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 작성자 truant
- 작성일 201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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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참 더웠다. 봄이 간 건지도 모를 사이에 여름이 왔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아스팔트 길 위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커먼 아스팔트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열기에 오만상을 다 하고 학원에 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그다지 내가 기분이 나빠질만한 요소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기운이 쭉쭉 빠지는 것은 아마도 어제 내가 알게 된 노래의 가사와 우연찮은 기회에 펼쳐보게 된 어느 3학년 선배의 공책 때문일 것이다.
어제의 마지막 교시는 정보와 컴퓨터였다. 수행평가를 보는 날이었는데 컴퓨터실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시작 시간이 늦춰지는 바람에 우리 반은 그냥 자유 시간을 가졌다. 한참 웹서핑을 즐기는데 옆 자리에 앉은 친구가 아주 심오한 표정을 지으며 제 앞의 모니터를 바라보기에 무슨 특종 기사라도 떴나 싶어 내 시선도 주저 없이 그 쪽으로 옮겨갔다.
“뭐냐 그게.”
녀석이 보고 있던 것은 모 발라드 가수의 노래 가사였다.
“이거 가사 엄청 특이하다. 남자는 왜 키스할 때 눈을 감느냐는 게 주제야.”
“무슨 그런 노래가 다 있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다시 내 모니터로 눈을 돌리려는데 문득,
“근데 여자도 눈 감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나도 눈 감는데?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 봐도 다들 눈 감잖아. 무슨 남자만 감아.”
내 물음에 친구가 생각해보니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암, 여자도 눈을 감는 게 당연하고말고. 저 가수는 무슨 자긴 눈 안 감는 것처럼 노래를 하네. 진짜 안 감나? 안 감으면 어색할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서 과거의 남자친구가 내게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뽀뽀든 키스든 처음의 설렘은 이제 지난 지 오래라 스킨십에 별 거리낌도 없을 때였다. 평소처럼 입술을 맞대는 오빠에게 나도 평소처럼 입술을 열어 줬는데,
“와, 너 이젠 눈도 안 감냐!”
라고 툴툴거렸다. 솔직히 나는 그 때 할 말이 없어서 느물느물 넘어가긴 했는데 그 때 그 일을 생각해보면 키스할 땐 눈을 감는 게 맞다. 눈 안 감는다고 한소리 하던 오빠의 말투가 아직도 생생하다. 딱히 진심이 담긴 투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얘길 해주니까 친구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심오해졌다. 뭐야, 왜 그래.
“네 말 대로면 그 오빠는 키스할 때 네가 눈 감나 안 감나 매일 보고 있었던 거네?”
“어?”
“그러니까 네가 눈 안 감는다고 말을 하지. 여태 같이 눈 감고 키스했으면 그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랬었던 건가. 정말 그랬던 걸까. 오빠랑은 헤어진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는데 나는 아주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그리고 아주 창피해졌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울적했다. 아아, 오빠는 내가 두 눈을 감고 움찔거리며 키스하는 광경을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재미있다는 눈? 흥미롭다는 눈? 차라리 귀엽다는 눈으로 봐 줬으면 좋을 텐데. 난 정말로 우울해졌다.
“나 다시는 키스할 때 눈 안 감을래.”
내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렇게 말하니까 친구가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차라리 키스할 때 너보다 먼저 눈을 질끈 감는 순수남을 만나지 그래.”
친구의 말에 나는 진짜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오빠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 정말이지 너무나도 슬펐다. 오빠의 기억 속에 내가 그렇게 완전 초짜, 뭐 이런 식으로 남아있으면 난 울어버리고 말 거야.
“악!”
학원에 가는 길에 나는 어제의 일이 그대로 떠올라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싫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키스에 대한 깨달음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심신이 피폐해지고 있다. 속이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아주.
키스 사건과 동시에 아스팔트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마냥 내 머리의 한 구석에서 새롭게 피어오르는 것은 오늘 아침 ca시간에 발견한 노트였다.
나는 한국단편소설읽기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ca부서에 속해 있었다. 우리 ca는 3학년 14반 교실에서 했는데, 남자 이과 반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시험이 코앞이니 알아서들 공부하라며 교실을 나가셨지만 옹기종기 모여 앉은 나와 내 친구들은 오늘 읽을 소설을 프린트해온 것 말곤 가진 게 없었다.
