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울 때 끊어야 여운이 남는 법이다.
- 작성자 레이디
- 작성일 2009-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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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1,092
늦은 밤, 집에 가는 버스에서 한정거장 먼저 내려 할인마트에 들렀다. 습하고, 비가 오는 날씨 때문인지, 늦은 하야(夏夜)라서인지 나를 제외한 손님은 없었다. 샌드위치를 만들기 위해 부족한 재료를 샀다. 계란 한 판을 사려다가 가격이 비싼 것을 보고 그만 주머니 사정이 생각나 고른 식품들을 서둘러 계산했다. 그런데 쓸쓸하게 비오는 밤길을 투박한 모양새로 검정 봉투 흔들며 가야겠구나, 생각하며 계산대를 지나치는데 문자가 왔다. 통화 가능해? 라는 내용이었다. 혼자 걷는 쓸쓸함에 염려하고 있는 차에 반가운 문자였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그리고 이렇게 늦은 밤에 문자를 보낸 연유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곧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너머로 차분하고도, 부드럽고도,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밤이니 목소리가 저조한 것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 오랜만의 연락에 반가워서 목소리에 대한 근거도 없는 생각들은 쓸데없다고 느껴졌다. 그는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정말 당연한 거지만, 안부를 물으며 통화는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내가 생각나서 연락했나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안부에 대한 내용을 서둘러 잘라버렸다. 그러더니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라는 말을 하면서 용건을 뜸 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정말 단순하게 보고 싶다 라던가, 다음에 보자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뜸을 들이던 그가 말을 텄다.
내가 레이디를 많이 좋아했던 사실을 아내가 알아버렸어. 라고 말을 뱉었다. 나는 많이 당황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이상하게도 침착했다. 다만, 유감스러웠다. 곧바로 나는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됐어요? 라고 물었다. 그가 한 말은 대략 이러했다. 자신이 과거에 블로그에 담은 나에 대한 비밀스러운 글을 어쩌다가 자신의 아내가 보게 되었고, 그래서 나와 연락도 하지 말고, 만나지도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것이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라고 했다. 나는 유감이네요. 라는 말로 답했다. 정말 그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한 사실이 유쾌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와 내가 알게 된지는 햇수로 4년이다. 나는 그의 고객이었다. 그는 가끔 보는 나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했다. 내가 부담을 느낄 정도로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직원과 고객을 넘어선 관심을 느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블로그 주소를 알려줬다. 나는 그 때 블로그라는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는 정말 내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지 블로그나 그 외에 궁금한 것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라며 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그의 호의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쾌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나는 그 시절 외로웠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주는 것이, 낯선 이가 주는 정체 모를 관심이라도 오히려 유쾌하고 흥미로웠으리라.
그 이후 우리는 서서히, 천천히 친해지고 있었다. 그가 보내는 문자와 가끔 갖는 만남. 그는 정말 친절하고, 매너 있게 나를 대했다. 서로 대화가 잘 통했고, 생각이 잘 통했다. 그래서 친해질 수 있었으리라. 나와 그는 가끔 화를 내고 불쾌할 때도 있었고, 서로 몹시 미안한 적도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서로의 생각이 통한 적도 있었고, 경계와 어색한 선이 허물어지는 진솔한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곤 했다. 나에 대한 에로스 러브를 말이다. 나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한 번도 사랑을 느껴 본 적 없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서도 아니고, 외모가 성에 차지 않아서도 아니고, 성격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이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랑 표현도, 사랑 고백도 모두 무시했다. 아니 그 것을 한 번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 없었다. 사람의 마음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그 것이 에로스적 감정이든, 우정의 감정이든 우리는 이미 정을 통한 사이가 아니었는가. 또한, 나에게 부담스러울 만한 감정을 품고 있는 그를 멀리하지 않은 까닭도 우정 때문이다. 우정이 아닌 다른 이름의 감정 때문에 우정을 버릴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여자가 생겼다. 처음에는 어떤 여자를 만났노라, 고 말했던 그가 어느 새 발전된 관계를 드러냈다. 어느 새, 그에게 그녀는 여자 친구가 되어 있었고, 어느 새 둘은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가 여자 친구를 만나는 단계를 겪지 않아서, 어느 순간 결혼을 하겠다는 모습이 너무 급작스럽게 느껴졌다. 말리지도 않았고, 염려한다고 하지도 않았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염려하거나 묻고 따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는 정말 한 사람의 어른이 되려는 성인이라고, 우정과는 별개로 그에게 아무 말도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결혼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아내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고마웠다. 나는 나름대로 그와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의 아내와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어린 친구와 어떻게 친하게 지낼까 싶지마는, 그래도 나는 친해져서 손해 볼 것은 없으리라고, 서로에게 오히려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고맙게도 그의 아내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고, 선한 의도의 연락과 관심을 보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친해질 수 있겠다, 라는 생각도 했다. 정말 선한 의도이기에,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선한 관심과 연락을 보내 준 고마운 그녀는, 나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던 그녀는 나와 더 이상 친해지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나는 그가 과거에 나를 연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를 떠올리면서, 또 그런 상황에 나라는 사람이 연류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그런 껄끄러운 상황을 겪는 두 부부의 마음은 어떠할까?
나는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아무런 잘못을 가하지 않은 채, 씁쓸하게 가해자가 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누구도 원망하지는 않았다. 원치 않은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떳떳한 마음이었다. 오해를 사고 있다든지, 죄책감을 갖고 있다든지 그런 마음이 아니었기에 나는 담담하고, 다만 유감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아내를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둘의 문제에 끼어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레이디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고, 특별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특별한 사람이야. 라고 말했다고 해서 굳이 거친 땅을 걸어야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적어도 우리의 우정을 지키고 싶었다. 자연스러움. 그 것이 우리가 통한 우정이 아니었겠는가.
아쉬울 때 끊어야 여운이 남는 법이니, 이만 전화를 끊어요. 라고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는 먼저 끊어.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잘 자요. 잘 지내요. 라고 말했고, 그는 평상시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잘 자요. 라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통화를 끊고서,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의 전율을 느꼈다. 나는 처음처럼 자연스럽고, 담담하다. 그리고 억지로, 굳이, 힘들게 엮으려고 하지 않고, 현재의 자연스러움을 걷는 우리의 우정이 지켜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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