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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여자

  • 작성자 이주이
  • 작성일 2015-04-25
  • 조회수 443

분홍여자

 

 

홍의 방에는 곰 인형이 있다. 문 옆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곰 인형.

 

홍과 섹스하지 않은 것이 지금 와서 후회된다. 아파트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기운이 반긴다. 익숙함은 살아있지 않지만 줄곧 나와 함께한 가족처럼 나를 반긴다. 나도 그게 좋다. 방은 어두웠다.

 

나는 홍의 허벅지를 잡았다.

필요한 게?
홍은 무표정이다. 홍의 곡선들을 만진다. 살의 느낌은 아닌.

돈? 돈 좋아해?
홍은 무표정이다. 홍의 옷이 슬쩍 사라진다. 가까이 가서 홍의 쇄골을 혀로 느낀다. 홍의 가슴을 주무른다. 홍을 앞니로 문다. 생살을 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귀 언저리가 아프다.

괜찮네.

뭐가.

홍이 처음 입을 열었다. 가루처럼 날리는 목소리.

네 몸.

나는 계속 홍을 만진다. 홍은 여전히 별 반응이 없다. 나는 계속해서 홍의 몸을 더듬는다. 홍이 다시 입을 연다. 여전히 가루처럼 날리는 목소리.

이건 상상. 허상. 네가 만든 추잡. 먼지 같은 놈.

시끄러.

 

홍은 눈을 떴다. 아침이니 눈을 뜨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홍은 침대에서 나와 씻지 않고 곧장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문을 나선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간다. 바깥 공기는 맑았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댄다. 앞니로 끝을 잡아 놓는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홍은 결국 한 개비를 침으로 적시고만 있다. 음수림보다 더 기분 나쁜 빌딩숲이 홍은 눈앞에 있었다. 얕은 바람이 얇은 옷을 적신다.

시발.

홍은 욕지거리를 했다. 홍은 자신의 눈앞을 빌딩들이 가로막는 것이 억울했다. 그래서 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홍은 옥상을 둘러보았다. 어제와도 그저께와도 같다. 홍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타고 담배가 툭 떨어졌다. 툭.

 

피곤하다. 아침이다. 아침이니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화장실에 간다. 나는.

어제 뭘 했지 하다가 홍을 떠올린다. 홍과 이야기를 많이 했지. 서로 오랜만에 만나서 별 희한한 이야기를 했었지. 그리고 그건 엉터리였지. 그래서 나는 그 실장이란 남자에게 돈을 주었나? 아니야. 그러니까 그 남자에게 돈을 준 것은 맞지만 홍이 다시 돈을 돌려주었지.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갔다. 도마 위에 남은 파프리카가 있었다. 남은 것. 남은 것들은 어떡하면 좋을까.

 

아침은 추웠다. 곧 눈이 올 것 같았다. 곧은 아니더라도 조만간 눈은 올 것 같았다. 홍의 머리 위 하늘 위 어딘가에서 눈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어서 확신을 못한다. 알 수 없다. 홍은 어차피 이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응. 그렇게 생각하며 홍은 옥상에서 내려왔다. 근데 아무래도 눈은 올 것 같다.

방문을 연다. 먼지가 풀썩인다. 방구석에 있는 의자 위의 맹한 표정의 곰 인형이 말없이 먼지를 보고 있었다. 홍은 곰이 보고 있는 먼지를 치우지 않는다. 언젠가 곰이 무얼 보나 궁금해서 홍은 곰 옆에서 무릎을 굽히고 곰이 보는 곳을 보았다. 거미줄이 보였지만 홍은 곰이 보고 있던 것이 그게 맞는지 몰랐다. 곰아 넌 뭘 그렇게 열심히 보니. 홍이 곰이 보는 방향을 볼 때, 아무도 모르게 곰은 고개를 돌려 홍을 보았을 수도 있겠지. 홍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먼지가 풀썩 일었다가 다시 침대에 내려온다. 곰이 나를 몰래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무섭다. 그리고 먼지가 너무 많던데. 청소해야지. 생각하면서도 홍은 자신이 청소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발등에 발바닥을 비볐다. 발바닥에서 서로 엉겨 붙은 먼지가 무거워져 바닥에 떨어졌다.

홍은 누워서 어제의 그를 생각했다. 중간키의… 좀 말랐나? 아무튼 그런 남자였고, 실장이 데려온 남자였고, 홍의 친구였고, 홍이 대학에 다닐 때 같은 집에서 살던 남자였다. 남자는 홍을 보자마자 알아보았고, 홍도 그랬다. 남자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고 홍도 그랬다.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서 이리저리 말을 걸었다. 홍은 적당히 대답했다. 홍은 가방에서 돈을 꺼내 남자에게 주었다. 십삼 만원이었다. 남자는 그 돈을 멀뚱히 보다가 받았다. 홍은 그 때는 당황해서 다 피하고 싶었다.

 

홍은 대학에 있으면서 과외로 학비를 벌었다. 납작한 머리의 남자아이였다. 홍은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한 단에 사십만 원을 벌었다. 조금 가르치다가 남자애 둘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자 한 달에 팔십 만원을 벌었다. 부모가 보태주는 돈과 합해 학비와 월세를 내면 남는 돈이 조금 있었다. 홍은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었다.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아했고, 술을 마시면서 춤추는 것도 좋아했고, 아무튼 술을 마시면 뭘 하든 홍은 좋았다. 홍은 술을 마시면서 이것저것을 하기 위해서 돈이 많이 필요했는데, 그 조금 남은 돈이란 게 금방금방 떨어지는 것이 특기라서 홍은 돈에게 자주 실망했다.

돈이 많은 선배가 있었는데 남자였다. 주말마다 여자를 데리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모텔에 가는 남자였다. 홍은 그 남자의 여자가 자주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홍은 남자에게 갔고, 며칠 뒤 홍은 남자와 주말에 시내로 갔다.

돈을 벌어놔도 자꾸 부족하더라고요. 방값으로 내고, 학비내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금방 텅장이에요 텅장. 무슨 뜻인지 알아요? 통장이 텅 비었다고. 웃기지? 아무튼 사실 내가 이것저것 많이 쓰긴 하는데 그렇게 많이는 아니거든요.

