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 사토시 [퍼펙트 블루]
- 작성자 neo
- 작성일 201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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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가수로 활동하는 '미마'는 돈과 성공을 위해 가수 생활을 접고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의 밝고 희망찬 모습에 비해 드라마에 잠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비참하고, 아이돌이었다는 이유로 감독과 제작진들은 미마를 비웃는다. 연기를 못하는 미마는 결국 누드모델의 길을 선택하고, 미마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스토커 '미마니아'는 미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사생활을 누출한다. 그 글을 본 미마는 자신이 직접 썼다는 착각에 빠져 아이돌 가수로 귀환하고 싶다는 마음과 더럽혀졌다는(돈을 벌기 위해 누드모델로서 몸을 판) 생각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중압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러던 도중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이 잇달아 살인되고 미마는 방 안에서 피 묻은 옷을 발견한다.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자괴감으로 파국에 치닫은 미마에게 아이돌 가수로 복귀하라고 협박하는 스토커 미마니아가 나타나고, 미마는 미마니아를 쓰러뜨린 채 간신히 도망치지만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는 자기 자신의 형체, 이중인격의 또 다른 '나'에게 끈질긴 강요를 당한다. 미마의 진정한 속마음에서는 아이돌 가수로 복귀하라는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한때의 그리운 시절, 가수가 되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 자신의 진정한 면모, 에로 배우가 되기 전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미마는 지리멸렬한 망상과 현실을 혼동하며 벗어나지 못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또 하나의 '나'를 확인하고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주인공 미마가 아닌 미마의 부 매니저 '루미'가 미마로 가장한 범인이었고, 미마에게 광적으로 집착했던 스토커 '미마니아'는 루미가 명령해서 죽이려는 시도를 했던 거였다고. 루미는 미마의 방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방을 똑같이 제작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자신이 미마의 옷을 입은 채 아이돌 가수라는 망상에 빠져 살았다고.(비록 루미의 자세한 과거사는 나타나지 않지만, 한때 잘 나갔던 가수가 퇴직해 다른 가수의 부 매니저로 활동한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첫 번째 해석인데 스릴러 좀 봤다는 관객들은 당연히 이렇게 풀이할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말하고 있고, 이 결말이 더할 나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극명한 차이에서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실은 루미가 미끼였고 진정한 살인마는 미마였다는 것. 이것은 결말 부분에서 확실히 두드러지는데 '내가 진짜'라고 여기는 미마는 사실 진짜 미마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애당초 미마가 환상에 시달렸던 것도 미마 자신의 탓인데 그런 미마가 루미를 함정에 몰아넣어 정신병원에 수감시켰을 수도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진범은 미마라는 것.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앞서간 증명은 일단 배제시키고 반대로 증명해 보자.
루미가 미마의 탈을 뒤집어쓰고 미마를 정신병원에 가두었을지도 모르는 일. 후반부의 클라이맥스- 자동차가 피 묻은 루미를 치려고 할 때 막았던 미마 장면에서 바로 정신병원으로 이동한다- 도 그렇고 중간의 과정이 설명할 필요 없는 부분이라 빠졌다는 것인데 핵심은 관객이 그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마도 세월이 지난 후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루미를 미마가 병문안 간 것이겠지만, 어디서부터 미마가 루미로 바뀌었는지, 루미가 미마로 뒤바뀌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최종 증거는 결말에 가서 종점을 찍는다. 미마가 백미러를 보고 선글라스를 벗은 다음 "난 진짜 미마야" 라고 한 것. 이것은 모든 일이 끝났다는 점에서 안도감에 내뱉은 말일 수 있지만 이 한마디로 인해 관객은 다시 혼돈에 빠진다. 끝까지 미마가 미마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 물론 영화가 말하는 점에서 직접적이고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첫 번째 해석이 옳고 지극히 정상적인 결말이지만 그렇게 단정짓기엔 뭔가 불확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되짚어 보면 주인공 미마는 실존한다. 미마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루미 역시 실존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자가당착에 빠진 루미를 혼란에 빠진 미마가 어떤 연유로 하여금 깨닫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어항 속의 죽은 물고기를 바라보는 장면은 상징적이고 예전의 미마(아이돌 가수였던)를 모두 상실했다는 뜻이지만 그것만으로 단정짓기엔 아직도 모호한 부분들이 많다. 가장 불확실한 것은 살아남은 한 명의 미마가 과연 현실세계로 돌아왔느냐는 것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보면 '나'의 존재성을 상실한 미마와 다른 '나' 사이의 불가해한 속성이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해결된다는 것인데 영화는 단순히 2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정반대의 시점에서 정황을 제시한다. 