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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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슬픈음자리표
슬픈음자리표 권상진 몇 겹 접힌 줄이 오선지 같다 꼬리부터 따라가던 눈길이 멈춘 곳은 무료급식소 입구 동그랗게 몸을 말고 첫 배식을 기다리는 노인의 굽은 등이 어느 어두운 시대의 악보에 걸린 음자리표 같다 넘겨진 악보처럼 문득 흘러가버린 그가 오래 묵혔던 생각을 보표의 첫머리로 보내 슬픈음자리표를 그려 넣는다 미처 음표가 되지 못한 삶의 생채기들은 이제 몇 마디 남지 않은 이 악곡에 모두 부려 놓고 가야 한다 슬픔이 줄을 당길 때마다 오선지에 맺혀 있는 검은 눈물들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춤춘다 배식이 시작되자 슬픔은 멀찍이 돌아앉아 주었지만 정 붙일 곳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던지 식판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슬픔의 행방을 찾는 노인 밥을 허물어 허기를 메울 때 식판에 숟가락 부딪는 소리에도 제법 슬픈 음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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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늦봄
늦봄 권상진 영화관과 별장 사이에서 살고 죽고 사랑하네 뭘 해도 안 풀리던 장남이 외곽지 도로변에 기사식당을 열었다 가로수 벚나무가 입구까지 꽃길을 내고 홍매화가 마당을 두른 낡은 건물이었다 주방까지 가득 들어찬 꽃향에 홀린 듯 봄날에게 적지 않은 권리금을 지불하던 날 봄이 허겁지겁 돈을 챙겨 넘던 산허리께엔 산복숭꽃이 드문드문 흘러 있었다 열흘 남짓 만개했던 꽃잎 화르르 무너지고 걱정이 새순처럼 싹을 밀어 올리는 사월 등꽃 꽃창포 목단 싸리 국화 꽃은 이제 뒷방 화투패에서나 순간처럼 피었다 지고 있었다 입하 지나 대문께 감꽃 터지는 소리 쪽으로 엄마가 고개를 돌리며 한 마디 놓는다 큰넘 살림도 이제 좀 피야 될낀데 굽은 허리가 고향집에서 산나물을 무치는 동안 논물 보고 온 작은넘이 수돗간에서 삽날을 씻는, 어떤 꽃은 피고 또 어떤 것들은 아직 피지 않는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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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양평 솔티재를 넘는 당나귀
권상진 선생님은 원고지 노트에 자신의 삶을 산문으로 열심히 쓰시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최고령 김진두 씨는 명문 S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나오신 것에 대한 자부심 반, 현재의 모습에 대한 회한 반의 감정으로 자신을 열어 보였다. 과거야 어떻든 간에 소년 같은 미소와 글을 써보겠다는 지금의 적극적인 자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안경 너머 눈이 빛나는 한용수 씨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집’을 떠올려 보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총각 기문관 씨는 〈자유〉라는 화두로 현실을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늘 소녀 같은 미소로 얼굴이 가끔씩 붉어지는 윤선원 씨는 아직도 시를 써서 메일로 부쳐온다. 이 모두 정이 들었다. 〈집〉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개설된 문학특강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여덟 번의 솔티재를 넘었다. 경기도 양평군 화전리로 넘어가는 작은 야산인데 ‘솔티’라는 재를 넘을 때마다 속으로 물었다. “이 짧은 만남을 위하여 너는 과연 몇 개의 재를 넘어왔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