남자는 그래? 그래? 그렇구나. 하면서 여자의 말을 들었다. 남자는 그래? 그래? 하면서도 그래? 그래? 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고 있었다. 홍 넌 술을 많이 마시잖아? 많이 마시면서 많이 놀잖아? 그걸 이것저것이란 단어로 적당히 뭉뚱그릴 수 있는 거야? 그래도 돼? 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누구나 봐도 알 수 있었지만 홍은 그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었다.

그 남자 선배 말고도 홍이 돈이 필요하다 돈이 모자라다 돈돈돈 소리를 하는 것을 들어준 남자는 많았고, 그래? 그래? 하는 사람의 얼굴을 흉내 내는 남자들이 많았고, 홍에게 돈을 주는 남자는 많았다. 남자들은 어쩐지 홍에게 돈을 많이 주면 자주 모텔에 데리고 갈 수 있다는 뭐 그런 걸 알고 있다는 걸 자랑스레 여기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두 달 지나서 과외를 받던 애들 중 하나가 그만두었다. 이제 홍은 다시 사십만 원을 받고 고등학생을 가르쳤다. 고등학생은 네 샘 네 샘 하면서 수업을 듣는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작 수학 하나 가르치는데 왜 사십만 원을 받는지 홍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홍이 그에게 필요하고, 그의 부모는 홍에게 사십만 원을 주었다. 어쩌다가 정기적인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든 홍은 돈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고등학생이 홍에게 선생님 남자친구 있어요? 하고 물었다. 홍의 대답은 없어. 였다. 홍은 많은 돈이 많은 남자 선배들을 떠올렸으나 대답은 없다고 했다. 왜냐면 그 남자 선배들은 남자친구가 아니거든. 절대로 그런 남자들은 나 남친 생겼다? 하고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지 않거든. 그럴 수도 없거든.

 

홍은 실물보다 좀 예쁘게 나온 사진과, 나이와, 홍의 방에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액수를 키보드로 쳐 인터넷에 올렸었다. 돈은 더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홍은 완료되었습니다. 하는 정떨어지는 멘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완료되었습니다. 저 한 마디에 내가 0과 1의 조합이 되어 여기저기 흩뿌려지는 건가? 홍은 대학에 다니던 때를 생각했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정말로 내 인생에 대해서 생각했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해. 그런데 진짜야? 정말로 나는 내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었어?

했었어. 정말이야. 나는 열심히 살아서 열심히 하는 CEO가 되고 싶었어. 진짜. 아냐 CEO가 궁극적인 목푠 아니구, 그러니까 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잖아. 동의해? 아무튼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려면 CEO가 되면 좋고, 그러니까 CEO가 되려고 마음먹었어. 돈이 많아지면 계속 뭐든지 할 수 있잖아. 음. 그런 삶은 숫자로 정의되는 삶과는 다르지.

하지만 홍의 삶은 지금 0과 1이다. 대충은, 그렇다

 

십삼 만원을 고스란히 다시 통장에 넣어두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기계가 지폐 열세 장을 삼켰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으나 나는 지폐가 갈기갈기 찢겨 숫자가 되어 통장에 입력되는 광경을 상상했다. 숫자가 되는 것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이년. 이년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크게 돈이 드는 일이 없었으니 남들처럼 누굴 먹여 살리려 뼈 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 과외선생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두 달 이상 계속한 적은 없었다. 아무튼 꾸역꾸역 지냈다. 꾸역꾸역 살아왔다. 찐득하게도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이년은 빨리도 지나갔다. 이년동안 서점과 서점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살았다기보다 기웃거렸다. 기웃거리다 일이 있으면 돈을 받고 했다. 그랬다.

 

대학에서 홍을 만났었다.

 

홍은 대학에서 그를 만났었다. 그들이, 그 둘이 친해진 이유가 부족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슷한 것들끼리 알아보는 어떤 것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작가끼리, 동물을 키우지 않는 사육사끼리, 사람을 죽이지 않는 살인마끼리 알아보는 것이었다. 둘은 계속 글을 쓰지 않고 동물을 키우지 않으며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서 친해졌다. 어디서 수렴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친해졌다. 그들은 돈이 무서워서 ―사실 홍은 무섭다기보다 귀찮았다. 돈이.― 같은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같은 집에 있으면 집세를 절반만 부담하게 되니까. 이건 참 좋은 것 같다.

집을 얻고 몇 주 뒤, 그는 홍이 어떤 일을 하며 돈을 가져오는지 알게 되었다. 홍은 대수롭지 않게 그에게 말해주었다. 홍을 보던 그는 표정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으려 그의 방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등을 보이며 그래? 했었다. 홍은 응 했다.

그때부터 그는 식탁에서 웃으며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홍도 그냥 가만히 밥을 먹었다. 둘 다 가만히 밥을 먹었다. 홍으로서는 그러는 그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어떤 기분인지 전혀 몰랐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니 말로 표현하기 귀찮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도 그것의 이유를 잘 모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홍은 그게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또 병신 같다고도 생각했다.

왜 갑자기 병신 같아졌니. 병신아. 뭐 좀 해봐. 말해봐 말. 말 몰라? 말도 모르게 된 거야?

언제는 그가 새벽에 말없이 홍의 방에 왔다. 홍은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도 가만히 있다가, 숨을 들이쉬고 돌아갔다. 홍은 그게 진짜진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홍은 영문을 몰랐다. 혹시나 그가 야한기분이어서 그러는 것이라면 홍은 차라리 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냥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홍은 어둠 속에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그의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듣고, 잠들었다.

그가 휴학 신청을 하고 온 날 밤, 홍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갔다. 그는 두꺼운 옷을 입고 홍을 뒤따랐다. 좀 늦은 저녁에 홍과 그가 향한 곳은 학교 앞 포장마차였다. 홍과 그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홍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소주병을 받아 오랜만에 그 금속 뚜껑을 돌리는 손가락의 감각이 좋았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소주잔도 되게 반가워서 홍은 볼 근육이 아픈데도 계속 싱글벙글 웃었다.

휴학은 왜 한 거야?
그냥 뭐….

왜? 군대가? 너 군대 안가도 된다며.

그런 거 아냐.

그는 잔을 들고 덜 익은 삼겹살을 보고만 있었다. 홍은 겉절이를 뒤적이다 다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뭔데, 공부하기 싫어?

그건 아냐. 그냥…… 복잡해서.

뭐가 복잡한 건데.