“자습 시간을 줄 거면 미리 말을 하던가. 공부할 거 하나도 안 가져왔는데.”
“내 말이.”
우리는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옆에서 나오는 에어컨 바람에 팔다리가 꽁꽁 얼어붙을 지경이라 라디에이터의 구멍을 막기 위한 도구를 열심히 찾았다. 필통과 프린트 몇 장만 달랑 들어있는 내 가방 안에는 도저히 쓸 만한 게 없어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내가 앉은 자리의 책상 서랍을 뒤졌다. 역시 부교재 하나와 무제공책 몇 권 빼고는 나오는 게 없어 실망하려는 찰나에,
“어?”
반투명한 스프링노트의 겉표지에 비치는 안의 내용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6월 10일은 제 생일이에요. 축하해주세요.
분명 남자 반인데 공책 안의 필체가 동글동글 귀여워서 나는 심심했던 차에 잘 됐다 싶어 그 공책을 꺼냈다. 제일 첫 페이지에 쓰인 제 생일이라는 문구 아래에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하고 코멘트를 달며 키득거리는데 뒷자리에 앉은 친구가 그게 뭐냐고 묻는다.
“이 책상 안에 있던 건데, 글씨체 봐. 별로 안 남자 같지?”
나와 내 친구는 별 생각 없이 공책을 한 장 더 넘겼다. 아마도 공책의 주인이 제 친구와 공책을 주고받으며 쪽지를 쓴 듯 서로 다른 필체가 나란히 대화형식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재밌겠다! 뭐든 읽는 걸 좋아하는 나는 눈을 반짝이며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X한테 100원 갚을 거야. 어떻게 줄까? 급식 먹을 때 주려는데. 이름을 부르고 줄까? 그냥 야! 하고 줄까? 이건 좀 아닌데. 아! 그냥 줘야겠다.
푸훕,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X는 아무래도 제가 관심이 있는 여자 후배의 이름인 듯싶었다. 남자들은 단순하다고 들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구나. 나는 그 공책의 주인이 참 귀엽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후배에게 말을 걸 거리가 없어 100원을 빌리다니. 게다가 그걸 돌려주는 방법조차 고민이 되어서 이렇게나 갈등하고 있다. 나와 내 친구는 쉬지 않고 키득거렸다. 고3. 우리보다는 한 살이 많은 나이다. 완전 오빠인데, 이런 속내가 있었단 말이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어제의 키스 사건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나랑 사귀었던 그 오빠도 나한테 행하는 한 가지 행동에 이렇게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이렇게나 많이 시간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나에게 주스를 사줬던 날, 친하지도 않은 나에게 먹고 싶다는 젤리를 사 줬던 날. 소소한 과거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나는 그 공책을 계속해서 넘기기 시작했다.
근데 솔직히 진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어. 그냥 잘 해보고 싶은 정도? 2학년 중에 맘에 드는 애 한 명밖에 없어. Y는 너 가져. 난 관심 없음.
“헐?”
가면 갈수록 가관이다. 한 사람의 입에서 이렇게나 많은 여자애들 이름이 나와도 된 단 말인가. 게 중에는 우리 반 아이들의 이름도 많았다.
야 정말 걔 기럭지 장난 아니더라~ 네가 꼬시라니까. 넌 그냥 하는 행동 자체가 꼬시는 거야. 근데 걘 너무 비싸게 굴어서 밥 한번 같이 먹기도 힘들어. 그래서 난 X가 좋음. 난 X>>>>Y야! 그렇게 좋으면 핥아. 아직 지지고 볶고 삶고 튀기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벌써 핥냐. 원래 만나고 스킨십하고 커플 되고 부부 되는 거야. 전등 off. 하악하악. 붕가붕가.
“충격과 공포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공책을 덮어 책상 서랍 안에 원상태로 집어넣었다. 처음엔 그저 귀여운 사랑에 빠진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빠도 나랑 사귀는 동안에, 이렇게 저질스러운 말을 친구들과 뱉으며 킬킬거렸을까. 상상하기도 싫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고 스스로 되뇌어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 이유는 공책 맨 뒤페이지에 떡하니 쓰인 이름 때문이었다. 오빠랑 아는 사이였다. 이 이름, 기억난다. 오빠도 이과였고, 지금 내가 있는 곳도 이과 반이고, 오빠가 지금 이 반일지도 모르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또 미친 듯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울적해졌다.
