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의 추론 2- (소설)「구토」를 읽고
- 작성자 silmshady
- 작성일 200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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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의 추론 2- (소설)「구토」를 읽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든 문학작품들은 성격상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갈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서사 구조를 중심으로, 주인공과 그에 따른 인물들이 사건과 상황에 얽힌 관찰과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문학적 발견, 다시 말해 작품을 읽음으로써, 무엇보다도 쾌락적 즐거움을 성취할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우리 주변에 출판되는 시, 소설 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또 하나의 갈래는 문학적 기능보다는 교시적 기능이 우선적으로 기반 된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겉으로는 서사 구조를 띈 문학작품으로 읽히지만, 내면을 파고 들어가면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상적 교훈을 남기려는 작품들이 많고, 문학 작품의 모습으로 변장해 자기 자신 속에 숨겨져 있는 사상을 좀 더 쉽게 이미지화 하려는 목적으로 작품의 모습을 띈 경우가 많다. 사르트르의 ‘구토’는 대표적인 후자의 성격을 나타낸다.
물론 ‘구토’는 소설이다. 서사 구조가 존재하고, ‘로캉탱’이라는 주인공도 존재한다. 주변 인물도 있고, 소설적 배경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구토’는 하나의 소설이라기보다는 실존주의를 이해하는데 기반이 된 하나의 사상서로 먼저 다가왔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개척자다. 사르트르-카프카-카뮈로 이어지는 부조리 문학의 개척자로써, 카뮈와는 서로의 작품을 비평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우정 사이에는 부조리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사르트르의 작품 속에 나타난 실존주의의 바탕에도 부조리가 깔려있다.
작품은 프랑스 부빌 지방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로캉탱은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는 평범한 남자이다. 그의 인적 사항이나, 집안 배경 등은 알 필요성이 전혀 없다. 그는 그저, 일개 도서관 직원으로서, 카페에 나가 사람들을 관찰하기 좋아하고, 가끔가다 카페 마담과 성관계를 맺는 인물이다. 그는 소설 속 주인공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역할이라기보다는 사르트르의 사상을 대변하는, 대리인에 가깝다. 소설은 그의 시선, 그의 행동에 따라 서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생각이다. 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나, 카페에 앉아 카드게임을 하는 노인들을 보며 그는 부조리를 느낀다. 또한 공원에 나가 마로니에 뿌리를 관찰하면서, 이 소설의 중심사상이 되는 실존주의를 이끌어낸다.
작품은 로캉탱에 의한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로캉탱이 보는 것 말고는 철저히 배격된다. 로캉탱의 행동반경은 그리 넓지 않다. 소설적 배경은(작품 중후반에 옛 애인인 안니를 만나러 파리에 잠깐 가는 것 빼놓고는)거의 부빌로 국한된다. 그것도 집-도서관-카페의 기약 없는 반복 속에서, 로캉탱은 많은 생각을 하고 관찰은 한다.
‘구토’에 나타난 작가의 메시지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양차대전 시기의 부르주아의 위선을 폭로 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실존주의 사상의 시작이다. 로캉탱이 시립 미술관에서 수많은 초상화를 보고 회상하는 장면에서 첫 메시지는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문제는 실존주의다. 실존주의가 단적으로 설명되는 부분은, 로캉탱이 공원에 나가 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생각하는 부분인데, 사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나, 로캉탱의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이 부분을 위해서 존재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을 아닐 것이다. 쉽게 말해 분위기를 깔아준 것이다.
