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문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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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 > 수필 금강산 기행문
작년에 다녀와서 쓴 금강산 기행문을 고쳐서 올립니다^^------------------------------------------------------ 금강산 기행문 송나라시인 소동파는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번만 금강산을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그리고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께서 천지 창조하신 6일중에서 마지막 하루는 오직 금강산을 만드는데 보내셨을 것이다.” 또한 육당 최남선은 “금강산은 보고 느끼기나 할 것이요, 형언이나 본 떠낼 것은 못됩니다.” 라고 하였고, 시인 고은은 “이 절경을 보고 실성하지 않을 놈이 있다면 그놈이 실성한 놈이다.” 라 하였다. 이처럼 일찍이 ‘나 이름 있소’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 금강산에 처음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외로 마음속엔 두려움이 먼저 일었다. 다름 아닌 북한이라는 ‘적국’에 간다는 사실이 먼저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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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 > 수필 설날의 짧은 기행문
"고모다ㅡ" 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소리였다.나이 15살, 졸지에 어린 고모가 되어버린 나는 나의 어린 조카를 바라보았다. "우리 세종이, 일어나 있었네?" "네!" 입가에 미소가 어리었다. 작년에 왔을 때만 해도 '누나'라고 부르며 웅얼거리던 녀석이었다. 어느 새 고모를 부르며 존댓말 쓰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2월 3일, 설날 하루 전이다. 설을 맞이하고 세배 드리기 위해 서울에서 조치원으로 부랴부랴 내려왔다. 차가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저번 설날 9시간 동안 도로 위에 있었던 날을 생각하며 몸서리쳤다. 내 몸에게 이제 시골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쉬고는 트렁크에서 짐을 끌어내어 등에 매었다. 즐거운 설 연휴의 시작이었다. 집에 들어서니 조치원 큰아빠와 큰엄마가 우리를 맞아주셨다. 뒤이어 세 살배기 하은이를 안은 '언니'도 나타났다. '언니'는 사촌오빠의 아내다. 예전에 뭐라고 불러야 될지 배웠지만 그 호칭이 어색해 언니라고 부르고 있다. 언니는 흰 피부에 큰 눈, 오똑한 코를 조그마한 얼굴에 담고 있다. 참 예쁜 얼굴이다. 언니는 입만 벙긋벙긋하며 인사 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노력은 하은이가 잠에서 깨어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울음에 잠들어있던 사촌 언니와 오빠들이 깨어 이층에서 내려왔다. 참, 큰집은 세 층을 가지고 있다. 집안에는 나무계단이 있고,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바깥에 있다. 3층은 집이라기보다는 옥상이다. 나는 항상 큰집이 부러웠다. 큰집은 내가 원하는 가정의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대가족, 넓은 집, 마당…. 덕분에 이곳에 있다 보면 피곤할지언정 심심하지는 않다. 대충 인사를 나누고 아침밥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세종이가 장난감 총을 들고 내 곁에 앉았다. 아빠가 선물한 모양이다. 장난감 주제에 폭신한 총알을 날리는 총에 나의 조카는 푹 빠져 있었다. 끙차. 세종이를 들어다 무릎에 앉혔다. 이제 5살인 녀석은 한결 무거워져 있었다. 사촌언니한테 그 점을 이야기 했더니 한 끼에 두 그릇은 기본으로 먹는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래도 또래 중에선 가장 키가 크다고 하니, 먹는 족족 키로 가는 것 같아 부러웠다. 나도 어릴 때 얘처럼 먹을 걸 그랬다. 조금 후에는 이내 하은이도 나와 내 앞에 섰다. 배시시 웃으며 무릎을 치는 것이 낯은 안 가리는 듯 했다. 그 두 명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지만, 밥 먹고 놀아줄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집에서 챙겨온 세 권의 책은 물론이고 쉴 틈도 없을 것이었다. 곧 나의 짐작은 현실로 다가왔다. 만약 중간에 하은이를 안고 내려오다 계단에서 넘어진 후 아프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가 있지 않았더라면 하루 종일 끌려 다녔을 터였다. 내가 누워서 책만 읽고 있자 둘은 이내 남매간의 정을 보여주며 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들 몰래 부엌을 오가며 부침개와 과일들을 집어먹었다. 