“아, 정말 싫다.”
“나도. 정말이지 싫다.”
남자는 다 이런가보다. 친구와 나는 한동안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더욱이 심했다. 어제와 오늘, 두 가지의 깨달음이 동시에 나를 덮쳐왔다. 완전 직격탄이다. 나의 과거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남자를 안 만나야 하나.”
여전히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연애를 안 한지 참 오래 되었다. 소개받고 있는 남자애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남자는 정말이지, 다 짐승 같다. 나는 늘 진심으로 오빠 앞에 서있었는데 오빤 그렇지 않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나는 지금 학원에 가는 중이다. 학원에 가는 것이 지금 나의 목표다. 햇볕은 아직도 뜨겁다. 썬크림을 바르고 나올 걸 그랬다. 그렇게 평소대로라면 10분도 안 걸려 도착했을 학원에 나는 20분도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하여튼 이해가 안 가요.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런 거냐?”
“너무 열 내지 마. 나 예전에는 누가 누구 따먹었다고 자랑하는 것도 들었어.”
“그런 게 어째서 자랑할 거리냐고! 나 진짜 소름 돋아. 과거가 너무 끔찍해.”
“남자가 원래 어려. 철이 덜 들어서 그래. 그래서 그런지 난 우리 또래 남자는 남자로 안 보이더라.”
학원 친구에게 못 다한 얘기를 한꺼번에 털어놓았더니 한다는 얘기가 저거다. 원래 그렇다니. 너랑 사귀었던 오빤 안 그랬을 거야, 하고 위로는 못 해줄망정.
“나 진짜 남자 다신 못 사귈 것 같아.”
“좋은 생각이야. 공부 해야지.”
“야!”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릴 질러.”
어떻게 눈치가 그렇게도 없니. 위로를 바라는 내 표정이 안 보이니? 내 말투가 그렇게 들리지 않아?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친구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 나는 풀리지도 않는 수학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잊어버리자.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나을 거야. 어쩌다가 어제오늘 연속으로 이런 일을 만나서, 이젠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 오빠와의 기억을 모조리 다 쓰레기로 만드는지. 끝까지 좋은 추억으로 남길 바랐는데.
“야 근데 나도 솔직히 좀 궁금하다. 그 공책 나도 보고 싶어.”
“뭘 또 봐. 됐어.”
이젠 다 끝이다. 남자는 다 쓰레기다. 너무 많이 진심을 주면 안 됐다. 솔직히 오빠랑 헤어지고 나서 별로 미련도 안 남았고 후회도 전혀 없었지만, 서로에게 좋은 만남이었다고 생각되었으면 했었다. 심심풀이가아니라, 진심으로. 근데 이건 뭐 완전 나만 이용된 것 같고. 오빠는 단지 외로웠고 여자가 필요했을 거다. 난 그런 오빠에게 걸려든 물고기. 원래 나는 물고기를 참 좋아하고, 집에 어항도 두 개나 있지만 오늘은 물고기가 참 싫다.
수업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하면서 세 시간을 보냈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은 해가 질 무렵이라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집으로 가는 길은 학원으로 올 때만큼 뜨겁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힘이 하나도 없이 터덜터덜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저녁 생각도 없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 목소리도 무시하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끔찍하다. 모든 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들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해봤다.
“영어 학원 알아놨다니까!”
아까부터 거실에서 뭐라고 얘기하던 게 영어 학원 인가보다. 내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엄마가 조금은 화가 난 투로 내게 소리쳤다.
“어딘데요?”
“저 앞에 영화관 뒤 상가 4층. 오늘 가서 테스트 봐야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닐 수 있다니까, 지금 가서 보고 와. 오래 안 걸린데.”
“나 방금 수학 끝나고 왔는데요?”
“뭐 어쩌겠니. 학원이 그렇게밖에 시간이 안 된다는 걸.”
짜증난다. 짜증나는 일투성이다. 아주 울적한 기분으로 나는 또 한 번 집을 나섰다. 오늘만 아스팔트길을 몇 번 지나다니는지 모르겠다. 영화관 뒤 상가 4층이라. 다행히도 나는 단번에 학원을 찾아냈다.
“저 시험 보러 왔는데요.”
