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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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가족
가족 이규리 지난 밤 비에 물이 불었나 보고 오라 하니 아이는 나무의 키를 보고 왔다 물에 비친 나무의 키가 더 커졌다고 수척한 물 위에 왜 나무의 키가 더 커 보이는지 그 아이 비오는 날 마당에 나가 화분에 물을 준다 우산 쓰고 물을 준다 아이의 말을 알아들은 화분의 꽃들은 그것이 약속이란 걸 안다 비가 왔으니 물이 불었을 거라는 건 어른의 말 비가 와도 화분에 물 줘야 하는 건 아이의 약속 그 아이 통통 뛰어다니며 현관문이나 창문을 죄다 연다 비가 자꾸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고 바깥에 젖고 있는 풍경들 자꾸 안으로만 들고픈데 안에 들고 나면 더 이상 그리움 아니니 젖는 마음은 밖에 두어야 하나 자라도 어른이 아닌 어른과 어려도 좀처럼 아이가 아닌 아이가 한 집에 산다 꽃 피고 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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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유령 가족
유령 가족 이은정 남편이 진짜 죽을 줄은 몰랐다. 진짜 죽을 작정인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흘리고 다니지 않는다. 유서를 사표처럼 재킷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들은 정작 그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주의한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취기에 담배 개비를 꺼내 들 때와 같이 마침내 혼자일 때만 유서의 무게를 직감한다. 남편의 옷에서 유서를 발견할 때마다, 그 내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안심했다. 두서없이 쓴 일기 같았다. 스스로 무게를 감지하고 가슴팍에 넣어 둔 한때의 다짐에 다시 손을 댈 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자살할 위인이 못 되었다. 어쨌거나 남편은 죽었다. 팬티만 입은 채로 어느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하였다. 우리 집이 아닌 다른 아파트 주차장에서 속옷만 입고 눈은 희멀겋게 뜬 상태로 발견되었다. 영안실에 놓인 남편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슬픔보다는 깊은 절망이 먼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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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아동청소년문학 뼈다귀 가족
“뼈다귀 가족 말이야? 그래도 단골이니까 말조심해!”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심성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은영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에? 아니, 좀 전에 나간 뚱뚱한 사람들 말인데.” 신참도 만만치 않다. 나와 은영 누구에게랄 수도 없는 첫 물음에선 반 높임말을 쓰더니 말상대가 은영 혼자가 되자 혼잣말인 것처럼 슬쩍 말이 짧아진다. 예사 솜씨가 아니다. 어제 스치듯 가벼운 인사만 하고 헤어졌으니 오늘 처음 만난 사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 살 많은 은영이 말을 놓자 신입도 지지 않는다. 같은 한 살 차이인 은영이가 처음 나한테 말을 놓기까지는 보름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반 높임말이 적절하게 가미된 반말이었다. 아무리 고등학생에 아르바이트라도 우린 어째든 직장 동료다. “그래. 그 사람들 말이야.” “그렇게 뚱뚱한데 뭔 뼈다귀 가족?” 말하기 좋아하는 은영이는 선배 행세를 하던 것도 잊고 신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