이러면 안 되는 데, 살찌는데, 하면서도 어느새 전을 부치고 계신 엄마 옆에 쭈그리고 있었다. 결국 조카들에게 걸려 끌려 나갔지만. 비록 체력이 부족한 탓으로 아기들을 피해 다녔지만 놀아주는 동안은 정말 즐거웠다. 두 조카를 그러안고 있을 때면 나도 얼른 커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까지 샘솟고는 했다. 참 신기했다. 아기들에게는 사람들이 미소를 짓게 하고 자신들을 사랑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연휴 첫 날은 나도 모르는 새에 지나가 버렸다. 설날 아침, 잠자리가 영 불편했던 나는 일찍 일어나 장작이 타고 있는 난로 앞에 쭈그리고 있었다. 모양새는 별로지만 공기도 훈훈하게 해주고 고구마도 구울 수 있는 기특한 녀석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마도 한 개 집어 먹기 좋게 반 토막을 냈다. 방금 구운 노릇노릇한 속살이 김을 내뿜으며 드러냈다. 안 그래도 요즘 길거리에서 파는 군고구마 먹고 싶었는데…. 크기가 작은 놈이라 금방 사라졌다. 까맣게 된 손만이 고구마를 먹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한 개 더 집으려다 아직 아침 먹기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렇게 먹다보면 배불러서 떡국도 못 먹을 것이 뻔했다. 내 손은 아쉬운 듯이 고구마 앞에서 부르르 떨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그 대신 부엌으로 가 물로 배를 한가득 채워주었다. 혼자서 책을 읽다 슬슬 배고파질 무렵, 점차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조치원 큰 아빠는 훨씬 이전에 일어난 듯했다. 방에서 나오지 않고 밖에서 들어오신 걸 보아 말이다. 여섯시 반. 큰 엄마들께서 아침 준비를 시작하셨다. 어젯밤에 도착한 것인지 세 분이 더 들어와 계셨다. 아직 두 분이 오시지 않았지만, 부엌은 여자 다섯 명으로도 충분히 부산스러워졌다. 나는 이 부산스러움이 좋았다. 이렇게 여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 가족들로만 구성된 작은 세계 안에서 사는 느낌이 든다. 설날 아침, 행복함을 충전한 나는 부엌일을 도와주며 그 부산함에 동참했다. 언니들과 떡국을 먹으며 아침뉴스를 보았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소식의 타이틀은 <설날 음식, 얼마나 살찔까>이었다. 한 의사가 나와 떡국과 갈비, 부침개의 칼로리를 계산했다. 우리는 저래봐야 안 먹을 수도 없는 데 왜 저런 소식을 들려주냐며 투덜댔다. 다음 소식으로 나온답시고 들려주는 것은 설날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들과 연탄 자살률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음주운전.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외할아버지는 작년에 사고가 나 뇌 한쪽을 다치셨다. 우리 할아버지가 음주운전을 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술을 마신 것은 상대방이었다. 설날 가까이 풀어진 마음에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오토바이를 타고 계시던 할아버지와 부딪힌 것이었다. 사고 전에는 농사일도 하고 개들도 여러 마리 키우시던 할아버지는 이제 머리 한 쪽이 푹 꺼진 채 링게를 매달고 살고 있다. 엄마가 큰 엄마 중 한 분도 음주운전자와 사고가 나서 이번 설날에는 못 오신다고 하셨다. 놀라 물으니 다행히 다친 곳은 없으나 협상이 끝나지 않아 못 오신다는 것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람들은 차와 너무 친숙해져서 그에 대한 책임감을 잊은 게 아닐까? 혹시 차 안에 있을 때는 그저 자신의 몸이 빠르게 이동할 뿐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저러한 생각에 들떠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치, 뉴스는 왜 저런 걸 방송해서 그래… 나는 공연한 뉴스 앵커만 째려보고는 남은 떡국을 들이켰다. 곧이어 청주 큰아빠까지 도착하자, 어른들은 차례를 지내러 나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차례를 지내본 적 없는 나는 언니들과 집에 남기로 했다. 마침 아침부터 과식하고 기분도 꿀꿀하던 차에 잘됐다 생각하고 운동 나갔다가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의 몸은 곧 소파에 파묻힌 채 책을 펼쳐들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맞는 고요함이었다. 차례가 끝난 후에는 당연히 세배였다. 나는 누가 세뱃돈도 시골로 내려오는 목적에 섞여있느냐고 물으면 부정할 수가 없다. 시골에 갔다 오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든든해지는 느낌이다. 시골 공기를 들이마시며 뛰놀고 여기저기서 집어먹고 마시며, 어른들로부터 용돈도 받는 생활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용돈은 세배드리는 때 한번뿐이지만. 아쉬운 대로 세배 드린 후에는 받은 세뱃돈을 쥐고 싱글벙글할 시간이었다. 