“아, 잠깐만. 3강의실 들어가 있어. 시험지 가져다줄게.”
귀염상의 조교선생님이 나를 3강의실로 안내했다. 가방 안에는 여전히 수학 문제집과 프린트물이 들어있다. 그 사이에서 필통을 꺼내들고 샤프 하나와 지우개를 골라 책상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시험 전에는 꼭 이렇게, 정리된 기분으로 시작한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복잡한 꼴을 보면 알던 문제도 틀리게 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아 쌤 한 번만 봐주세요. 저 다음부턴 진짜 열심히 외울게요. 쌤! 백점 받을게요!”
“내가 한두 번 속니? 얼른 3강의실 들어가. 테스트 보는 애 있으니까 조용히 기다려.”
“그깟 재시 하나가지고 왜 이러세요! 저 오늘 단어도 외워왔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강의실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알듯 하면서도 모르겠다. 남자치고는 별로 굵지 않은 목소리. 누구였더라. 아무래도 재시험을 봐야 하는데 보기 싫다고 떼를 쓰는 중인 것 같았다.
“단어장 내놓고 가. 컨닝하면 안 돼.”
“실망이에요 쌤. 어떻게 저를 그렇게 불신하실 수가.”
내가 아는 누군가가 여길 다니나 싶어서 강의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는데 아무래도 교무실 안에서 얘길 하는 듯 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강의실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온 사람은,
“어?”
오빠다. 산산조각난 내 과거의 주인공.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쳤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놀라서 뱉은 짧은 감탄사만이 전부였다. 참으로 어색한 시간이었다. 조교선생님이 들어와서 내게 모의 텝스 시험지를 주고, 오빠에게 단어 재시 시험지를 주기 전 까지는. 반년이라는 시간은 참 길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과거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나보다. 같은 공간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면.
“단어 시험지 내놔. 이번에도 재시면 어머님께 연락 드릴거야.”
몇 분 후에 조교선생님이 다시 강의실에 들어와 오빠의 시험지를 가져갔다. 오빠도 별 말 없이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갔다.
“미친 것 같아.”
아무렇지 않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는지, 지난 반년이라는 시간동안 난 도대체 뭘 한 건지. 오빠가 나가고 난 후의 텅 빈 책상만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말았다. 오빠에게 나란 존재는 단지 잠깐 동안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흥밋거리였을 뿐일 텐데, 나는 이렇게나 동요하고 있다. 자존심 상하게도.
“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시험을 본 거니? 점수가 완전 말이 아니던데.”
“어휴. 묻지도 마세요.”
“왜 그러는데?”
당연히 그날 시험은 말짱 꽝이었다. 전 남자친구를 앞에 두고ㅡ게다가 별로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닌ㅡ누가 시험을 잘 볼 수 있겠는가.
“엄마.”
“응?”
“나 다른 학원 알아봐주면 안돼요? 제발요.”
“얘가 왜이래? 너 영어 쉰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얼마나 더 미루려고 그래!”
기대도 안 했어요, 그래.
하. 한숨을 푹 내쉬면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정말 바보 같아 보였을 거야. 어? 라니. 안녕? 도 아니고. 나랑 사귀고 있을 당시에도 늘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솔직히 부정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그깟 노래가사와 낙서가 태반이었던 공책이 나를 이렇게나 슬프게 만들다니. 뒤늦은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악!”
학원에서 마주쳤던 오빠의 눈빛이 떠올라 나는 또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저번처럼 길바닥 위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다.
“너 요즘 왜이러니?”
이해가 안 간다는 엄마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중에도 없다. 그냥 싫다. 다 싫다. 나는 한 순간도 오빠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는데, 오빤 나와 달랐던 거다. 그래서 남자는 다 늑대라고 하던가. 세상에 정말 착한 남자는 없는 걸까. 만약에 내가 원하는 만큼만 순수한 남자가 나타난다면, 난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해 줘야지. 정말로.
“그래서 그 오빠랑 마주쳤다고? 운도 아주 지지리 궁상맞게 없다.”
끔찍한 주말ㅡ이게 다 연속해서 있었던 그 슬프고도 괴로운 일들 때문이다.ㅡ이 지나고 월요일. 학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니 친구가 혀를 끌끌 찬다. 나도 안다. 내가 운이 없다는 것 쯤. 드라마나 영화, 하다못해 초등학생이 쓴 인터넷 소설에도 남자들은 늘 여자 주인공만 바라보는 일편단심으로 나오는데. 어째서 현실은 그렇지 못한 걸까.
