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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켓 시인의 목소리로 듣는 「복어 가요」

  • 작성일 2025-01-09

복어 가요

이자켓



합정까지 걸을까? 

추운데 

목도리 빌려줄게 

너는? 

난 추위 잘 안 타 

추워서 머리가 멈췄나 봐 

겨울이라 그런가 

차디찬 골짜기인 거야 

그곳에 도달한 생각들은 

모두 얼어붙는 거지 

그 골짜기 다 녹여주고 싶다 

그럼 범람할 거야 

아무 말이나 쏟아져 나올 거야 

그건 안 돼 

왜? 


저거 들려? 

뭐? 

구세군 종소리

연말이긴 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해? 

요즘 살쪘나 봐 패딩 탓인가 

나 부해 보여? 


조금 떨어진 채 

빗물 언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한적한 합정에는 

이 거리 끝에도 저 거리 끝에도 

담배 태울 곳이 없어서 

‘그런지’라는 카페를 지나고 

솔방울식당 지나고 

푸르게 칠한 건물과 

목련이 자라는 주택 지나 

어둑한 골목에 들어섰다 

불을 붙이고, 신발 뒤축으로 

얼어버린 물웅덩이를 부수었다 

얼음 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다 맥없이 나뒹굴었다 

종소리가 한 번, 두 번 

이편저편 맴돌았다 


10번 출구가 보였다 

목도리를 돌려받았다 

조심히 가 

너도······

넌 뒤돌아보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매끄럽게 사라졌다 

점점 작아지는 뒤통수를 보다 

돌아섰다 

코트 주머니에는 킹 크룰의 앨범이 들어 있었고 

움켜쥔 목도리는 방어 태세의 복어만큼 부풀어 올랐다



- 시집 『거침없이 내성적인』(문학과지성사, 2023) 

시인 김언
이자켓의 「복어 가요」를 배달하며

   마지막에 등장하는 “방어 태세의 복어만큼 부풀어” 오른 목도리가 인상적인데,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는 듯도 한데, 그렇다고 대단한 장면을 연출하는 시는 아닙니다. 딱히 무슨 사이라고 하기 힘든 너와 나, 두 사람이 어느 겨울밤 합정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나누는 대화와 눈에 띄는 소소한 풍경이 시의 대강을 이룹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통상 시에서 ‘죽은 시간’으로 처리되던 장면들을,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없는 시간’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되던 장면들을, 이 시는 끈질기게 주워 담아서 조각조각 보여줍니다. 조각 사이사이로 미세하게 내비치는 어떤 감정도 느껴집니다. 추운 겨울밤 목도리를 빌려주고 빌려 쓰고서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사이, 그러면서도 묘하게 어긋나는 대화만 이어가다가 속내를 다 말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사이, 어쩌면 너의 속내는 물론이고 나의 속내도 확신할 수 없어서 꼭 부풀어 오른 복어들처럼 방어적인 대화가 오가는 사이. 그런 사이에서 비롯되는 감정선이 시의 줄기를 이룬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 시의 진짜 매력은 미처 드러내지 못한 너와 나의 속내에 있지 않습니다. 한적한 동네 길을 따라서 보이는 이런저런 이름의 카페와 식당, 어둑한 건물과 주택, 그리고 신발 뒤축에 부서지는 얼음 조각과 반사되는 가로등 불빛, 연말을 맞아 이편저편을 맴도는 구세군의 종소리. 소소하게 지나치기 쉬운, 그래서 버려져도 상관없는 풍경들이 미세하게 오가는 너와 나의 감정선을 조금도 부풀리지 않는 방식으로 자꾸 들여다보게 만듭니다. 들여다볼수록 이상하게 부풀어 오르는 시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게 매력이라면 매력인 이 시에는 이상한 것이 더 있습니다. 제목이 왜 「복어 가요」일까요? 복어가 간다는 뜻일까요? 복어의 노래라는 뜻일까요? 물어봐도 대답해줄 이들은 없습니다. 너도 나도 그 자리를 떠나고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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