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은 욕망을 찌른다(천운영
- 작성자 러블리아
- 작성일 201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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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천운영. 처음 접해본 작가의 이름이다. 이름만 봐서는 이 작가가 창작하는 모든 작품의 분위기가 ‘평화로운 천 개의 구름’처럼 조용하고 온화한, 하늘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바늘>을 읽어보니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공기가 무겁다. 음침하고 추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 한 마디로, ‘낯선’분위기다. ‘낯설게 하기’ 기법을 잘 사용한 것 같다. ‘바늘’은 작품을 구상할 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따가운 것, 아픈 것, 고통스러운 것을 묘사할 때만 잠깐 얼굴을 비추는 ‘부재료’였을 뿐, 주재료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문신’이란 행위를 이렇게 한 땀 한 땀 섬세하게 묘파할 수 있을까. 부재료에서 주재료로 멋지게 탄생한 바늘과, 문신을 포함한 소설의 모든 소재들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 추함 뒤에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을 것만 같고, 아름다움 뒤에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주인공이 바늘로 한 땀 한 땀 문신을 새기듯, 소설 속에 숨어있는 의미들을 밑그림 위에 색채로 드러내주고 싶었다.
2. 본론
1) 작가 천운영에 대해
천운영은 1971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2000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소설 <바늘>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2001년 제9회 대산문학상 문학인 창작지원금을 받았으며 이후 꾸준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여성 미학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는 천운영의 소설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인간의 몸과 욕망의 문제이다. 천운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로 훼손된 몸을 가진 여성인물들이며 이들은 육식성과 폭력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에 비해 원초적이며 야생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물들이다. 천운영은 이러한 주인공들이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소설화하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폭로하고 있다. 천운영의 소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독특한 배경 설정의 측면에서도 특징적이다. 천운영 소설에는 그동안 소설적으로 잘 형상화되지 않았던 독특한 직업이나 지역이 종종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를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치밀한 플롯을 통해 전개해 나간다. 또한 그의 간결한 문체와 극단적인 묘사력은 천운영 소설만의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장치가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2003년에 신동엽창작상, 2004년에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소설집으로는『바늘』(2001, 창비)과 『명랑』(2004, 문학과 지성사), 『그녀의 눈물사용법』(2008, 창비)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는『잘 가라 서커스』(2005, 문학동네)가 있으며, 최근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화제가 된『생강』(2011, 창비)을 발간한 바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천운영 [千雲寧]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 추한 외모의 여자들과 미추의 대립
천운영 소설의 중심 구도는 미추의 대립이다. 특이하게도 여자를(그것도 중심인물을) 추한 인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숨>의 할머니는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내려 소의 휘어진 꼬리털 같이 늘어뜨린 채로 80년을 살았고, 육식동물처럼 단단한 등뼈로 고기를 탐하는 다소 잔인하면서도 탐욕스러운 인물로 그려져 있고, <포옹>의 여주인공은 결핵보균자인 아버지의 결핵균을 물려받아 곱사등이의 몸을 갖게 되었다. 천운영 소설의 모든 ‘추한’여자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모습(화장을 하거나, 성형을 하거나, 자신을 꾸미거나)은 드러나 있지 않다. 대리만족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거나 자신의 여성성을 억압하는 존재들에게 저항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바늘>의 여주인공도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을 가진, 추한 여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문신은 추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다. ‘거미 몸통의 암홍색을 위해서 베네티안 레드와 인디아 잉크, 징크 옥사이드를 고른다. 털이 북슬북슬하게 난 거미 다리는 크롬 그린과 암청색 인디고 염료를 사용하면 될 듯하다.’ 거미의 사실적인 느낌을 위해 정성껏 안료를 고르고, 섬세하게 명주실을 감는 여자는 아주 섬세한 모습이다. 추한 외모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여성스럽게 그려진다. ‘살갗에 묻은 잉크와 피를 닦아내자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골리앗거미는 풍요로운 식사를 마치고 밀림 속에서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나는 어느새 밀림 속에 숨은 한 마리 거미가 된다. 가느다란 여덟 개의 다리로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투명한 거미줄에 미끄러지듯 걷는 거미. 발끝에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부주의한 청색 나비 한 마리가 내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청색 나비의 아름다운 날개가 나달나달해지기까지 조용히 기다린. 그리고 다리에 난 섬세한 털로 남자의 몸을 애무하듯 먹잇감을 부드럽게 감싼다. 주사바늘을 꽂듯 나비의 몸통에 촉수를 박는 그 순간.’ 그녀가 그린 골리앗거미는 살아 숨 쉴 것처럼 남자의 몸에 새겨지고, 여자도 문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남자의 몸을 애무하는 상상을 한다. 자신이 유일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순간이 바로 문신 행위다.
만약 문신을 추하고 혐오스러운 행위로 본다면, 그녀의 엄마가 수를 놓는 것은 아름다움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여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작은 방에서, 섬섬옥수 고운 손으로 옷감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여인이다. 얌전함, 조신함의 이미지도 아름다움의 또 다른 의미다. 그러나 엄마는 수를 놓는 바늘을 추한 행위에도 사용한다.
