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니진
- 작성자 정글피쉬
- 작성일 2010-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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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알았다. 그 스타킹 같은 쫄쫄이바지는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입고 있었다는 것을.
색 색깔로, 또는 블랙으로, 타이트하고 깔끔한 데님으로 만들어진 그 바지는 서울시내 곳곳을 걸어 다녔다. 보이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꽉 끼는 바지를 입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 바지가 유행이라도 말이다.
내가 아침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지하철 안에도 어김없이 스키니 진을 입은 늘씬한 여자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여자들의 다리를 훑어본다. 스스로도 내가 변태 같지만 눈길은 자꾸 다리 쪽에 머문다. 가늘고 기다랗다. 내 다리처럼 굵은 다리는 어디에도 없다.
똑같이 스키니 진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다리 굵기도 비슷해 보인다. 나도 스키니 진을 입고 싶은데 저 우월한 다리들 중에 나의 부끄러운 무 다리를 던져놓을 자신이 없다. 저런 다리들 중에 내 무 다리가 그 꽉 끼는 바지를 입고 함께 서 있으면 얼마나 볼썽사나울까. 하지만 조금의 위안을 삼고자 나와 비슷한 다리통을 가진 사람이 있나 훑어본다.
내 동생은 나랑 체구가 완전히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동생과 나를 보고 호박과 오이라고 표현했다. 동생은 작고 비적 말랐지만 나는 옆으로 퍼진데다가 투실 투실했다.
동생의 다리는 내가 은밀하게 관찰하는 지하철 여자들 다리와 비슷하다. 좀 짧다는 게 흠이지만.
동생은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밤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스팸을 한 접시 구어 먹어도, 밥을 먹었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틈틈이 간식을 찾아도. 살이 찌지 않는다. 그게 체질이란 말은 너무 불공평하다. 한 집에서 똑같이 먹고 자는데도 동생은 군살 없는 아담한 몸매를 유지한다.
물론 스키니 진도 너무 잘 어울린다. 내가 뒤늦게 스키니 진이 유행이라는 걸 알기 전부터 동생은 스키니 진을 열심히 사들이고 있었다. 동생의 가느다란 다리를 예쁘게 감싸주는 스키니 진. 동생은 내가 매일 아침 쳐다보는 지하철 여자들과 한데 뒤섞여 있어도 전혀 부끄럽거나 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 그 애가 또 쇼핑몰에서 스키니 진을 시켰다. 꽤 비싼 돌청 스키니 진. 봉투에 밀봉되어 온 그 바지는 처음부터 그 애의 것처럼 잘 어울렸다.
갑자기 난 화가 났다.
“야! 왜 이렇게 옷을 사대? 그 돈이 다 네 돈이야! 다 엄마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잖아.”
동생은 말했다.
“뭐 . 언니는 이런 거 입고 싶어도 못 입잖아.”
분했다. 하지만 다시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난 입술만 질겅거린다.
오늘은 이상하게 사람이 더 많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는 데 역마다 사람들이 물밀 듯 들이닥쳤다. 난 문 쪽으로 밀려난다. 정거장 수를 보니 아직 학교에 도착하려면 멀었다.
오늘은 하마터면 지각할 뻔 했다. 평소처럼 옷을 입으려고 서랍장을 뒤적거렸다.
도저히 입을 옷이 없었다. 바지는 하나같이 헐렁하고 캐릭터가 그려진 윗도리는 유치찬란했다. 스키니 진처럼 다리에 조금이라도 붙는 청바지를 찾아보았다. 다행이 다섯 번째 서랍장에 꼭꼭 숨어있는 일자 청바지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티까지 찾고 기쁜 마음으로 옷을 입으려고 했다.
그런데 허벅지가 잘 들어가지 않았다. 투두둑 하고 실밥이 뜯어지는 소리까지 났다. 간신히 다리를 꽉 꽉 밀어 넣어 들어가긴 했는데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봤다. 이걸 입고 학교에 간다면 난, 온종일 얌전한 아가씨처럼 두 손을 포개고 의자에만 앉아있어야 할 것 같았다.
청바지를 내동댕이쳤다. 할 수 없이 서랍장에서 내 허벅지에 알맞은 넉넉한 바지를 꺼냈다. 엄마는 부엌에서 시간도 없는데 자꾸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한다며 구시렁댔다.
“빨리 와서 밥 먹어. 학교 늦겠다!”
아침은 잘 먹어야 한다며 밥그릇에 밥을 소복하게 담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그런데 밥 먹기가 싫어졌다. 이 밥을 다 먹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청바지가 허벅지부터 안 들어 갈 것 같았다. 난 배가 고팠지만 숟가락을 탁 놔버렸다.
“너 다이어트 하냐? 네가 얼마나 복스럽게 생겼는데 무슨 살이 쪘다고 다이어트를 해? 지금이 얼마나 통통하고 보기 좋은데.”
