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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조각난 필름에 피를 바르고 있었다

  • 작성자 소이진
  • 작성일 2012-09-16
  • 조회수 337

정우는 갈색 빛이 나도록 구워진 옥수수 식빵에 딸기잼을 바르고 있었다. 제대로 으깨지지 않은 큼지막한 딸기 덩어리가 잼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정우는 잼 숟가락을 놀리다 말고 그것을 집어먹었다.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입이 찢어진 오렌지 인형처럼 실실 웃는다. 그러다가 장지갑처럼 반으로 접힌 식빵을 하나 건넨다. 커다란 맥주잔에 포도 주스를 따르던 나는 냉큼 받았다. 장지갑의 접힌 틈새로, 넓은 공간에 펴지느라 색이 연해진 붉은빛이 보인다. 나는 빵을 크게 베어 물었고, 뒤따라 정우도 빵을 깨물었다. 바삭한 겉과 달리 속은 부드럽고 쫄깃했다. “집에는 내려가 볼 거야?” 빵 조각을 우물거리면서 정우는 입을 열었다. 어느새 내 맥주잔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아니. 나 과외 있어.”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빵가루가 잔뜩 떨어져 있는 빈 그릇을 싱크대로 옮겼다. 무엇이 그리 신 나는지 연신 오드리 헵번처럼 입꼬리가 올라 있다.

 

아침을 빵으로 간소하게 대신하고 나서부터 독서에 돌입한 정우를 뒤로하고 집을 나선다. 6년 동안 아침을 거르다가 방 짝인 정우와 살게 되면서 조금씩이라도 먹기 시작했다. 정우는 인상이 투박하나 사글사글하다. 상당히 활기차고 유쾌한 친구라, 방을 살펴보기 위해 만났을 때, 쭈뼛대는 나의 손을 잡아끌어 점심을 한 끼 사주었다. 햄이 잔뜩 들어가 조미료의 맛이 입안에 계속 감도는 부대찌개였는데, 맵고 짰다. 정우는 연신 맛있다며 이 인분을 혼자서 다 먹었다. 최근에는 대학 적응이 힘에 부치는지 힘들고 우울한 기색을 내비치기는 해도 잠깐이다.

 

장마가 지나고 부쩍 더워진 날씨에 손부채질을 해가며 X 아파트에 도착했다. 403호의 벨을 누르자 막대사탕을 문 소년이 문을 연다. 반기는 듯 안 반기는 듯, 묘한 표정이다. 한 시간가량 과외 수업이 진행되었다. 어떻게든 수업을 하지 않으려는 소년의 잔꾀 때문에 계획했던 분량을 다 끝내지 못했다. 강하게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 밑에 앉아서 소년과 담소를 나누다가 소년의 어머니가 차려준 간식 상을 비우고서야 일어섰다. 집을 나서자 열기가 훅 닥쳐온다. 햇살이 노랗게 세상을 덮고 있다. 다른 동으로 발걸음을 뗀다.

 


 

*

 


 

그렇게 세 명의 학생들과 티격태격하고 났더니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었다. 교수님과 점심을 하기로 약속한 터라 서둘러 학교에 갔다. 만난 교수님과는 학교 근처 죽 가게로 향했다. 허한 속을 달래주어야 한다면서 소고기 죽을 시키셨다. 날이 더워 땀이 계속 새어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죽 가게의 에어컨이 고장 나서 더위를 품에 안고 밥을 먹어야 했다. 뜨거운 죽을 한 숟갈 퍼서 촛불 끄듯 후후 불어 식혀 먹고. 흐르는 땀에 상의는 젖는다. 죽이 굉장히 맛있었기에 먹는 동안 정우 몫을 하나 주문해두었다. 아마 그는 점심도 잊고 책에 빠져 있을 것이다.

 

예상외로 정우는 손바로 책을 놓아둔 채 퍼더버리고 누워 자고 있었다. 선풍기 날개가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처럼 느릿느릿 회전하고 있다. 안쓰럽게 탈탈거리는 소리에, 나는 먼지가 잔뜩 쌓인 에어컨을 깨웠다. 에어컨은 오랜만의 기상에 여러 개의 입을 한꺼번에 벌리며 숨을 토해냈다. 그 기쁜 숨의 냉기에 좁은 거실은 급속히 시원해졌다. 찬 기척을 느끼고 정우가 부스스 일어난다. 나의 손에 들린 죽을 보더니 입을 벌리고 웃는다. “나 또 나가야 해.” 약간 식은 죽을 정우는 빠르게 떠먹는다.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는지 고개 한 번 안 든다. “늦게 와?” “늦는다면 늦고.” “치킨 사와!” 평소에도 식탐 많고, 많이 먹었는데 요새 더 많이 먹는다. “응.”

