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초코입니다
- 작성자 비기닝
- 작성일 201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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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족
저는 올해로 14살이 되는 작은 코카스파니엘이에요. 털이 초코색이라 하여 이름은 초코입니다. 제 주인은 한참 변덕이 심한 17살의 현아라는 여자아이에요. 이 아이에게 길러지기 시작한 것은 제가 태어나던 해인 재작년부터인데, 저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 집에 분양되어 왔어요.
제가 살고 있는 이 집의 식구는 저를 빼고 총 넷입니다. 주부이신 아줌마와 회사에 다니시는 아저씨가 있구요, 한 달 전에 태어난 아기 하람이가 있습니다. 현아는 늘 제게 ‘내가 너의 주인이야-’라고 말하는데 아마 그것은 불안하기 때문일 거에요. 사실 제게 밥을 주고 저를 목욕 시켜주고 하는 것은 모두 현아가 아닌 아줌마께서 해주시거든요. 그래서 한 번은 현아 방이 아닌 아줌마 아저씨 방의 침대 밑에서 잔적도 있어요. 물론 현아 몰래요. 아줌마 아저씨도 제가 침대 밑에서 잠을 잔 것을 모르셨는지, 아침에 부스스한 털을 세우고 먼지에 둘러 싸여 침대 밑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저를 보고 아줌마가 ‘귀신이야!’하고 소리를 지르셨어요. 귀신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에 저는 그 귀신이란 것이 무척이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아줌마 아저씨가 제가 침대 밑에서 나오는 것에 귀신인줄 아셨다니까, 앞으론 침대 밑에서 자지 않기로 다짐도 했어요. 그 정도 했으면 제 밥도 현아가 주고 씻겨주는 것도 현아가 해줄 줄 알았는데, 현아는 오히려 밤중에 저를 안고 자지 않아 잠옷에 제 털이 묻지 않았다고 좋아하기만 했어요. 덕분에 삐진 저는 그 날 밤부턴 현아가 새벽에 저를 안으려 손을 마구 뻗어도 요리조리 피해자고 있답니다.
요즘 저희 집안에 최대 관심사는 하람이에요. 아줌마는 하루 종일 하람이만 보고 계시고, 다른 일을 하다가도 하람이가 응애-하고 우는 소리를 내면 당장이고 뛰어와 하람이를 품에 안으시고 우스운 표정을 지으셔요. 그럼 하람이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활짝 웃고요. 제가 봐도 하람이는 무척이나 귀여워요. 아기를 본 것은 처음인데 하람이의 볼은 통통한 고기처럼 살이 올라 앙, 물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람이가 귀엽다고 볼을 물면 하람이가 아파할 거고 아줌마와 아저씨, 현아가 싫어할 것을 알기에 저는 꾹 참아요. 저녁밥을 먹을 때 즈음에 집에 돌아오시는 아저씨 역시 집에 돌아오시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하람이를 안고 우스운 표정을 지으셔요. 그런 아저씨의 얼굴을 본 하람이는 또 활짝 웃습니다. 아기라면 조금 무서워할만한 표정임에도 하람이는 늘 활짝 웃어요. 사실 저도 가끔 아줌마와 아저씨가 짓는 우스운 표정을 보면 살짝 겁이 납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아줌마가 무서워하는 그 귀신이 그렇게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주름이 져있거든요. 하람이는 아마 무척이나 착한 아기인가 봐요. 아니면 모든 아기들이 착한 걸까요?