그는 우울한 표정을 하고 물끄러미 홍을 보았다. 홍은 씩 웃고 젓가락을 앞니로 물었다. 홍은 얼굴만 웃었다. 홍에게 그는 갑자기 미지의 사람이 되어버렸고, 그가 느끼는 것은 말 그대로 미지이기 때문에 그도 홍도 알 수 없었다. 홍은 알 수 없는 어떤 것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지어야 했다.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리면 아 졌다 졌어 하는 기분일 것 같아서 실실 웃었다.

 

홍은 좋은 친구였다. 홍은 학식이 도저했다. 생각이 깊었다. 성실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주었다. 놀고 싶은 날엔 밤새 같이 떠들어 주기도 했다. 보고 싶은 잡지를 사다주었다. 생일도 챙겨주었다.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나를 위해 월세가 싼 집을 찾아주었다. 그래도 부담스러운 집세를 절반씩 내주며 같이 살았다. 나는 네 친구 어쩌고 하는 노래도 불러주었다.

홍은 여러 가지로 불리었다. 갈보, 창녀, 논다니, 매춘부, 창부, 곰을 산 날까지 모르고 있었다. 홍이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말을 듣고 있을 때, 내 방에는 곰 인형이 있었다. 곰 인형은 친구가 애인에게 주는 것을 보고 샀었다. 곰 인형은 편지를 두 손에 쥐고 있었다.

홍의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홍이 그렇구나. 그 생각을 했었다. 나는 이 생각을 하고 있구나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 생각에만 몰입했었다. 편지를 슬쩍 곰 인형에게서 뺏어 보던 책 사이에 숨겼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편지를 숨길 때도 나는 편지를 숨기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홍에 대한 사라지지 않은 동경과, 새로이 자리 잡은 홍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머릿속에 같이 살았다. 거부감? 확신할 수 없었다. 홍 때문이다. 홍이 그런 말을 해서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나쁘네 홍은.

 

홍은 옷을 챙겨 입고 방에서 나왔다. 목적은 없다. 찾는 사람도 없다. 그래도 홍은 나올 수밖에 없다. 오늘 저녁에 자괴감에 빠지지 않으려면 돌아다니는 정도는 해야 했다. 다리를 아프게 해야 했다.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돌 때 오른쪽 무릎이 아플 정도는 되어야 했다. 홍은 침을 죽 뱉었다. 방 안에서 마신 찐득한 공기도 뱉었다. 입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기웃거릴 곳도 없이 홍이 동네를 빙빙 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가 이곳에 있다.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 나는 여기 있어. 여기 이렇게 걷고 있어. 여기서 동네를 돌고 있지. 음. 나는 걸으면서 있어. 이거 누가 했던 말 같은데?

어, 야!

실장이다. 홍은 당황했다.

오랜만이네! 요즘 출근 안하던데?

어… 안녕. 몸이 좀 그래서 쉬려고. 넌 요즘 뭐 해?

예의상, 예의상 이런 건 물어봐야지. 홍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한편으론 이 애한테 예의를 갖추어야 하나 생각도 했다.
계속 이거 하고 있지 뭐.

실장은 씩 웃으며 양 손바닥을 위로 올렸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는 보지 못했던 제스쳐다. 그 애는 벌써 어른이 되었군. 그렇군. 성인인가. 미성년자가 아니구나. 음. 나 어릴 때는 어린 게 너무 싫었었는데.

어디 가는 중?

실장이 철없는 말투로 묻는다. 홍은 어떻게 대답할까 망설인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생각해본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느라 땀을 내보낸다. 홍은 순발력이 필요한 이 상황이 진짜 싫다. 시간이 12시에 가까웠다.

점심 먹으러 가.

어 나돈데. 혼자?

실장은 씩 웃었다.

 

테이블. 실장과 홍의 대화가 오고 간지 좀 되었다. 홍의 앞에는 샌드위치가 있다.

실장은 더 시끄러운 남자가 되었다. 대학생이면서 홍이 일하는 곳의 실장 일을 하고 있는 그는 요란했다. 원래 요란한 성격이었는데 더 요란해졌다. 굳이 요란하게 시끄럽다.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들을 홍은 싫어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존심이 셌다. 자존심이 센 남자가 이야기할 때 홍이 정색하면 그는 다리를 떨면서 온갖 허구를 늘어놓았고, 홍이 계속 반응하지 않으면 갑자기 일이 생각나서 돌아갔다. 그런 사람들은 어찌나 바쁜지 꼭 나갈 때 화면이 꺼진 전화기에서 전화가 왔다.

실장도 그런 남자들을 잘 안다. 그런 남자들이 허풍을 게워내는 모습은 얼마나 봐주기 뭐한 꼴인지도 안다. 고로, 실장의 시끄러움은 헛소리가 아니다. 헛소리 안 한다 실장은.

실장이 말한다.

요즘 애들 누가 관리하는지 알아? 내가 하거든. 업소 커지면서 큰 실장 자리도 늘어났어. 나 이거 잠깐 하면서 용돈이나 얻으려 했는데 아마 뿌리박을 것 같다. 아무튼 지금 1002호 빈 거, 지금 다시 안 들어오면 뉴페 넣을 거야. 니 방 없어진다고.

실장이 물을 홀짝였다.

솔직히 너보다 와꾸 괜찮은 애들 많아. 근데 내가 너 생각해서 아직까지 방 비워둔 거야. 상무 형이 방 남는 거 싫어하시는데 내가 너 처지 아니까 빙빙 둘러대면서 방 그렇게 두는 거라고. 솔직히 니가 지금 이거 아니면 벌어먹고 살 데는 있냐?

실장이 또 물을 홀짝였다. 홍은 눈빛을 바꿔 실장을 본다.

왜 그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뭐… 세상에 업소 일 하는 여자가 너뿐이냐? 너보다 더한 년들 많아. 그러니까… 내말은,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일단은 너 다른데 어디 자리 잡을 때까지 오피 있으라고.

실장이 컵을 내려놓았다.

야.

실장이 눈을 깜빡 했다.

몇 년 전까지 너한테 수학 가르치던 년이 업소 알바하는거 보니까 감회가 존나 새롭디? 내가 우습지?

실장이 가만히 있다가 코웃음을 훅 친다. 홍이 계속 말한다.

내가 너한테 내 방 비워두라고 했냐? 씨발 내가 업소 아니면 어디 꼬라박혀서 뒤지는줄 알고 있겠네? 좆까 역겨운 새끼야. 내 자리 내가 알아서 만들어. 니가 개 같은 오지랖 안 떨어도 알아서 한다고. 알았으면 상무새끼 눈치 그만보고 방 채워. 나 간다.

