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개구리백작의 초대

  • 작성자 쇼치필리
  • 작성일 2011-06-19
  • 조회수 287

개구리 백작의 초대

 

 

 

초대장을 받았다. 하얗고 뻣뻣한 종이가 매끄럽다. ‘부고’라고 쓰여진 부분부터 조금 아래쪽 까지, 읽을 수는 있지만 이해하기 싫은 글자들이 잔뜩 써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든다. 나를 보고 있던 담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의 눈동자가 말했다. 넌 가야해.

느껴진다. 내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건 내게로 꽂히는 시선. 뒤를 돌아보자 나를 향해 헤죽거리며 웃는 저 얼굴이 낯이 익다. 또 정우철이다. 내가 정우철의 고백을 거절한 이후로 몇 개월째 반복되는 이 행동들에 짜증을 넘어, 이젠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겨울이 물러가고 새 학년, 새 학기가 되어 부푼 마음을 안고 교실 문을 연 순간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전교에 딱 한명 있는 왕따가 우리 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음침하고 말을 붙이면 어눌한 말투로 대답을 한다. 심지어 가까이 다가가면 지독한 냄새마저 났다. 그애는 성추행범으로 경찰에 끌려간 적이 있다. 자기말로는 옆에 있던 여자의 치마가 올라가서 그것을 내려주려고 했다는데 그런 애의 말 같은건 전혀 신빙성이 없다. 작년에 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엔 층이 달라서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지만, 가끔 계단에서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항상 계단 손잡이를 잡고 후다닥 계단을 오르내렸다. 그런데 맙소사. 같은 반이라니.

새 학기라 한껏 멋을 내고, 들뜬 기분으로 교실을 들어섰는데 ‘정우철’. 그 애를 발견한 순간부터 내 들뜬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앞으로 즐거울 일만 가득할 우리 반의 행복을 정우철이 벌써부터 조금씩 좀 먹는 듯한 느낌이었다. 빈자리를 찾아 앉고 나서 의자를 최대한 당겨서 벽 쪽에 붙었다. 조금이라도 정우철과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의 앞문이 렸다. 나이 지긋하신 남자 선생님 한 분이 들어오시고, 그렇게 새 학기의 첫날을 맞이했다. 그 이후로 별 다른 일 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문제의 그날이 다가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교실 문을 열며 반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는데, 내게 돌아오는 건 평소와 다름없는 반가운 인사에 대한 화답이 아니라 비웃음의 시선과 조롱 섞인 웃음이었다. 자리로 향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나를 향해 수근 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야, 주인공 납셨다.”

“박 수진. 넌 저런거한테 인기 있어서 좋겠다?”

나를 향해 깔깔 웃으며 손가락질 하는 친구들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 귀에 들려오는 말을 이해 할 수 없었고 자리에 도착해선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우철이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것도 꽃다발을 들고 앉아서 내 책상위에 무슨 내용인지, 한자 한자 빼곡히 책상에 써넣고 있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좋아해’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었다. 몇 개는 맞춤법도 틀려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진 글자도 보였다. 그리고 내 눈은 정우철이 완성해가고 있는 문장을 읽고 말았다. ‘나랑 사귀자.’ 고작 다섯 글자에 불과한데 나는 그 글자들의 나열에 이성을 잃었다.

“야, 너 내 자리에서 뭐 하는 거야!”

정우철을 밀치자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정우철이 의자와 함께 쓰러져 뒹굴었다. 정우철이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이 바닥에 떨어지며 꽃잎 몇 개가 휘날렸다. 별로 세게 민 것도 아닌데 정우철이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정우철을 발로 찼다.

“야. 일어나. 약한척 하지마.”

그런데 여전히 정우철은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발길질을 멈췄다. 그래서 놀란 마음으로 다가가 정우철을 몇 번 흔들었다.

“정우철? 야, 너 괜찮아?”