“그 오빤 아무 말도 안 해?”
“할 말이 뭐가 있겠어. 너도 그때 공책 봤잖아. 남자란 다 그런 존재들이야. 나는 정말 다시 만나면 반갑게 안녕, 하고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안 되더라. 그건 정말 허구 인가봐. 완전 픽션.”
아, 정말 기분이 안 좋다. 오래 전에 지나가버린 과거가, 현실에 이렇게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니.
“잊어버려.”
그게 말처럼 쉽다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니. 그 말을 끝으로 친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기야 할 말도 없을 거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고, 그 과정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친구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을 테지. 어쩌면 오빠도 친구 말처럼 벌써 잊어버렸을지 모르는 일에 나 혼자서만 이렇게 열을 올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쓰렸다.
“시험 성적은 어머님께 문자 보내드린 대로 생각보다 낮았거든. 그래도 여태까지 봐온 모의고사 성적이랑 내신 성적 들어보니까 좀 더 상위 반에 들어가도 되겠다고 생각해서 고3 반에 넣었어. 너무 걱정은 말고, 고2도 몇 명 있으니까.”
“네에.”
“8강의실로 가면 돼.”
조교선생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강의실을 찾아 나섰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띈 3강의실은 나를 학원 복도 가운데서 또 괴성을 지르게 만들 뻔 하였으나 나는 꾹 참았다. 더 이상의 난해한 행동은 나도 싫다.
“악!”
슬프게도, 나의 다짐은 얼마 안 가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8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내 눈 바로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오빠였기 때문이다. 그날과 똑같은 표정으로, 별 감흥 없다는 듯이 나를 스쳐지나간 오빠가 복도 끝으로 사라진 후에야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강의실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정말 미친 게 분명해.”
그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창피함의 극치였다. 강의실 안에 있던 다른 학생들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난 그저 불쌍한 희생양일 뿐 인데. 오빠가 다시 강의실로 들어오고 얼마 안 되어 선생님도 따라 들어오셨다. 첫 수업, 평소 같으면 분명 이것저것 따지며 이 선생님의 강의는 뭐가 좋고 뭐가 안 좋고를 비교할 때인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게 다 오빠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노래가사와 공책에 적힌 대화 때문일 거다. 쉬는 시간에도 나는 꼼짝 없이 자리에만 앉아있었다. 혹시나 또 눈이 마주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 어색함과 불편함을 더 이상 견뎌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 분이 일 년 같던 수업이 모두 끝나고, 원래도 행동이 굼뜬 편이었던 나는 강의실에 있던 모든 학생이 다 나갈 때쯤에서야 가방을 챙겼다. 오빠도 벌써 강의실을 뜬지 오래였다. 하지만 나는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서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머릿속이 참으로 복잡했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생각만큼 길지 않았나보다. 인상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지 오래, 나는 제 멋대로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부터 후텁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시각은 밤 9시 30분. 해가 떨어지고도 남았을 텐데 이렇게나 덥다니, 여름은 여름이다.
“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팔목을 붙잡았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한참 전에 간 줄 알았던 오빠가 아주 난해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참 어색했다. 너무 어색해서 손발이 오그라들고도 남을 물음이었다.
“오랜만이라고. 그냥.”
오빠의 대답은 참 건조했다. 사실 나는 아주 잠깐, 오빠가 다시 내게 고백을 해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기대는 늘 기대만으로 끝난다. 현실이 될 수는 없다.
“그러게.”
나는 여전히 어색하게 말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색한 목소리로. 하하하, 아주 인위적인 웃음소리를 내면서 나는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하늘이 어두운 건 좋지만 가로등이 환한 건 싫다. 오빠는 반년 전 그 때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게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집까지 데려다 줄게.”
여전히 건조한 말투와 함께 오빠는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외로운 걸까. 나랑 헤어진 지 참 오래 됐으니까, 오빠는 다시 나로서 외로움을 달래려고. 공책에 쓰여 있던 글귀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나마 잘 해보고 싶은 거지. 한번 꼬셔 보려고.