2# 사춘기
오늘 저녁시간은 다른 때와 달리 조금 조용합니다. 아마도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일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방에 있는 분홍색 거울로 이마를 살펴보던 현아가 발갛고 볼록하게 솟은 것을 만지며 성을 냈어요. 또 여드름이 났네, 하구요. 아마도 현아의 얼굴에 난 그것을 사람들은 ‘여드름’이라 부르는가봅니다. 아줌마가 제 이름을 부르며 밥 먹으라고 하는 것에 저는 기분 좋은 소리로 짖으며 방을 나섰어요. 현아는 여전히 성을 내고 있었구요. 식탁의 밑에 쭈그리고 누워 통조림을 맛있게 먹고 있던 와중에, 현아가 방에서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신문을 읽고 계시고 아줌마는 하람이의 밥을(아줌마께서 하람이의 밥은 우유라고 하셨어요) 주고 계셨어요. 다들 밥 먹자, 아저씨가 말하셨습니다. 아줌마는 하람이를 침대에 내려놓으시고 미역국을 떠드셨어요. 현아는 숟가락만 든 채로 미역국의 미역을 들추고만 있었습니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왜 깨작거리기만 하니?’ 아줌마의 말에 현아가 ‘입맛이 없어서요.’하고 대답했어요. 그리곤 아저씨가 무어라 말을 하시려 입을 열었는데, 현아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저의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어요. 아저씨가 성이 나 붉어진 얼굴로 현아의 뒤를 따라 현아의 방으로 들어가셨고 곧 방 안에서 아저씨가 현아를 혼내는 소리가 들렸어요. 곧 방문이 쾅! 하며 열렸고 현아가 소리쳤습니다. ‘다들 나한테 신경 좀 끄면 안돼요?’…… 그리고 현아는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아마도 학교로 가는 것 같았어요. 현아가 나가고, 아저씨는 한숨을 쉬시고 아줌마는 우는 하람이를 달래셨습니다.
“아침에 죄송해요.”
분홍소시지 반찬을 우물거리며 현아가 말했어요. 식탁 밑에서 밥을 먹던 저는 현아의 목소리에 현아를 올려다보았어요. 붉게 물든 볼을 문지르는 현아를 보던 아저씨가 그래, 하는 짧은 말을 하시고 다시 밥을 드셨어요. 저는 보았습니다. 식탁 밑으로 현아의 손을 잡아주시던 아저씨의 손을요.
3# 데이트
아줌마와 아저씨가 모두 외출을 하셨습니다. 두 분이서 모임이 있다고 하셨어요. 아줌마가 현아에게 오늘 하루는 집에서 하람이를 봐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현아는 살짝 짜증을 내긴 했어도 알았다며 수락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 금방 전 현아가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안절부절 못하며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나가봐야하니 하람이를 돌볼 수 없다구요.
“친구가 급하게 만나자고 해서 나가봐야해요.”
아, 금방 걸려온 전화는 친구에게 온 전화였나 봅니다. 얼마나 급한 일이 길래 현아가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걸까요? 저는 따뜻한 카펫 위에 누워 상기된 현아의 얼굴을 보았어요. 현아는 뭐가 그리 불안한지 손톱까지 깨물기 시작했습니다.
“아, 엄마!”
그대로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아줌마의 목소리가 끊겨버렸습니다. 현아가 절망적인 얼굴을 하고 바닥에 주저 앉았어요. 그렇게 급하다면 나가봐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아줌마와 아저씨 역시 지금은 집에 들어오실 상황이 되지 못한가봅니다. 하람이는 무척이나 착하고 순한 아기이지만 하람이도 아기이니 혼자 있을 수는 없겠지요? 아, 물론 제가 있긴 하지만 저는 하람이를 돌볼 수가 없으니까요.
“무려 성환이가 먼저 만나자고 했는데 나갈 수가 없다니….”
성환이? 성환이라하면 많이 들어본 이름입니다. 방에서 현아가 친구와 전화통화를 할 때에 비밀이라도 되듯이 ‘나는 성환이가 조금 마음에 들어’하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성환이라는 친구가 현아에겐 정말정말 마음에 들고 소중한 친구인가 봐요. 현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손톱을 깨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동안 무엇을 고민하더니 현아가 휴대폰을 열어 번호를 딱딱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다 대었습니다.
“미안, 오늘은 동생을 봐야해서. 다음에 보자.”
결국 성환이라는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 했나봐요. 조금 안타깝긴 하지만 하람이를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현아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현아는 정말 좋은 누나에요.
“동생이 뭐라고! 엄마한테 아기 본 아르바이트비 꼭 받아내고야 말겠어.”
아, 금방 한 말은 취소해야겠어요. 현아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았습니다. 왠지 조금 무서워지네요. 현아가 자신을 돌보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평소 순하고 조용하던 하람이가 응애, 하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현아는 화가 가신 눈을 하고 어쩔 줄 몰라하며 하람이가 있는 방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갔어요. 저도 현아를 뒤 따라 들어갔습니다. 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저를 보며 현아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네요.
“털 날리잖아. 거실에 가 있어, 초코.”
저도 하람이같은 아기에겐 저의 털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현아가 대놓고 면박을 주니 속이 상해 히잉, 거리며 방을 나왔어요. 귀여운 하람이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긴 하지만, 저 때문에 하람이가 이상한 병 같은 것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전 정말 너무 속이 상할 거예요.