'바늘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어 봐. 가늘고 뾰족한 바늘 조각은 내장을 휘돌아다니면서 치명적인 상처들을 만들지. 혈관을 따라 심장에 이르면 맥박을 잠재우며 죽음을 부르는데, 아무런 외상도 없어.'
소설에서 엄마가 현파스님을 살해했다고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으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현파스님을 살해하고, 자신 역시 자살했을 것이다. 대개 모든 죽음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 ‘살해’와 ‘자살’은 더더욱 부정적인 이미지다. 바늘로 수를 놓던 우아한 엄마가 그 바늘로 현파스님 살해 사건(추악한)에 연루된 후, 자살(자신을 죽인다. 아주 좋지 않은 의미)하는 것도 미추의 대립이라 볼 수 있다. ‘한복 저고리를 바느질하던 엄마의 손은 옷감에 새겨진 고급 손수 같았다. 그리고 엄마와 스님과 함께 하던 차시간, 다기에 그려진 대나무보다 곧고 부드럽던 엄마의 손을 따라 떨어지던 옥빛 찻물.’ 이 때문에 주인공은 아름다운 엄마가 스님을 죽인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현파스님 살해 사건을 떠올리며 그녀는 미륵암의 새끼 고양이를 떠올린다. 모든 욕망이 잠들어 있는 절에서도 미추의 대립은 존재한다.
‘스님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미륵암에서의 새끼 고양이를 기억해낸다. 미륵암을 배회하던 수많은 고양이 떼. 마당이나 법당까지 함부로 나다니는 고양이들이 무척이나 두려웠었다. 그러나 고양이들은 아름다웠다. 그 자그마하고 부드러운 몸속에는 온갖 아름다움이 용수철처럼 휘어져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양이를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내 고양이들을 시기의 대상으로 본다. 그때마다 눈빛을 번득이며 육질의 맛을 느끼고 있는 고양들을 나는 시기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절에서 느끼는 ‘육질의 맛’은, 계율을 어긴 아주 추악한 욕망이다. 아름다운 고양이들이 육질의 맛을 느끼며 추악한 욕망을 만끽하는 것과 주인공 또한 금기를 깨고 그런 ‘육질의 맛’을 느끼고 싶어 한다. 새끼 고양이를 죽이러 가면서도 여전히 고양이를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 땔감으로 쓸 나무더미 사이에 이제 막 낳아 놓은 새끼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새끼 고양이 몸에 손을 대 보았다.순간 어디선가 어미 고양이가 기습을 가하듯 나타나 등을 굽히며 내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나는 새끼 고양이를 들고 뛰었다.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해 공중변소에 몸을 숨겼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고양이는 작고 여리고 아름다웠다.’
그 작고 여리고 아름다운 고양이는 더러운 변기통 속에 빠져 짧은 생을 마감한다. ‘구더기가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변기통 속으로 새끼 고양이가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양이들을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면서도 질투의 대상, 살생의 대상인 추악한 존재로 여긴다. 자신의 본능인 ‘육식’이 추악한 욕망이 되는 ‘절’이란 공간 속에서,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육질의 맛’이란 추한 욕망을 즐기는 고양이의 얼굴 뒤에도 미와 추가 혼재해 있다.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얼굴을 가진’ 801호 남자는 흔히 말하는 ‘곱상한 미남’이다. 잘생기다 못해 예뻐 보일 정도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외모는 남성성을 갖지 못한 ‘추한’모습이다. 전쟁기념관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매일 화약 냄새를 맡고 포탄소리를 들으며’ 전쟁을 상상한다.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전쟁’으로 대비되는 힘이다. 그는 추한 살상이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과 귀주대첩 기록화, 칠지도를 보며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전쟁을 기념한다는 것은 어쩌면 전쟁을 아름다운 행위로 인식하는 남성성에서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훼손된 남성성인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주인공으로부터 바늘 모양 문신이라는 강인함을 얻은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3) 식욕과 색욕은 한 끗 차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3가지는 식욕, 색욕(성욕), 수면욕이다. 셋 중, 식욕과 색욕은 많이 닮아 있다. 둘 다 뭔가를 탐하고, 집어삼킨다. 빨 때의 느낌이 온 몸에 전해져오고, 세포가 강렬한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느껴야 더 행복하다. 이 때문인지 예술에서는 식욕과 색욕을 동일시하여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천운영 소설 <눈보라콘>의 소년은 눈보라콘을 먹거나 눈보라콘을 먹는 소녀를 볼 때 ‘허망하고도 풍만한 달콤함’을 느낀다. 언제나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미끈미끈한 액체(정액?)가 허벅지를 스친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노래 <레시피>를 얼핏 들으면 남자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지만, 실은 남성을 ‘갖고 싶은’여성의 욕망을 담고 있다. ‘귤처럼 까고 싶어, 니 비밀을 알고 싶어. 바나나 껍질처럼 비밀을 벗기고 싶어.’ 그래서 식욕에 ㅓ자, ‘신음 소리’하나만 내면 색욕이 되는 것 같다. 식욕과 색욕은 한 끗 차이니까.