 


 

*

 


 

정우의 소원대로 닭튀김을 손에 들었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친구들을 데려다 주느라 조금 늦었다. 술을 마시지 않아 뒤처리는 언제나 내 몫이다. 손에서 느끼한 기름 냄새가 풍겨온다. 문을 열었는데 정우가 보이지 않는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더워서 그런 건가 정우의 샤워 횟수가 늘었다. 거의 집에만 있으면서도 하루 네댓 번씩 하곤 한다. TV 앞에 작은 상을 펴서 닭튀김 상자를 열었다. 노랗게 튀겨진 겉옷이 버터를 바른 듯 윤이 흐른다. 정우가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눈이 마주쳤고, 정우는 화들짝 놀랐다. 정우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으로 걸어갔다. 수건으로 자신의 몸을 가린 채다. “왔어?” 방문을 열고 몸이 반쯤 들어갔을 때 정우가 입을 열었다. “닭튀김 사왔어. 얼른 먹어.” 정우는 방문을 닫는다. 나는 벽에 기대고 앉아 TV를 틀었다. 마침 하계 올림픽 경기가 한창이었다. 역도 경기였는데, 우리나라 선수도 한 명 출전했다. 여자 선수가 무거운 바벨을 들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새삼스러웠다. 반년 가까이 함께 지냈는데 정우의 완전한 나신을 보는 것이 처음이다. 기분 탓이겠지. 정우가 어느새 잠옷을 입고 나온다. 닭튀김을 보더니 달려든다. 살이 두껍게 붙은 닭 다리를 든다. “장미 선수 나오는 경기야?” “아마.” 우리는 똑같은 자세로 앉아서 올림픽 경기를 보았다.

 

전등불을 끄고 거실에 누웠다. 닭튀김은 뼈만 남아 있었고, 우리는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배우의 익살스러운 행동에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며 킥킥대고 웃었다. 남자 주인공이 사건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동성애자 연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주인공은 입술을 쑥 내밀고 다가오는 상대를 가까이에 두고 식은땀을 흘린다. 나는 그것이 너무 우스워 배를 잡고 웃었는데 정우를 보니 얼굴이 싸늘하다. “정우야, 왜. 아파?” 그제야 정우는 웃어 보인다. 그 후로 몇 번이고 이러한 장면이 계속되었는데 정우는 그때마다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까 닭을 너무 급하게 먹더니 체했나 보다. “아파 보인다. 들어가서 자” “아냐, 안 아파.” “체한 거 같은데? 방에 약 있어. 먹고 자.” 정우는 알겠다 하고 일어선다.

 


 

*

 


 

