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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 작성자 사싶
  • 작성일 2015-06-21
  • 조회수 151

 

미나를 들인 건, 헬퍼 몇 명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나. 전에 사귀었던 여자애의 이름과 비슷했다. 그 애와는 안 좋게 끝났다.

미나는 나보다 두어살 쯤 어리다고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헬퍼 일을 해왔다고 한다. 그 애 말고도 몇 명이 더 왔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을 헷갈리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결국 ‘헤이’라고 불렀다.

 

*

 

아빠는 밤 늦게만 돌아다니지 않으면 필리핀의 치안은 꽤 안전한 편이라고 말했다. 자주 외박을 하는 나를 겨냥해서 한 말이었다. 경비원은 없었지만 이쪽 동네는 부자들이 살기 때문에, 경찰이 자주 순찰을 돌았다. 마을 자체에 성벽처럼 커다란 문이 있고, 거기서 두어명이 팔짱을 끼고 보초를 섰다. 몇몇 집이 고용한 관리원도 있었다. 어느 집이든 잘 관리된 수영장이나 꽃이 만발한 마당은 기본이었다. 담장이 예쁘고 보안 장치가 달린 철문이 예쁜 집들이었다. 가끔 트라이시클 운전자*들은 내려주고 난 후에, 동네를 기웃거리다 내쫓기기도 했다.

학교가 끝난 후 주로 한인촌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다. 여자애 몇 명을 부르기도 했고, 무엇보다 한국 식당이 꽤 많았다. 한글도 쉽게 볼 수 있었다.

 

*

 

“헬퍼 바꿨어요?”

나는 아빠한테 한국말로 물었다.

 

“필리핀에 온 지 몇 년이 되도록 영어를 못해?”

 

“학교에서는 영어 써요.”

나는 젓가락으로 닭볶음에 있는 고추 씨앗을 걸러내며 말했다.

 

“또 그 질 안 좋은 애들과 우르르 몰려다닐 게 뻔하지.”

 

저번에 친구 유진과 여자애들을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

유진은 필리핀에서 사귄 친구였다. 대학교에는 한국인들도 꽤 있었다. 아니, 한국인들이 절반을 차지하다시피 할 정도였다. 유학사를 통해 입학한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교실에는 한국어가 영어보다 더 많이 들렸다. 교수들은 가끔 눈치를 주기도 했다. 시험 당일에도 오지 않는 애들도 수두룩했다.

 

유진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착실하게 공부에 매진하는 줄 안다고 했다.

유진과 나는 코리안 고 홈이라는 문구가 붙은 전봇대를 볼 때마다 주먹엿을 날려주곤 했다.

 

*

“너도 참 노답이라니까.”

유진은 낄낄거렸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이라고 한다.

 

유진이 건네준 약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가끔씩 한국 친구들의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무슨 성분이냐고 물어보자고 하자, 감기약을 조금 바꾼 거라고 했다.

 

“나도 한국에 가고 싶어.”

나는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 위에 앉은 여자애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 학교, 한국으로 치면 지잡대야. 재외국민 전형을 노려보든가 해야지.”

 

“쟤는 너 한국 가는 거 알아?”

 

“몰라.”

 

유진은 자기 여자 친구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도 여자애의 허리를 잡고 옷을 벗겼다.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신음소리와 말소리가 뒤섞였지만 어떤 종류의 이질감도 들지 않았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가요처럼.

 

*

 

단체 채팅방에 보낸 문자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전에 나눈 이야기들을 보곤 했다. 이 지겨운 나라. 에어컨을 틀었지만 여전히 더웠다. 문득 선풍기를 틀고 이불을 덮는 건 사치라고 말하던 엄마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가난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몇 번 연락이 왔지만 매번 거절했다. 선택을 후회하긴 싫었다.

 

*

 

안녕, 나는 미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까이서 본 미나는 피부가 꽤 하얗다. 유일하게 한국인의 느낌이 조금 나는 여자애였다. 짙은 눈썹이나 쌍커풀이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너, 내 친구 닮았어.”

나는 그다지 어려울 것 없는 영어로 말했다.

 

“그분, 예뻐요?”

미나는 웃었다.

 

응. 사진 보여줄까? 나는 갤러리를 넘겨 필리핀으로 오기 전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그날 이후 필리핀에서 찍은 사진은 얼마 없다.

 

“지금 시험 기간이죠? 도서관 다니느라 매일 늦게 들어오는 거예요?”

나는 대답을 회피한 채 머리를 긁었다. 미나는 나를 유, 아니면 준이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오빠라고 해. 미나는 서툴게 발음을 했다.

 

오빠.

그 애의 입술이 움직이는 게 작은 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미나와 조금 친해지고 난 후로는 시내로 나가 같이 밥을 먹었다. 미나의 한국인 아빠 얘기도 들었다.

 

“돈 벌어온다고 하고 몇 년째 안 오고 있어요.”

티브이에서 몇 번 미나와 비슷한 사정의 애를 본 적이 있다. 문제야, 문제.

 

“넌 한국에 가본 적이 없는 거야?”

나중에 같이 갈 일이 있으면 좋겠다. 으레 빈말을 했다. 하고 나서도 빈말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했다. 미나는 그러자고 답했다.

 

*

 

"준, 너네집 헬퍼 예뻐?"

자기 집 헬퍼들은 모두 아줌마라며 유진은 투덜거렸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 헬퍼한테 야한 말 좀 가르쳐봐. 나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언제 가는데? 곧.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노답인생, 노답인생. 트라이시클 운전사 한명을 불렀다. 그는 300페소를 요구했고, 중간에 예상보다 거리가 멀다면서 200페소를 더 요구했고, 시간이 늦었다면서 100페소를 더 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달라는 대로 줬다. 땡큐, 써, 땡큐.

 

*

 

나는 애원하다시피 미나의 몸을 더듬었다. 미나에게서는 세탁물 냄새가 났다. 처음 하는 일은 아니었는데 자꾸만 손은 떨렸다. 미나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나는 미나의 입을 막았다. 어떤 사고를 할 겨를도 없이, 정신차려보니 그 애는 브래지어를 다 내놓고 있었다. 그 애를 더듬은 촉각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미나를 밀쳤다.

 

지갑을 털어 100페소짜리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서랍 안에 넣어둔 1000페소짜리 몇 장도 꺼냈다. 손이 떨렸다. 그리고 미나에게 떠넘기듯이 줬다. 유흥가에서 여자를 안고 키스를 하던 유진처럼.

 

"이런다고 네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미나는 나를 준도, 오빠도 아닌 유라고 불렀다. 그러곤 종이를 몇 번 흔들어 보이더니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가방이 필요하다면 가져가. 미나는 가방을 챙겨 집을 나갔다. 나는 그 애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

 

경찰이 찾아온 건 다음날이었다. 아빠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넥타이를 정리하고 출근을 했다.

 

미나는 흰 천으로 덮어져 있었다. 토할 것 같았다. 그저 절차일 뿐이라고, 미나가 이 곳에서 일했던 게 맞냐고 경찰은 물었다. 나는 헬퍼였고, 우리 집에서 얼마 전에 일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경찰은 미나의 가방을 노린 사람들이 결국 살해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경찰은 끄덕이더니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아빠는 그 애를 보지 못했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는 밥을 먹으며 핸드폰에 저장된 미나의 사진을 지웠다. 가장 늙은 헬퍼가,오늘따라 일손이 부족하다며 투덜거린 게, 그 애가 남긴 전부였다.

 

 

 

사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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