분위기를 깔아 준 것은 로캉탱 자신의 생각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 속에는 중요하게 생각될 만한 주변인물 두 명이 등장한다. 알파벳순으로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을 독파하고 있는 독서광과 로캉탱의 헤어진 옛 애인 안나가 그들이다. 사르트르는 그들마저도,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 하는데 희생시켜 버린다. 독서광은, 쉽게 말해서 20세기의 지식인이다. 전쟁 통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여기저기 방황하는 지식인들. 카페에 앉아 독서광과 로캉탱이 식사하는 장면에서는 독서광의 굳건했던 자신의 휴머니즘 사상이 로캉탱의 몇 마디 말에 무너짐으로써, 사르트르가 의도했던 지식인들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나타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이자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 대중을 겨냥한 인물이라는 추론도 가능할 것이다. 안니는 독자에 해당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르트르는 자신의 작품 속에 이 작품을 읽게 될, 독자를 상징하는 인물을 넣는데 까지 다다른다. 파리에 있는 안니의 집에서 둘의 대화를 들어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안니는 로캉탱의 생각에 반발한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안니는 로캉탱 사상의 반대자, 즉 이 책을 접하게 될 일반 대중들과 평론가들에 해당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로캉탱의 명상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지는 않겠지만, 사르트르가 평론가들에게 선수를 친 건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로캉탱이 말하는 구토를 경험했다. 다들 한번쯤, 어떤 어휘를 반복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읽다보면 어느새 어휘가 지닌 속성과, 그 어휘의 음향이 단절되는 현상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책’이라고 부르는 것들. 이 ‘책’의 음절을 따라 반복해서 읽다 보면, 책의 속성과 그것의 용도는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 그대로 ‘책’이라는 음향만 남는다. 그저 ‘책’이라는 음성만이 귀에 인식되는 것이다. 로캉탱은 사물의 존재가 무의미해 지고, 그것의 속성과 겉면이 분리되는 현상을 느낄 때, 구토증을 느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던 사물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원적으로 시각에 국한되어 우리에게 그저 ‘보여진’것이다. 사물은 이제 두 가지로 양분된다. 속성과 겉면이다. 겉면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흔히 사물의 존재를 말할 때, 겉면만 보고 ‘그것은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사물의 속성이 사라진 ‘겉면’을 바라볼 때 로캉탱의 구토를 경험했다. 그것은 진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련의 과정을 추리해낼 때, 우리는 부조리를 느낀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사르트르의 ‘구토’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부조리를 통해 어떤 귀결적 사상이나, 추리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시지프 신화’에서 계속되는 습관 속, 일종의 의식을 갖게 될 때, 부조리를 인식한다고 말했다. 실존주의도 이것과 상통한다. 로캉탱은 어떻게 사물의 존재에 대해 구토증을 느끼게 되었는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결코 변하지 않는 습관적인 생활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미미한 사건들. 이런 사건들은 그의 뇌리에 깊게 남지 못한다. 이것들은 결국 습관적인 사건에 포함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잠을 자고, 도서관에 가고, 카페에 간다. 여기서 생겨나는 무의미한 행동들, 무의미한 대화들. 이것은 사르트르가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 주인공으로 하여금 ‘존재의 부재’에 대해 더욱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 갈 수 있도록, 일종의 명석을 깔아 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명석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의 창작적 측면에서는 명석으로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논리적으로 따져 볼 때, 사르트르가 제창한, 실존주의는 부조리와 숙명적 상관관계를 이룬다.
부조리의 시작은 습관이다. 습관적인 일상생활에서, 어느 날 인간은 의식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조리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자살을 택함으로서, 모든 문제를 청산하고 자유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시지프처럼 세계에 복종해 희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부조리의 과정과 해결이다. ‘구토’에 나타난 로캉탱의 존재론적 고심은 부조리의 과정과 상당부분 많은 점이 비슷하다. 습관 속에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구토 증상을 느낀다. 다시 말해,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되찾는 순간 구토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느꼈던 ‘존재’라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각적 인식에 불과한 것. 사물의 속성과 겉면이 서로 분리되어 인식될 때, 세상과의 단절이 시작된다. 전혀 새로운 사물이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던 사물의 용도와 기억이 날아가 버리고, 우리 눈앞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사물이 떡 하니 놓여 있는 것이다. 구토는 이런 ‘공포’로부터 유발된다. 이것은 단지 사물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포함된 세계는 무엇이었는가. 세계의 본질과 겉면이 분리되어 우리에게 인식될 때, 우리는 세상과의 단절을 느낀다. 이 상황은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사르트르의 시대에 더욱 부각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 전혀 다른 세계다. 인간의 공포는 여기서 비롯된다. 그저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존재론적 부조리와 상통하는 부분이다. 또, 과정적 측면에서, 단절감을 느끼는 것은 부조리와 ‘구토’에 나타난 로캉탱의 실존주의의 발견에서, 단적으로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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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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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지금 와서 다시 보니 밑에 결말부분이 두문단 정도 더 있는데 빠져있네요... 어쩔수가 없군요 수정기한이 지났는지 수정도 되지 않네요... 어찌됐든 미흡하지만 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좋은 지적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글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왜+예시""가 거의 빠져 있군요. 그러다 보니 긴 내용을 읽고도 독자는 공감하기 하기보다 계속 책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이 글을 읽게되는 불편함이 생기는군요. 글에서 사용하는 어휘는 필요에 따라 어렵게 쓸 수도 있지만 논지에 대한 이해까지 어렵다고 느끼는 글이 되지 않도록 교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을 보완하여 더 좋은 글로 만나길 바랍니다.
라는 작품을 읽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비평한 글이로군요. 글의 길이도 제법 긴 흐름으로 펼쳐나간 집요함이 느껴집니다. 열심히 생각하고 표현하느라 고생이 많았겠군요.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독서비평글은 일종의 논증적인 글쓰기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글에 담길 내용은 ""책의 핵심내용 소개와 더불어 그 내용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한다+그 예는 책의 내용 에 이러저러한 내용이다."" 등의 내용이 필수적으로 담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