천운영의 소설 속에선 유난히 음식에 집착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눈보라콘에 탐닉하는 소년, 육식 동물처럼 탐욕스럽게 고기를 즐기는 할머니(단편소설 <숨>). 이들의 식욕은 단순한 식욕이 아닌, 성욕(소년)과 지배욕(할머니)을 내포하고 있다. <바늘>의 주인공인 타투이스트는 문신 작업이 끝난 후, 언제나 고기를 찾는다. ‘나는 양념하지 않은 고기를 먹는다. 손가락 두께로 썰어서 피가 살짝 날 정도로 구운 쇠고기나 마늘과 양파를 많이 넣고 삶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상추와 같은 야채를 곁들여 먹지도 않는다. 구운 고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채소류가 아니라 하얀 쌀밥이다. 쌀눈이 살짝 비치도록 말간 밥알에 약간 검어진 육류의 핏물이 스며들 때. 고기의 맛은 정점에 이른다.’ 주인공은 육식을 통해 온전한 ‘날 것’의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 양념하지 않은 쇠고기에서 피를 보고 싶어 하는 대목에선 그녀가 문신을 하며 느끼는 성욕을 실제로 풀고 싶어 하는 것이 보인다. 을 가진 추한 그녀는 실제 남자들과 소위 ‘썸싱’이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네가 조금이라도 예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 그림을 그리고 나면 그게 간절해지거든. 근데 넌 문신기술은 좋지만 도저히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 하긴, 그림을 그려준 그 많은 놈들이 너한테 덤벼들었다면 넌 매일 항생제를 달고 살아야 했을 거야.”
비록 추한 외모지만 그녀는 여성이고 성욕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문신 후 언제나 찾는 고기는 바로 섹스를 향한 욕망의 표출이다. 상추와 같은 야채를 곁들여 먹지도 않는 것은,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성욕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뒤틀린 육체처럼 성욕도 온전하게 표출되고 있진 못하다.
‘육류 코너를 떠나다가 쟁반 위에 올려진 붉은 살덩이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둥그런 모양의 고깃덩어리는 꼭 삭발한 스님의 머리를 연상시켰다. 말끔하게 정리된 스님의 머리통은 곧 솟아오를 태양과 같았으며, 그 위엄이 넘쳐 어찌 보면 동물적인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론 동그랗고 단단해 보이는 스님의 머리통에 마오리족의 혈흔문신을 새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가 하면 삭발한 머리통에서 보였던 동물적인 느낌이 내 뒤틀린 성욕과 함께 희석되어, 고운 여자의 손이 스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정사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곤 했다.’
고깃덩어리들을 통해 ‘스님’이란 남성성을 억압받는 존재를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여성성 역시 온전하지 못하단 의미다. 살갗을 지켜줄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연약한 맨살을 드러낸 스님의 머리에 ‘남성성’을 채워주고 싶어, 마오리족의 혈흔문신을 새기는 상상을 한다. 고운 여자의 손이 스님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정사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은, 엄마와 현파스님이 불온한 사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4) 남성성을 잃은 그, 여성성을 잃은 그녀
주인공을 찾아온 모든 남자들은 문신을 통해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나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 한다. 인간의 살갗은 오히려 과일에 가까워 쉽게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인간의 살에 거미의 외피를 그릴 수 있다.’ 골리앗거미, 호랑이, 사무라이 검처럼 남성적인 문양을 그려 달라는 남자들은 모두 겉으로는 과일 껍질처럼 쉽게 상처가 나는 살갗처럼 외강내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주인공에게 바늘 다루는 법을 알려준 김사장은 주인공을 문신의 세계로 이끌어 자신을 비롯한 남성성을 잃은 남자들에게 문신을 시킨다.
‘김사장이 데리고 온 사람은 평생 화투판을 전전했다는 사십대 후반의 남자였다. 유난히 숱이 많은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을 하고 송아지처럼 커다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남자의 어깨에는 푸른색 닻이, 가슴팍에는 커다란 사각형이, 배에는 다섯 개의 직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이기는 내가 외항선 탈 때 단체로 그린 기고, 이 네모는 'ㅁ'자 데이. '마산대표'라고 쓸라 캤는데 문신하던 놈이 'ㅁ'자만 쓰고는 딸려가뿟다. 'ㅁ'자를 이리 크게 써 갖고 우예 마산대표를 다 쓴단 말이고. 그때부터 내 인생은 조져뿐기다. 마산 대표도 몬 하는 기 무신 성공이고 성공은." 남자는 밑그림만 덩그러니 남은 문신자국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섯 개의 직사각형은 오광을 그리려 한 것이라고 했다. 부적처럼 가슴에 품으면 없던 끗발이라도 세울 수 있으리라는 남자의 희망은 공허한 몇 가닥 선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마산대표는 고사하고 평생 꿈꾸던 큰 성공을 하지 못한 채 화투판만 전전하는 남자는, 주인공이 해준 문신을 통해 ‘공허한 몇 가닥 선’에 불과했던 ‘작은 액자’에 호랑이와 5광을 채워 넣는 것은 남성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남자의 작은 액자에 호랑이 한 마리를 그려 준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로 눈을 부라리고 있다. 참숯을 곱게 갈아 몸통 깊숙이 줄무늬를 새겨 넣는다.사각형 안에 갇힌 호랑이는 고작 마산대표가 아니라 조선시대 무관을 대표했던 흉배문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개의 사각형 안에는 일, 삼, 팔, 비, 똥. 다섯 개의 광을 그려 넣는다. 남자는 어느 화투판에서도 느긋할 수 있는 오광을 몸 안에 숨기고 있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 그렇게 막강한 숨긴 패를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여유롭겠는가.’
