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테제
- 작성자 데카당
- 작성일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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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는 걸핏하면 목을 조르려 하고 높이 솟은 절벽면의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도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따라, 윤리가 학문임을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대체 어찌 생겨먹은 것이 학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내 목을 조르려고 하나? 스스로 의미없는 말들만을 골라서 지껄이며 제 목에 칼을 차게 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그러고는 사회에 책임을 모두 지게 하는 것이 학문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학문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윤리라는 것들을 학문이라고 부르기 위한다면 전체적 공해주의라는 이름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윤리라는 종양을 뚝 떼어냈다고 해서 사회학에 어떤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팔을 빌려 궂은 일을 해왔을 뿐, 중요한 일들은 결국 윤리를 잠시 떼어둔 채 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어느 사회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 가정에 대한 견해는 모든 가정을 뿌리뽑아 햇볕을 쬐게 했다. 학교에 대한 견해는 생각없는 기계들이 돌려 생각없는 기계만을 만드는 컨베이어 벨트로 바꿔놨다. 가장 구역질 나는 국가에 대한 견해는 어느 누가 게워낸 것이든 독재의 변호인으로밖에 서지 않았다. 뭐? 역사를 보지 말고 현재를 보라고? 너무나 슬프게도 무엇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아닌가? 저리 치워줬으면 한다. 앞을 보니 암막에 덕지덕지 붙은 소원들은 면면이 쓰레기들이고 옆을 둘러보니 이곳이 폐수 처리시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남은 선택지는 나가는 것과 뒤로 돌아앉는 것인데 나가기에는 출구까지 가기 귀찮으니 일단 돌아서 생각해 보련다. 되도록 빠르게 돌아앉아서 냄새까지 나기 시작한 폐수에게 관심을 끄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다면 믿겠는지? 돌아앉은 후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뒤쪽에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돌아앉기 위해서는 어째서 돌아앉으려고 하는건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기는 또다른 쓰레기들이 굴러와 성을 내며 배설한 것에 공손히 답해야 한다. 뭘 어쩌란 말인가? 보기 싫은게 있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다른 심오하고 창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어느 누구의 두개골 속에서 그런 생각이 기어온건가! 뭐? 사명감? 문제 해결? 쓰레기들이 분리수거를 위해 아등바등 분류표를 붙이는 것이 웃기기만 한데 주석까지 붙여대니 할 말을 잃고야 만다. 우선 웃기지도 않는 완장질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문제 해결법인데 자기 완장을 벗기는 싫으니 일단 더이상 완장을 주지 않으려는 심보만 부리는 것들. 이 쓰레기들에게 어떤 사명감이라도 있었겠는가? 대답해달라! 선긋고 틀을 잡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 뿐인 것들이 완장질을 하는데 그 뒷줄에 있는 사람은 안된다 이건가? 역겹다, 역겨워! 나오라! 나도 그 반짝이는 구토자의 완장 구경이나 한 번 시켜달라! 뭐라뭐라 말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들과 똑같이 도피나 해보자는 것이고, 당신들과 똑같이 그 도피에 어떤 변명도 붙이지 않고 해보자는 것이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완장 나도 껴보고 나서 버리든지 다시 끼든지 하라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당신들에겐 뇌가 들어있지 않은 건가? 눈을 어떤 잣대로 쑤시면 그런 식으로나 보고 귀에 어떤 관을 꽂으면 그런 식으로나 듣는지 궁금하군. 물론 당신네들이 할 때는 이유를 묻는 이들이 없었을 것이니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내가 요청할 사항은 뛰어내리는 것 밖에는 없게 되는 것 같다. 그 완장은 나에게 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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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입과 손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질문한 사람 없다 지적하는 객석 "당신 누구요?", 뻘쭘한 연기자 "돈키호테입니다. 기억하실련지").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 다음 나올 말이 무얼까, 고민하다가도 생각없이 말을 뱉게 된다. 채팅에서도. 이미 몇 사람은 그런 무례한 말들을 들었는데, 떠나가지 않아 고맙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캠프 참여를 망설였다. 몇 분 정도. 다음은? 타닥 타닥, 토도독, 토독토독. 