애초에 루미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인지, 극중 드라마 각본대로 미마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 것인지. 미마가 범인이든 루미가 범인이든 관객의 상상에 해석을 맡기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액자 형식의 연출인데 주인공이 출연하는 영화와 현실과 꿈을 마구 뒤섞어 놓았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현실에서 빠져나오면 꿈이고, 꿈에서 빠져나오면 영화이며, 영화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현실이듯 형용할 수 없는 딜레마에서 관객은 주인공과 같이 뫼비우스의 띠를 헤맨다. 만약 장르영화 마니아가 간단명료하고 쾌활한 스릴러를 원했다면 난해한 이야기에 다소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장면이 겹치면서 돌고 도는 광기의 영상은 정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퍼펙트 블루>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모든 등장인물과 배경 속에 철학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안에 풍자와 해학이 동시에 존재한다. 뛰어난 연출력과 과감한 시나리오로 언뜻 보면 스토리가 뒤엉켜 엉망진창이 된 것 같지만, 관객에게 주인공과 같은 혼란을 유발시킬 뿐 한 장면 한 장면에 모든 단서가 숨겨져 있다. 미마가 강간당하는 장면에 출연하겠다고 했을 때 부 매니저 '루미'의 과민반응, 미마를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는 '지나치게' 친절한 장면 등에서 감독은 이미 다양한 복선을 깔아놓았다. 그것을 발견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순전히 관객의 몫이지만, 한 컷 한 컷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더욱 실감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파프리카>에서도 그랬듯 곤 사토시는 '꿈'을 주제로 관련된 영화를 만들어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꿈같고 우리가 꾸는 꿈이 현실 같기 때문이다. 최근 드라마 또는 영화에서 아이돌이었던 가수가 배우로 등장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배우가 자신이 원해서 배우가 된 것인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배우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사람이 한때 아이돌이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다수의 의견에 밀려 그대로 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렇듯 작품은, '미마'와 같은 배우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스토커가 따라붙을 수 있고, 누구든지 그 모습을 모방하는 자가 생겨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무서운 현실이자 사실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범인은 과연 누구인 것일까? 최악의 결과를 선택한 배우 미마일까, 미마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 매니저일까? 아니면 집요하게 따라붙는 스토커의 탓일까? 영화는 끝까지 현실과 꿈이 확연치 않은 모호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은 선뜻 '이 자가 진정한 범인이었다'고 단정 짓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모순에 빠진 것인지, 배우로서 성공해 진짜 미마를 되찾은 것인지, 또 다른 나와 대립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의문 모를 스릴러의 매력이자 이 영화만의 특징이다. 작품은 단순히 반전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가 다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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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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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란 어떤 것일까? 주변 사람들의 힐난과 강요가 모든 희망을 억누르는 세상일까? 아니면 모든 상황이 비참하고 견디기 힘들지만 절벽 끝에 한 줄기 희망이 있는 따뜻한 세상일까? 제인 볼링의 <광산 탈출>은 바로 후자를 말하는 청소년문학이다. 이 작품은 한없이 어둡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해지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있으며, 아무리 괴롭고 모진 노동을 한다 해도 결국 끝에는 새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인공 '레길레'는 불법 폐광에 강제로 이끌려온 18세 소년이다. 레길레는 짧으면 세 달, 길면 여섯 달 정도를 어둡고 갑갑한 광산 속에서만 보낸다. 사방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전등으로 돌만 캐야 하는 고통은 '자마자마(불법 폐광 채굴에 동원된 사람)'의 피치 못할 운명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레길레는 괴로움에도 적응돼 친구와 가족 모두를 잊어버리려 한다. 레길레는 갈수록 심해지는 구타와 핍박에도 묵묵히 일만 하다 어느 날 열세 살 소년 '타이바'를 만나게 된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는 타이바는 광산을 빠져나갈 생각에 희망을 품는다. 레길레는 그런 타이바를 철 들지 않았다며 한심하게 내려다보지만, 친구 '카테카니'의 설득으로 타이바를 도와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작품은 광산 안의 일과 광산 밖의 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광산 안의 일은 레길레와 어린아이들의 극대화된 답답함과 고통스러움을 표현한다. 