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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작성자 피아노맨
  • 작성일 2007-05-25
  • 조회수 1,412

                                           영원한 엄석대 제국을 그리며 

 

     작가 이문열과 그의 작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각자 사람마다 기호는 다르겠지만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책을 통해 나는 그 유명한 작품을 처음 맞닥뜨렸다. 어렸던 그 땐 물론 이야기의 주제를 알 수 없었고, 그냥 반 전체를 주무르는 엄석대의 모습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제목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젠 고등학생이 되어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우고,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역대 독재정권 시대와 이에 대항하는 민주화의 흐름, 그 속에서 쉬쉬되고 은밀히 밀폐된 수많은 충격적인 진실들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담긴 심오한 뜻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또한 개봉당시 화제를 뿌린 영화를 통해 본 엄석대의 독재 왕국과 이에 결국은 굴복하는 한병태의 무기력한 모습은 나에게 많은 생각 거리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좌천한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시골 초등학교로 전학 간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찍소리 한 번 안하고 그냥 순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그는 서울에서처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물심공세를 펼치고 엄석대에게 반항하지만 아이들은 엄석대에게서 등 돌리지 않고, 한병태 자신도 외로운 저항에 점점 지쳐간다. 독재의 횡포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한병태의 노력은 담임선생님의 방관, 아이들의 맹목적인 순종과 더불어 수포로 돌아가고 그 역시 권력의 달콤함에 길들여져 자신이 되려 엄석대를 따르게 된다. 나는 엄석대를 따르는 변질한 한병태의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을 느꼈다. ‘독재 권력과 이에 기생하는 민중’이라는 테마는 더이상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라는 끔찍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며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정권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람들이 동조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 슬픈 역사의 이면을 들춰보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인 마틴 하이데거에서부터 전설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리고 나치(Nazi)당의 총통으로 너나할 것 없이 히틀러를 지지하고 뽑은 독일국민들. 그들의 맹목적인 나치에의 복종은 오늘날까지 수십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절대적으로 엄석대에게 복종하고 그 어떤 비합리와 모순에도 저항하지 않는 5학년 2반 아이들 역시 히틀러를 따르는 독일 민중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면 이는 지나친 억측일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반’은 그 자체의 모순이 아니라 또 다른 막강한 강자에 의해 무너져 내리면서 씁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엄석대 제국의 아이들은 아무도 그릇된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이는 오랫동안 엄석대 제국의 존속을 가능케 했다. 새로운 선생님이 부임하고 나서야 비로소 엄석대의 비행은 폭로되고 그의 제국은 무너진다. 그러나 이는 한병태가 그토록 바랐던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이 아니라 또 다른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힘으로 힘을 물리치는 것. 비록 이렇게 해서라도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상태가 합리적이고 올바른 것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하더라도 비민주적인 절차는 묵인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이룩된 민주질서는 과연 끝까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국회의원이 된 6학년 담임선생님과 엄석대가 보낸 화환의 등장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매우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원작에선 중년이 된 ‘나(한병태)’가 어느 날 엄석대가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지나간 세월과 권력의 무상함을 추억하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에선 지난날 엄석대반을 매질하며 민주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선생님은 이젠 국회의원이 되었고, 엄석대가 보낸 거대한 화환만이 그의 성공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성공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보는 이의 판단에 맡긴 채 말이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렇게 원작과 다른 결말을 맺으면서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젠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을 살아가는 한병태와 다시 새롭게 권력자가 된 엄석대. 그리고 권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국회의원이 된 지난날의 선생님까지. 이 모든 모습들은, 어쩌면 뻔한 권선징악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는 원작의 결말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결말이었다. 중년이 된 한병태가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따름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자유당 정권 말기를 배경으로 하다 보니 흔히 엄석대 제국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에, 그리고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님은 5․16 군사정변으로 또 다른 독재체제, 이른바 유신체제를 만든 박정희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렇게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사실은 과거에서는 물론이고 지금 까지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끔찍한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히틀러를 지지했던 독일 국민이 그랬고, 위안부와 생체실험, 민간인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했던 일본국민이 그랬고, 이승만을 왕으로 떠받들며 지지한 수많은 한국 국민들이 그랬다. 굳이 말하면, 저렇게 화려하게 한 시대를 풍미한 슬픈 역사가 아니더라도 내 자신이 지금까지 속해왔던 많은 집단도 결국은 엄석대반의 아류에 불과했다. 나는 그 속에서 때론 권력자, 때론 권력에 기생하는 순응주의자였고 그래서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나는 나 자신과 이 사회를 향해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고발하는 이 사회와 사람들의 모습은 결국은 나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 처음 책을 읽을 땐 깨닫지 못했던 이토록 너무나도 슬픈 진실이 영화를 본 후 새삼스럽게 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서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이 사회의 어디에서든 ‘엄석대 제국’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원작에서든 영화에서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현실사회의 씁쓸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민주적 질서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던지는 심오한 뜻과 세상의 수많은 엄석대 제국을 생각하며 많은 것을 깨닫게 된 좋은 기회였다.

오랜만에 좋은 작품을 하나 발견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피아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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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아노맨
  • 200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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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글에 이문열씨가 최근에 말한 에 대한 특별수업내용이 있으니 이와 함께 얽어 읽으면 더 풍부하게 이 작품을 읽어내는 시각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 2007-06-02 02:00:56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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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을 시대와 역사, 그리고 자신의 삶의 현실과 얽어서 읽는 방식으로 글을 써서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는 글입니다. 작품의 줄거리 요약은 모든 사고의 기본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고 해석하는 노력이 가장 바람직하고 소중한 책읽기 방식입니다. 우의 소설인 이 작품의 경우 특히 우리의 삶의 문제와 연결시켜 읽어야만 작가의 의도파악을 제대로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원작과 영화의 내용중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분석해보고 두 작품의 결말이 의미하는 바를 분석해낸 점도 매우 좋았습니다.

    • 2007-06-02 01:59:04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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