일정은 비어있겠지? 당연하다. 내가 누군데. 나, 그정도로 친구 많지 않습니다?(객석에서, 푸하하. 연가자가 원하는 반응) 시 게시판에 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합평작을 쓰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2월이었고, 뉴스를 다량 보았고, 마침 교외선이 재개통하여 기존에 쓰던 길을 막아 시내로 가는 시간이 8분가량 늘어났다. 토 하고 싶었다 그것도 건강하게. 길고 길게, 우웨에에에에엑. 그리고 며칠 후 글틴캠프 신청 안내에 시 합평작은 두 편까지 제출 가능하다는 수정이 가해졌다. m님이 원흉, 이라고 해야할지, 발제자였다고 한다. 두 번째 합평작도 비슷한 계열이다. 기러기는 귀여우니까, 덜 구토스럽긴 하다. 글틴캠프를 대비하여 김희수의 의견제시와 l의 선수치기로 글틴 오픈채팅방이 만들어졌고, 얼마간 평화로운 글틴생활을 한 뒤, 문장청소년문학상 특별상을 탔다는 연락이 왔다. 수필로(의미심장한 음악, 여운을 만들어내는데 혈안이 된 연기자). 수필? 수필?? 수필 게시판에 몆 편 올린 기억은 있는데, 12월에 올린 것을 제외하면 딱히 언급된 적도 없었기에 적잖이, 사실 많이, 놀랐다. 월장원 없이 수상이라니, 신기하지 않은가. 김희수였는지 누군가의 말마따나, 어떤 척도로 측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상상해볼 수도 있었다(무표정한 객석, 죄송합니다저의불책입니다). 아우라, 그리고 비경험의 경험으로써, 특이성을 나타내는 무언가, 특별해진 기분. 다른 이슈라면 꼭 보고 싶었던 친구가 신청기한을 넘겨버려 참가하지 못하게 된 것. 너무나 안타까워 친구의 이름이 없는 명단을 몇 번씩 들여다보다 캠프날이 왔다. 당시 떠올린 목표라면 재밌게 놀고, m님 s님 그리고 눈금실린더 및 다른 글티너들과 신나는 문학얘기를 하는 것, 촌극에서 살아남는 것인데, 앞의 두 목표들이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위협받았다. 필명과 글만 가지고는 글티너들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술렁이는 혹은 관심없는 객석). 글 쓰는 인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글 쓸 인상이 아니었던 것! 말이 되나? 이래도 되나? 문학 이대로 가면... 그래도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데카당, 여자가 아니었냐는 말도 들었다. 이렇게 재밌게 놀자, 의 목표는 어디론가, 알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버렸다. 나머지 또한 필연적 귀결로 뚜벅뚜벅 걸어나갔고. 셔틀에서는 다른 합평작들을 읽었고 졸았고 눈금실린더와 떠들었다. 파주에 도착. m님과 인사를 했고 몇 시간은 먼저 와있던 s와도 인사했다. 아이스브레이킹은...버거웠다 재미도 감동
- 데카당
- 2025-01-28
비가 내렸거나 해가 났거나 희박해서 무시할 만 하지만 현재를 기준으로 얼마 후에는 추세를 알 수 없는 확률로 눈 혹은 우박이 내린 날 태어났다. 그리고 앞의 문장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날씨도 태어남도, 생각해 보라구 산부인과의 지붕 아래서 날씨를 모르고 태어났고 태어나면서 태어남을 몰랐어 따라서 내 태어남은 거짓이다 나는 태어난 적 없다. 어느 순간 존재가 발견됐을 뿐 그래도 이것은 설화 나부랭이가 아니다 생각을 하고 나니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성체가 존재하기 시작함에 따라 우주도 존재하기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미끄러지는 것들 위에 미끄러지지 않는 것들을 두어 결국 미끄러질 수밖에 없도록 한다.언제나 태어날 때와 같았다. 미끄러지지 않는 나의 사고와 미끄러지는 주변 환경. 흔히들 사고라고 불리는 것을 내 지방질 전기신호 전달기는 바다의 표층에 둥둥 떠다니는 식물성 플랑크톤의 행동같이 체화하였다. 사건을 겪고 정보를 받으면 그 텍스트를 그대로 퍼와 범람하는 정보에 떠서 정보가 흔들리면 내 사고가 요동친다고 느껴버린다.인식의 첫 순간 내 손가락은 믹서에 갈리고 있었다. 6살 때의 일이다. 가족 중 누군가 혹은 내가 고의로 혹은 실수로 내가 믹서 날을 손으로 돌리고 있을 때 전원 버튼을 눌러 피가 주루룩 났다. 어느새 전선은 연결 돼있었고 나는 그걸 몰랐던 것 같다. 6살의 내 사고는 대략 이러하다:날을 돌리고 있었다 왜지? 돌아가는게 신기해서. 돌린다. 모터 소리가 난다. 앞에 있던 가족 구성원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오른다. 믹서가 치워진다. 다른 가족 구성원이 소리를 지른다. 아하, 손을 본다. X자로 상처가 나있다 피가 죽죽 나온다. 놀란다. 이게 뭐람? 소리 지른 가족 구성원이 호들갑 떨며 가져온 붕대를 신나서 줄줄 감는다 왜 감지? 모른다. 흐르는 피는 신기하게 생겼다. 왜지? 그냥, 흐르잖냐.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 차에 태워 병원에 데려간다. 흥분된다. 엄지 손가락 둘레가 두 배가 됐다. 상처인 x를 붕대 위에 연필로 그린다. 어떻게 생겼는지 까먹으면 아쉽잖아. 모처럼 생긴 상처이니까. 안타깝게도 흉터가 남지 않다. 회복이 쓸모없을 정도로 빨랐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눈치도 없는 줄기세포와 그 외 다수, 역량을 조금 아꼈으면 어땠을까 물론 설계 상으로는 10~30대에 재생산 하고 사라지는게 나은 덩어리이니 원가 절감을 위해서 그렇게 되는게 맞긴 하지만..결국 사고는 뚝뚝 끊겼지만 환경이 매끄럽게 흘러갔었다. 가족 구성원들의 질서정연한 행동이라거나, 뭐 이것저것. 지금 생각하면 일부러 믹서를 작동한걸까? 싶기도 하다. 왜? 몰라 그건. 아직도 사고에는 허리가 없다.초등생활은 헛소리 단편들로 채워졌다 이건 그거고 이유는 저거다 근거는 없다 수고해라. 그래도 있어보였나보다 부모가 박사냐는 말도 들었댔으니, 그런데 아쉽게도 석사졸, 석사 수료란다. 이 경향은 아직도 있다. 이 책의 주장은 이거다 이유는 없다 수고해라. 한결 다루기 편해졌지 않나? 이유는 없다 수고해라.중학생, 말을 빨리
- 데카당
- 2024-12-29