현파스님도 소설 속에선 남성성을 잃은 남자로 등장한다. ‘아름다운’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 역시 훼손된 남성성을 상징한다. 불교에서 속세를 버리고 해탈하여 열반에 오르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참으로 많다. 그 중에선 성욕도 포함된다. 엄마가 일부러 부러뜨린 바늘처럼 뾰족한 끝이 없어, 겉으론 거세되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반강제적으로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두피를 지켜줄 머리카락 하나 없이 맨살을 드러낸 모습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마오리족의 혈흔 문신을 새겨 남성성을 회복해주고 싶게끔 만든다.
801호 남자의 쌀알처럼 흰 얼굴과 곱살한 인상은 아름다운 한편, 훼손된 남성성으로 나타난다. 남성성이 약한 남성은 동족 간 생존 경쟁에서 불리하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 고참들은 내가 곱살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심한 얼차려를 주곤 했어. 난 정말 꿋꿋하게 이겨냈지. 그런데, 어느 날 내 옆에서 잠자고 있던 고참이 내 바지를 벗기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난 꼼짝도 할 수 없었어…….” 성적 모욕까지 겪게 되자 자신의 흰 피부는 트라우마로까지 이어진다. “그때 난 알았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거세를 하거나 강해지는 것.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뭐라 생각해? 강해지는 것밖에 없어. 넌 그걸 해 줄 수 있잖아.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 줘. 칼이나 활, 미사일, 비행기, 뭐든.”주인공만이 자신의 몸을 칼, 활, 미사일, 비행기 같은 강인함으로 채워줄 수 있는 것을 알고, ‘다시는 봉합할 수 없는’문신을 그린다. 그의 아름다움을 파괴하지 않고 싶은 주인공은, 그의 가슴에 작지만 가장 강한, 욕망과 남성성, 섬세함, 아름다움이 혼재된 바늘을 그려 준다. 801호 남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한편, 남성성을 얻게 된다.
이렇게 남성성을 훼손한 남자들에게 문신으로 남성성을 회복해주는 주인공 역시, 여성성을 잃어버린 여자다. 흔히, 못생긴 여자는 여자도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유독 여성에게만 외모적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강하다. 남자와는 달리 주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 소위 ‘남자가 꼬일’확률이 높다. 더 좋은 짝을 찾기에, 한 마디로 생존 경쟁에 더 유리하다. 이런 세상에서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곱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둥그렇게 붙은 목과 등의 살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목소리, 뭉뚝한 발가락’을 가진 추한 주인공은 ‘여자’로서의 삶을 당당히 누려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고운 손으로 수를 놓고 차를 따르는 주인공의 엄마가 아름다운 모습인 것과는 달리, 추한 외모로 태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왔을 확률이 크다. 못생긴 외모로 인해 어린 시절 받았을 상처도 컸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자로서 당당히 누려야 할 성욕조차 마음껏 누릴 수 없다. 그녀에게 문신 시술을 받는 남자들조차, 그녀와 ‘하고 싶은’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런 그녀에게, 김사장은 탈피의 기회를 주었다. 옷감에 수를 놓는 엄마의 미적 감각은 그녀가 물려받은 유일한 아름다움이었고, 그것은 문신이라는 다소 거칠고 남자답지만 한편으로는 섬세한 작업으로 태어난다. 그녀는 문신을 할 때, 유일하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 자신에게 문신을 받는 남자들이 그녀의 외모를 추하게 보더라도, 문신만큼은 아름답다고 여긴다. 문신은 단순한 직업이 아닌, 그녀의 분신이자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행위이다.
5) 미륵암과 엄마, 그리고 현파스님 살해 사건
주인공은 간질발작을 고치기 위해 엄마와 함께 미륵암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절은 모든 욕망을 죽이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해탈해서 열반에 이르기 위해 욕망이란 것을 가져선 안 된다. 사리사욕과 ‘간질발작’같은 비정상적이고 야생적인 모습, 그리고 성욕을 죽여야 한다. 이러한 미륵암은 주인공에게 있어서 구속과 속박의 의미였을 것이다. 육식주의자인 주인공 또한 절에서 채식을 해야 함은 피할 수 없다. 출가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절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규칙이다. ‘여리고 따뜻하고 조금은 메마른 스님은 때로 신도들이 가져온 생선대가리나 고깃덩어리를 요사채 앞에서 고양이들에게 던져주곤 했다. 그때마다 눈빛을 번득이며 육질의 맛을 느끼고 있는 고양들을 나는 시기에 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절에 생선대가리와 고깃덩어리를 가져온 신도들은 무슨 생각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미륵암 뒷마당에서 몰래 먹기 위한 것이었음이리라. 꼭꼭 숨겨 왔지만 들켜버린 ‘욕망’들을, 스님이 고양이들에게 ‘던져준’것이다. 채식이 계율이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미륵암에서 유일하게 호사(?)를 누리는 존재인 새끼 고양이들은 주인공이 질투하는 대상이다.
