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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거울에 비친 나, 참된자아를 찾아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 작성자 임도영
  • 작성일 2012-11-07
  • 조회수 1,487

검은 거울에 비친 나, 참된자아를 찾아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잃어버렸습니다. /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 길에 나아갑니다. <중략>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윤동주 '길' 중에서-

 여기서 담 저쪽에 남아있는 나는 누구일까요?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길을 담 저쪽에 남아있는 나를 찾아서 걷는 고통스러운 모습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을 일이겠지요. 이 시의 화자는 '사는 것이 잃은 것을 찾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 살이 라는 것이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요? 이 길은 고통스럽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꿋꿋이 나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소설 '데미안'은 이처럼 그 길을 나아가는 사람을 아주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던가." 라는 말로 시작하는 데미안은 에밀 싱클레어가 성장을 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저는 데미안을 읽으며 싱클레어의 자리에 나를 대신 앉혀놓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성장의 고통을 겪는 싱클레어의 모습에서 우리들은 우리를 발견할 수 있고 또 우리를 더 성장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싱클레어는 세상을 두 개로 나눕니다. 하나는 아침에 찬미가가 울려 퍼지고 부모님의 사랑, 엄격함 그리고 모범과 교훈이 있으며 의무와 죄, 양심의 가책과 참회, 용서 등 밝음과 명랑함이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는 살인, 자살, 새끼를 낳은 암소와 거꾸러진 말 등 야만적이면서도 잔인한 어둠의 세계입니다. 밝음의 세계에서 살고 있던 순진무구한 싱클레어는 크로머라는 동급생에게 기죽기 싫어 자신도 사과를 훔친 적이 있다는 거짓말을 합니다. 크로머가 신고를 한다는 협박에 싱클레어는 죽을듯한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됩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에 대해서 일종의 멸시감을 느낍니다. 싱클레어의 세계에 균열이 생긴 것이죠. 이러한 균열은 아물고 치유되고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살아서 피를 흘리게 됩니다. 즉, 낙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에덴의 동쪽에 당도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싱클레어는 첫 죽음을 경험합니다. 의지하고 있던 그리고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부숴버려야 하는 그 버팀목에 금이 가는 것입니다. 이는 싱클레어에게 죽음만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벗어난 싱클레어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에게 상급생 데미안이 나타납니다. 데미안은 정신적 성숙함을 갖춘 사람으로서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데 인도자가 됩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크로머로부터 구해줍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혼자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었기에 다시 밝음의 세계의 예속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깨어진 그 균열은 다시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데미안은 카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말하며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은 선이며, 부성적인 것,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 이상적인 것이지. 그래, 그러나 세상은 그 외에 다른 것으로도 만들어져 있어, (...)" 아름답고 고상하고 선한 한쪽만 인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자신의 내면의 문제만이 아닌 곧 인류의 문제라는 것을 싱클레어는 깨닫게 됩니다.

 시인 윤동주 또한 별빛이 있게 하는 밤의 어둠과 두려움도 인정합니다.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빠알간 꽃이 피어났네, / 햇빛이 푸른데, / 그 전날 밤에 / 그 전날 밤에 /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 사랑은 뱀과 함께 / 독은 어린 꽃과 함께

 -윤동주 '태초의 아침'-

이 시에서 선은 '사랑'과 '꽃'으로 악은 '뱀'과 '독'으로 상징되어있습니다. 태초부터 세상은 사랑과 뱀, 독과 꽃이 공존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아름답고 숭고한 선한 쪽만 인정하는 것은 세상의 절반만을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는 '허용된 반쪽'이 아닌 '완전한 전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싱클레어는 이즈음 아버지를 죽이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는 빛의 세계의 싱클레어가 완전히 죽었음을 상징합니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헤어지게 되고 싱클레어에게는 파멸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술집을 드나들며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학교에서 쫓겨날 위기에까지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그에게 우연히 마주친 '현명한 소년의 얼굴을 한' 소녀를 만나 그녀를 숭배하게 됩니다. 싱클레어는 집에서 그녀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해 내며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정신 치료를 받으면서 나이 마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싱클레어의 행동은 헤세가 그림으로부터 받은 평안과 희열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헤세는 어느 한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는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것은 문학이 내게 주지 못했던 예술의 위안 속에 새롭게 침잠하는 것이다."