내가 정우철을 걱정하며 다그칠 때 우리 반 애들은 나를 그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정우철과 엮였다는 이유만으로 날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정우철을 도와주신 건 담임선생님 이셨다. 조회 하러 교실에 들어오셨다가 엎어진 내 책상과 겁에 질려선 쓰러져있는 정우철을 보는 나를 발견하시더니, 묵묵히 정우철을 들쳐 업으시곤 보건실로 데려가셨다. 한참 있다가 교실로 돌아오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 아이들을 물끄러미 한 바퀴 돌아보시더니“장난 심하게 치지마라.”라는 말만 툭 하니 던지시고 나가셨다. 들리는 소문에는 정우철이 가벼운 뇌진탕으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담임선생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정우철이 너 때문에 응급실에 다녀왔으니 너는 돈을 물어야 한다. ‘ 따위의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셔서 나는 설마 정우철이 집에 나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던 게 벌써 몇 달 전의 일이다. 물론 지금도 정우철은 내게 병원비를 청구하지 않고 있다. 그 날 이후로 반 친구들은 틈만 나면 나와 정우철을 엮지 못해 안달이 나서 자기들만의 소설을 쓰고 있었다. 정우철이 내게는 왕자님처럼 보여서 내가 정우철에게 잘 보이려고 학교에 꾸미고 다닌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며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 정우철은 왕자님이라기보다는 개구리에 더 가깝게 생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눈 하며 파리하게 질린 안색하며. 더욱이 구부정하게 굽은 등은 그 애를 개구리처럼 보이게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정우철은 집에 돈이 조금 많았다. 조금이라고 하기엔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그 예로 정우철이 가끔가다 비오는 날 넘어져 흙탕물에서 뒹구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 다음날은 항상 새로 산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학용품과 책가방, 신발은 자주 바뀌었다. 무엇하나 제 수명을 다 하기도 전에 조금 닳았다 싶으면 항상 고급인 새 물건으로 대체되곤 했다. 그래서 몇몇 애들은 정우철 몰래 물건을 슬쩍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집에 돈이 많은 정우철을 애들은 개구리 백작이라고 불렀다. 왕자라는 칭호를 붙여주기엔 머리도 딸리고, 일단 얼굴이 안된다나 뭐라나. 애들이 자신을 개구리 백작이라고 부르며 나와 자신을 엮는 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철은 끊임없이 날 따라다녔다.

정우철이 왜 날 좋아하는지를 모르겠다. 나는 단 한 번도 정우철에게 친절했던 적이 없었고, 심지어 이렇다 할 만한 말을 해본적도 없었다.

물론 그 기분 나쁜 진심은 듣고 싶지도 않지만. 몇 개월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날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정우철과 한 묶음으로 묶여서 애들 입소문에 오르내리는 처지가 되었고 정우철이 이렇게 수업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가릴 거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이들은 나를 향해 입방아 찧느라 바빴다.

“정우철, 너 쟤가 좋냐?”

반 애들 중 하나가 낄낄 웃으며 나를 가리키며 물음을 던진다. 정우철은 대답이 없다.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 볼 뿐이다. 처음엔 아이들이 놀릴 때 마다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맞대응을 했지만 몇 개월째 반복되는 일상에 질려버린 나는 이정도의 대화는 이젠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정도 놀림으로 끝나지 않을 모양인지 아까 그 애가 정우철에게 이것저것 시키고 있었다. 박수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껴안으라면서 자꾸 정우철을 부추겼다. 처음엔 무시하던 정우철도, ‘그렇게 해야 박수진도 널 좋아해준다’는 말을 듣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우철이 내게 조금씩 다가왔다. 정우철이 무슨 행동을 할지 뻔히 아는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반 애들이 재밌는 일이 생겼다며 단체로 교실 문을 닫고 나를 붙잡아 정우철에게 안기게 만들었다. 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믿었었는데…. 그러나 친구들에게 느낀 배신감도 잠깐이었다. 얼결에 안겨버린 나에게 정우철이 뽀뽀했다. 반 아이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몰려드는 당혹감과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어서 정우철의 뺨을 연달아 때렸다.