절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입에 대 보지 못한 고기를 밀반입해오는 신도들과(이들은 절만 벗어나면 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 유일하게 육식이 허락된 존재인 고양이들. 그러다 주인공의 욕망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어느 날 땔감으로 쓸 나무더미 사이에 이제 막 낳아 놓은 새끼 고양이를 보게 되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새끼 고양이 몸에 손을 대 보았다. 순간 어디선가 어미 고양이가 기습을 가하듯 나타나 등을 굽히며 내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나는 새끼 고양이를 들고 뛰었다.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해 공중변소에 몸을 숨겼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고양이는 작고 여리고 아름다웠다. 새끼 고양이를 변기 속으로 집어던지기까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구더기가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변기통 속으로 새끼 고양이가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채식’이란 계율에 저항하기 위해, 절의 또 다른 금기인 ‘살생’을 한다. ‘산 아래 마을’이란 공간은 절에서 벗어난 세속의 공간을 의미한다. 미륵암과 달리 욕구를 마음껏 해소할 수 있는 곳이다. 화장실의 또 다른 이름인 ‘해우소’는 근심을 없애는 공간이란 뜻이다. 고양이를 조용히 살해해, 근심이 남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화장실이고, 은밀한 욕구를 몰래 해소하는 곳이다. 주인공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엄마가 현파스님을 흔적 없이 살해할 거라는 복선 구실을 한다.
비단에 곱게 수를 놓는 조신한 엄마도 욕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녀의 남편, 주인공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 남편의 부재로 인해, 그녀는 성욕을 포함한 모든 표출할 기회를 잃었다. 모든 욕망이 잠든 조용한 절에서도, ‘남자’인 스님을 보는 엄마는 성욕과 애정욕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면도칼을 들고 스님의 머리를 깎는 엄마를 상상한다.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스님의 어깨를 살짝 누르듯 짚고 한 손으로 이발을 하는 엄마. 면도칼 끝에서 스님의 머리카락이 스르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아주 고즈넉한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모아 침낭에 넣었을 엄마의 섬세한 손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찻상을 가운데 두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시는 엄마와 스님의 모습처럼.’ 스님의 머리를 깎아 주고 찻상을 마주하며 사랑을 키웠을 것이다. 그녀의 억압된 욕망은 스님과 세속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의 간질발작이 완치되어 더 이상 절에 머물 일이 없어져 집에 돌아왔지만, 엄마는 다시 절에 돌아간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나흘 동안 숯물 들인 무명 동방의와 바지, 치자물 들인 가사를 만들었다.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까지 완벽히 끝났을 때 엄마는 내게 겨자색 보자기에 둘둘 말린 것을 꺼내 놓았다. 엄마가 준 보자기에는 꽤 많은 돈 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스님의 옷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나는 그곳으로 가야겠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
욕망을 대표하는 ‘돈 뭉치’를 들고 절에 찾아가는 것은 미륵암에서 욕망의 불꽃이 터질 것을 암시한다. ‘침낭에 머리카락을 넣어두면 녹이 슬지 않는다.’의 의미는, 억압된 남성성의 의미를 가진 ‘스님의 머리카락’과, 여성성의 의미를 가진 엄마의 바늘을 함께 두면, 두 소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인 ‘욕망’이 녹슬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스님의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깎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침낭 속에 소중한 바늘과 함께 넣는 것은 두 사람의 합방, 성관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엄마는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엄마가 가장 아끼던 일제 바늘쌈을 펼친다. 1호부터 20호까지 금빛 머리를 빛내며 꽂혀 있는 바늘들. 손가락 끝으로 아주 미세한 곡선의 감촉을 느끼며 바늘을 뽑아든다. 갑자기 모든 신경 세포가 한꺼번에 바늘 끝으로 몰린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바늘들을 들여다본다. 스무 개의 바늘은 전부 뾰족한 바늘 끝이 잘려져 있다. 바늘은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채 철사처럼 뭉뚝했다. 엄마는 일부러 바늘 끝을 잘라 낸 것이다.’
바늘의 끝을 자르는 것은 거칠고 추한 욕망을 잘라내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바늘이 한편으로는 ‘남성’의 의미도 내포하기 때문에 현파스님의 거세되고 억제된 남성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엄마는 자신이 현파스님을 죽였다고 우긴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엄마가 현파스님을 살해한 것에 의문을 갖고, 마지막에는 ‘엄마는 왜 죽이지도 않은 스님을 죽였다고 했을까?’라고 하며 엄마가 현파스님을 살해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바늘을 잘게 잘라 매일 마시는 녹즙에 넣어 봐. 가늘고 뾰족한 바늘 조각은 내장을 휘돌아다니면서 치명적인 상처들을 만들지. 혈관을 따라 심장에 이르면 맥박을 잠재우며 죽음을 부르는데, 아무런 외상도 없어.’
이 한 문장을 통해, 엄마가 현파스님을 살해했음을 말하고 있다. 엄마가 현파스님을 살해하는 것은, 자신을 받아들여 줄 수 없는 억압된 남성성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조신한 자신이 느끼고 있는 추한 욕망을 증오하기 때문에, 스님을 살해한 후 자살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그 욕망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바늘 끝을 잘라 녹즙에 넣어 욕망을 죽인 것이다.