홍이 일어서서 밖으로 나간다. 홍은 일어서면서 한숨을 쉬었다. 홍은 마음이 불편했다.

실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밖으로 가는 홍에게 말한다.

나 너 무시하는 거 아냐. 너 이쪽에 있을 여자 아냐. 내가 알아. 근데 누가 널 모르잖아. 몰라주잖아.

홍은 우뚝 멈췄다.

자존심 상하겠지. 안다 알아. 뭐든 해보려고 하는데 안 되는 거. 그걸 아무도 몰라주는 거. 억울하겠지. 근데 너 자존심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개같고 좆같고 그래도 일단 살고 보는 게 정답 아냐? 그리고 다 너를 모르는데 니가 당장에 업소에서 일한다고해서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실장은 담배를 꺼냈다.

건방져 보이겠지만 사람은 내가 더 많이 만나봤어. 니 치부는 치부도 아냐. 니가 역겹다고 하는 나보다 더 역겨운 애들 진짜 많더라. 진짜로. 뭐… 생각 많이 해봐 그러니까.

홍은 건물을 나갔다.

 

휴학 중에 고향에 왔다. 맹한 얼굴의 곰 인형을 홍의 방문 앞에 놓아두고 왔다. 잠시만 고향에 머물고 싶었다. 홍을 잠시만 보고 싶지 않았다. 홍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홍을 잠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아. 그러면서 또 홍은 돈을 줄 남자들의 전화를 받고 있을까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짜증이 났다. 고향에까지 와서 홍의 생각이라니. 나는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개를 구경했다. 고향 동네에는 집집마다 개가 있었다. 홍을 닮은 개는 없어서 안심했다. 당연히 사람을 닮은 개는 드물지. 홍은 개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음, 홍은 미인이지?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아마 지구 전체에서 홍을 닮았다라고 할 수 있는 개는 없을 거야. 개들은 나를 볼 때마다 두리번거렸다. 백 마리는 족히 넘을 개들이 전부 나를 보면 두리번거렸다. 개들은 그것이 나를 보았을 때의 반응이라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러면 혹시 내 주변에 무언가 있는 것인가 궁금해 하면서 두리번거렸다. 결국 나는 고향에서 개와 주변을 둘러보는 놈이 되었다.

개는 많았다. 마음먹으면 마릿수를 셀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사실 그럴 수 없다. 숨어있는 개가 있고, 새로운 개가 있고, 죽은 개가 있고, 떠나간 개가 있고, 바뀐 개가 있다.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면 개들을 세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영원히 바뀌는 것이 개들의 수다. 개들은 영원히 바뀐다. 두리번거리는 개들은 내가 셀 틈을 주지 않고 바뀔 것이다. 그게 사실이던지 거짓이던지 어쨌든 개들은 계속 숫자가 바뀐다. 생각보다 더 빨리 늘어나고 생각보다 더 빨리 줄어든다. 그런 식이다. 아 근데 개들 표정이 너무 멍해서 무섭다. 난 왜이렇게 무서운 게 많지?

그때쯤 홍은 내 머릿속에서 개가 되어 있었다. 개 같은 개. 나는 개한테 인형을 가져다 준 놈이었다. 그런 놈이었고, 개에게 인형을 가져다준 나도 개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옥상에 올라왔다. 도시에는 구경할 개가 없다. 도시의 옥상에서 보이는 것은 지붕의 바다와 전봇대들이었다. 지진이 나면 지붕들이 출렁이며 진짜로 바다가 될 것 같다. 음. 하늘은 구름이 많다. 카메라를 꺼냈다. 고향에서 가져온 카메라였다. 나는 하늘 위 제멋대로 다니는 구름들을 닥치는 대로 찍어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구름을 찍을 수 없을 때까지 찍을 것이다. 새도 찍고 비행기도 찍고 희미한 흰색 달도 찍어야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나는 하늘을 많이 보는 애였던가? 스무 살이 되고 나서부터는 하늘을 많이 보았었던가? 확실한건 최근에는 그다지 많이 보지 않았다.

찍으면 찍을수록 하늘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하늘엔 개도 없다. 그래서 개를 보며 내 주변에 뭐가 있는 건가? 하며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개도 없어서 홍도 생각나지 않는다. 찍은 사진들을 확인해 보았다. 찍은 사진을 그 자리에서 확인하면 방금 전까지 떠 있던 하늘이 너무 하찮게 보이지 않아? 좀 그래. 그때 기분 알아? 알거야 아마. 피사체는 참 아름답지. 근데 나는 아름답지 않아서 내 렌즈로 보는 피사체는 너무 아름답지 않아. 퇴색되었지. 그런 느낌이야. 맞아… 근데 날 아름다운 사람이 렌즈로 보면 난 아름다울까? 자신이 없다.

그런데 인생은 참 아름다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하늘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잖아. 그거 중에 하나야. 음. 인생은 아름다워. 그런데 내 렌즈는 아름다운지 아닌지 확신을 할 수가 없다.

하늘까지 올라갔던 정신이 수직으로 땅에 내리꽂힌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두 발이 옥상의 시멘트 바닥에 단단히 박혔다. 무거운 곳이다. 왜냐면 사진을 확인하다가 홍의 방이 있는 오피스텔 건물을 찍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찍었는지 무의식중에 찍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에 나는 막연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홍을 다시 볼 것이다. 좋든 싫든 계속 홍의 생각을 하다가 언젠가 다시 한 번 홍의 방을 찾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면 나는 아직까지도 홍의 생각을 계속 하고 있으니까.

홍은 영원히 내 머릿속 한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아무리 쫓아내도 뒤를 돌아보면 홍은 계속 웅크리고 있다. 홍은 개다. 개다. 생각하면 개는 홍이 되어 있다. 지붕의 바다 위에서. 혹은 오피스텔 건물에서 개는 계속 짖는다. 홍은 계속 소리친다. 뭐라고 소리치는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굳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들어서 좋을 것 없잖아.

홍은 더 이상 동경하던 홍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갈보잖아. 난 홍의 엘리트적인 면모를 동경했지 그 이외의 것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잠깐만, 그렇다면 나는 홍을 동경한 거야 아니면 홍의 엘리트다움을 동경한 거야?