“야! 네가 뭔데 자꾸 나한테 들러붙어? 어? 네가 정신 나간 미친놈이건 변태건 양심은 있을 거 아냐? 네가 이따위로 뻔뻔하게 행동해도 되는 거야? 그 더러운 눈으로 나 쳐다보지도 말고,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마. 그리고 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마. 그냥 어디 가서 콱 죽어버려. 안 그러면 내가 너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씩씩대며 숨도 쉬지 않은 채 내뱉은 말과, 말을 하는 내내 정우철을 때린 내 손으로 인해 정우철의 눈과 뺨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속사포 처럼 내뱉은 내 말을 용케 알아들은 것인지 정우철의 끔벅거리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러더니 수업이 반이나 남았는데 정우철은 교실을 뛰쳐나갔다.

정우철이 교실을 뛰쳐나간 뒤 교실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내가 화낸 것에 대한 품평이 아니라 정우철이 나에게 뽀뽀를 한 것이 큰 화젯거리가 되어 교실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덕분에 뒤이어 수업을 하러 들어오신 선생님은 교실을 정리하느라 무진 애를 쓰셔야만 했다. 학교가 끝날 때까지도 정우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우철과 나의 뽀뽀에 관한 소문만은 무성하게 퍼져서 내 귀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과장된 얘기가 덧붙여져서.

종례를 하러 들어오신 선생님은 정우철의 빈자리를 확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말씀 없이 손을 휘휘 저어 집에 가라는 신호를 하시곤 교실을 나가셨다. 반애들이 우르르 교실 밖을 빠져나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 교복셔츠 소매 끝으로 입술이 피가 나도록 문질렀다. 그러다 왈칵 눈물이 났다. 내 인생에 왜 정우철 같은 게 끼어들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렇게 욕을 먹고,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거냐며 내 자신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진심으로 정우철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이른 저녁부터 잠에 빠졌다. 나는 꿈에서 정우철을 봤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정우철은 걷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선 앞에 멈춰 선다. 꿈속에서 정우철은 눈물 맺힌 빨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의 슬픈 눈길이 가시가 되어 내게 박혔다.

‘너 때문이야.’

정우철은 입을 벌려 말했다. 그리고 선 너머로 비추기 시작한 새하얀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정우철이 뛰어든 빛이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더니 핏빛이 되어 시야마저 붉게 물들였다.

따르릉하고 울리는 요란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꿈인가 싶을 정도로 선명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왠지 피 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우철에 관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 기분 나빠서, 학교에 가면 정우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교복을 꿰입었다.

항상 마지막으로 교실에 들어서는 편이라 늘 일찍 와있는 정우철에게 어제의 일을 한참 더 퍼부을 생각으로 세차게 교실 문을 열었다. 교실이 어째서인지 조용하고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꽃 향이 훅 끼쳐왔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교실을 휘 둘러보았더니 정우철의 자리에 흰 국화꽃이 여러 송이 놓여 있었다.

“야, 정우철 자리에 웬 국화꽃이야?”

정우철의 옆자리에 앉은 애를 툭툭 치며 묻자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너 국화꽃의 의미 모르냐?”

“국화꽃의 의미는 아는데 저게 왜 정우철 자리에 있냐는 거지. 혹시 정우철 죽었냐?”

농담 섞인 어조로 되묻자 그 애의 표정이 굳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철 어제 교통사고로 즉사했대. 누가 뒤에서 떠민 건지, 아니면 뛰어든 건지는 자세히 모르겠는데 자살인거 같다더라. 근데 학교에서 쉬쉬하고 있대.”

