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미동 사람들을 읽고-지리멸렬
- 작성자 아마도생선
- 작성일 200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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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 사람들을 읽고-지리멸렬에 관한 고찰
원미동으로 가는 길을 험난하다. 짐칸 한 모퉁이에 보자기를 쓰고, 발바닥으로 동반자의 온기를 느끼며 고속도로를 부유하는 것은, ‘인생은 짐짝처럼 실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큼이나 매서운 여로.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을 향해 과거의 묵은 빚들을 씻는 소시민의 삶들이 모요ㅕ있는 멀고도 아름다운 원미동, 그 동네, 우리 삶의 군상들이 여기저기서 그 빛을 발한다. 한계령을 넘어가면서.
방울새의 울음을 갈망하면서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우리의 모습이 한쪽 다리가 짧아 균형이 맞지 않게 되어버린 평상처럼 흔들거린다. 일상이 지독히도 지리멸렬하다.
사랑은 가질 수 없을 때 더 아름답다는 명제는 사랑의 성취 후에 다가오는 지리멸렬함에 근거를 두고 성립한다. 제 아무리 드라마틱한 사랑도 일상의 우물에 빠지고 난후에는 별 볼일 없다. 그 지리멸렬함이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면서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라는 사실은 어쩐지 기분을 여우가 시집가는 날에 내린다는 비 사이로 내리 쪼이는 햇빛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찻집여자를 사랑하게 된 사진관 엄씨는 ‘추위를 많이 타는 근가 주변머리 없는 하얀 목덜미를 가진 것을 원망’할 정도로 애정을 느끼지만 그 애정역시 감정의 무게에 비해 너무나 쉽게 거두어 진다. 포기할 수 없는, 그리고 사수해야 할 지리멸렬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다면 지리멸렬을 피해 도망치는 삶은 과연 행복할까? 할리우드 무비스타들은 꿈같은 파티장과 궁궐 같은 저택에서 하루하루를 그들의 영화처럼 사는 것은 행복할까. 겪어보지 못해서 알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달려드는 파파라치들과 후안무치한 황색 타블로이드언론의 기자들 때문에라도 그들은 일상의 지리멸렬함을 갈구할 것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하는 것이니까.
인간은 언제나 판타지를 동경한다, 가질 수 없기에 더욱 욕망한다. ‘지하생활자’의 그도 갈 수 없는 위층의 화장실을 궁금해한다. 금지되어 있기에 동경한다. 기어코 꺠어진 유리조각 사이로 보이는 초라한 집을 보면서 그는 그를 들어오지 못하게 열쇠로 꽁꽁 봉해두었던 곳이 겨우 저런 곳이었는가에 대한 회의와 함께 격렬한 변의를 느낀다.
지리멸렬에서 벗어나도 결국은 지리멸렬한다. 일상을 벗어난다 해도 결국은 생활이다.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를 꿈꾸기보단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땅을 짚고 가는 것, ‘강 노인’과 같은 신념과 자신으로 자신의 중심을 세우는 것은 소시민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홍상수 감독이 ‘생활의 발견’ 이란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일상을 가차없이 표현한 그 영화는 몸서리쳐지는 우리네 생활의 무미건조함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을 읽으며 영화의 여러 씬들이 오버랩되는 느낌을 받았다. 일탈이라 해봐야 고작 한계령을 넘지 못하는,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군상이 스쳐지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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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생선
- 2008-01-23
평론가 황진미에 따르면 <바람난 가족>은 가족의 본질을 규명하며, 이제 가족윤리를 넘어 새로운 개인윤리를 정립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1) 첫 번째의 가족은 개인이 가족이라는 집단에 귀속되는 가족이다. 가족은 인격의 대변체이면 가족은 개인을 말한다. 일종의 집단주의적 태도의 가족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가족에서 떼어놓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은 그들의 정체감을 형성하며 그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두 번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누가 누구에게 생계를 걸고 있진 않아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남의 인생 참견 하지 말고, 남의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 그들은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위해주며” 산다. 남이야 뭐라던 시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술 담배 끊지 않고, 시어머니는 15년 만에 새 파트너와 섹스를 하며, 남편은 “별 문제될 것 없이” 다른 여자 좀 만난다. 아내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산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남편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연접하는 독립된 개인들이다. 여기 양극단의 가족이 충돌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선 관대한 척 매끄럽게 빠져나가던 “신원 확실하신” 그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중앙에서 50년 가부장제라는 허상을 짚고 실족한다. 영작의 할아버지는 처와 딸 여섯을 두고,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으나 이후 그들은 생사조차 모르고 산다. 가부장제의 핵심 요소인 父-子만 추려왔건만 그들은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 父-子는 가부장제의 핵심이긴 하지만, 가족의 핵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남녀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적인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 남녀의 성적인 차이는 영화 내에서 크게 3가지로 나온다. 더불어 이 영화는 가족의 본질을 보여주며, 나아가 ‘화목한 가정’을 목표로 삼는 가족윤리에서,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개인윤리로, 윤리의 단위가 바뀌어져야 함을 제안한다. 진짜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해질 것인가? 연애가 답이면 연애를 하고, 가정이 답이면 가정을 꾸려라. 그러나 남에게 “재수 없게 연설”하지 말고, “네 아버지 탓”도 하지 말고, 오지말라는 애인에게 “내가 미쳤었나보다”며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지도 말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며, 맨 정신으로, 솔직하게 사는 것”이 “이제 짐승의 시간은 관두고, 사람답게 사는” 최소한의 개인윤리이지 않겠냐고 감독은 ‘바람’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괴물>에는 서로 합치되지 않는 세 가지 층위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남루하고 무능하지만 자식을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이다. 둘째는 무능하면서 억압으로만 작동하는 아버지, 한
- 아마도생선
- 2007-12-14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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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그 중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한 두편을 중심으로 정리해가는 방식으로 글의 짜임을 잡는 것도 매우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너무 고정적인 틀에 얽매이는 고루한 사고일 수도 있으니, 그런 측면도 한 번 고려해 보아라는 권유 정도로 받아 들여 주기 바랍니다. 의사소통을 먼저 소중히 여기는 측면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의도에서 하는 권유이니 참고바랍니다. 아무튼 의욕적으로 계속 좋은 글을 올려 주어 글을 읽는 즐거움이 솔솔 배어나는 글입니다. 더욱 멋지고 진지한 글로 자주 만나길 빕니다.
하지만, 남과 함께 읽어서 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글이라면 조금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독자를 고려해 주는 배려심이 필요합니다. 특히 여러 개의 단편이 한데 묶인 작품을 소개하는 글은 자칫 쓰는이도 읽는 이도 혼란스러워 할 상황이 생길수 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는 여러 전략이 있을 수 있겠으나,
다만, '원미동 사람들'에 나오는 여러 단편들에 대한 느낌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의욕(과욕?)을 보이다 보니, 글을 처음 읽는 이들은 조금은 혼란스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군요.항상 글쓰기를 하는 상황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 글을 누가 읽을 것인가를 고려하면서 써야 합니다. 자신이 읽을 것을 주목적으로 쓴 내용이라면 떠오른 대로 메모하는 수준으로만 정리해도 좋습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마도 생선'님은 매우 격렬하고도 치열한 정서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체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낍니다. 책을 읽으면서 현실 속에 떠오르는 여러 경험들과 연결지으면서 자신의 할 얘기를 끝가지 이어나가는 것도 평소에 많은 생각을 하고, 정확하면서도 풍부한 표현을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아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쓰기경험을 지속해 가는 것이 자신의 표현력을 더 향상시켜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므로 칭찬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생활의 발견 18금 아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