홍의 방에선 본능을 자극하는 냄새가 났다. 초라한 냄새이기도 했다. 차라리 나는 그것이 향수 냄새가 아닌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향수 냄새가 싫었다. 향수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났다. 그런 인공적인 냄새가 싫었다. 사람이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한 향기도 자연히, 우연히 피어나는 향기가 지닌 매력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그리고 우연히 피어나는 향기는 대게 홍을 떠올리게 한다. 가루처럼 날리는 향기. 공장이 아닌, 기계가 아닌 곳에서 인공적이지 않은 온기를 품고 찾아오는 향기. 그런 따스한 향기. 가만히 있어도 뺨이 뜨뜻해지는, 바라볼 수 있다면 마치 주홍빛을 내지를 것 같은, 그런 향기. 불꽃같은 홍의 향기.

고향에서 지내며 그런 홍의 향기를 잊을 때쯤 자꾸만 늑골안쪽에서부터 구름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건 구름이 아니라 먹구름 같기도 하고 어쩌면 안개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기분일 때마다 콜라를 사다 마셨다. 사이다는 투명해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콜라를 마셨다. 목이 따가웠다. 그래도 먹구름인지 안개인지는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마셨다. 컵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들고 마셨다. 끄윽끄으윽 트림을 하며 다 마셨다. 그러고는 게워내기도 했다. 그러길 반복하면 콜라도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나는 소주와 콜라를 같이 마셨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서 잠을 잔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구름은 자꾸 퐁퐁 솟았다. 역겨웠다. 뭘 해도 구름은 씻기지 않고 머리만 아프다.

 

그 초라한 냄새는 홍과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둘 다 대학을 졸업하고 좁은 방에서 혼자 살고 있다. 간헐적인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하며.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할까 생각하기도 너무 피곤해서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한 생활. 피곤 속에서 우리 둘은 살아가고 있었다. 혹은 죽어가고 있었다. 다른 공간에서.

홍을 다시 보게 되고, 홍의 방에 이야기만 놓고 왔다. 다시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아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막 말한 이야기였다.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이야기. 별 의미 없는 이야기. 의미 없는 말을 계속하자. 모든 일의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잖아? 사실 이년 만에 만났다고 해도 그런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방을 나와 집에 들어가서 잠만 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나도 잘 모른다. 아마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보면 반가운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불문율 때문이 아닐까. 그런 걸로.

홍이 몸 파는 여자인 게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바랐다. 이거 진짜다. 진짜로 간절히 바랐어. 잘 안되더라.

 

홍은 쓰레기통에 붙은 콘돔을 떼어냈다. 세면대에 던져놓고 옷을 입었다. 이불을 정리했다. 화장지에 물을 적셔 방 침대 근처 여기저기에 보기 싫은 흔적들을 닦아 없앴다. 테이블의 먼지도 닦았다. 종일 혼자 방에 있으니 답답했다. 홍은 뭐라도 해야 한다는 기분이었다.

현관문 옆에 앉아있는 곰 인형이 홍을 쳐다보았다. 홍이 손을 흔들자 곰도 홍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곰에게 딱히 표정은 없었지만 곰의 동작에는 순수함이 있었다. 종일 문 옆에 매달려서 홍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지만 곰은 그저 손을 흔들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곰이 손을 흔드는 동작은 사람들이 지갑에서 현금과 카드를 꺼낼 때와는 달랐다. 욕망을 풀기 위한 야릇한 동작이 아니었다. 홍은 그래서 곰이 손을 흔드는 동작이 우스웠다. 나 곰이에요 인형이에요 하는 것 같았다. 저것이 곰 인형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홍은 곰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홍의 방을 나가며 곰 인형을 보았을까.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랐다. 뭐가 되면 좋을지 몰랐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되도록 남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일을 하고 싶었다.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일을 하면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그러면 짜증이 날 테고, 그러면 일을 그만두게 되고, 그만두면 사람들이 또 손가락질 하겠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부끄럽지 않은 대학에 가서 부끄럽지 않은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걸 하려면 부끄럽지 않은 성적이 필요했고, 그걸 위해 노력을 해봤다.

하지만 노력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것을 찾아 헤매었지만 정작 나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몰랐다. 남들을 보고 이쯤이면 부끄러운 정도구나 생각만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부끄럽지 않아도 부끄러움의 기준은 자꾸 변했고, 자꾸 눈알들이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숨었다. 여태까지의 인생을 단칸방에 숨겼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숨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놓고나니 좀 마음이 좋아졌다.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팔트다. 저 아스팔트에 처박히면 박살나는 것이다. 두개골이든, 카메라든, 홍이든, 죄다 박살나는 것이다. 나는 그 시커먼 지면으로 카메라를 던져준다. 잘 가라. 잘 가라 카메라. 잘 가라 구름. 잘 가라.

 

홍은 방을 나왔다. 하지만 홍이 바라는 것은 방 밖에 없었다. 홍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곰 인형을 가지고 나왔다. 곰 인형이 홍은 마음에 들었다. 홍은 곰 인형을 가지고 산책을 할 것이다. … 홍이 좀 걷다가 멈췄다.

홍은 다시 방에 들어가 담배와 라이터를 가지고 왔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입술이 말라서 담배랑 붙었다.

홍은 오피스텔 건물 뒤쪽으로 십오 분쯤 걸었다. 그러면 작은 언덕이 있다. 작은 언덕에 마당이 있는 주인 없는 집이 있다. 홍이 마당에 들어가려다가 대문 옆에 있던 대나무 빗자루를 쓰러뜨렸다. 홍은 대나무 빗자루를 보다가 빗자루로 마당을 쓸었다. 마당을 쓸었는데 낙엽이랑 마른 풀이 수북이 쌓였다. 홍은 그 중간에 담배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켜 가져다 대었다. 마른 잎들은 불을 받고 하얀 연기를 내다가 갑자기 불을 뱉고 타들어갔다. 하얀 연기가 요상한 냄새를 풍기며 피어올랐다. 담배 포장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불이 닿은 부분에 재가 생겼다. 마른 잎들은 저들 스스로 불길을 끌어와 자신의 몸에 칭칭 감았다. 붉은 목도리 같다. 붉은 빛을 감으면 잎들의 빛이 사라지고 검은색만 남았다. 미련 없이 툭 떨어졌다. 홍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홍은 어느새 무언가가 보고 싶다. 눈앞에서 누군가 불을 목도리처럼 휘감고 재가 되는 모습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뭔가 달리질 것 같아.