어라, 하람이의 울음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그에 섞인 현아의 한숨소리도 점점 커지구요. 현아가 하람이를 포대기에 싸안은 채로 거실에 나와 하람이를 소파에 내려두었습니다. 하람이의 울음은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가 않네요. 현아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또 손톱을 깨뭅니다. 아무래도 불안할 때면 나오는 버릇인 것 같아요. 현아가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릅니다.
“엄마, 나에요. 하람이 자꾸 우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수화기 너머로 아줌마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우유를 데워 먹이라는 아줌마의 말에 현아가 네, 대답하곤 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부엌 쪽으로 다다다 뛰어갔어요. 그리곤 우유가 담긴 병을 들고 와 하람이를 들곤 하람이의 입에 고무 같은 것을 물려주었습니다. 조용해진 하람이가 우유를 참 맛있게도 먹네요. 꿀꺽 꿀꺽, 조용한 집안엔 하람이가 우유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집니다. 하람이가 우유를 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아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람이 네가 성환이보다 잘났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하람이가 히죽히죽 웃네요. 하람이는 현아의 품이 따뜻한지 발그스름한 볼을 하고 그 품에 안겨 우유를 잘도 먹습니다. 현아의 품은 제가 지금 누워 있는 빨간 카펫보다도 더 따뜻할 거예요.
4# 한 밤 중의 부부싸움
늦은 밤, 현아의 침대 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이 번쩍 뜨인 저는 문을 살짝 열고 대체 누가 이 밤중에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인지 보기 위해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보았어요.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고, 곧 고개를 돌려 보이는 얼굴은, 어라, 아저씨네요. 아저씨가 집에 늦게 오신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저는 조금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지금 저게 아저씨가 아니라 아줌마께서 무서워하시는 그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이에요. 제가 물러나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저씨인지 무엇인지 모를 그것이 다가와 저를 빤히 쳐다봅니다. 그리곤 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어요. 아마도 제 생각이 틀린 건가봅니다. 귀신은 무척이나 무서운 것인데 제 앞의 이 사람은 저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니, 아마도 아저씨가 맞나 봐요. 저는 아저씨가 반가워 꼬리를 흔들며 현관으로 나가 아저씨를 따라 거실로 들어섰습니다. 아저씨는 방까지 가시던 도중에도 제 머리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셨어요. 아저씨가 이제 들어가라, 하시고 저는 헤헤 혀를 내민 채로 발걸음을 돌려 현아의 방으로 향했습니다. 그 때, 뒤에서 무언가 찰싹! 하는 소리가 났어요. 듣기만 해도 제 등이 아린 그런 소리라 저는 다시 몸을 돌려 아저씨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줌마가 아저씨의 등짝을 시원하게 내리치고 계신 것이 아니겠어요? 놀란 저는 여전히 혀를 내민 채로 아줌마를 보았습니다. 잔뜩 성이 나 붉어진 얼굴을 한 아줌마가 아저씨의 무너진 몸에 대고 소리 치셨어요.
“지금이 몇 신 줄이나 알아요?! 늦어도 10시 안엔 들어온다고 했으면서!”
아하, 아저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모양이에요. 아줌마는 이런 적이 없더니…, 정말 실망이야 하는 말들을 연달아 하셨고 술에 취한 아저씨는 여전히 묵묵부답. 답이 없는 아저씨가 답답하신지 아줌마가 아저씨의 등짝을 몇 번 더 내리치셨어요. 세 번 정도 내리쳤을까, 갑자기 아저씨의 상체가 휙, 하니 들렸습니다! 놀란 아줌마가 뒤로 물러나셨고 아저씨가 왜 때려! 하며 무척이나 큰 소리를 내셨어요.
“매일 바가지나 긁구 말이야. 당신두 다른 여자들이랑 틀릴 거 하나 없어!”
“뭐에요? 집에 늦게 들어온 게 누군데! 그럼 나랑도 틀리구, 다른 여자들이랑도 틀린 그런 사람 만나서 살지 왜 나를 잡아다가 이 꼴로 살게 만들어, 왜!”