정우는 잼을 바른 식빵을 먹고 있었다. 나는 거실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고 있다. 악덕 사채업자와 도박을 하여 돈을 얻어 가는 만화였는데 굉장히 긴장감이 있어 침이 꼴깍 넘어갔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시계를 보니 시침이 11을 향해 있다. 친구 한 명이 마침 이 시간에 놀러 오겠다고 한 약속이 생각났다. 녀석은 친구 자취방에 놀러가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십 몇 년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친구 집에서 자본 적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흔쾌히 친구를 받아주었고. 정우와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기에 소개도 시켜주고 싶었다. “정우야. 오늘 내 친구, 집에 놀러 오기로 했어.” 정우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언제냐고 물어본다. “지금. 너랑 같은 학교 다니는 애야. 인사도 할 겸.” 그러자 정우의 눈이 동그래지면서 행동이 급해진다. 재빨리 식빵을 던져버리고,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설 채비를 한다. “갑자기 약속이 생각났지 뭐야. 저녁쯤에나 들어올 거야.” 말하는 정우의 목소리가 심각할 정도로 떨린다. “인사라도 하고 가지, 왜.” “아냐. 많이 어지르지 말고 놀아.” 정우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친구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집 앞이니까 문 열어둬.] 정우는 벌써 나갔다. 정우가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얼른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고. 거기에는 친구와 정우가 맞닥뜨린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정우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는 꽤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돌덩어리가 된 듯 멈춰 선 그들에게 슬리퍼를 끌며 다가갔다. 정우는 도망가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친구는 정우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 나의 등을 내리친다.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 “너 설마 쟤랑 룸메냐?” 친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과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답을 내뱉으라 재촉하는 듯했다. “응. 둘이 아는 사이야?” 친구는 내 한 마디에 놀라며 말을 짓이겼다. “쟤 게이야. 네 학교에도 소문났을 텐데 몰랐어?” “무슨 웃기는 소리야, 그건. 어서 들어와.” 나는 친구의 모습에 웃었다. 장난치는 것으로 생각했다. “들어가고 자시고 진짜 저 애 게이라니까. 우리 학교에 소문 쫙 났어. 왜 이때까지 나한테 이야기 안 했냐?”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진지한 모습에 나는 조금 흔들렸다. “진짜야?” “진짜라도. 그럼 너 게이랑 반년을 산 거냐? 어오. 왜 말 안 했냐?” “야, 잠깐. 너 집에 가라.” 나는 친구를 계단 쪽으로 밀었다. 친구의 말이 너무도 혼란스러웠기에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텅 빈 집에 발을 얹어 놓기 전에 나는 먼저 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식탁에 앉아 머리를 괴었다. 정우가 동성애자라. 나는 차분히 생각했다. 이미 속은 불붙어 있었다. 정우에게 화가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맥박이 빨라졌다. 그동안의 이상했던 정우의 모습들이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나신을 내게 보였을 때 당황하던 모습이나 동성애를 조롱하는 영상들을 보며 불쾌해하던 모습들, 어쩌면 내가 놓쳤을 수많은 행동들. 한참을 정적 속에 흐르는 장면들을 잡아채고 있노라니 정우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전화기도 꺼져 있었기에 나는 초조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가 지는 시각까지 앉아 있었다.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학교에 소문 쫙 났어.’ …. ‘학교에 소문 쫙 났어.’…. 찬물을 바가지 채로 부은 듯 속은 싸늘했다.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우는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을 터였다.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사실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절친하게 지내던 키가 작은 아이는 찬바람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게 좋아한다 고백했다. 바람이 칼과 같이 귀를 가르며 지나갔기에 잘 알아듣지 못한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키가 작은 아이는 다짜고짜 다음 달에 유학을 가노라 선언했다. 바람을 타고 그 목소리는 가슴에 꽂혔다.

 

 정신적으로 지쳐갈 즈음, 기다리던 정우의 문자메시지가 전해졌다. [내일 너 과외 가면 짐 챙겨 나갈게. 오늘은 집에 안 들어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해가 졌다.

 

나는 정우가 가 있을만한 곳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집 근처부터 동네 끝까지 몸을 움직였다. 먼저 찜질방을 돌았다. 그리고 게임방을 찾아다녔다. 셀 수 없이 많은 게임방이었기에 하나하나 돌기에 벅찼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고, 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게임방에 들어가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일단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갔다. “저 손님, 몇 시간이나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컴퓨터 화면을 보더니 답했다. “6시간 정도 하셨네요.” “저녁은 먹던가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대답하기 귀찮은 눈치였기에 나는 당장 그에게서 몸을 돌려 조심스레 정우에게 다가갔다.

 

“한정우.” 정우는 내 목소리를 듣고 놀라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왜 왔느냐며 물었다. 나는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그를 설득했고, 그는 계속해서 어떻게 왔느냐고만 물었다. 잠깐의 실랑이 후에 나는 억지로 정우를 끌고 나왔다. 정우는 나와서도 고개를 푹 숙이고 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미안.” 정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말을 하기 위해 숨을 들이쉬자 아무 말도 말아 달라며 부탁한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 마음이 아팠다. “정우야. 괜찮으니까 고개 한 번 들어.” 정우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픈 강아지 마냥 한나절 만에 얼굴이 축축 처져 있었다. “내일 나간다니까 왜 왔어. 게이인 거 숨겨서 미안해. 욕하려면 그냥 가줘.” 정우는 울먹이며 입을 닫았다. 나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키가 작은 아이는 그 이후로 내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물론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열었을 때, 그는 공항에 가기 직전이었다. 키가 작은 아이는 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차에 올라탔다. 잠깐 차가 머물러 있는 동안 나는 창문 너머로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차는 떠나갔다.

 

나는 정우가 스스로 만든 보호막을 뚫고 한 발짝 다가갔다. 정우는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 물렀다. 나는 재게 다가가 정우를 안아 주었다. “괜찮다니까, 괜찮아. 나 그런 걸로 친구 버릴 놈 아니야.” 정우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울음소리에서 키가 작은 아이의 인영이 스쳐 지나갔다. 눈물을 받아주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집에 가자.”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떨어진 어두운 복도에는 한 남자의 슬픈 울음소리가 울렸다. 남자를 살금살금 할퀴던 필름 조각들이 눈물과 함께 조금은 떨어졌다. 그렇게 남자의 마음에는 핏물이 고였고, 피는 따듯했다.