분명 나는 정우철이 빛 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었다. 그 후 핏빛으로 물든. 그렇다면 정우철은 나에게 마지막 순간을 알려주고 간 것이란 말인가? 나 때문에 자신이 죽은 거라고, 나를 원망하려고? 갑자기 온몸이 으스스하게 떨렸다. 어디선가 정우철이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흰 국화꽃으로 두러진 액자를 안고 계셨다. 액자 속 사진의 주인공은 정우철이었다. 선생님이 교탁에 영정사진을 세워놓으셨다. 교실이 술렁였다.

“혹시 너희가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속담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속담을 바탕으로 각자 반성하길 바란다.”

선생님의 한마디에 교실이 조용해졌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조회시간이 흘렀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박수진. 따라올 것.’ 선생님은 교실을 나가시면서 나를 복도로 부르셨다. 선생님을 따라 교실을 나서려는데 정우철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단숨에 퍼졌는지 다른반 아이들이 몰려들어 정우철의 책상에 놓인 국화꽃을 확인하고서야 뒤돌아섰다. 그제서야 나는 정우철이 죽은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뒤에서 나를 끈질기게 쳐다보는 시선도 없었고, 쉬는 시간에 정우철을 괴롭히던 소리로 가득 찼던 우리 반은 고요하기만 했다. 다른 반애들이 한마디씩 내 뱉는 ‘정우철 진짜 죽었네.’하는 소리에 그때마다 내 심장은 쿵하고 떨어졌다.

다른 반 아이들을 밀치며 교실을 나서다가 정우철의 사진을 보았다. 영정사진 속에서 정우철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정우철은 학교에서 놀림 받는 개구리 백작이 아니었다. 18살의 푸름을 자랑하는 나와 같은 나이의 학생일 뿐이었다. 그리고 사진속의 정우철은 평소와는 달리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쭈뼛대며 음침하게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생각했다. 정우철은 죽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어버리라는 내 말을 듣고 바보같이 죽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내게 거부당했다는 것이 큰 상처를 남아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 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건 나는 정우철에게 있어 살인자나 다름없고, 나는 그 죄에 대한 무게를 평생 안고가야 한다는 거였다. 그 무게를 확인할 때 마다 오늘 보았던 사진 속 정우철의 미소는 나를 더 괴롭게 하리라는 것도.

쇼치필리
쇼치필리

추천 콘텐츠

나는 여기 없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나는 여기 없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이 아름답다는 말은 누군가 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은 아름답지 않다. 심지어 가본 적 있는 길도 결코 아름답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눈을 감고 길을 걸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눈꺼풀 속에 덮인 길은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길을 나서는 사람에게 덤벼든다. 쭉 뻗은 곧은 길이 순식간에 미로로 변해버리는 순간은 눈을 감기만 한다면 언제든 찾아온다. 그 길에서 자빠지는 건 한순간이다. 잘 다져놓은 거짓말 위에서 몇 번 구르고 나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은 아름답지 않다고. 그런 내게 부모님은 아름답지 않은 길이었다. 엄마의 영양분을 열 달 가까이 갉아먹던 나는 수박 덩굴을 톡 끊어 버리듯 탯줄을 잘라내었는데도 전혀 보채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었다. 참을성을 배우지 않고 세상으로 끌려나온 아기가 울지 않는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했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강낭콩만 한 내 심장을 뛰게 했던 엄마의 체온도, 참외처럼 툭 불거져 나온 배꼽을 통해 들어오던 온갖 것들이 아득하게 멀어지던 순간이. 그때, 배가 고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아이 특유의 칭얼거림이나 짜증을 부리고 싶진 않았다. 유리문이었는지 거울이었는지 아니면 날이 선 메스였는지는 모르겠다. 매끈한 표면 위에 비쳤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새파랗게 몽고반점이 퍼진 내 엉덩이에는 채 닦이지 않은 핏물이 엉켜 있었다. 빨갛고 파랗게 얼룩져 있던 동그란 엉덩이가 꼭 수박 같았다고 엄마는 지금도 말한다. 퍼즐처럼 조각조각 짜 맞춰진 내 인생 첫날의 기억엔 아빠의 모습이 없다. 내가 이상한 아기로 기억되는 탄생은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그 순간 내가 태어났다는 걸 몰랐을 게 뻔하다. 이제 막 코로 숨 쉬는 법을 배우는 아기에게 격려 한마디 건네주는 아빠가 없는 탄생이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내 탄생에 대해 엄마가 신기한 듯 회상할 때면 그러니까 아기였던 나는, 내가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거라고 투덜대곤 한다. 그때마다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콧잔등을 때렸지만. 사춘기를 겪으면서 우리 집이 평범에서 벗어난 가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아주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침실을 함께 쓴 적이 없는 부모님의 사정을 열네 살이 되어서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 집의 밤은 고요했으며 내게는 다른 형제가 없다. 집안 어른들의 재촉을 못 이겨 치러진 두 분의 결혼식. 그 첫날밤의 실수로 내가 빚어졌다는 것은, 두 분 모두에게 난감한 일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밤마다 낯선 사랑의 향기를 묻혀주던 밤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엄마나 아빠가 특별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너무 많아서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다던 아빠는 내가 태어나던 순간에