두 분 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리둥절한 채로 아줌마와 아저씨를 지켜보고 있던 제 뒤로 발걸음 소리가 나 돌아보니 이제 막 잠에 깬 듯한 현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눈을 부비작 거리던 현아가 엎어져 계신 아저씨를 보고 놀라 아저씨를 일으켰어요. 현아가 아빠, 일어나세요 하며 일으켜주는 것을 뿌리친 아저씨가 저 혼자 땅을 짚고 일어서시더니, 옆구리에 손을 딱- 올리고 아줌마에게 삿대질을 하시며 한마디 하셨습니다.
“남자가 말이야,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집에 늦게 들어오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 사람이 말이야, 응? 내가 언제 12시 넘어서 들어온 적이 있던가? 처음 늦은 건데 그걸 그렇게 잡을려고! 나를 물어뜯을 작정이지 말이야, 이게.”
“내가 물어뜯긴 뭘 물어뜯으려고 그런다고 그래요? 나를 이상한 여자로 모는 것 좀 봐봐.”
“아유, 그만 좀 하세요! 하람이 깨겠어요.”
“현아 너는 들어가서 자!”
아저씨가 소리치는 것에 현아가 놀라 뒤로 자빠질 뻔하였습니다. 겨우 서랍장을 잡고 선 현아도 어째 성이 나는지 붉은 얼굴로 아저씨의 팔뚝을 잡아 방으로 끌기 시작했어요. 어서 들어가 주무세요, 하는 현아를 또 한 번 뿌리친 아저씨가 아줌마를 칠 기세로 노려보셨습니다. 그 기세를 눈치 챈 건지, 아줌마가 먼저 아저씨의 어깨를 탁! 밀치셨어요. 아저씨를 밀치는 아줌마를 본 현아는 정말 놀란 것인지 눈이 튀어 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아줌마를 봅니다.
“그만 하시라니까요!”
“어어, 지금 날 밀었다 이거지?”
아저씨의 입이 열리고 아저씨 역시 손을 들어 아줌마의 어깨를 밀쳤습니다.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하마터면 아줌마 뒤에 있던 커다란 화분이 엎어질 뻔하였어요. 현아는 아줌마의 팔을 잡음과 동시에 그 뒤의 화분을 감쌌습니다. 현아는 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요.
“이 사람이 진짜!”
화가 난 아줌마가 아저씨를 더 세게 밀쳤습니다. 아저씨가 ‘어어!’하는 조금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뒤로 쿵! 넘어지셨어요. 엉덩방아를 찧은 아저씨께서 연신 으으… 하는 신음소리를 내셨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아플 지경인데 아저씨는 얼마나 아프실까요. 아저씨를 일으키려 상체를 수그린 현아가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탁! 노려보았어요. 그와 동시에 움찔, 한 아주머니께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아를 보았습니다.
“다들 그만하고 주무세요!!!!!!!!!!!”
코 고는 소리도 없이 조용한 아파트 단지에 현아의 고함 소리가 크게, 크게, 크게- 퍼졌습니다.
5# 가족사진
오늘은 신나는 주말입니다. 사실 저는 매일 집 안에 있으니 무어가 그리 즐거운지 모르겠지만 현아와 아저씨는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연신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즐거운 것이 맞겠지요?
그런데 여느 주말과는 달리 오늘은 온 가족이 일찍이 일어났어요. 아직 아기인 하람이만 정오를 향하는 지금 코오, 하는 소리를 내며 자고 있습니다. 아침에 아줌마가 통화하는 것을 들었는데 오늘 집에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가 온다고 했어요. 덕분에 아줌마는 아침 일찍부터 얼굴에 허연 분을 찍어 바르셨습니다. 현아도 전신 거울에 제 옷 이것저것을 비추어 보며 ‘뭘 입지?’하고 고민했습니다. 결국 화장을 마친 아줌마께서 방에 들어와 ‘교복 입어!’하고 소리를 치셨을 때에야 그 행복한 고민이 시무룩하게 끝났습니다. 따로 준비는 하지 않고 말끔하게 옷만 차려 입으신 아저씨는 뭐가 그리 지겨우신지 연신 하품을 하십니다.
“초코, 너도 우리 가족이니까 예쁘게 털 빗자.”
“안 돼, 초코는 사진 찍을 수 없어.”
“네? 초코도 우리 가족인데 왜요!”