소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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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니

    바람이… 더 가져갈 것도 없는 헛헛한 마음을 아예 휩쓸 작정인지 강하게 붑니다. 길게 금이 간 유리창은 달각거리며 금방이라도 깨질 듯 아픈 소리를 지릅니다. 그 고통스러운 울음에 저도 덩달아 눈물을 적시고 싶습니다. 그러나 곧 자세를 바로 앉아 펜을 손가락 사이에 단단하게 끼우고 책상 위를 훑어갑니다. 텅 빈 속내만큼이나 깨끗하여 두려운 백지가 새겨진 양 미동도 없이 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옆에는, 가끔 펼치어보는 국어사전이 두꺼운 용모를 드러낸 채 누워 있고, 그 위에 외국 작가의 소설집이 덤으로 얹혀 있습니다. 아마 이 작가를 좋아하실 겁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 한두 주 동안은 깊게 뿌리를 내린 여운이 헤살을 놓아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식은땀이 흐르고 옴짝달싹 못하는 걸요. 헝가리에서 어떤 음악을 듣고 많은 사람이 자살했다는데 사실 이 작가의 손에서 꺼내어지는 이야기가 더욱 우울하고 비극적입니다. 저는 몇 번이고 책장을 덮었습니다. 눈을 감았는데, 사위에, 땅을 들이받고 주먹질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명인지 신음인지 웅성거림으로 범접했습니다. 파도, 같았어요. 한에 받친 운명들의 떨림에 저는 눈물을 떨구며 무릎을 꿇어앉았습니다. 쓰다듬어주고 싶었습니다. 저를 향해 뻗는 손이, 밭을 대로 밭아 기아 같은―아니, 필시 기아일 몸이 마치…… 마치 어제의 저를…… 저의 파르르 떨리는 손을……. 이만해야겠어요. 방금까지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 년도 더 전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상경한 청년이 아니었음에도 숫했고 내성적이었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원래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조금씩 조금씩 조용해졌다고 하더군요. 그것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 저조차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나누던 친구가 그나마 몇 있던 중학교, 입을 다물고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만 지냈던 고등학교를 건너 성인이라는 꼬리표를 처음 달았습니다. 저는 담배를 한 갑 샀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쓴맛에 켈록거리면서도 빨간 불빛을 물고 섰습니다. 여러 개의 얼굴이 떠내려가는 듯한 한강을 우두커니 보며 건밤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저의 성인식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거창한 예식이자 일탈이었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꿈에 나왔습니다. 아스라이, 희뿌연 담배 연기로 휘감긴 제 거친 몸이 아련하게 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감잡히고, 자기를 기이는 저를 책하고자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맞아요…… 저는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강을 거스르다 힘에 부쳐 죽는 연어의 처지가 될 것 같았습니다. 죽은 채로 거센 물살에 휩쓸려 몸이 찢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저는 그래서 한사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지요. 당신께서도 아실 겁니다. 자신을 스스로 죄인 다루듯 대해야 하는 비애를, 꿰뚫을 듯 매섭게 쏘아보는 눈앞에 나서지 못하는 두려움을, 피를 같이한 자에게도 살을 부딪치는 자들에게도 기대지 못하는 비실존적인 허

  • 소이진
  • 2012-12-15
봄바다를 기원하며...