  • 쇼치필리
  • 2012-12-02
노, 숙자

노, 숙자   1.   숙자가 집을 나갔다. 벌써 며칠째 옆집은 소란스러웠다. 아줌마가 워낙 큰 소리로 우는 탓에 깜짝 놀란 아빠는 자전거 바퀴를 땜빵 하다가 더 큰 구멍을 내버렸다. 동네 사람들은 자전거보다는 숙자의 가출에 관심이 많아서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아빠는 집을 쪼개어 터를 낸 작은 가게 바닥에 망가진 자전거를 눕혀놓고 바퀴를 돌리며 말했다. 글쎄, 제아무리 성하지 않아도 이렇게 굴러가는 게 인생이지. 아직까지도 옆집에서 우리 집 앞을 지나는 골목에는 일주일 전 숙자가 흘린 피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숙자는 몸이 컸다. 그런데 몸만 컸다는 게 문제였다. 나보다 세 살이 더 많았지만, 유치원을 갓 다니기 시작했던 나와 생각하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숙자와 노는 나를 보고 자전거를 고치러 온 사람들은 아빠에게 저마다 걱정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아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일을 하다 이따금 뒤를 돌아볼 뿐이었다. 나는 여러 갈래로 뻗친 숙자의 머리칼을 빗겨주며 이따금 허공에 대고 화를 내는 숙자를 얼러주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없던 나와 놀아주는 건 숙자 뿐이었으므로 나보다 세 살 많지만 훨씬 어린 숙자의 머리를 빗겨주는 데 열중했다. 내게 봉긋한 가슴이 솟아올라 부끄러움을 알게 되기까지 그렇게 했다. 하루는 옆집 아줌마가 큰 수박 통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앞으로도 숙자 잘 부탁한다. 아줌마의 부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나 씨 몇 개를 남기고 뱃속으로 들어갔다. 부끄러움을 배운 대신 숙자를 까먹게 되었다. 고작 담장 하나를 두고 함께 시간이 흘렀지만 성장한 건 나뿐이었다. 일주일 전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숙자를 몰랐던 나는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 웅크린 숙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주황색 불빛이 깜박이는 가로등 옆에 쪼그려 앉아 서럽게 울어대는 여자가 누군가 하고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곧, 옆집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자세히 들여다본 숙자는 엉망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산발한 머리는 길이가 제멋대로 잘려있었고 목에는 검붉게 끈에 졸린 자국도 있었다. 뜯어진 블라우스 사이로는 울긋불긋하게 멍이 든 가슴팍이 눈에 띄었다. 밝은색 청바지는 팬티를 축축이 적시고도 흘러나온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청바지 지퍼는 채 올라가지 않은 상태였다. 끊임없이 울어대는 숙자를 품에 안고 쭈그려 앉은 나도 펑펑 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바닥에 주저앉은 숙자는 콘크리트 바닥 색보다 진한 흔적을 남겼다. 숙자를 집에 바래다주고 난 다음 날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옆집 부부는 그렇잖아도 불쌍한 애를 건드린 개새끼들이 누구냐며 이를 갈았다. 숙자는 입을 꾹 다물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범인을 찾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피해자가 증언 하지 못하니 별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되던 날, 숙자가 사라졌다.     2.   계절이 변했다. 그랬던 것처럼 옆집에 관한 기억은 점점 지워지는 중이었다. 아빠는 여전히 자전