현아가 웃는 얼굴로 제 전용 빗을 들고 와 털을 빗겨 주는데, 아저씨가 저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조금 서운해 아저씨를 향해 히잉, 히잉, 소리를 내자 아저씨가 어쩔 수 없어, 하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습니다. 아저씨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무언가의 이유가 있나 봐요. 그래서 저는 이내 체념하고 아저씨가 쓰다듬어주시는 손길을 느끼며 바닥에 엎드렸어요.
‘딩동-’
“어, 오셨나보다.”
현아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현관에 나가 문을 열었어요. 커다란 사진기와 받침대, 반짝반짝 열을 내뿜는 조명기구를 짊어진 콧수염 아저씨가 집에 들어오셨어요. 콧수염 아저씨를 따라 들어온 몇몇 다른 아저씨들이 거실에 조명기구를 세우고 카메라를 설치하셨습니다.
“보통 집으로 부르시는 경우는 드문데, 왜 사진관에 오지 않으시고 출장을 부르셨습니까?”
“저는 사진관 가서 찍자고 했는데 와이프가 굳이 집에서 찍기를 원하더라고요.”
“예, 예, 집에서 찍는 것도 좋은 추억이죠.”
“하하,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뒷짐을 진 아저씨가 콧수염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시고, 아줌마는 다른 아저씨들에게 이것은 여기에 저것은 여기에 하며 설명을 하셨어요. 그 사이에 현아가 방에 들어가 예쁜 꼬까옷을 입은 하람이를 안고 나왔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있는데도 넉살 좋은 하람이는 방긋방긋 예쁘게도 웃습니다. 콧수염 아저씨가 하람이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시며 ‘애가 참 예쁘네요.’하셨습니다.
“준비 다 됐습니다.”
“아, 예. 거기 소파에 앉으시죠.”
“이렇게요?”
“사모님이 앞에 앉으시고, 아기는 학생이 안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아, 네!”
현아가 하람이를 안고서 소파의 뒤에 섰어요. 소파에 앉은 아줌마, 아저씨께서 활짝 웃으셨습니다. 며칠 전, 한 밤 중에 아줌마와 싸우시다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 아직도 아프신지 아저씨가 엉덩이를 몇 번 문지르셨어요. 그 싸움이 있은 뒤로 한동안 집 안엔 냉랭함이 가득했었지요. 하지만 곧 아저씨가 먼저 사과하시고 두 분은 예전과 같이 서로 다정하셔요. 이제야 우리 집 같습니다.
“하나, 둘, 찍습니다!”
“초코, 이리 와!”
현아가 조용히 입만 벙긋거리며 제게 손짓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콧수염 아저씨가 ‘김치!’하고 소리 치실 때 냉큼 소파 위로 올라 아저씨의 무릎에 앉았어요. 아저씨와 아줌마가 크게 웃으셨습니다. 현아도 웃고, 하람이도 방긋방긋 웃습니다.
며칠 후에 사진이 도착했고, 그 사진은 우리 집 거실 벽면 한가운데에 걸렸습니다. 저를 빼고서 찍은 사진도 몇 장 있었지만 아저씨는 제가 있는, 제가 아저씨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그 사진을 벽에 걸으셨습니다. 그 사진 속엔 늘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아저씨가 있고, 여전히 현아 대신 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아줌마가 있고, 늘 제 주인으로 남을 현아가 있고, 제가 지켜주고 싶은 하람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 초코도 있어요! 저는 우리 가족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늘 지금처럼 서로 사랑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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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기닝
- 2010-07-19
벚꽃이 지는 그 날에 이사는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벌써 많은 짐이 포장되어 쌓여 있곤 했다. 엄마는 내가 땀 흘리지 않게 하시려고 부러 내 짐을 제일 먼저 챙겨 놓으셨다. 먼지 냄새가 폴폴 풍기던 내 방 안은 어느새 모서리만 두꺼운 종이에 쌓인 나무 책상을 빼곤 모든 것이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사를 하기 편하라고 처음부터 조립식 책장을 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큰 가구들까지 처리가 빨라 애초부터 내가 할 것은 없었다. 내 물건 중 유일하게 상자에 들어있지 않고, 원래의 위치대로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것이 있다면, 춘천으로 가는 기차표, 하나였다. 엄마는 집에 없었다. 아침에 일 문제로 밖에서 저녁을 먹고 와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에게 전화하지 않고 표를 바지 뒷주머니에 챙겨 집을 나왔다. 아마 엄마는 곤히 자고 있어야 할 내가 집에 없는 것에 또 이 주위를 샅샅이 뒤지며 근처 파출소에 신고까지 할지도 모른다. 앞 일이 뻔히 내다보임에도 나는 그냥 집을 나왔다. 아무 말 없이 나와 아침 해가 다 떠서야 들어온다고 해도 엄마는 아무 말 하지 않으실 거다. 그저 고요히, 한참 내 눈을 보다 방으로 들어가실 거다. 정류장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멍하니 보다 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한참 버스 안이 붐빌 시간임에도 자리가 많았다. 나는 맨 뒤에서 2번째 자리에 앉았다. 내 뒷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이 소미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여학생의 이어폰에서 강한 비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약하다. 심적으로 약한 것이 아닌 몸이 약하다. 아니, 어쩌면 몸과 마음 둘 다 약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선천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약한 아이들은 친구가 없다. 