나는 결국 오빠에게 잡힌 손을 뒤틀어 놓아버리고 말았다. 오빠가 맹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장난. 반년 전이나 지금이나, 오빠는 한 번도 나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던 걸까. 진심을 담아 키스하던 나를 뜬 눈으로 지켜보고, 그저 한번 꼬셔보겠다는 심산으로 내게 고백을 하고.
“오빤 정말 미운 사람이야.”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솔직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여기서 그러는 건 너무 창피하고, 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힘이 없어서 뛸 수도 없었다. 집에서 대충 신고 나온 슬리퍼나 직직 끌면서 집까지 가는 게 최선이었다. 찔끔찔끔 배어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과거에 이어 현실까지 와장창 깨져버리는 느낌이다. 아주 옳지 못한 상황이다.
“야!”
오빠가 다시 한 번 나를 붙잡았다. 나는 아무 것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엉엉 울었다. 나를 장난감 취급 했다는 게 화가 나고 서러워서, 나는 정말 진심이었는데 오빠는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너무 억울해서.
“왜 우는데.”
오빠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가증스러웠다. 정말 미워서 당장에라도 한 대 쳐주고 싶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짓 하지 말라고!”
“누가 안 좋아하는데.”
“오빠가 나 안 좋아하잖아. 한 번도 안 좋아했으면서 사귀자고 하고! 사랑한다고 하고! 헤어지자고 하고! 오빠가 다 그랬잖아!”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을 수 없는 눈.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오빠는 하, 하고 기가 차다는 웃음소리를 냈다.
“멍청아.”
“뭐?”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전혀.”
오빠의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반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땐 겨울이었고, 지금은 여름이니. 날씨도 춥지 않다. 제 손이 차다는 이유로, 내 손까지 시릴까봐 꼭 장갑을 끼워주고 손을 잡던 오빠도 없다. 우리는 그냥 맨 손을 맞잡고 걸었다.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사귀기 전에도, 사귀는 동안에도, 헤어진 다음에도. 난 늘 너를 좋아했어.”
오빠는 가끔씩 훌쩍거리는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했다.
“확신이 안 섰을 뿐이야. 너도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아니라면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혼자만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잖아, 연애라는 게.”
“말도 안 돼.”
“어째서?”
“오빤 항상 무미건조했잖아. 말투도, 행동도. 흔한 애정표현 하나 없이.”
투정부리는 것 같은 말투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투가 나왔다. 사귀는 동안에는 한 번도 표현한 적 없는 사소한 불만. 오빠는 내 말에 그냥 피식 웃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지 안 좋아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무턱대고 해보기엔 내가 너무 소심하고.”
“거짓말.”
“진짜야.”
이젠 집이 코앞이다. 나는 걷는 속도를 서서히 늦추면서 고개를 아래로 내리깔았다. 시선의 끝에는 잡은 두 손이 있다. 헤어지기 전이나 똑같이 맞잡은 손이지만 무언가 다르다. 솔직해졌기 때문일까, 서로에게.
“이제는 알았네.”
“뭘?”
“네가 애정표현 많이 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 거. 평생 모를 뻔 했잖아. 이렇게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
“오빠야말로 먼저 해봤으면 됐잖아. 바보 아냐?”
“뭐래. 멍청이가.”
바보와 멍청이라, 우리가 사귀던 그 때에 서로를 부르던 애칭이었는데. 밤은 밤인가 보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아스팔트는 낮과 똑같은데 그 열기는 사그라지고 없었다.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안 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오빠는 조용히 웃었다. 호탕하게 웃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집 앞까지 다다라서 오빠가 내 손을 놓았다.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방금까지 내 손과 맞닿아있던 그 손을 살랑살랑 흔든다. 안녕, 하고 인사를 한 후에 오빠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멀어져가는 오빠의 발걸음에 맞추어 나의 조각났던 과거가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간다.
“잘 가.”