홍은 오늘 불장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홍은 주인 없는 집안으로 들어가 쓰레기들과 필요 없고 불에 잘 탈것 같은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나와 있는 대로 태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홍은 소각장에서 괜찮게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에 잘 타는 것들이 불에 타는 것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연기가 망령처럼 피어오르는 것도 좋았다. 홍은 즐거워서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 손에 든 곰 인형을 바라보았다. 클라이맥스다. 홍은 중얼거리며 자기가 마음에 들어 하던 곰 인형을 불의 중앙에 놓는다. 곰 인형이 비명을 질렀다. 홍은 이제 씨익 웃는다.

참아. 뜨거워도 참아. 그래야 어른이 될 수 있는 거야. 누구나 다 참았어. 너만 힘든 줄 아니? 다른 곰들을 봐. 얼마나 필사적이야. 근데 넌 왜 자꾸 엄살이니. 아휴, 열심히 좀 해라.

곰이 눈물을 흘렸다. 곰의 다리가 타들어간다. 곰의 몸통이 타들어간다. 곰의 팔이 타들어간다. 곰의 머리가 타들어간다. 곰이 죽었다. 죽었어? 응. 죽었니? …

 

나는 달리고 싶었다. 카메라를 집어던지면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기분이 계속 이상하다. 뛰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어디로 뛸까. 무의식과 확률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뛰면서는 내 발과 앞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왼쪽 골목을 지나 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오른쪽 골목을 지나 상가 건물들 사이로 지나갔다. 계속 그랬다. 계속 그러다 보면 지나온 길을 잊고 다시 그 길을 달린다. 계속 그런 식이다.

그런데이상하다내가점점오피스텔로가까워져간다내발이어디로가는지내다리가어디로가는지알고싶지않다근데내가자꾸오피스텔로간다홍이있는오피스텔로간다무섭다홍을보고싶지않다근데홍이보고싶다홍홍홍이어디에있지홍어디있는거야대답좀해봐뭐라말좀해봐홍어디야어디있어내가알수없는곳인가근데홍이누구더라맞다내친구홍내매춘부친구홍홍을잃어버리기싫어근데무서워너무

홍이 정말 있을까? 사실 내가 정신병이 있어서 홍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외로웠던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오랜만에 제정신을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오피스텔을 향해서. 천천히. 확인해야한다.

이제 이 작은 언덕을 곧장 내려가면 오피스텔이다. 나는 터덜터덜 걸었다. 무릎이 아팠다. 볼이 따가웠다. 나는 길옆에 있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금 떨어진 곳의 집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불인가. 누가 집에 불을 질렀나. 아니다 연기가 적군. 뭘 태우나보다. 그 집을 계속 보고 있었다. 집. 집이라. 홍이 생각나네. 왜?

홍이 나왔다. 뭐야. 홍이네. 제 말하면 온다 이건가? 왜?

어! 여기서 뭐해?

홍이 뭐라 말한다. 알아들을 수 없다. 내가 지금 생각이 너무 복잡하다. 오랜만에 제정신인 기분이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근데 홍은 잘도 말하네. 근데 말을 잘 못하네. 내가 알아듣게 좀 말해라. 언덕 아래에 홍의 방이 있는 오피스텔이 있다. 홍이 오피스텔에 들어가면 오피스텔에 불을 지를까. 화재. 오피스텔에 불이 나서 홍이 불에 타 죽으면 더 이상 홍이 나타나지 않을까.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아. 홍은 사라지면 안 되지. 홍은 내 친구고. 홍이 있어서 난 즐거웠고. 근데 내가 대가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홍을 죽일 수는 없지.

넌 참 머저리 같다.

홍이 또 뭐라 말한다. 머저리? 그건 알아들었어. 나보고 머저리라고 한 거야? 좋아. 난 머저리야. 그거 할래요!

홍은 불이다. 불을 불태워 죽인다니. 좀 그렇지? 홍은 불을 닮았지? 저 여자는 불을 닮았어.

 

언제라도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홍. 그래서 매력적이었던 홍. 그런 그녀는 매춘부가 되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짝짝짝.

 

난 가끔 말이야. 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 차라리 불에 홀리고 싶어. 아무도 날 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다… 말릴 사람이 없다.

홍이 곰 인형을 가지고 있었지. 가지고 있었지. 내가 그거 선물했었지. 왜 직접 주지 못하고 방에 놓고 고향에 갔을까. 이해가 안 되네. 와. 나 진짜 또라인가봐. 머릿속에서 이상한 여자를 만들어서 인형을 선물하고 별 짓을 다 한다. 와…. 편지? 편지도 있었던가? 거긴 뭐라고 썼더라? 근데 내가 선물을 주었던가? 아닌가? 나는 드디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볼에 끈적한 뭐가 흐르는 게 느껴진다. 손가락으로 쓸어보니 피였다. 따끔거린다. 달리면서 어디에 긁혔나보다.

너 볼에 피나. 너 왜 이리 멍하냐. 야! 어이!

홍이 또 또 뭐라 말하네. 아 그래. 대답해야지. 성의를 보여야지.

어디 긇힌 것 같은데.

성의 있게 대답한다고 했는데, 홍이 그걸 알았을까 몰랐을까.

 

홍의 방이다. 오피스텔에 있던 방. 내가 홍이 다시 보았던 그 방이다. 큰 침대가 있고,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있고, 작은 책장이 있고, 화장실이 있고, 냉장고가 있다. 홍이 있고, 내가 그 옆에 앉아 있다. 홍이 휴지로 볼의 피를 닦았다. 피가 빨갛다. 피가 빨갛다. 피가 빨갛다. 피가 빨갛다. 피가 빨갛다. 피가 빨갛다! 피가 빨갛다!! 내가 지금 자꾸 피가 빨갛다. 라고 하는 것은 홍의 방에 있던 것 같은 곰 인형이 지금 확실히 없기 때문이다. 왠지. 왠지. 왠지. 곰 인형이. 없으니까. 왠지. 뭐라고 할까.

홍은 열심히 사과를 깎았다. 열심히 깎았지만 서툴러서 사과 껍질이 굵게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홍의 방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실제 넓이가 더 넓은 것 같다. 다른 세계 같다. 홍의 방이라서 그렇다. 이 방이 홍의 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방이었으면 이런 생각은 안했겠지. 멀미난다.

자꾸 멀미가 난다. 자꾸 멀미가.