말도로르의 노래는 로트레아몽이 발표한 산문시집이다. 카뮈는 그의 책 반항인에서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며 한 가지 예로 로트레아몽을 드는데 이후에 서술되는 반항하는 인간상과는 꽤나 큰 차이를 보이는 말도로르의 경우를 자신이 사용하는 반항의 계보에 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말도로르의 특징은 신, 즉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반감과 그에 따르는 사회 규범의 파괴이다. 예를 들어 당시 사회 규범에서의 모범이 되는 가족(명예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아버지, 가족 간 예의를 지키는 현명하고 다정한 어머니,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들)이 나오는데, 그 가족의 아이를 꾀어내고 마대자루에 담아 포물선을 그리게 던져버린다. 반항의 사전적인 뜻을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 맞서 대들거나 반대함'이므로 말도로르의 일차원적인 테러들을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카뮈의 반항은 아무런 숙고 없이 벌이는 무차별적인 테러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이때 반항은 절대적 부정에서 변화해 일어난 행동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절대적인 부정은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도 생을 유지하려 하는데, 생을 선택하는 것에서 이미 생에 대한 가치판단을 한 것으로, 이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부조리한 인간이며 1차 대전을 통해 막 종교와 이성의 신성화에서 벗어난 유럽에서는 부조리의 추론으로 자살의 정당성을 숙고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너무나 솔직한 나머지 절대적인 의미없음에서 나오는 살인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보다 자신까지 부정해서 자살로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시작되고 끝난 시기 유럽에는 부조리의 추론을 비틀어 국가적 단위의 살인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고 개인적인 숙고에서의 자살은 사실상 사라졌다. 부조리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살이 아니라 살인을 선택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반항이 아니다. 반항은 자신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침해를 막는 것이다. 침해를 거부하는 것이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반항할 수 있다. 따라서 반항은 절대적 거부도 파괴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전적인 긍정이다. 가치의 인정과 거기서 나오는 보존을 원하는 긍정이고, 따라서 폭력은 가치의 보호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써만 행해질 수 있으며 그 책임 또한 짊어져야 한다. 말도로르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한다. 섭리, 절대선 등의 것과 거기서 오는 희망을 없애고자 한다.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섭리가 희망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을 따르는 이들도 용납할 수 없다. 섭리에 대항해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섭리만을 공격하고 끝내는게 아닌 것이다. 이때 반항적인 추론은 가치를 손으로 가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섭리를 밀쳐내고 마침내는 섭리를 끌어내리는 것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인간은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 반항의 추론은 섭리를 끌어내고 자신이 거기에 앉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추론의 단계에서는 이미 섭리의 자리에 앉은 말도로르에게 섭리를 기준
- 데카당
-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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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안녕하세요, 데카당님. <4월 테제>는 러시아 혁명 초기에 레닌의 주요한 주장을 담은 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글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데카당님의 글을 독해하기 어려운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맥락이 소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글 역시 어떠한 상황적 맥락 속에서 쓰여진 것인지 잡히질 않아서 선뜻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습니다. 학문으로서의 윤리에 대한 반감과 비판적 시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잘 와닿지 않았고요. 어떤 책을 읽고 그 속의 캐릭터를 연기해 목소리를 내주신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이런 유추의 과정 전체가 제게는 큰 흥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