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은 졸작인가
- 작성자 jus
- 작성일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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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은 졸작?
최근 명량의 기세가 무섭다. 8월 13일을 기점으로 관객 수 1200만 명을 돌파한 명량은 이제 한국 박스오피스 최다 관객 영화라는 ‘왕좌’에 오르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명량 이전에 개봉한 군도나 명량이 흥행 중에 있을 때 개봉한 해적은 명량의 관객몰이에 장애요인이 될 수 있다는 예상도 있었지만 명량은 이를 충파처럼, 우직하게 부딪치며 흥행 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8월 7일 진중권 교수가 자신의 트위터에 “영화 ‘명량’은 솔직히 졸작.”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에 네티즌들이 진 교수에 비판 및 반론을 가하자 진 교수는 13일 “짜증나네. 그냥 명량은 영화적 완성도가 떨어집니다.……(후략)”라고 화답하였다. 결과적으로 본인의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진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영화 ‘명량’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를 유도하였다. 여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명량은 과연 졸작인가?
명량의 흥행에 담긴 불편한 진실
“눈엣가시 ‘아바타’에 뺏긴 5년 되찾을 때 됐다.” 최근 명량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자 뉴스엔 조연경 기자가 쓴 기사의 제목이다. 아바타와 명량은 여려 가지 측면에서 상당히 대조적인 영화이다. 따라서 명량을 통해 아바타를 침몰시키려는 사람들의 심리는 여러 방식으로 분석되어야한다. 먼저 명량과 아바타의 갈등은 한국 작품 명량과 할리우드 작품인 아바타 간의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금 더 과장해 표현하자면 한국에서만큼은 할리우드 작품이 박스 오피스 1위를 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시각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명량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에 ‘명량 일본반응’이 나오는 것도 결국 이러한 시각의 일환이다. 결국 명량의 흥행에는 배타주의, 더 나아가 쇼비니즘이나 징고이즘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명량과 아바타의 차이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해 만들어진 명량과 순수 판타지인 아바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실 대한민국은 판타지를 ‘허구’, ‘공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더 나아가 판타지는 ‘아이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아바타가 박스오피스 전체 1위를 차지하는 것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것에 이러한 시선이 일부 담겨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판타지는 현실에 대한 하나의 대안 세계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결국 명량의 흥행에는 국가적, 장르적 배타주의가 담겨 있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산으로 간 스토리?
명량은 러닝 타임 128분 중 거의 절반에 이르는 61분을 해상 전투신에 할애하였다. 해상 전투신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61분이라는 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박진감 있는 전투 장면을 연출하였다는 점은 이 영화의 무엇보다 큰 강점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절반에 해당하는 67분은 아쉬웠다. “스토리가 산으로 갔다.”, “스토리가 침몰했다.”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명량의 스토리는 산으로 갔는가? 아니다. 명량에는 스토리가 없었다. 최종병기 활에 비교했을 때 명량이 더욱 아쉬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과 중반에 해당하는 67분 동안 명량은 하나의 스토리 라인을 만드는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해상 전투신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배설의 배신, 탐망꾼 임준영, 권율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나대용 등 많은 장면을 담아내려고 한 노력이 보였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전체 스토리 라인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기 - 승 - 전 - 결이 아니라 기 - 결(해상전투)이 되어버린 명량이다.
후손 아그들이 우리가 이리 개고생헌 것을 알기는 알까
명량 전투는 우리에게 하나의 판타지였다. 단 12척으로 330여 척의 배와 싸워 이기는 것은 아무리 울돌목의 물살이 빠르다고 해도, 아무리 조선 화포의 비거리가 길다고 해도, 아무리 조선의 판옥선이 단단하다 해도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명량에 기대를 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하나의 판타지인 장면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연출해낼까에 대한 기대가 몹시 컸다. 하지만 명량은 이러한 중요한 설명을 엑스트라에 맡겨 버렸다. 노를 저을 때 “판옥선아, 버텨줘.”라고 말하거나 충파 장면에서 “구선이 부활했다.”라는 대사로 판옥선을 설명하거나 “회오리다.”라는 식의 대사로 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설명하려는 연출은 굉장히 아쉬웠다. 전략가 이순신을 제대로 연출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불어서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인 “후손 아그들이 우리가 이리 개고생헌 것을 알기는 알까”는 감독의 메시지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왜 명량인가
사실 영화의 흥행 요인을 분석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다. 어느 요소든지 끌어다가 끼워 맞추는 해석을 하면 흥행의 요인이라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흥행 요인을 분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수많은 흥행 요인 중에서 영화가 관객을 불러 모은 본질을 꿰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명량인가. 앞서 언급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왜 명량인가. 군도가 아닌, 해적이 아닌 왜 명량인가.
결국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갈망의 반영이다. 사실 세월호 참사와 명량 해전은 많은 부분 닮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명량 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맹골수도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선조의 모습과 배를 버리고 살아남은 이준석 선장 역시 많은 부분 닮아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우리는 진정한 리더십의 부재를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다. 대통령이 국가 개조를 외치고 나서는 상황이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이순신을 통해 새로운 리더십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충(忠)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순신의 믿음이 성리학의 조선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2014년 지금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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