6) 그렇다면 ‘바늘’의 의미는?
소설 <바늘>을 읽으면서, 박지윤의 <성인식>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전체를 아우르는 음침하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러나 말 할 수 없는 매혹이 느껴지는 분위기, 흑과 백의 극명한 대립(박지윤 <성인식>에서는 의상, 소설에서는 미와 추), 감상한 후에는 드러날 듯 말 듯 한 묘하게 에로틱한 느낌이 신경세포를 강타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바로 ‘바늘’이 등장하는 것이다. 흔히 바늘처럼 길쭉하거나 뾰족한 물건은 남성을 상징한다. <성인식>뮤직비디오에서는 미싱 장면에서 바늘을 클로즈업하는데, 이때 바늘은 남성을, 바늘 아래의 노루발은 여성. 즉 남성과 여성이 만나는 ‘성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미싱에 손을 다쳐 흘린 피가 흰 천에 스며드는 것은 ‘첫 경험’으로 여성의 처녀막이 파열되는 것이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서 오로라 공주가 15번째 생일에 물레에 손이 찔리는 것이나, 영화 <활>에서 활에 맞은 소녀의 하얀 치마가 피로 물드는 것도 같은 의미다.
<바늘>에서의 문신 작업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허벅지에 문신을 새기는 작업은 등이나 가슴 쪽보다 훨씬 신경이 쓰인다. 상대의 종아리에 올라탄 채 팬티 사이로 비어져 나온 털을 보면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고른 숨소리와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뜻한 바람은 남자의 사타구니를 데우기 충분하다. 남자의 성기는 내가 바늘을 댄 순간부터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해 밑그림이 끝날 즈음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나기 마련이다.’ 바늘(남성)으로 연약한 살갗(여성)을 찔러, 문양을 새기는(첫 경험으로 처녀막이 파열되는)이 모든 문신 작업 과정은, 섹스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추한 외모의 주인공은 누구하고도 관계를 가져 본 적이 없다. ‘남자가 말한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게 하는 이유들이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추하다는 추상어가 명백히 눈앞에 펼쳐져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나는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다.’ 그녀를 찾는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문신 실력에 감탄해 찾아오는 것이다.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이 없듯, 문신 행위는 그녀가 유일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것은, 그녀는 문신 행위와 섹스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섹스의 대리만족을 문신을 통해 푸는 것이다.
주인공의 엄마에게 있어서 바늘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여성성을 나타내는 도구이다. 사람의 살갗을 찔러 수를 놓는 주인공과는 달리, 부드러운 옷감 위에 수를 놓는 아름답고 조신한 모습. 엄마의 바늘은 욕망이라는 이면도 갖고 있다. 절이란 공간과, ‘스님’이란 상대의 상황이 욕망의 표출을 막았을 뿐, 현파스님의 머리를 깎아 주는 부드러운 손길과, 그 머리카락을 몰래 침낭 속에 넣어두면서 은밀한 쾌락을 꿈꾼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의 조신함과 욕망을 죽여야 하는 ‘미륵암’이란 공간을 부정하기 위해 바늘을 사용한다. 바늘로 살해한다고 하면, 직접 바늘을 들어 심장에 가격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엄마의 방법은, 녹즙 속에 몰래 바늘의 잘린 끝을 넣어 은밀하게 목숨을 끊는 것이다. ‘스님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기 위해 누군가 사건을 은폐했을 수도 있다’란 주인공의 추측처럼, 자신이 사랑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기 위해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끝이 잘린 바늘’같은 존재인 스님에게 ‘바늘의 뾰족한 끝’을 먹임으로 인해, 억압된 남성성을 회복할 수 없음에 체념하는 것이다. 엄마의 바늘은 끝이 잘려나간 아픈 바늘이다.
“아름답다고? 내 모습을 봐. 죽은 사람처럼 하얀 이 피부 좀 보란 말야. 내 피부는 선천적으로 너무 하얘서 쉽게 타지도 않아. 구릿빛 피부를 만들어 보려고 하루 종일 선탠을 해본 적도 있어. 그런데 발갛게 달아오르기만 하지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제자리야. 나는 언제나 허약하고 소심해 보여. 난 그게 싫어.”
남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죽은 사람처럼 추해 보인다고 여긴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의 아름다움을 지켜 주고 싶어 한다. 현파스님을 살해하면서도 스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고 싶어 했던 자신의 엄마처럼. 어쩌면 주인공이 801호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건 처녀막처럼 한번 상처가 나면 다시 봉합할 수 없어. 죽을 때까지 네 몸에 붙어 있을 텐데 그래도 하겠어?”
그녀는 남자와 첫 섹스를 하게 될 것을 직감하고 말한 것이다. 801호 남자와 주인공은 서로 훼손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찾으려 하는 인물로, 두 사람의 성 정체성을 회복시켜 줄 유일한 수단은 사랑과 성행위다.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 처녀막에 영원한 흔적이 남을 여자와, 문신이 영원히 피부에 남을 남자.