홍이 사과 한쪽을 이쑤시개에 꽂아 건넸다. 앞니로 바로 사과를 물어 먹었다. 홍은 그걸 보고 웃었다. 멀뚱멀뚱 하다가 볼을 긁적였다. 볼의 상처에 손톱이 닿아서 움찔했다.

어딜 다녀온 거야?
피곤하지 않은 곳.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신 있다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사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손톱이 볼의 상처를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네가 없는 곳. 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까닭은 궁금하다.

그럼 여긴 피곤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 안에서 씹히고 갈려 죽이 된 사과를 천천히 삼킨다. 뇌보다 심장이 먼저 이런 상황에 반응하는데 사람들은 왜 마음이 뇌에 있을까 심장에 있을까 고민하는 것일까. 홍은 무심하게 잘린 사과껍질을 입에 물었다. 홍은 계속 나를 보고 있고, 나는 사과를 본다. 나는 뭐라 말할지 모르겠다. 홍도 그렇겠지만 홍은 진취적인 성향이 나보다 조금은 더 있으니까 어떻게든 무슨 말을 하겠지.

너한테는 말하고 싶었어.

 

그는 적당히 조용했다. 적당히 사람다웠다. 적당한 삶을 살았다. 적당한 그가 마음에 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적당히 들었다. 무슨 질문을 해도 적당한 대답을 했다. 다 적당한 표정을 했다. 그래서 그냥 말했다. 나 몸 팔아. 오피스텔에서 일해.

그건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달랐다.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다행인 것은, 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은 그가 그저 그런 수준의 감상만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참 이상하다. 일관성 없다고 욕을 할 수도 없는데 나는 계속 속으로 욕을 했다. 아 하지말걸. 아 하지말걸. 시발.

나도 사과를 한 조각 먹었다. 앞니로 베고 송곳니로 찌르고 어금니로 으깬다. 베이고 찔리고 으깨질 때마다 사과는 아삭 아사삭 신음하며 단물을 뚝뚝 흘린다. 잘린 과육이 입천장을 긁고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사과는 축축한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목구멍이 간지럽다. 동산에서 훔쳐 따가지고 온 과일을 삼키는 기분이다. 간지럽고 아찔하다.

 

홍은 가끔 노래했었다. 잘 부르진 않지만 따라 부르고 싶은 목소리였다. 지금도 홍은 부른다 노래. 우리는 지금 아무데도 없어서 아무데도 아닌 곳으로 자꾸 편지를 보냅니다. 내 꼴은 없는 네 방의 열쇠처럼 알 수 없음을 돌아다닙니다. 입술을 뜯어내고 노래를 부릅니다. 검은 유리 속에서 바라보는 가만히 목을 잘라내는 나를 보며 또 난 다시 구렁텅이에 돌아갑니다. 입술을 뜯어내고 노래를 부릅니다. 입술을 뜯어내고 노래를 부릅니다. 입술을 뜯어내고 소리칩니다.

홍은 욕실에 들어갔다. 나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서 테이블을 본다. 테이블에는 낙서가 있다. 볼펜으로 한 것 같은데, 아마 홍의 낙서일 것이다. 홍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써놓았다.

 

삶은 예술이다.

예술은 주관적이다.

삶은 주관적이다.

주관적인 삶이다.

객관적인 삶은 있을까.

객관적인 삶.

어중간한 삶.

 

다른 손님들이 이 낙서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생각을 똑같이 하는 것일까. 낙서는 주관적이다. 낙서는 주관적이다.

홍이 불렀던 노래 가사를 생각해본다. 해괴하고 신기하다. 누가 불렀더라. 해변에서 공연을 하고 자기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드러머가 죽은 밴드였던가. 아니면 숲에서 공연을 하다가 서로를 죽인 밴드였던가. 아무튼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죽었었다. 노래는 죽기 전에 녹음했는데 죽고 나니까 께름칙하다. 기분이 이상해. 노래.

쏴아아

홍이 샤워를 한다. 음. 같이 살 때 자주 들었었지. 쏴아아. 사아아. 물이 막 떨어져. 바닥은 축축해지고, 머리카락은 무거워지고, 눈이 막 감기고. 발가락 손가락 사이사이에 따뜻한 물이 들어와서 좋지. 수증기도 좋고. 샤워는 좋다 좋아.

쏴아아

물이 아래로 떨어진다.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에는 오류가 없다던가.

오류가 없다.

아니다. 오류는 있다. 오류는 어디에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류는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항상 그걸 늦게 찾는다는 것이다.

쏴아아.

나는 오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나의 오류. 홍의 오류. 방의 오류. 물의 오류.

어이. 쏴아아.

홍이 뭐라 부른다. 쏴아아. 나는 대답 않고 계속 생각한다.

 

오류03

그릇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 일. 그릇되다.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릇되어 이치에 맞지 않다. 홍이 말없이 알몸으로 나오면 나도 말없이 옷을 벗고 우리 둘 다 키스를 하지 않고 서로의 섹스를 하고 나는 집에 가고 홍은 여기 있을 것이다. 이건 오류 아니지? 아니다 아니다 적어도 고차원적인 더 심한 심각한 오류가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일개 사람이고 나보다 높은 차원은 생각할 수 없다. 음. 이 문장에는 오류가 없는 것 같다.

 

넌 안 씻어도 돼? 쏴아아.

홍이 뭐라 말한다. 쏴아아. 나는 대답 않고 계속 생각한다. 생각한다 하고 생각한다. 어쩌다 홍의 방에 오게 되었나. 그거 약 발라야 돼. 방에 약 있는데. 방에 가자. 오랜만인데 이야기도 하고. 뭐하고 살았었어? 그런 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얌전히 앉아있는데 욕실에서,

탕, 탕, 쿵. 쿠궁.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홍이 무슨 소리를 냈다. 물소리가. 물소리가아. 물소리가 참. 아무튼 오류는 계속 있는 거다. 오류들은 계속 태어나. 어제도 생일이고 오늘도 생일이고 내일도 생일이고 참 좋겠다. 나는 오류입니다. 배회하는 오류. 잠들지 않는 오류. 잠들 수 없는 오류.

아니 이런 생각 말고, 저 소리 뭐야 근데?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소리가 참. 물소리가… 적적하다. 물소리가 참 불쌍하다. 쏴아아. 물소리가 애원한다. 쏴아아. 물소리가 자꾸 중얼거린다. 무릎이 간지럽다. 종아리가 간지럽다. 무릎 안쪽 팔꿈치 등허리 옆구리가 갑자기 너무 뜬금없이 간지럽다. 내 안의 공기와 내 바깥의 공기가 자꾸 다르다 큰일이다. ㅆ아아. 눈꺼풀을 닫았다. 그래서 자꾸 눈꺼풀이 보인다. 숨이 너무 빨리 쉬어진다.