미지근하게 식은 아스팔트 위, 오빠가 사라진 자리에는 평소와 같은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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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찍한 복도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울렸다. 수능이 끝난 이후로 고3이 학교에 나오지 않아 5층 복도는 늘 이렇게 어두침침하고, 한적하다. 현서는 이런 고요함이 좋았다. 항상 붙어 다니는 단짝 친구와 쉬는 시간마다 올라와 걷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저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눈 하나 없이, 마냥 조용하기만 한 복도는 현서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조용했던 복도가 시끄러워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중앙계단에서 튀어나온 진수를 시작으로 대여섯의 남학생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5층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현서는 걸음을 멈추고 친구의 손을 잡았다. 둘은 말없이 남학생들이 사지기를 기다렸고, 그들은 곧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수를 앞세워 중앙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김진수 쟤 이상하지 않아? 어쩔 땐 무지하게 활발한데 또 어쩔 땐 멍하니, 꼭 정신 빠진 사람처럼 누가 말 걸어도 대답도 없고. 방금도 봐. 저렇게 온 학교를 다 들쑤시고 다니다가도 점심시간만 딱 지나면 입을 딱 다물더라니까.” 현서도 친구의 말에 공감했다. 진수는 전교에 소문이 자자한 또라이였다. 자칭 타칭 또라이. 오죽하면 별명이 미친 진수를 줄여 미친수가 되었을까. “저거 약 한다는 소문도 있어. 취해가지고 정신이 나간대나. 하여튼 미친수 이름값을 해요.” 약. 현서는 그 한 단어를 천천히 곱씹으며 진수가 사라진 중앙계단을 바라보았다. 이미 남학생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중앙계단은 복도만큼이나 고요했다. 현서는 점심시간의 한가운데도 5층 복도만큼이나 좋아했다. 점심시간의 시작과 끝은 학교 건물에 학생들이 바글바글하지만 그 중간에는 죄다 식당 아니면 운동장으로 빠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가했다. 학교 건물 전체가 5층 복도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현서의 친구까지 식당으로 가고 나면 교실에는 현서 혼자만 남는다. 현서는 벌써 몇 년째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걸렀다. 조용한 교실과 복도를 이리저리 거니는 게 점심시간의 유일한 낙이었다. 현서는 오늘 오전의 일을 생각하며 중앙계단을 내려갔다. 파란 알약, 익숙한 약봉지. 현서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미지를 지우려 눈을 끔벅거렸다. 세 번째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현서는 뒷문이 반쯤 열려있는 교실을 발견했다. 발자국 소리를 줄이고 천천히 그 가까이로 다가가면 눈에 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김진수. 미친수다. 진수는 텅 빈 교실에 홀로 서서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능숙한 손길로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 진수는 가만히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약이다. 진수가 약을 삼키는 것까지 지켜본 현서는 교실 문을 활짝 열었다. 화들짝 놀란 진수가 한 손에 쥐고 있던 가방을 놓쳤다. 후드득, 약봉지들이 교실 바닥으로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가!” 진수가 소리를 질렀다. 나가! 나가! 나가!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는 진수를 바라보며 현서는 눈만 끔벅거렸다. 진수는 씩씩거리며 바닥에 흩어진 약봉지를 끌어 모았다. 두 손 가득 약봉지를 들고 쿵쾅거리며 창가까지 걸어간 진수가 아
- truant
- 2012-01-13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토스트기에서 식빵이 튀어 올랐다.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접시에 담은 K는 새벽에 끝마친 기획안을 훑으며 식탁에 앉았다. 아직 창밖에 캄캄한 탓에 식탁 위의 스탠드는 여전히 켜진 상태였다. 입에 문 토스트를 씹을 겨를도 없이 서류에만 집중하던 K는 무언가 자꾸 토스트를 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K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길게 뻗은 종이의 끄트머리가 제 입에 물린 토스트를 자꾸만 밀어내고 있었다. 뻗어있는 종이를 따라 시선을 옮긴 K는 방금까지 읽고 있던 기획안의 끄트머리가 점점 길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을 커다랗게 뜬 K는 한 손에 쥐고 있던 머그컵과 함께 서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머그컵 안에 가득 차있던 물이 쏟아져 서류가 바닥에 찰싹 달라붙었다. K는 재빨리 손을 뻗어 서류를 건지려 했으나 물을 먹은 종이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 순식간에 부엌을 넘어 거실까지 뻗어나가는 서류를 멍하니 바라보던 K는 제 손목시계가 삑삑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한 손으로 뒷머리를 쓱쓱 빗어 내린 K는 가방만 잽싸게 챙겨 현관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지하철은 한산했다. K는 여기저기 빈자리가 많은 지하철 좌석을 바라보다가 문과 제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대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어두운 터널의 벽면은 똑같은 문양만을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한없이 창문만을 바라보던 K의 허벅지가 점점 무거워졌다. 무심코 고개를 숙인 K는 빵빵해진 가방을 발견하고 입을 딱 벌렸다. 살짝 열린 가방의 틈새로 서류들이 꾸역꾸역 고개를 디밀었다. 