이리저리 짐 정리를 하고나니 어느새 열두시가 되어 점심까지 먹고 집으로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은 많이 지루했다. 점심 먹고 바로 출발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런 모양이었다. 출렁이는 차들의 도로 위에서 여덟 시간의 긴 항해를 보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밥을 해놓지 않은 탓에 저녁은 외식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물 찜을 먹고 나자 피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차안에서 계속 잤다고는 하지만 몰려드는 피곤에 떠밀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 몸의 피곤은 잠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나보다. 잠으로 체력을 충전하는 몸인데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설날, 행복했던 짧은 여행은 내 꿈속에서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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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틴 > 수필 펜 속에 바다를 고이 담아 (부산문학예술기행 기행문)
프롤로그: 부산=아쿠아리움?내가 부산을 처음 가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새마을호를 타고 해운대역에 도착한 후 해운대의 모래사장으로 달려갔을 때, 갈매기와 비둘기가 한데 어울려 놀고 있는 광경을 처음으로 봤다. 갈매기 발과 비둘기 발이 모래사장에 나란히 자국을 남기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었다. 해운대 모래사장을 좀 돌아본 후에는 부산 아쿠아리움에 가서 하루 종일 물고기와 상어들을 봤다. 아쿠아리움 방문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에, 부산을 많이 돌아보진 않았다. 점심으로 (부산까지 가서) 삼겹살을 먹은 것이 전부였다.그 후로 부산엔 갈 일이 없었다. 해운대가 여름 휴가철 때마다 붐빈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의 피서지 기피대상 1위가 되어버렸다. 하긴 도시 사람들이 휴가조차 도시로 가고 싶을 이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때 아쿠아리움에 가서 상어보트라도 탔으면 모를까,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던 경험은 금방 잊혀져버렸다. 10년이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 부산이란 곳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남쪽의 머나먼 세계가 되어버렸다.남쪽의 항구 도시, 갈매기 소리! 너 참 오랜만이다! 첫째 날: 여행의 여명이 밝아 온 날, 용궁을 헤엄치다2014 부산 문학예술기행 <나의 펜으로 바다를 열다> 부산 여행의 여명이 밝았다. 슬로건이 조금 거창하긴 하지만……. 부산에 가서 문학세포를 활짝 열고 와야겠다. 큰 도시 옆에 바닷가가 있는 것이 대한민국에 인천 빼고 더 있는가? 그만큼 흔치 않다. 일어나자마자 귓속엔 갈매기 소리가 깍깍거리며 울려 퍼졌다. 그래, 오늘 정도는 아침잠을 반납해 줘야겠다.떠나기 전, 독수리 상징탑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45인승 관광버스에 올랐다. 우리 조는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좌석들은 꽉 막혀 답답해 보이는데, 뒷자리는 찻간이 넓어서 참 편안했다. (이래서 중고등학생 때 반에서 가장 힘 센 애들이 뒷자리에 앉았나.) TV에서 나오는 가요프로그램의 트로트가, 조별 영상 인터뷰의 배경음이 되어주었다. 한참 졸다 보니, 어느 새 평사휴게소에 도착해 있었다. 졸린 틈에 비몽사몽하며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방송 카메라를 들이대는 센스란.) 내가 휴게소에 들르면, 꼭 커피를 사서 마신다. 어느 곳에나 다 있는 프랜차이즈는 되도록 피하고, 그 휴게소에서만 특별히 운영하는 것이면 더 좋다. 평사휴게소의 카페는 어르신들을 위해 쌍화차도 팔고 있었다. 직원에게 여기가 어디쯤이냐고 물으니, 경주와 가까운 곳이라고 했다. 부산까지는 아직 한참이 멀었다는 이야기인데. 커피 덕분에 날아가 버린 잠은 어찌하랴.휴게소를 지나 한참 달리고 부산 톨게이트에 진입했다. 대전과 별 다를 것은 없었지만, 높은 건물들이 아주 많았다. 우리 아파트도 20층으로 둔산동에서는 나름 고층아파트에 속하는데, 부산의 건물들에는 한참 못 미쳤다. 롯데 캐슬 등의 브랜드 아파트는 대략 40층으로 보였고, LH 복도식 임대아파트조차도 20층은 가뿐히 넘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도 63빌딩 외에 높은 건물은 잘 없는데, 부산의 건물들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꼭대기 층에 살면 아마 해운대 모래사장까지 보일 수 있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고,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일수록 바다가 잘 보이겠지. 