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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스위프티 보이의 변명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5-15
  • 조회수 187


어쩌면 신성한 글쓰기를 하면서 가요를 듣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모르겠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타자기를 두드리는 나는 역시 성자가 아니었다. 


내 전 감상문을 읽으신 독자분들은 내가 꽤 비범한 테일러 스위프트 팬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이 뜨거운 팬심의 열기는 이번 년도 4월 19일 세상으로 나온 그녀의 가장 최근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가 미국의 여러 신문에서 비판을 받았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게 했다. 아직도 4월 18일 새벽까지 유튜브에서 그녀의 신곡이 하나라도 선공개되지 않을까, 쓸데없는 리서치로 잠을 셋던 것, 4월 19일 학교가 끝나고 미친듯이 유튜브에 접속해 업로드된 16곡을 허겁지겁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유가 모를, 또 때론 알겠는(그렇다고 더 나은 건 아니지만) 우울감으로 나의 삶이 종이라면 갈기갈기 찢고 싶은 충동으로 삶의 대혼동을 마주할때도 나를 살게 해준 것은 테일러의 우울하고, 신나고, 섹시하고, 종교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음악이었다. 내 상황에 너무 와닿는 가사를 들으며 마치 그녀가 내 친구라도 된 듯이,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눈물을 쏟다가 기분 좋을 일은 하나도 없는데 자유분방하고 흥분되는 곡을 들으며 또 춤을 추고…어떤 사람들은 거의 테일러 팬덤을 종교라고 부르는데 너무 틀린 말은 아닐테다. 가장 최근 나온 앨범은 커버색의 회색빛만큼 지옥과 천국, 선과 악을 뒤흔들며 욕과 하나님을 섞어가는, 유난히 크리스천들의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예 가요를 부르는 것을 금지하는 학교에 다니는 나로서도 그런 불편함에 얼굴을 찡그린 적이 몇번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아직도 그녀의 음악에, 그녀의 삶의 스토리에 열광하는가. 어쩌면 난 그저 그녀의 유명함과 성공, 외모에 현혹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쉽게 속임당한 것을 순순히 인정할 내가 아니기에, PK 소년의 이 모순적인 팬심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저명한 세계적인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의 강연중 내가 간직하는 명언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가장 그분의 입에서 나오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 있었다. 거의 눈물을 일렁이실 듯한 표정으로, “정말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와 비슷한 말을 하셨는데 평소 예배때마다 찬양을 부르면 자주 눈물을 훔친 나로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 “아픈 위로”라고나 할까. 심장을 만지는데 마치 좀 너무 강한 포옹처럼 나의 뼈를 아프게 하는. 내가 대중가요를 들으며 그 경이로운 고통을 느낄지는 상상도 못했다. 찬양을 들을때 느꼈던 감각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찬양은 내게 부모님과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신을 생각하게 했다면 테일러의 노래는 나자신과 내가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또 찬양은 나자신을 회개하는 것이 많다면 테일러의 노래는 나를 상처준 이들을 공격하는 것이 많다. 마치 냉탕에서 바로 온탕으로 잠수하듯 내 음악리스트를 완전히 갈아 바꾸었고 내가 무엇을 듣는지는 내가 누구가 되는지에 영향을 미쳤다. 부정적인 영향부터 말하자면 내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가 좀 더 볼륨이 커졌다. 과거에는 기쁨, 감사나 “거룩한” 사랑이 아닌 감정들에 대해서 최대한 억제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감정들이 온전히 내 것이고 그렇기에 표현되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차산정상에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올까, 이런 생각을 더 자주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은 밖에 나가기 너무 귀찮아서 테일러 노래 중 가장 분노를 잘 분출할 수 있는 곡들을 듣는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겠지만, 감정이라는 “사치”를 부릴 수 없는 입시생에게 슬픔과 분노라는 방청객은 꽤나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제 긍정적인 영향을 말해보자면,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좀 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심지어 소설이나 시로써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너무 세속적이지 않을까, 너무 야하지 않나, 너무 반항적이지 않나, 이 외 여러 검열기를 드리대며 내 상상력이 내게 건네는 손을 잡지 못했다. 이제는 너무 대놓고 내 상상력을 풀어놓을 정도로 이게 충분한 문학적 가치가 있는지를 걱정하지 너무 히피적인지를 따지지는 않는다. 기억에 남는 일은 최근 아예 활동하지 않는 인스타그램에 나의 우울과 반항기가 담긴 시 몇개를 포스트했다. 다행히 나를 팔로우 하시는 선생님들과 목사님은 날 걱정하셨지 대놓고 혼내시지는 않으셨다. 그렇게 나는 나의 문학적 발언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다시 주인공인 테일러 스위프트로 돌아오자면, 난 그녀의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용기가 좋다. 많은 사람들은 테일러의 십대시절 순수함, 깨끗함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어릴적 쓴 가사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다면 마냥 “기독교”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티브한 대표적인 옛날 테일러 곡 ‘Love Story’에는 “내 아버지는 ‘줄리엣을 떠나’라고 말하셨다”는 가사가 있는데 결국 아버지라는 존재로 대변되는 전통적인 가치가 자신의 애인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것이다. 또 이미 자신과 헤어진 남자연예인들의 등을 서늘하게 하는 곡을 쓰는 것으로 잘 알려진 그녀는 ‘Dear John’이라는 곡과 기타곡에서 가끔 대놓고 이름을 공개하기도 했다. 많은 가수들이 솔직하지만 특정한 사람에 대해 그렇게 날카롭게 디테일한 곡을, 그것도 그 사람이 셀 수 없는 팬을 가진 또 다른 스타라는 걸 고려했을때, 쓰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전남친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무례하게 다가올지는 당사자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로, 즉 전혀 다른 상황과 사람들로 둘러싸인 나의 이야기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그녀의 진솔한 가사를 곱씹으며 언젠가 나의 이야기도 누군가의 이야기로 곱씹힐 것을 자주 꿈꾼다. 