책임자 '페이스맨'의 계속되는 구타, 총알의 타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돌에 깔려 심한 상처를 입게 되는 등 어둠 속에서의 외적 파괴와 내적 파괴를 뼈저리도록 생생하게 포착한다. 광산 밖의 일 역시 안의 일과 다를 게 없다. 살아 숨 쉬는 공기가 가득한 세상이라는 것만 빼면, 지배자 '파파'의 삿대질과 모욕은 광산 안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레길레에게 세상은 갇혀있어도 괴롭고, 나와 있어도 불편한 공간이다. 레길레는 이미 희망을 저버린지 오래지만, 타이바는 자마자마들을 구해주었다는 '스파이크'라는 인물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숨 막히는 광산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건 영웅 스파이크뿐이다. 레길레는 불행 속에서만 답을 찾으려 하지만 타이바는 가망 없는 환상 속에서 미래를 찾으려 한다. 레길레가 광산 밖으로 나와 만난 친구 카테카니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굳센 희망을 갖고 있다. 레길레는 계속되는 친구들의 설득에도 너무 오랫동안 세뇌되어 있던 탓에 잠시 주저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아직 한 줄기 빛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타이바를 돕는다. 이렇듯 작가는 희망은 혼자 있을 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합쳤을 때 나타난다는 사실을 타이바와 친구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청소년들은 가족을 위해 광산에서 살아가는 레길레처럼 불편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이라 해도 희망을 잃지 않고 탈출을 포기하지 않는 타이바가 되어야 할
- neo
- 2016-12-31
영화를 보기 전, 네이버 영화에 들어왔을 때 다분히 놀랐다. 아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점이 4점밖에 되지 않다니, 왜 그런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는 전부터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 <사이비> 그리고 <지옥: 두 개의 삶>을 봐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사회 비판적인 면과 풍자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사람들이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았다는(진짜로 봤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배우 심은경을 비하하면서 연기를 못했다느니, 보고 암이 걸렸다느니, 나만 당할 수 없다느니 하고 10점을 주는 사람들을 보니 기가 막혔다. 물론 개개인의 표현은 자유고 그 표현을 존중해 줘야 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고작 <부산행> 시작에 등장하는 배우 심은경이 서울역의 심은경과 연결되지 않았다고 비하하는데, 서울역이 부산행보다 먼저 제작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부산행은 상업적으로 활용하려고 만든 영화였기에 큰 연관이 없을 수도 있었다.(그리고 감독은 이미 큰 연관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것 하나 때문에 욕하는 관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다음날 영화를 직접 보러(기대가 컸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갔다. 나도 은근히 평점을 믿을 때도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전작보다 수준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약간 노심초사 했던 터였다. 그런데 영화는 기대 이상의 퀄리티와 탄탄한 각본, 스릴 있는 액션과 통렬한 풍자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사이비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할까. 마지막 반전은 소름끼치도록 굉장했고, 그토록 욕하던 배우들의 연기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입 모양이 맞지 않다고 욕하는 관객이 허다했는데, 100% 일치하지 않았을 뿐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도 관객이 서울역을 멀리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부산행과 같은 액션 영화가 아니라는 것, 시원한 액션을 기대했는데 감독이 방점을 찍은 면은 액션이 아니라는 것, 원조교제와 노골적인 살인 장면 등이 관객에게는 굉장히 불편하게 다가온 것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암울하며 곳곳에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장면이 자리 잡고 있다. 추악한 경찰의 삿대질, 노숙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시민들, 민간인에게 총까지 쏴대는 경찰의 극악무도한 횡포는 세월호 시민들의 시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직 가볍고 희망찬 이야기만 원하고 비극적이고 암울한,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을 멸시한다. 그것을 '대중 영화'라 일컬으며, 그런 의미에서 <부산행>은 대중성 있는 영화로서 관객이 원하는 요소를 삽입해 천만 관객까지 돌파한 것이다. 결론은 애초에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영화인지 찾아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극장에 가 관람한 관객들의 책임이 크다. 나는 이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알고 갔기에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기대 이상의 경이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종종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들이
- neo
- 201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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