엄마는 또 늘 하던 소리를 해댔다.
여자들이 자기가 살쪘다고 느끼는 기준은 평균체중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기가 뚱뚱하다고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엄마는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지만 그런 말들은 전혀 위안이 안 된다. 복스럽다니 하는 말들은 내게 더 자극만 줄 뿐이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컴퓨터를 켰다. 끝내는 사지도 못할 거면서 쇼핑몰에서 스키니 진을 검색해 본다.
다양한 디자인에 스키니 진을 입은 모델들이 우아한 다리를 뽐낸다. 다리 성형을 해서라도 저런 다리를 가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리에서부터 내 몸 전체까지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난 스키니 진에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다. 길고 날씬한 다리로 스키니 진을 꼭 입고 말리라는 굳은 결심을 한다.
스파르타 식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식단표를 짠다.
군것질을 하지 않고 밥을 평소보다 덜 먹었다. 하지만 습관처럼 내 입은 계속 먹을거리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당근과 오이를 먹었다.
피부미용에도 좋고 노폐물도 빼준다는 물은 하루에 꼭 여덟 컵씩 마셨다. 하지만 그 역시도 쉽지 않았다.
살을 빼는 건 어떤 이의 말을 빌려,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체중은 일, 이키로 빠지다가 그대로 멈춰버렸다. 오직 내 소모적인 히스테리와 스트레스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날도 한손엔 물병을 들고 당근과 오이를 씹으며 영어숙제인 단어장을 폈다. 그때 ‘skinny’란 단어가 눈에 띈 건 우연 이였을까?
‘빼빼마른!’ 너무도 익숙한 그 단어를 나도 모르게 연신 중얼댔다.
‘그냥 마른도 아닌 빼빼 마른. 빼빼 마른이라. 내가 빠져있었던 건 스키니 진이 아니라 빼빼마른이었나?’
tv에서 광고가 흘러나온다. 요즘 뻔질나게 선전을 해대는 모회사의 다이어트 용 시리얼 광고다. 딱 보기에도 깡마른 여자가 스키니 진에 다리를 낑낑대며 집어넣고 있다. 그런데 저칼로리 시리얼을 먹었더니 다리가 바지 속으로 미끄러지듯 쉽게 들어간다.
뭔가 어색하다. 깡마른 여자에게 다이어트가 절실할까? 소비자들에게 광고의 목적을 확실하게 전달하려면 아무래도 깡마른 모델보다 어느 정도 살집이 있는 모델을 쓰는 게 맞을 텐데.
광고를 기획한 사장도 '빼빼 마른'이란 단어에 꽂혀 광고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던 걸까? 그저 요즘엔 모두들 skinny한 모델들을 쓰니까, 나도 요즘 트렌트에 맞춰 마른 모델을 썼을 뿐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먼지가 뿌옇게 쌓인 그리스 로마신화 책을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며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미의 신 아프로디테가 나온다. 난 미의 여신이라 해서 글 보다는 그림을 먼저 봤다.
하지만 아프로디테의 몸매는 정말 가관이었다. 그녀는 투실투실한 허벅지를 가진 고도비만의 여성이었다. 미의 여신이면 당연히 가슴은 크고 허리는 잘록하고 키는 백 칠십 이상이어야 맞는데. 난 모든 신이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며 칭송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책장 구석에서 먼지와 함께 빚이 바랜 그리스로마 신화 책을 다시 찾았다.
아프로디테는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며 고고한 자태를 뽐냈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아프로디테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는 진정 미의 여신이었다.
아프로디테의 얼굴은 내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다 사라지게 해줬다. 히스테리와 스트레스로 얼룩진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내 몸은 공장에서 뽑아낸 마네킹이 아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건 얼굴 생김새처럼 모두 다르다. 세상엔 뚱뚱한 사람도 있고 마른 사람도 있다는 건 당연한 진리다.
사람들은 소중한 내 몸을 여전히 자기들만의 잣대로 평가할 것이다.
“넌 허벅지에 온 살이 쏠렸어. 넌 뚱뚱해.” 라며.
하지만 이제 그런 말은 내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제 내 눈에는 내 몸매가 너무나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난 허리 사이즈가 삼십 인치인 스키니 진을 사기로 결정했다. 엉덩이와 허벅지에 맞춘 것이다.
나는 매일 등교하는 지하철에서 자랑스럽게 입고 다닐 것이다. 내 다리는, 내가 한 때 우월하다고 느꼈던 그 다리들과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으니까.
다리란 자고로 달리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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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피쉬
- 20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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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피쉬
- 2010-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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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피쉬
- 2010-09-13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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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잘읽었어요~
우와~정말 로그인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군요.....읽으면서 저도 제얼굴과 몸매에 자신감을 가져야 겠다 생각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