작은 사회라는 학교에도 엄연히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그 중 나는 약자에 속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적엔 친구가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제법 강했다. 또래 아이들 중에 최고로 떠오를 만큼 강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나보단 강했다. 아마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강했던 때가 그 때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점점 약해졌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 즈음이 돼서는 아주 심각했다. 내 스스로도 내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서서히, 천천히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가가 폭락하듯 그렇게 약해졌다. 점점 뛰는 것이 힘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선생님이 혹시 체육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한다던가, 문제가 있는 아이는 선생님께 미리 알려달라고 말하셨지만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매 체육 수업에 여느 아이들과 같이 참여했고 힘들었지만 견딜만하다는 생각에 버텼다. 전혀 견딜만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대회 날이었다. 그 날은 왠지 다른 때와 달리 전혀 힘들이지 않고 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주는 밥을 맛있게 먹고 학교에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기분이
- 비기닝
- 2010-04-25
나의 돌고래 유치원을 졸업하던 그 날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아니, 정확히는 졸업식이 끝난 후에 갔던 아쿠아리움을 기억한다. 더 정확히는 푸른 빛깔의 물속을 쓸쓸히 헤엄치던 돌고래를 기억한다. 사실 난 그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의 어릴 적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언급하는 그 졸업식을 하던 날이 내 몇 없는 어릴 적 기억 속에 박혀 있는 이유는 그만큼 특별한 것을 보았고, 느꼈기 때문이다.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에 들어섰다. ‘한빛유치원 6회 졸업식‘이라는 글씨가 알록달록하게 적혀있는 커다란 플랜카드를 올려다보다 고개를 살짝 틀어 엄마의 얼굴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그런 표정으로 엄마는 무뚝뚝하게 강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올랐다. 나는 엄마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보다가 그냥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강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높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강당에 걸린 커다란 자물쇠가 열린다. 선생님들은 우리가 강당에 오를 때마다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한명씩 계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었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계단을 잘 오르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저 내 손을 잡고 나를 끌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내 손바닥에서 땀이 잔뜩 배어나옴에도 엄마는 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저 나의 땀이 나는 손이 축축하고 걸리적거리는지 아예 손까지 놔버리고 혼자 훅훅 올라갔다. 나는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뒤따라 올랐다. 몇 번이고 이대로 확 넘어져버려 뒷통수라도 찢어지게 만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계단에서 엎어지지도, 구르지도, 뛰지도 않았다. 그저 내 앞에서 유유히 계단을 오르는 엄마의 발길을 따라 꾸역꾸역 계단만 올랐을 뿐이다. 나와 엄마는 지각생이었다. 우리가 들어선 장내는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슬리퍼를 신고 있음에도 엄마는 슬리퍼로 갈아 신지 않았다. 뱀가죽을 둘러씌운 것 같기도 한 그런 검푸른 빛깔이 도는 뾰족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우리 바다반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여전히 엄마는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그곳은 계단도 아니었고, 혼자 걷기 힘든 곳도 아니었다. 그저 나무 바닥이었다. 하지만 나는 계단을 혼자 올랐을 때에 느꼈던 것보다 더 큰 서운함을 느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엄마가 바다반 선생님께 가볍에 목례하였다. 선생님도 당황이 서린 눈을 접어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엄마의 꼬리 마냥 옆에 붙어있던 내게도 손을 들어 인사하셨다. 나는 방긋 웃으며 선생님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가 선생님께 달려가서 엄마 대신 선생님의 손을 잡으면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졸업식은 별 탈 없이 끝났다. 별 탈이 없었다는 것은 시시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활
- 비기닝
- 201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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