  • 쇼치필리
  • 2012-11-24
밀실 실험

        밀실 실험             남자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온통 하얀색 뿐이다. 남자는 흰 긴 소매 옷을 입고 있다.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얀색 투성이인 곳에서 남자는 추위를 느낀다. 바람이 분다거나 냉기가 몰아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 있을 뿐이다. 맨발인 발끝에 닿는 느낌은 나쁘지 않다. 바닥이라고 해야 할지, 땅이라고 해야 할지 남자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어쨌거나 바닥인지 땅인지 모를 뭔가의 촉감은 ‘부드럽다.’와 ‘매끄럽다.’의 중간이다. 남자는 촉감 좋은 그곳에 발을 몇 번 쓱쓱 문지른다. 남자는 바닥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에 누워 뺨을 비빈다. 누워서 뺨을 비비다 남자는 잠이 든다.       남자가 눈을 뜬다. 눈을 뜨자 어제보다 흰색 하늘은 더욱 눈이 부신다. 눈을 깜박이며 눈부심에 적응한다. 남자는 가만히 누워 있다 문득 갈증을 느낀다. 남자가 몸을 일으킨다. 오랜만에 움직이는 탓인지 몸이 무겁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본다. 무의식중에 물을 찾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남자와 하얀색 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자마저도 없다. 남자는 다리를 벌려 한걸음 내딛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걸음을 남자는 같은 보폭으로 걷는다. 그러다 남자가 멈춰 선다. 남자는 발 앞에 놓인 투명한 유리잔을 본다. 허리를 숙여 유리잔을 집는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 잔 안에서 투명한 액체가 찰랑댄다. 남자는 잔을 입에 가져간다. 꿀꺽. 한번 마른침을 삼키곤, 잔을 기울인다. 남자의 목젖이 서너 번 정도 크게 움직인다. 흔들어도 더는 찰랑대지 않는 잔을 보며 남자는 바닥에 엎드린다. 바닥에 내려놓은 잔 안에 찰랑대는 투명한 액체 대신 하얀색 바닥이 담긴다. 남자는 흰 바닥도 마실 수 있을까 해서 몇 번 잔을 들이켜 보지만 목구멍을 타고 드는 것은 그저 남자의 침뿐이다. 남자는 아쉬운 듯 몇 번이고 잔을 매만지다 엎드린 채로 잠이 든다.       남자가 눈을 뜬다. 이제는 익숙해진 눈부심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다. 꼬르륵. 남자는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꼬르륵. 남자는 다시 한번 그 소리를 듣고서야 소리의 진원지가 자신의 배임을 안다. 남자는 옷을 들추더니 홀쭉한 배를 만진다. 남자는 그것이 배가 고픈것임을 알았다. 한 손에는 유리잔을 들고, 남자는 어제처럼 걷기 시작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쯤 가다가 남자는 같은 보폭을 유지하던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쪽으로 남자는 달리고 있다. 남자의 다리가 풀려서 더 이상은 달릴 수 없게 되었을 때 남자는 발 앞에 놓인 식빵을 본다. 고소한 냄새가 난다. 남자의 입안에는 침이 잔뜩 고인다. 남자는 쪼그리고 앉아 식빵을 잡는다. 폭신폭신하고 조금은 따뜻한

  • 쇼치필리
  • 2011-04-13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