-펠릭스 브라운(Fellix brown)에게 보내는 편지(1917) 중에서-

이처럼 싱클레어도 그녀를 그리며 다시 마음속의 위안을 받고 다시 잊고 살았던 아름다움, 성스러움, 곧 '빛의 세계'에 대한 갈망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 싱클레어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에서 어떤 새가 그려진 그림을 태워 먹는데 그 속의 새가 다시 살아서 안으로부터 자신을 먹어 들어오게 됩니다. 이 꿈은 이원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며 서로의 세계를 갈망하게 되는 반쪽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날아오르려는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후 싱클레어는 그 새를 그려서 데미안에게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데미안에게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라는 답장을 받게 됩니다. 아브락사스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함께 소유하고 지배하는 신입니다. 이것은 싱클레어에게 반쪽의 세계에서 나와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싱클레어는 다시 꿈을 꾸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안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바로 아브락사스이었습니다. 그 포옹은 '깊은 행복감이면서도 죽음의 공포, 무서운 가책과 끔찍한 죄가 섞인 것'이었습니다. 즉,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 모두 결합한 것 아브락사스의 본질인 사랑인 것입니다.

 싱클레어는 새로운 인도자인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아브락사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피토리우스는 아브락사스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이라 합니다. 그리고 내면속의 악마적인 면 그리고 신적인 면을 모두 인정하고 그 내면에 충실해지지 않는다면 아브락사스는 떠나간다고 말합니다. 이 가르침으로 싱클레어는 좀 더 자기 자신에 대해 용기와 신념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한층 더 성장한 싱클레어는 피토리우스가 떠나갈 때 ‘인도자는 내게서 떠나 버렸다. 나는 완전히 암흑 속에 서 있다. 나는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다. 도와다오.’ 라는 종이를 데미안에게 보내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게 들려주며 극복하게 됩니다.

 이즈음 싱클레어는 알을 깨고 나와 한 마리의 새가 되는 다섯 번째 꿈 그리고 연이여 저번 꿈에서 나온 어머니가 좀 더 구체화 되어 나오는 꿈을 꿉니다. 꿈에서 어머니를 안으려 하면, 어느새 어머니가 아닌 키가 크고 절반은 남성적이며 절반은 모성적인 여자를 안게 됩니다. 이 여인이 바로 우리 모두가 닮아가야 할 자기실현에 성공한 사람 즉 ‘완전한 인간’인 것입니다. 이후 싱클레어는 자신이 꿈꾸던 모습을 가진 여성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에바 부인은 인류의 어머니이며 엄격한 부성적인 표정과 따듯한 모성적인 표정을 함께 가지고 있는 싱클레어의 운명의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내면에 부성적인 면과 모성적인 면 더 크게 모든 이원성의 균형을 맞추어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에바 부인이 ‘인류의 어머니’로 묘사되는 까닭에는 이러한 인간상이 즉 모든 인류가 닮아야 할 인간상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윤동주의 시 ‘자화상’의 화자 또한 에바 부인이 되려 합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단 우물을 홀로 /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우물 속 아름다운 배경 속 사나이를 미워져 돌아가다 다시 돌아오는 반복을 합니다. 우물 속에 비친 그 사나이는 자신의 자아인 것이지요. 자신의 내면을 한편으로는 이성과 판단으로 채찍질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성숙한 면모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에게 냉정한 아버지의 표정 그리고 따듯한 어머니의 표정을 함께 짓는 것이 그리고 그 균형을 잘 맞추어 나가는 것이 바로 자아 성찰의 길일 것입니다.

 에바 부인을 만난 싱클레어는 대립하던 세계가 만나 자신의 내면에 도달해야 할 곳에 왔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자신이 자기완성을 했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의심을 나타냅니다. 그러자 에바 부인은 별을 꿈꾸던 청년이 마침내 별을 품자 의심이 생겨 해안에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절망적이지만 자신으로 모두 불태워 그 아름다운 여자를 얻고 그 여자가 왔을 때 자기 자신과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는 얘기입니다. 즉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자기실현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후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전쟁에 나가게 됩니다. 싱클레어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되고 그 옆 침대에 누워있는 데미안을 만납니다. 데미안은 이제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며 자신을 부르지 말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이후 싱클레어는 자신의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을 들여다볼 때 데미안을 닮은 나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길을 걷는 까닭이였던, 담 저쪽에 남아있는 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걸으면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괴로움에 눈물범벅이 되어 서울 시내를 걷던 저의 모습이 보입니다. 저는 사람이 많았던 거리에서도 혼자임에 괴로웠고 그러한 이유 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길을 저 혼자만이 걷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이 길을 걸으며 누군가 이미 그 길을 걸어와 남겨둔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담 저쪽의 나를 찾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를 부수고 다시 태어난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피하지 않고 이 길을 걸을 것입니다. 검은 거울에 비친 나, 참된 자아를 찾아서 나아갈 것입니다.

임도영
임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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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도영
  • 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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