뭐야? 뭐지? 뭘까? 뭐냐고. 뭐…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야 그 소리? 쾅? 쿵? 어… ‘꿍’과 ‘꽝’ 중간쯤이었나?

아. 두근두근한다. 손가락이 춥다. 곧 홍이…

홍이…

아, 눈꺼풀을 열었다. 욕실 문이네.

아니 그 소리 뭐였냐니까? 뭐가 떨어지는 소리야? 부딪히는 소리야?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느 샌가 물소리가 부담스럽게 길어졌어. 캄캄한 굴에서 물소리가 비명을 지른다. 나는 일어나 욕실 문 앞에 선다. 녹 냄새가 난다. 오류네. 오류다 이거. 홍이 이 안에 있다. 있어야 한다. 왜 왜 자꾸 불안하지 왜. 왜.

오류다. 오류를 직면했다. 이…안에. 나는 전등 스위치를 껐다. 아 뭐야 장난치지 마. 불 켜!

뭐라고?

ㅆ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라고?

ㅆ아아아아싸아아아아아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 야!!!

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

뭐야 대답해! 아까 장난치지 말라며! 장난은 너가 치고 있잖아요!

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on/off/…!!

뭐라 말좀 해봐! 장난치지 말라고 욕좀 해봐!

문을 두들기다가 달칵.

문을 열었다.

 

홍은 오늘 죽었습니다. 혼자만.

 

시체가 누워있다. 시체가 된 홍은 바닥을 베고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욕실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빨간 피도 흥건하다. 물은 계속 홍의 위로 떨어지고 있다. 나는 떨어진 샴푸 통을 만지작거린다. 그러고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홍의 앞에 쭈그려 앉는다. 샤워기에서 자꾸 물이 떨어져서 머리가 젖었다. 검지로 홍의 코와 입술을 만져본다. 죽었어? 응. 입술을 홍의 입술에 가져다 댄다. 뗀다. 검지로 입술을 쿡쿡 찌른다. 죽었어? 응. 손가락을 홍의 입 속에 넣어본다. 말랑말랑해. 이빨은 플라스틱 같고. 근데 진짜 죽었어?

바닥이 자꾸만 빨갛다. 바닥은 자꾸만 빨갛다.

 

그는 이제 생각을 천천히 한다. 바닥이 빨갛다. 홍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바닥이 계속 빨갛다. 그는 홍 옆에 나란히 눕는다. 따뜻한 물에서 자꾸 김이 나온다. 쏟아진다. 바닥은 계속 빨갛다.

 

홍이 죽었다. 미끄러져서? 그런가. 홍 너 근데 이렇게 죽을 거였어? 음… 대답 좀.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손으로 막 빨간 바닥을 휘저었다. 참방참방 소리가 났다. 쏴아아 소리는 너무 시끄러워서 이제 별로 신경 안 쓴다. 어지럽다. 홍이 죽었다.

 

그는 땀을 흘리다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누웠다. 어쩌지 이제 어째. 홍 진짜 죽었어? 아니잖아. 아니지? 그는 다시 홍을 보았다. 나 죽었어 미안해. 너무 어이없다. 나 좀 무거운가봐. 되게 빨리 떨어졌어. 와…. 막 넘어지면서 속으로 수백 번 살고 싶어 살려줘 소리질렀어.

아니야.

이제 그는 홍을 노려보고 있다.

너 그냥 기절한 거야. 일어나. 그는 홍을 잡고 흔들었다. 홍의 머리가 흔들려서 피가 더 나왔다. 너 안 죽어. 일어나봐. 홍은 계속 흔들렸다. 일어나! 일어…

 

그리웠던 홍.

 

나는 홍이 짐승처럼 죽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남자는. 누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는 계속 누워 있다. 눈꺼풀을 본다. 지금은 아무것도 디딜 수 없다. 그는 다시 고향에 가야겠다 생각한다. 홍이 차라리 없는 곳에 가야지. 응. 피곤하다. 물은 계속 떨어진다 오류는 계속 떨어지는 중이다. 오류가 물이 자꾸 돌아다니느라 바쁘다. 빨간 물이 참방참방한다. 아 맞다. 신고를 할까? 신고를… 에이 관두자.

잘 생각해. 잘 생각하자. 평소엔 많이 안했지만 지금은 생각을 많이 해야 해. 홍이 죽었잖아? 에이 관두자. 홍이 죽었어. 죽으면 끝이래.

그는 손바닥으로 물이 흥건한 바닥을 휘젓는다. 지금 이게 뭐지? 도대체 뭐냔 말이야. 바닥이… 그래 바닥이 홍을 쳐서 죽인거야? 그래도 돼? 그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 빨간 물이 참방참방한다. 그의 머리가 홍의 가만히 썩는 머리에 닿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홍의 볼에 입을 맞춘다. 핥는다. 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 끝낼까. 홍이 죽은 지금 전부 끝낼까. 영원히 홍을 생각하지 말자. 내 친구 홍은 오피걸이예요. 라고 말 할 일이 없잖아. 홍은 죽었어. 죽으면 끝이래. 내 가장 친한 친구 홍이 떳떳하지 못해서 (그럴까?) 나도 괜히 안 떳떳해지는 거 이거를 끝내자. 그는 몸을 돌려 무릎으로 홍을 디딘다. 그는 홍의 주인이 되었다. 열심히 뭘 한다. 괜히 샤워기 물이 계속 떨어진다. 그가 홍의 안에 열심히 들어간다. 홍은 열심히 죽어있다. 비린내가 참방참방 한다.

 

바닥은 계속 빨갛고 홍은 계속 차갑고 빨갛다. 밖에 눈 온다.

이주이
이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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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그: 주이로부터, 라니. 꼭 저한테 편지를 보낸 것 같아서 들어와 꾹꾹 다져 읽었습니다. 글틴엔 글 잘 쓰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글, 감사합니다.

    • 2015-04-25 21: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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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감사합니다. 음...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이런 칭찬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저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어.. 그러니까 제가 하고싶은 말이... 감사합니다...

      • 2015-04-28 23:28:2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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