다소 신성모독적인 가사들에 대해서는 굳이 변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음악, 영화, 시와 소설에 담긴 신성모독을 그 창작자 자신의 신을 향한 경멸로 넘어가는 것은 조금 성급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말은 큰 힘이 있고 특히 노래는 그 말을 따라해야 하는 성격이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런 기준들을 다 따지다보면 노래의 일부가 아닌 노래 자체를, 어쩌면 가수자체를 차단해야 하고 그것은 회색지대를 검은지대라고 부르는 오류와 같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의 신성모독적인 곡들만 모아서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테일러의 음악을 즐기고 있는 나조차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감정, 심미적 감수성, 표현들은 매우 유한하다. 그 유한성은 굳이 찾아낸 오점을 보며 손가락질하기보다 그 순간속 아름다움을 곱씹으려는 노력을 하는 겸손을 갖게 한다. 


나의 ‘다윗’이라는 이름은 모두가 알듯이 성경속 인물을 따왔다. 가끔 간음자이자 예배자이고, 군인이자 시인이고, 사랑꾼이자 살인자인 다윗이라는 인물로 내 이름을 지으신 부모님은 과연 무슨 생각으로 지으셨을지 궁금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라면서 내 이름은 나의 가장 큰 치부이자 자랑거리였다. 주로 내 이름에 대해 매우 당당해하다가도 목사님의 설교말씀 중 다윗이 속옷이 벗겨지며 춤을 추는 얘기, 밧세바와 간음한 얘기가 나오면 모두 나를 쳐다봤고 목사님께 따져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 모순 그 자체인 듯한 다윗은 은근 테일러 스위프트와 닮은 점이 많다. 테일러 스위프트도 크리스천이지만 대다수 크리스천들에게 “가짜 크리스천” 취급을 당하고, 결혼을 원한다지만 공개적인 전남친만 12명이 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모순적인데 단지 그들은 유명해서 그 모순점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어떤 위대한 희망의 전도자가 되려고 곡을 쓰고 있다고, 또 나자신도 희망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단지 우리는 우리의 복잡한 삶이 너무 이해되지 않아 얼마나 이해되지 않는 지를 우리가 가진 무기로 표현하는 것 아닐까.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감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이 긴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도 잠시 위선자 같은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포옹해보시기를 제안하며 테일러 음악을 듣는 중 쓰여진 이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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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테일러 스위프트만큼 영향력 있는 가수를 찾기도 어렵지만, 그녀만큼 막강한 안티팬들을 거느리는 연예인도 흔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십대~이십대 남성집단에서 스위프티(스위프트의 팬들의 별명)라는 타이틀은 유리한 경력이 아닐 뿐더러, 사소한 취미로서 보이기조차 짙은 낙인을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그녀의 음악을 즐겨 듣는 집단이 주로 십대~이십대 여성인건 사실이나, 나도 한명의 공식적인 스위프티로서 테일러를 둘러싸는 암묵적인 편견에 대하여 논하고 싶다. 그 편견들 전부가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의 음악의 가치를 “여자애들의 연애 욕구”를 대리만족시켜주는 정도로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가는 무엇인가? 모든 음악이 그렇듯, 테일러의 음악과 삶은 분리되어질 수 없다. 특별히 테일러는 자서전적인 가사를 쓰는 것으로 유명한데, “존에게 (Dear John)” 라는 곡에는 옛남친의 실명을 제목에 담아 그 옛애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따라서 그녀의 음악에 대해 평론하기 전 그녀의 삶에 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테일러는 미국의 전형적인 남부 중산층 가정아래 자라났다. 13살 부터 자신의 십대를 보낸 테네시 주는 미국 내의 강한 보수적인 가치와 개신교적인 가치를 대표하는 주이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과 남다른 창의력을 발견하고 지지해준 부모님은 그녀를 후원하기에 충분한 재정을 갖고 있었기에, 그녀에겐 꿈을 펼칠 기회가 십대부터 주어졌고 그 꾸준한 노력과 지지는 컨트리싱어*로서의 폭발적인 인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 순탄하고 부러울만한 과정에 대해 성인이 된 테일러는 주변에서 자신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착한 크리스천 소녀의 모델”이 되도록 압박을 주었음을 토로했다. 아주 어릴적부터 그녀는 그녀의 음악과 정치적 성향을 분리하도록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과정의 여지도 없지 않지만, 실제로 그녀의 초기 곡들안에 있는 전통적인 결혼을 추구하는 암시, 기독교적 전제를 갖고 있는 인용들, 무엇보다 맑고 순수한 영혼이 느껴지는 요소들은 그녀가 사회적으로 “합당한” 예술적 표현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오히려 오늘날 스스로가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에 모순되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십대시절 작곡한 “변화 (Change)”라는 곡의 가사중에 나오는 할렐루야 (기독교적인 예배의 표현)와 비슷한 시기에 써진 “태워버릴 사진 (Picture to Burn)”이라는 곡의 지금은 삭제된 가사인 “그럼 난 내 친구들에게 너가 게이라고 할게 (That’s fine, I’ll tell you mine you’re gay)” 등등의 가사들은 종교적이고 반동성애적인 그녀의 배경을 드러낸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그녀는 보다 더 도발적이고 자유분방하고 진보적인 팝 앨범들을 후에 내기 시작했고 세계를 뒤흔드는 팝스타로 자리매김을 했다. 더 나아가 공식적으로 여성인권과 성소수자인권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표출했다. 그녀의 커리어의 발전은 여성인권

  • 위다윗
  •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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