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 작성자 임세헌
- 작성일 202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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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1
- 조회수 325
그들의 길이는 아주 길다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아니면 이유는 있지만
아무 이유 없는 것처럼
선을 긋는다
책의 인상깊은 문장엔
절대로 선을 긋지 않는다
긋는 순간 나의 정신은
몇 십 년 전 고등학교
그저
선명상을 하듯
아주 천천히
순수하게
선을 긋는다
경복궁에 선을 긋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선을 긋는다
그리고 에펠탑에도
어느새 뉴스엔
내가 나온다
흑백
cctv 화면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건물에 선을 긋고
서둘러 도망가는 모습이
그래서 오늘은
흰 후드를 입고
선을 긋는다
성당의 하얀 돌벽
울퉁불퉁한 돌 위로
선을 긋는다
선 속에서
나는 성당과 잠시
얘기한다
넌 누구니?
난 성당이야
왜 이러고 있어?
누군가 날 만들었어 다리 없이
나한테 다리 좀 만들어줘
이곳 너무 갑갑해
다리는 만들 수 없지만
선은 그어줄게
빗소리도 없고
발소리도 없이
선 긋기 좋은 밤
그어진 선 하나에
말숙한 신사들은 가고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된다
경쾌하게
성당과 나는 왈츠를 춘다
그것도 잠시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là! arrêt
하니
도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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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접어 달리니합쳐진다이곳과 저곳이땅주인은 땅 줄었다며소장을 보내고운송업체 사장은 감사하다며금일봉을 건넨다그래도 합의금이 더 많다호신술이나 배워볼까사채업자들이 협박한다축지법은 이제 쓸모가 없어배,차,비행기가 더 빠르네사채업자 피할 때만 요긴하지일본 관광지에 가서 인력거나 끌까5분 만에 한 바퀴를 도는 인력거가성비가 떨어진다고 하겠지같이 도술을 공부했던 친구들은다 서커스쇼를 하는데축지법은 받아 주지도 않네비행술은 날아다니고분신술은 여럿이 되지만축지법은 그냥 걷는 거야자연스럽게 땅을 접는 것이축지법의 최고 경지야그립다 순수하게 축지법을 연습했던발 끝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잡념없이 즐겁게 걷고 걸었던돈 언제 갚을 거야!큰일 났다 땅을 접어 달린다한 번 더 접어 달린다도망치는 것이 아니다세상을 바꾸는 것이다접고 접고 접어서지구가 손바닥만하게 되어사라질 때까지그러다 느껴진다접힌 땅이 다시 풀어지고 있다이곳과 저곳이풀어진다탄성 반발설: 장기간에 걸쳐 지각의 일부에 변형이 축적되어 암석의 강도 한계를 넘게 될 때 지각이 파쇄되며 지진이 발생한다*모든 것이 흩어진 세계깨진 세계에서 파편 위를나는 축지법으로 걸어다닌다더 잘 걷는다그 외엔 목표가 없다*https://www.kigam.re.kr/menu.es?mid=a40301010000(일부 변용)
- 임세헌
- 2025-05-01
40분 동안 한 장면만 나오는한 시골 풍경만 나오는이상한 영화가 있다그것은 영화의映자가영원의 永인지헷갈릴 정도로 지루하다영화라기 보다는 살랑거리는 사진이고취기에 세상을 볼 때 일렁이는 것 같다목가적인 시골의2.45 대 1의 비율의창문을 가진 집에 살다 아침에 일어나 약간 몽롱하게창 밖을 보는 듯하다어쩌면 이미 모든 것은정지해 있을 지 모른다고1초에 24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듯 하고움직이고 싶어서 움직이려고24장의 사진이 발광하는 듯 했다결국모든 것은 그대로 일 거라는비관적인 생각이 들 다가도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오래된 지혜가 생각나고영화에서도 스러지는 밀이다르게 스러지고다르게 움직이는 것이어쩌면 내가 볼 수 없는작은 메뚜기가 밀알을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나는 계속 영화를 본다살랑거리는 바람의 무게와스러지는 밀의 무게밀알 먹는 메뚜기의 무게까지세상은 점점무거워지지만무거움을 즐기기로 한다의자와 거의 한 몸이 된 채조금씩 흔들리는 밀을 보며내 머릿속에도 밀을 하나 심고천천히 길러보며조금씩 흔들어 본다그러다 보면사십분 후의 밀은처음의 밀과 분명 다를 것이다밀에게 밀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해진다
- 임세헌
- 2025-04-28
케텔비의 페르시아 시장에서를 듣다 오랜만에 다시 모텔 노스탈자로 갔다 유령처럼 벽에 붙어 있는 담배연기 누런 벽지와 누런 전등과 누런 노스텔지어 노스텔지어와 노스탈자의 차이를 고민했다 바래진 노스텔지어가 노스탈자일까 사라진 노스텔지어가 노스탈자일까 테헤란로와 페르시아 시장의 차이를 고민했다 카펫을 산적도 없지만 사 보았고 적선을 해 본 적도 없지만 해 보았다 저글링하는 광대를 구경했고 흥겨운 음악에 춤을 췄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모텔 노스탈자에는 존재한적도 없는 것들이 숙박했고 존재한 적도 없는 소리가 배관를 타고 올라왔다 영화 소리, 싸우는 소리, 우는 소리, 파도 소리, 새소리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사그라들고 첼로 연주자의 선율이 흐른다 공주를 묘사하는 서정적 멜로디 모텔의 복도에 공주의 행렬이 지나간다 모텔은 증식하고 증식한다 우아한 첼로 선율에 공주를 맞자 수 많은 숙박객이 들어온다 수 많은 공주와 내가 들어온다 방이 꽉꽉차고 배관를 타고 소리가 들린다 울고 싸우고 얘기하고 맹세하고 놀고 나는 게걸스럽게 들었다 음악을 듣고 있는 나를 대신해 내가 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꼭지를 틀고 모든 소리를 토해냈다 음악이 끝나자 모텔을 나왔다 난 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음 곡은 El bimbo라고 했다
- 임세헌
- 2025-04-07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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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안녕하세요, 김선오입니다. 임세헌 님의 <선> 잘 읽었습니다. '선'이라는 단어, 선명상의 '선'이기도 하고 평면 위에 그어지는 기하학적 의미의 선이기도 하며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서의 '선'이기도 한 그 단어를 다채롭게 활용하여 시 안에서 펼쳐내고, 자칫 '선'이라는 단어가 품을 수 있는 지나치게 무거운 의미로부터 장난스럽게 탈피하면서 표면적인 유희를 만들어내고 있는 시라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을 긋는 행위의 순간에 화자는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부터 이탈하여 선에 이끌리고 선을 이끌며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동하고 성당과 왈츠를 추기도 하네요. 결말부에 들려오는 프랑스어를 통해 또 한 번의 공간 이동을 장난스럽게 암시하면서 마무리한 점도 좋았고요. 우리가 묶여 있는 관습화된 육체의 감각 이상의 운동을 언어를 통해 보여주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