소설 결말에서, 남자의 가슴에도 작은 바늘이 새겨진다.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 하나를 그려 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소설에서의 바늘은 여러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섬세함과 조신함, 그리고 욕망과 남성성. 여자는 801호 남자의 아름다움을 훼손시키지 않는 한편, 그에게 남성성을 회복시켜준다. 가장 얇으면서도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같은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주인공은 작은 틈새 같은 바늘에서 어린 여자 아이의 성기를 연상하고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에게서 이제 막 발아하기 시작한 남성성을 보고,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결론
소설을 읽으며, 성인식을 치르는 느낌이 들었다. 박지윤의 <성인식>처럼 묘하게 음침하면서도 성감대를 자극할 것 같은 분위기에 끌리다가도, ‘난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라고 도발적으로 외치는 문체에, 창작세포에 한 땀 한 땀 명주실로 문신을 새기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도 이런 문체를 구사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성인식> 뮤직비디오 속 박지윤의 의상처럼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그런 문체를 갖고 싶은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천운영은 취재를 잘 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소설 소재로는 흔치 않고 여성이 취재하기 힘든 장소까지 직접 달려가 체험한 것이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바늘>의 문신소는, 날카로운 바늘과 살갗을 관통하는 명주실과 안료, 바늘을 달구는 냄새처럼 문신소 풍경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촉감을 그대로 옮겨 온 것만 같다. 이런 묘사는 소설을 위해 몸을 던지는 정신을 가졌을 때만 가능하겠지. 상상을 풀어 놓는 간접 경험보다, 직접 느낀 것에 상상을 접목시키는 직접 경험의 문체는 뭔가 더 특별하다.
사람이 성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찾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 아닐까? 2차 성징 이후로 자신의 성을 재확인하는 경험(월경, 몽정 같은)을 통해 성숙해가는 것처럼. 이 과정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문신으로 남성성을 회복하려는 남자들처럼, <성인식>의 박지윤처럼 피를 봐야 한다. 조금 늦게 시작한 만큼 내 글이 정체성을 갖기까지 피를 흘릴 날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파하지는 말자. 골리앗거미처럼, 바늘처럼 더 단단한 형체를 갖추기 위한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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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소녀는 그림을 썩 잘 그리는 편이다. 학교 미술시간에 매일 뽑히고, 선생님의 칭찬과 아이들의 부러움 섞인 표정을 볼 때면 행복하다. 칭찬 덕분에 ‘진짜 화가’를 꿈꾸게 된다. 어린 아이들을 움직이는 데는 ‘칭찬’하나로 충분하니까. 사실 소녀의 예전 꿈은 발레리나였다. 발레리나가 자신의 운명인 줄 알았는데, 무용학원을 1주일 만에 그만 둔 이후로 꿈을 접은 것이다. 처음엔 환상을 품고 무용학원에 등록했겠지만,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너무 벅찼을 것이다. 신체조건이나 유연성이 발레를 하기엔 애초에 적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화가의 꿈은, 자신과 가장 잘 맞았던 것이다. 화가의 꿈을 가지게 된 과정이 나와 비슷해서 놀랐다. 꿈을 접은 자리에 새로운 꿈을 채우는 것이 너무나도 닮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진 꿈이 오래 간다는 사실도 말이다. 소녀가 처음 그린 그림은 바가지였다. 보통 미술을 시작할 때는 사과나 구 모형 같은 걸 그리는데, 바가지라니 조금 특이했다. 욕조 소묘를 한다는 것은 들어 봤지만 말이다. 작은 손을 떨며 바가지를 그리는 소녀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읽는 내 손이 떨릴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의 초등학교 6학년 때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썼던 소설(?)은 어린 시절 친척집에서 봤던 동화책에서 본 이야기었다. 창작동화 전집 안에 묶여 있는 3가지 이야기를 살짝 각색해 일기장에 연재(?)했었다. 시험에서 성적을 잘 받고 싶어하는 여고생이 약국에 가서 '공부 잘 하는 약'을 달라고 하는 에피소드부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여학생은 대학에 들어가서 제과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사장님을 짝사랑하게 되지만 유부남이라는 걸 알고 포기를 한다. 대학 졸업 후에 작가로 등단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아랫집과 층간소음 소동을 벌이는 이야기로 끝난다. 원래 독립된 이야기를 짜깁기한 거라 이야기가 잘 이어질 리는 없었지만, 선생님의 호응은 좋았다. 내가 그때 썼던 소설들도 사실 읽은 책의 내용을 빌려 각색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순수하게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신경숙 작가님도 여상 시절에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설가의 꿈을 키우지 않았는가. 책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다가 다른 이야기와 합쳐보기도 하고, 나눠 보기도 하면서 스토리텔링 방법을 나름 익혔던 것이다. 무지개 상가의 3층은,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명원 화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쁘다. 뭔가(성경이나 찬송가)를 자꾸 외워야 하는 삼일교회, 하얀 김으로 뒤덮인 오미사 세탁소, 그리고 일등 속독학원. 소녀는 명원 화실에 갈 때마다, 복도를 빠르게 지나쳐간다. 예전에 그만뒀던 삼일교회 어린이반 선생님과 마주치기도 미안하고, 일등 속독 학원생들의 지루해 보이는 표정도 보고 싶지 않다. 특히 오미사 세탁소의 흰 김이 무섭다. 소녀는 ‘외우는 게 싫어서’교회를 나가지 않았다는데, 이 말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테크닉이나 뽑히는 법을
- 러블리아
- 2015-03-10
