는다. 『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 (창비, 2024)
- 관리자
- 2024-06-14
- 관리자
- 2023-12-28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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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7건
개살구는 먹을 수 없는 살구다. 그럴 듯하지만 먹을 수 없는 개살구의 차가운 아침과 우두커니 서 있는 미루나무의 초저녁과 싸락눈의 차가움이 지키는 다소 차갑고 쓸쓸한 풍경 속에 화자가 있다. 별정우체국은 국가 주관의 공적 기관이지만 개인의 요청 하에 설치할 수 있는 시설로 세상에도 안정적으로 속하고 싶고 개인의 개성도 드러내고 싶은 화자의 자아로 읽힌다. 그것을 설치하기 위해 마음 속으로만 동분서주 해보지만 현실은 봉투 조차 넣을 수 없는 입장이다. 이미 강마을이라는, 강으로 세상과 소통의 창구가 막혀 있다는 문제상황이 제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별정우체국이라는 상징적 소통의 창구로 뭔가 개선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한 듯하다. 강마을이라는 한적하고 다소 척박한 환경에서 스스로의 개성을 드러내고 싶었다면 강마을 그 자체를 찬란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더 근본적인 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니면 별정우체국에 소망을 투영하는 대신 강마을 외부로 목표를 돌리거나. 별정우체국이라는 소박함은 봉투 때문에 그만둘만큼, 딱 그만큼의 욕망으로 화자에겐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점은 화자는 이런 이야기를 여유롭게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한결 자신만만해졌다는 것이다. 여유 있게 추억을 되새기는 모습이 멋있다.
저자는 무언가 전하고 싶은것이 간절해서 우체국까지 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환경?의 제약때문인지 저자의 한계때문인지 전하고 싶은걸 포기한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전하고 싶은것은 저자의 마음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데 말이든 그 무엇으로도 담을 수가 없어서 포기를 했을까? 소통하고 싶은? 떨어져있지만 함께 하고 싶은 욕구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무엇을 전하고 싶은걸까?
어릴 적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찬 때가 있었던 것 같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 햇빛으로 반짝이는 강, 그곳을 걷는 멀리 보이는 점 같은 사람.. 그런 장면에 슬픈듯 낯선 음악이 더하면(아마 티비 광고를 보며 키운듯하다)막연히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그 곳에 대한 이상한 확신이 들어 이 곳이 아닌 다른 그 곳으로 떠나야할 것 같았다. '옛 일'이라는 시를 읽으며 별정 우체국을 떠올리니 어릴 적 내가 상상한 그곳이 생각났다. 이 시가 알려준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가 쓸어내린 초저녁 풋별 냄새에서 슬픔이 느껴진다. 어릴 적 어슴프레해지는 저녁까지 뛰어놀던 골목에 가로등 불빛의 그림자가 왜 슬프게 느껴졌는지 알 것 같다. 난 슬픔이 좋은 것 같다.
시시각각 느껴지는 새로운 감상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바람에 핸드폰을 들다가도 망설이게 되는 때가 종종 있다. 별정우체국을 하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와 함께 자신이 보는 아침 안개를, 풋별 냄새를 공유하고 싶었던 화자 역시 마땅한 봉투가 없다는 이유로 그만 멈칫거리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에도 그러한 마음보다는 그것을 담을 그럴싸한 도구에 오히려 집착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저 담백하게 내 마음을 전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마음을 담고 있을 언어나 방법이 더 신경쓰일 때.... 주객이 전도되는 이러한 상황이 불편해진 나머지 마음을 전달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넣을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다는 화자의 말은 그래서 애틋하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만큼 자신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크고 남다른데 그걸 담아낼 수 있는 좋은 방식을 아직 찾지 못한 애달픈 마음을 이렇게 시로 둘러 표현하는 것 같다.
처음 읽었을 때는 고향에 살던 화자가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지만 결국 넣을 봉투가 없어 포기했다는 단순하고 짧은 내용으로 읽혔다. 그리고 시속 화자와 같이 우리는 누구나 과거에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랐으나 결국은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하게 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용적 평이함이 사람들의 보편적 공감을 확보해준다. 그런데 이 시의 묘미를 살려주는 것은 바로 2연이 있기 때문인 거 같다. 내게 2연은 이 시를 자꾸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했다. 2연은 ‘나’의 소망과 좌절 사이에 흐르고 있었던 시간의 모습이 잊고 싶은 무언가는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고향의 자연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개살구 익는 강가’, ‘마루나무가 쓸어내린’, ‘풋별 냄새’, ‘차고 긴 밤’, ‘싸락눈이 싸락싸락’의 감각적 이미지들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그 시간 속에는 우리의 순수했던 열망과 노력, 그리고 안타깝게 손에 닿을 듯 닿지 못한, 좌절된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옛일’이 되어버린 지금 이 시점에도 시각적, 청각적, 후각적 이미지들로 인해 생생하게 환기된다. 그래서 한때 간절했지만 이루지 못한 소망을 이제는 그저 ‘옛일’이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