가방의 가죽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뽀득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K는 거대해진 가방을 안고 달렸다. 최대한으로 늘어난 가방은 결국 엘리베이터 안에서 갈라지고 말았다. 찢어진 가방 위로 터져 나온 서류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점점 높게 쌓였다. 띵, 짧은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K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불도 켜지지 않은 사무실은 땀을 뻘뻘 흘리는 K의 모습과 달리 고요하고 평온했다. K는 어두운 사무실을 가로질러 제 자리를 찾았다. 높게 칸막이가 쳐진 책상 위의 서류뭉치들이 길게 자라 칸막이를 넘어 옆 자리까지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VIP룸의 서랍을 뒤져 가위를 찾아낸 K가 서류의 끄트머리를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서류는 쉽게 잘렸고, 잘려나간 조각들은 나풀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K는 가만히 서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지켜보았다. 스산한 소리와 함께 종이는 또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K의 손에 들린 서류와 바닥에 떨어진 종이는 손을 쓸 새도 없이 불어났다. 거대한 서류뭉치들은 순식간에 K를 에워싸며 더 높이 자라났다. 어두운 사무실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통유리로 된 한쪽 벽에서 해가 솟아오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K는 서류더미 사이에 뚫린 가느다란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서 햇빛이 반짝이다 곧 사라졌다.
- truant
- 2012-01-13
세탁소 입구에 달린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A는 그저께 맡겼던 정장 한 벌을 어깨 뒤에 걸치고 세탁소를 나섰다. 평소 같으면 자잘하게 생긴 주름이나 얼룩 정도는 알아서 지웠을 텐데, 회사일이 제일 고된 연말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이렇게 세탁소를 들락거려야 한다. 그래도 곧 새해니까. A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정장을 걸친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저씨 옷은 왜 다리가 하나에요? 아저씨 다리는 두 갠데, 하나에 둘 다 넣나?”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A는 제 어깨에 들린 정장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하는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다리가 하나라고? A는 검지에 걸린 정장 옷걸이를 제 눈앞으로 옮겼다. 단정하게 접힌 정장 바지가 꼭 외다리 같다. “사실 아저씨는 다리가 하나 뿐이야.” 순진한 꼬마는 A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A는 그런 꼬마를 뒤로한 채 허허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라면이 끓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던 A는 갑작스러운 도어락 소리에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저 말고는 이 집에 찾아올 사람도 없거니와, 누군가 방문한다 하더라도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A는 조심스럽게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약 강도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A는 속으로 별의 별 상상을 다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형. 나 가방 좀 받아주라.” A의 눈앞에서 어색하게 목발을 짚고 서있는 사람은 제 동생이었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미소를 지으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동생의 모습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마냥 힘겨워 보였다. 다 끓은 라면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후후 불던 A는 젓가락을 들다 말고 소파에 앉은 동생을 바라보았다. 별 시답지도 않은 프로그램을 틀어 놓고는 좋다고 웃는 모양이 참 어색하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동생이 어색한 게 아니라 A 자신이 어색한 거였다. 혼자 사는 집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A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웬일로 우리 집엘 다 왔냐는 A의 물음에 동생은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중얼중얼 말했다. 지잡대 다니면서 돈 버릴 바에야 자퇴하고 기술을 배우겠다느니, 학원을 다녀야겠다느니. 동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A는 얼굴을 찌푸리며 식탁을 쾅 쳤다. 라면 그릇에 꽂아둔 젓가락이 또 한 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내가 너 이러라고 월급 꼬박꼬박 넣어준 줄 알아?” A는 실없이 웃는 동생의 멱살을 잡아 올려 소리를 빽 질렀다. 동생은 A의 눈만 몇 번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당최 시끄럽기만 한 TV 프로그램과,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동생에게 질린 A는 제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얼마 못 가 다시 방에서 나온 A는 소파에 앉은 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쪽 다리에 두꺼운 기브스를 하고도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동생이 A는 참 신기했다. “다리는 어쩌다 그랬어.” 소파에 앉은 A가 조심스레 묻자 동생은 실실 웃으며
- truant
- 201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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