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없이
- 작성자 임세헌
- 작성일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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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1
- 조회수 321
머리가 아파서
머리를 자른다
머리는 구른다
탁자 밑을 구른다
책장 옆을 구른다
거실유리에 부딪힌다
이제 최고의 상태야
몸이 없는 머리는 말한다
나는 미친걸까
라는 몸의 말
핏방울이 보글보글 오르며 말한다
그래도 괜찮아 매끈하잖아
머리가 말한다
엄마!
문이 열리고
학교에서 딸이 돌아온다
머리 없이
다정하게
딸을 안
지금 뭐하는 거야
머리가 탱탱볼처럼
통통 튀어온다
너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머리는 몸이 들고 있는 종이를 뺏는다
학원광고와 기부광고와 빚독촉을
머리는 몸을 가둔다
방에 가둔다
십년간 가둔다
십 년 후 몸이 문을 열고 나오자
딸이 있었다
손바닥만한 종이에 빽빽이 적힌 글자를
외우고 있었다
몸은 딸을 안아주었다
그런데 딸은 몸이 없었다
꺼져 방해돼
머리의 말에
몸은 안방으로 사라졌다
또 다른 몸이 있었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몸과 몸은 오래 보글보글 거렸다
안방에서 몸과 몸은
서로 포옹했다
머리의 세계 속에서
보글보글
핏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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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세헌
- 2025-06-28
땅을 접어 달리니합쳐진다이곳과 저곳이땅주인은 땅 줄었다며소장을 보내고운송업체 사장은 감사하다며금일봉을 건넨다그래도 합의금이 더 많다호신술이나 배워볼까사채업자들이 협박한다축지법은 이제 쓸모가 없어배,차,비행기가 더 빠르네사채업자 피할 때만 요긴하지일본 관광지에 가서 인력거나 끌까5분 만에 한 바퀴를 도는 인력거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하겠지같이 도술을 공부했던 친구들은다 서커스쇼를 하는데축지법은 받아 주지도 않네비행술은 날아다니고분신술은 여럿이 되지만축지법은 그냥 걷는 거야자연스럽게 땅을 접는 것이축지법의 최고 경지야그립다 순수하게 축지법을 연습했던발 끝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잡념없이 즐겁게 걷고 걸었던돈 언제 갚을 거야!큰일 났다 땅을 접어 달린다한 번 더 접어 달린다도망치는 것이 아니다세상을 바꾸는 것이다접고 접고 접어서지구가 손바닥만하게 되어사라질 때까지그러다 느껴진다접힌 땅이 다시 풀어지고 있다이곳과 저곳이풀어진다탄성 반발설: 장기간에 걸쳐 지각의 일부에 변형이 축적되어 암석의 강도 한계를 넘게 될 때 지각이 파쇄되며 지진이 발생한다*모든 것이 흩어진 세계깨진 세계에서 파편 위를나는 축지법으로 걸어다닌다더 잘 걷는다그 외엔 목표가 없다*https://www.kigam.re.kr/menu.es?mid=a40301010000(일부 변용)
- 임세헌
- 2025-05-01
40분 동안 한 장면만 나오는한 시골 풍경만 나오는이상한 영화가 있다그것은 영화의映자가영원의 永인지헷갈릴 정도로 지루하다영화라기 보다는 살랑거리는 사진이고취기에 세상을 볼 때 일렁이는 것 같다목가적인 시골의2.45 대 1의 비율의창문을 가진 집에 살다 아침에 일어나 약간 몽롱하게창 밖을 보는 듯하다어쩌면 이미 모든 것은정지해 있을 지 모른다고1초에 24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듯 하고움직이고 싶어서 움직이려고24장의 사진이 발광하는 듯 했다결국모든 것은 그대로 일 거라는비관적인 생각이 들 다가도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오래된 지혜가 생각나고영화에서도 스러지는 밀이다르게 스러지고다르게 움직이는 것이어쩌면 내가 볼 수 없는작은 메뚜기가 밀알을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나는 계속 영화를 본다살랑거리는 바람의 무게와스러지는 밀의 무게밀알 먹는 메뚜기의 무게까지세상은 점점무거워지지만무거움을 즐기기로 한다의자와 거의 한 몸이 된 채조금씩 흔들리는 밀을 보며내 머릿속에도 밀을 하나 심고천천히 길러보며조금씩 흔들어 본다그러다 보면사십분 후의 밀은처음의 밀과 분명 다를 것이다밀에게 밀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해진다
- 임세헌
- 2025-04-28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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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안녕하세요, 김선오입니다. 임세헌 님의 <머리 없이> 잘 읽었습니다. 박력 있게 이야기를 전복시키며 치고 나가는 힘이 느껴지는 수작이었어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장식적으로 오용하지 않되 잠재된 의미를 계속해서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끌고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딸'과 '엄마', '머리'와 '몸'이라는 대상이 계속해서 서로 교란되고 위치를 교환하며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유희를 능란하게 해내고 있다는 점이 특히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변환하여 장면의 지속성을 높이는 테크닉 역시 훌륭했어요. 이번 시는 크게 흠잡을 곳이 없네요. 띄어쓰기 정도만 신경쓰면 좋겠습니다.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와 같은 이수명 시인의 초기 시집에서 신체를 다루는 방식과 언어적 리듬을 중점적으로 읽어본다면 도움이 될 거예요.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