2012년 1월 26일 목요일.   무작정 바다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을 가르며 차는 나아갔다. 한 시간 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술기운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몸에 열이 나서 창을 열었더니 추웠다. 내팽개쳤던 목도리를 주워들어 품에 안아 따듯하게 했다. 따듯해진 목도리를 목에 두르자 확, 온기가 몸에 흘렀다. 얼마큼 더 가자 바다가 보였다. 어렴풋이 해가 뜨기 시작했다. 주변은 뽀유스름해졌다. 온통 연한 회색빛이었다. 해변에는 여자의 머리카락 같은 해조류가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다. 쌀쌀했다. 몸도 덥힐 겸 해서 차에서 내려 사빈을 걸었다. 모래가 얼어 있었다. 모래를 밟을 때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승처럼 버티고 선 바람막이숲이 위엄을 뽐냈다. 멀리서 보아도 흐드러진 후박나무 꽃이 퍽 아름다웠다. 주머니에 꽂아 넣은 손이 시렸다. 문득 발로 찬 자갈돌에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는 어제저녁, 헤어지자고 통보했다.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았을 때 예감했어야 했다. 한창 상사들에 치이고 있을 때 그의 문자가 왔다. 퇴근하고 연락하라는 내용이었는데, 답장은 하지 못했다. 퇴근 한 시간 전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처음에 반기더니 이내 목소리를 내려 깔았다. 상사의 눈살이 신경 쓰여 X 카페로 나오라는 말만 듣고 끊었다. 퇴근이 늦어져 황급히 카페로 달려갔다. 그는 머그잔 하나를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있었다. 골똘히 생각하는지 눈을 내리깐 모습이 언제나처럼 매력적이었다. “동윤아, 나 왔어.” 내가 다가가자 그는 흠칫 놀라더니 일어섰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왜 눈치 채지 못한 것일까. 내가 주문한 레몬에이드가 나올 때까지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억지로 분위기를 잡는 게 생경스러웠다. 레몬에이드를 한 입 마시고, 묵묵히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왜 불렀어?” 나의 물음에 그는 대뜸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미간이 일그러져 있었다. “장정운, 우리 그만할 때 된 거 같다.” 나는 빨간색 빨대를 입에 물었다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뭐?” 갑작스레 날아오는 날카로운 그의 말에 되묻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렸다. 표정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을 것이다. 반면에 그는 눈빛이 약하게 흔들리는 것 말고는 담담해 보였다. “헤어지자고.” 행동이나 어감으로 미루어 보아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인 듯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나를 좋아하지 않았나? 그동안의 행동들은 모두 거짓이었던가? 새벽의 바다는, 겨울이었고 기온이 낮았음에도 아기 담요처럼 포근했다. 한참을 걸었을까, 사빈의 끝이 보였다. 사빈의 끝에는 바위 절벽이 서 있었다. 절벽이라 해봐야 상당히 낮았다. 화려한 죽음을 계획하고 바다를 찾은 여인처럼 나는 조심스레 몸을 절벽 위로 옮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가나 상점이 전무했다. 여름에도 개장하지 않는

  • 소이진
  • 2012-08-26
정사

그가 사랑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는 한 여자와 결혼한 남자였다. 그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를 사랑했다. 먼저 청혼한 것은 여자였다. 여자가 그를 처음 좋아하게 된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여자는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갔다. 3학년인 그는 동아리 장이었다. 그는 모든 여인들에게 친절했다. 신입생이라면 강도가 더해졌다. 공교롭게도 그 해 새로 들어온 여인은 여자뿐이었다. 여자는 그의 친절을 독차지했다.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빼앗겼다. 여자는 예쁘지 않았다. 그는 잘생겼다. 그럼에도 여자는 그에게 구애했다. 끈질겼다. 오랜 구애 끝에 그와 사귀는 데까지 이르렀다. 2년 정도 탐색기간을 거치고 여자는 그에게 구혼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다. 그는 남자라면 안정적인 틀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여자는 그에게 있어 하나의 도구밖에 되지 않았다. 여자는 진실을 모른 채 그와 결혼했다. 한 가닥이 부족한 사랑이란 삐거덕대기 마련이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신혼여행을 넘긴 그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여인을 만나기 시작했다. 여자보다도 젊고 예쁜 여인들이었다. 여자가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여자가 떡하니 부엌에 서 있음에도 그는 거실에서 시시덕거리며 그의 연인과 전화 통화를 했다. 참다못한 여자는 그날 저녁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이상이 없다고 여겼다. 되레 말을 꺼낸 여자가 주눅이 들었다. 저녁이 지났다. 바윗돌만큼 무거운 공기에 지쳐갈 즈음 그는 벗지 않고 있던 와이셔츠 차림에 정장 윗도리를 챙기고 나갈 채비를 했다. 벌써 현관 앞에 가있는 그를 쳐다보며 여자는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 가? 밤이 늦었어. 밖.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갔다. 여자는 결심했다. 빨리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여자는 그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차를 사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미행하기가 쉬웠다. 그는 대로에서 잔뜩 치장한 여인을 만났다. 그대로 몸을 옮겨 여관으로 들어갔다. 능숙하게 방을 잡은 그는 여인을 향해 웃어 보이며 여인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맞은편 자동차 뒤에 숨어 그를 지켜보던 여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그는 더러운 여관을 불평하면서도 여인과 함께 밤을 보낼 터였다. 옆방을 잡아 끝까지 감시하자니 그것은 그것대로 서러웠다. 여자는 상처로 아린 마음을 움켜잡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녀를 만난 후로 모르는 여인들과 관계를 하지 않았다. 그녀를 통한 정신적인 만족으로도 그는 쾌락을 느꼈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여자보다 젊고 예뻤다. 여자보다 말을 예쁘게 했고 성격도 싹싹했다. 길게 내려오는 생머리는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늘 좋은 향이 났다. 장미향이 나기도 했고, 달콤한 향이 나기도 했다.

  • 소이진
  • 201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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