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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테제

  • 작성자 데카당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199

윤리는 걸핏하면 목을 조르려 하고 높이 솟은 절벽면의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도 지나쳐 버리고 만다. 그러니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따라, 윤리가 학문임을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대체 어찌 생겨먹은 것이 학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내 목을 조르려고 하나? 스스로 의미없는 말들만을 골라서 지껄이며 제 목에 칼을 차게 하는 것이 학문이라고? 그러고는 사회에 책임을 모두 지게 하는 것이 학문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학문이라고 불릴 수 있는가? 윤리라는 것들을 학문이라고 부르기 위한다면 전체적 공해주의라는 이름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윤리라는 종양을 뚝 떼어냈다고 해서 사회학에 어떤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팔을 빌려 궂은 일을 해왔을 뿐, 중요한 일들은 결국 윤리를 잠시 떼어둔 채 했다.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어느 사회가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가? 가정에 대한 견해는 모든 가정을 뿌리뽑아 햇볕을 쬐게 했다. 학교에 대한 견해는 생각없는 기계들이 돌려 생각없는 기계만을 만드는 컨베이어 벨트로 바꿔놨다. 가장 구역질 나는 국가에 대한 견해는 어느 누가 게워낸 것이든 독재의 변호인으로밖에 서지 않았다. 뭐? 역사를 보지 말고 현재를 보라고? 너무나 슬프게도 무엇하나 바뀌지 않은 것이 아닌가? 저리 치워줬으면 한다. 앞을 보니 암막에 덕지덕지 붙은 소원들은 면면이 쓰레기들이고 옆을 둘러보니 이곳이 폐수 처리시설이 아니고 무엇인가? 남은 선택지는 나가는 것과 뒤로 돌아앉는 것인데 나가기에는 출구까지 가기 귀찮으니 일단 돌아서 생각해 보련다. 되도록 빠르게 돌아앉아서 냄새까지 나기 시작한 폐수에게 관심을 끄게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래도 남은 문제가 있다면 믿겠는지? 돌아앉은 후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뒤쪽에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돌아앉기 위해서는 어째서 돌아앉으려고 하는건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기는 또다른 쓰레기들이 굴러와 성을 내며 배설한 것에 공손히 답해야 한다. 뭘 어쩌란 말인가? 보기 싫은게 있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다른 심오하고 창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건가? 어느 누구의 두개골 속에서 그런 생각이 기어온건가! 뭐? 사명감? 문제 해결? 쓰레기들이 분리수거를 위해 아등바등 분류표를 붙이는 것이 웃기기만 한데 주석까지 붙여대니 할 말을 잃고야 만다. 우선 웃기지도 않는 완장질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문제 해결법인데 자기 완장을 벗기는 싫으니 일단 더이상 완장을 주지 않으려는 심보만 부리는 것들. 이 쓰레기들에게 어떤 사명감이라도 있었겠는가? 대답해달라! 선긋고 틀을 잡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 뿐인 것들이 완장질을 하는데 그 뒷줄에 있는 사람은 안된다 이건가? 역겹다, 역겨워! 나오라! 나도 그 반짝이는 구토자의 완장 구경이나 한 번 시켜달라! 뭐라뭐라 말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당신들과 똑같이 도피나 해보자는 것이고, 당신들과 똑같이 그 도피에 어떤 변명도 붙이지 않고 해보자는 것이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완장 나도 껴보고 나서 버리든지 다시 끼든지 하라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당신들에겐 뇌가 들어있지 않은 건가? 눈을 어떤 잣대로 쑤시면 그런 식으로나 보고 귀에 어떤 관을 꽂으면 그런 식으로나 듣는지 궁금하군. 물론 당신네들이 할 때는 이유를 묻는 이들이 없었을 것이니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내가 요청할 사항은 뛰어내리는 것 밖에는 없게 되는 것 같다. 그 완장은 나에게 준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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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밈화

자살. 스스로 죽는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지금까지는 자살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 개인의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만을 듣고 배우고 가져 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관점 또한 필요할 때인 듯 하다. 시작은 복제 단위로서의 밈이다. 가계를 따라 수직 낙하할 수밖에는 없는 유전자와는 다르게 밈은 가계를 벗어난 것에 더해 수평적이거나 역전되는 전달이 가능하다. 이것은 유전자가 번식기까지는 개체를 유지시키려 하는 것에 비해서 밈은 개체의 안전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효과를 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가장 성공적인 밈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민족끼리 배타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어서 결국 민족국가를 침체시킴에도 끝없이 퍼져나갔고 현재까지 복제되고 있다. 밈으로서의 자살 개념을 살펴보기 전에 자살 통계를 보면 때 30대 이상 연령층에서 한순간에 수와 비율이 폭증하는 것을 근거로 자살이 유전자의 작용이 아니냐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전의 특징 덕분에 번식기가 지난 후 발현되는 치사 유전자는 도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논의는 끝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에 논의는 계속된다. 자살이 유전자 차원의 어느정도 퍼져있는 표현형이라면 경험적으로 노화라는 현상에서 보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오면서도 그 현상의 표면적인 이유를 집어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 같은 고전 자료에서 자살이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쓰이고 성서에 자살을 죄악으로 적어놓은 것을 보면 자살이 어느정도는 퍼져있다는 가정은 맞지만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고 극복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또 자살을 죄악으로 터부시하던 중세를 지나면 자살을 예찬하는 이들이 등장해 자살이 훌륭한 이유에 대해 사고하기 시작하니 이들이 자살 밈을 성공적으로 퍼뜨린 개체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의 자살 예찬을 유전자의 기능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해당 시기, 근대의 유명한 자살 예찬가들이 말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삶의 방식에서 삶 또한 예찬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 플룻을 연주한 어떤 철학자와 풍성한 식사자리에서 자살을 논한 쇼펜하우어가 좋은 예시이다. 자살이 유전자의 표현형이라면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므로 밈이 개입했다고 보겠다. 탈출구, 해결책으로 던져지던 자살이라는 개념은 현대에 들어서 드디어 진지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더이상 삶과 자살을 동시에 예찬하지 않는다. 밈의 복제과정은 유전자보다 덜 엄밀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는 단계별로 억제제를 갖지만 밈의 복제에 있어 억제제는 개체들이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또다른 밈 뿐이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개별 유전자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반면 밈은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감각을 이용한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복제되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며 따라서 개념이 바뀐 것이다. 위의 주장이 사회, 철학적 관점을 모두 사용한다고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밈으로서의 자살과 철학적 자살, 사회 구조적 자살을 보는 관점 사이 관계를 짚어야겠다. 우선 밈에 관한 관점이 가장 근본적이다. 개