세상의 끝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사람들은 ‘끝’이라는 단어만 듣고 부정적인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세상 끝과의 조우>라는 영화의 제목은 활짝 열려 있는 느낌이다. 포스터의 색채도 정말 아름답다. 햇빛이 비치는 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언 얼음. 회색 바위에 올라선 두 사람은 허공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있다. 꿈의 막이 오르길 기다리듯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고 맑은 땅 남극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동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고전게임 ‘남극탐험’이 떠올랐다. 조이스틱으로 파란 펭귄을 조종해서 남극점을 발견해야 하는데, 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수렁을 잘 피해야하고, 갑자기 튀어나온 물개에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뜀박질을 하며 한 판을 끝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미지의 땅을 발견한다는 재미에 빠져, 아문센에게 빙의된 듯 남극을 돌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배경음인 ‘스케이터츠 왈츠’의 잔잔한 선율에 손을 맡기다보면, 마음은 이미 얼음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있다. 어린 시절에 남극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아마 남극에 사는 사람들은 펭귄과 대화를 하고, 매일 스케이트를 타면서 살 것이라고 상상했다. 얼음집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커가면서는 점점 남극에 가면 얼어 죽거나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랬기에 이 영화가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겠지. 꿈과 현실의 중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걸까? 꿈보다 멋진 현실에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남극을 다룬 다큐 영화라고 해서 뻔한 내용일 것 같았지만, 여기서는 다큐멘터리의 장점이 빛을 발했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이 직접 맥머도 기지를 방문해서 그곳의 삶을 체험해본 영화는 한 편의 자전적 소설 같았다. 어떤 기교 없이 삶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그 삶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일단 초반부부터 압권이었다. 꿈의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또 다른 ‘현실세계’가 펼쳐진다면? 남극에 있는 과학기지라고 해서 얼음 벌판 위에 컨테이너 박스 몇 개가 놓인 한적한 풍경을 떠올렸다. 하지만 넓은 땅 위에 회색 집들이 세워진 곳이 나타났고, 이게 맥머도 기지란다. 마을의 모습이라면 그나마 봐 줄 만도 하지만, 이건 공단의 모습이다. 픽션의 묘미 중 하나는 반전이다. 초반부터 감상자들의 예상을 뒤엎어버리다니! 더 놀라운 것은 감독이 연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은 상상이나 꿈보다 훨씬 더 극적이다. 남극이라는 백지 상태에 그려진 꿈은, 언제든지 새롭게 수놓을 수 있고 더 멋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기지에 상주하는 사람들 또한 모두 평범한 삶을 벗어나, 더 극적인 현실을 찾기 위해 남극을 찾았다. 지게차 운전사가 된 철학자, 새로운 꿈을 찾아 나선 은행원, 머나먼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가로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주고 싶은 요가강사…….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식물을 키우는 언
- 러블리아
- 2014-12-26
1. 서론 이기호, 흔한 이름 같으면서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작가이다. 수업 시간에 잠깐 감상했던 그의 등단작 <버니>를 읽으며, 머릿속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좆나리 멋있는 그녀가 왔어……. 랄라라라라랄~’ 소설이 아니라 마치 노래 가사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뮤지션의 소울이 들어간 랩 가사를 읽는 기분. 학교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노래 가사 같은 시는 많이 접해 봤지만, 노래 가사 같은 소설은 처음 본다. 아주 신선하고 기존의 틀을 파괴한 그런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수인>이란 작품도 상당히 관심이 갔다. 소설가가 되고 싶으면 꼭 읽어봐야 할 작품이라고. (작가가 되겠다면서,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다니. 반성하자!) 수인이라…….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의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미국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나 영화 <쇼생크 탈출> 같은 탈옥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목만 봐서는 아주 삭막하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은 절대 갇히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고, 책을 펼쳐봤다. 소설 <수인>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란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경쾌한 연두색 표지에, 무수히 찍힌 유머러스한 발자국들. 그 발자국의 주인인 듯한, 머리를 감싸고 있는 사람. 아마도 표지 속의 사람이 바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선한 상상을 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작가. 그리고 발자국은 작가의 상상력의 자취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인>을 읽으면서, 주인공은 땅굴을 파며 갇혀 있을지언정 상상력은 절대 갇히지 않고 머릿속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2. 본론 (1) 어서 와~ 이기호는 처음이지? 197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9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버니〉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10년 제11회 이효석문학상을, 2013년 제1회 김승옥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수상경력으로는 2010년 제11회 이효석문학상, 2013년 제1회 김승옥 문학상이 있으며, 저서로는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와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가 있다.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사과는 잘해요>……. 전체적으로 소설의 제목들이 심상치 않다. 요즘 유행하는 ‘열도의 제목학원’ 교본으로도 쓰일 수 있을 정도이다! 살짝 박민규 작가 같은 느낌도 나면서, 중독성 있고 신선한 제목들이다. 제목이 이 정도인데 속은 어떨까? 모든 소설들이 기본 구조를 파괴한 형식들이다. 앞에서
- 러블리아
- 2014-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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