  • 데카당
  • 2024-04-11
자의적 해석의 자의적 해석

문학작품이든 철학 저작이든 글을 바라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 방법마다 꽤나 명확한 차이점을 갖는다. 문학의 예를 들어 대한민국 경기도 소재 일반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 내신의 어려움을 산맥을 넘는 어려움을 노래한 시에서 비유했다고 해보자. 산의 초입은 수월하기 때문에 경험이 적은 경우 완급 조절을 실패해 급하게 걷게 되고 능선쯤에서부터는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다시 다른 산의 초입이라 힘을 빼고..반복이다. 글 내부의 정보만으로 해석할 경우 이 글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슬기롭게 산맥을 넘는 방법을 제시한 설명문이 될 것이지만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제시된다면 내신 대비 방법에 대한 설명문이 문학적 성격까지 갖게 된다. 철학 저작을 생각해보자. 위의 예에서와 같은 학생이 어느 날 얻은 삶에의 시선을 시로 풀어내려고 한다. 시시포스와 바위에 대해 노래한 시는 학생의 부조리주의적인 깨달음에 대한 정보가 제시되지 않는 한 신에게 반항한 사람에 대해 경고하는 그리스의 신화를 형식이 없는 현대시로 풀어 쓴 것에 불과할 것이지만 정보가 주어진다면 경고의 메시지는 사라지고 높은 곳을 향해 계속해서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행복함을 알려주며 절대적 진리인 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좌절해도 멈추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상을 제시한다. 같은 정보가 주어지더라도 사람들마다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위의 학생이 쓴 내신의 어려움에 대한 시에서 갑은 고난의 연속이 찾아오는 고등학생의 생활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을 발견하고 을은 즐거운 자기확인의 연속으로 구성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예찬을 발견한다. 이 둘의 발견 중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 옳을까? 알 수 없다. 학생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는데 sns 활동을 하지 않았고 일기를 쓰지도 않은 등 판단의 근거가 될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다. 교과서, 시험에 가장 자주 쓰이는 방식으로 편집위원, 출제자들이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해석 중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선택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장이라면 자신의 뜻을 멋대로 왜곡한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어쩔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고 출제자들은 권력을 가졌다. 그렇다면 글을 읽고 더 깊은 이해, 시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감상을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미덕은 무엇일까? 자의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유의할 점은 교과서, 교재, 문제집으로 공부해 정형화된 시험을 봐야 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의적인 해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의적 해석에의 자의적 해석은 예를 들어 이렇다. 위의 학생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대해 노래한 시가 발견됐다고 하자. 출제위원 병은 이 시에 대해 수레바퀴가 의미있기 위해 계속해서 돌듯이 자신도 돌아야만 의미있게 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절망을 토해내는 시라고 해석했고 출제시에 그 해석을 담은 보기를 붙였다. 시험에 나오는 작품

  • 데카당
  • 2024-04-06
반항 선언

보수성이 필요한 사회가 있을 수 있다. 전통 보존과 관련된 기관같이 사회를 현재, 또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상적인 모습에 맞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곳인데 이 경우 해당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이들에겐 반항은 사회를 뿌리부터 뽑아버리려는 시도이며 억압은 정당한지의 여부를 벗어나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허가가 남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사회는 가정이다. 가정에서 피보호자가 보호자의 가치를 벗어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는지 의심하기 쉽다. 잘못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보호자에 의해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받을 것인데 물론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 중 하나로 더 거대한 사회의 유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개별 가정의 개별 가치가 침해된다고 해서 상위 단위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물론 그럴수도 있다. 사회화의 단계에서 반사회적인 가치를 가지는 경우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경우는 사회가 요구하는 초기교육이 진행되었다면 발생하기 힘들다. 반사회적인 가치라며 억압하는 것은 보호자 자신의 부족함을 자백하는 것이거나 피보호자가 상위 단위로 나아갔을 때 필요한 기능을 제거하는 행위이다. 상위 단위에서 특별해지고 싶을 때 가장 큰 악영향을 주는 것이 입 꾹 닫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적당히 쓰다가 버려달라는 요청과도 같은 것으로 가정에서부터 톱니바퀴가 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에 보수적이게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더 큰 사회가 금지하는 가치를 가정교육의 단계에서 거르고 난 후에는 반항을 요구하는 것이 차라리 더 좋다.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행보가 대놓고 보수적이라 그렇다고 본다. 개선된 모든 것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기존을 벗어난 것은 기본적으로 거부당한다. 어쩌면 보호자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데카당
  • 202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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