부산 판 <갈매기의 꿈>이 아닐까.부산의 건물들을 구경하는 동안 송정 바닷가와 가까운 곳까지 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예쁜 카페들과 맛집들. 바다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 기분은 어떨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4층짜리 엔제리너스와 할리스 커피 건물이었다. 아마 이쯤이 숙소인 것 같았다. 혹시 호텔에서 묵는 건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해운대 청소년수련관이라고 했다. 우리는 청소년이 아닌데……. 게다가 한참 올라가야 숙소가 나온다고 했다. 그 길도 단순한 오르막길이 아니었고, ‘부산(釜山)’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45인승 버스가 올라가지 못해 걸어서 가야 했다. 수학여행이랑 MT는 여러 번 가봤어도, 이렇게 높이 붙어 있는 숙소는 처음이었다.청소년수련관이라는 이름답게, 숙소 내부도 딱 중고등학생 때 수학여행 갔던 곳들과 닮았다. 작은 방에 이불 몇 장. 그리고 수건걸이(겸 빨래건조대). 낮은 곳에 있는 콘센트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높은 곳에 충전기를 연결해야만 했다. 부산 문학기행이 문학고행이 되는 듯한 이 기분은 뭘까. 애플과 안드로이드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잘만 영글어갔다. 다행히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방을 배정받았다. 방충망을 열 수 없어, 격자를 입힌 바다가 건물들 사이로 보였다.잠시 누워서 쉬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급식실로 내려갔다. 식판과 밥반찬들. 학교 근처의 백반 집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청소년수련관 덕분에, 오랜만에 학창시절의 추억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로 간 곳은 달맞이 길에 있는 김성종 추리문학관이었다. 숙소가 있는 곳보다는 조금 낮은 언덕에, 작고 예쁜 카페와 집들이 붙어 있었다. ‘달맞이 길’ 이란 예쁜 이름답게, 인형이 사는 장난감 마을인가. 낮에 와서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송정 바닷가에 달이 뜰 때, 작은 건물들도 귀여운 불빛을 낼 것 같았다. 나중에 자유여행 와서는 꼭 밤에 들러봐야겠다.달맞이 길을 올라가자 추리문학관이 보였다. 추리문학 작가들의 초상화가 먼저 우리를 반겼다. <여명의 눈동자>를 쓰신 김성종 작가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자리를 잡은 추리문학관 1층은, 문학관이 아닌 북카페에 더 가까웠다. 전체적으로 갈색 톤에 빈티지한 인테리어. 특히 서재가 탐이 났다. 벽돌을 쌓은 다음에 판자를 걸쳐 놓은 모양이, 흔한 책꽂이 같지 않고 특이해 보였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내 집에 꼭 이런 서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싶었던 책들을 여러 권 꺼내놓고(물론 다 읽지는 못함.), 오렌지주스를 한잔 마시며 앉아있는 동안 작가님이 들어오셨고, 강연이 시작되었다.추리문학 작가라고 해서, 처음엔 <여명의 눈동자>도 추리소설인 줄 알았는데, 추리 코드는 들어가지 않고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현대사를 소재로 한 대하소설이었다. 추리소설은 그 후에 쓴 것이라고 한다. 일본과 영국에는 장르문학이 발달되고, 추리문학 또한 수준이 높은 반면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지켜나가는 작가님의 의지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귀가 얇은 나로선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속의 옹달샘을 판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동안 신념이 부족했던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문단은 순수문학만을 고집한다. 어떤 문학이든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외국에 사진에 대해 다룬 책 전문 박물관처럼 전문 문학관이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작가님의 말씀대로,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 전문 문학 도서관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앤틱 가구들로 꾸며진 2층은 김성종 작가님의 저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서가의 문을 잠가 놓아서 볼 수는 없었지만, 작가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엿보기에는 충분했다. 장편소설을 쓰려 하는 나조차도 책 한 권 분량을 넘기기 힘든데, 한 작품이 몇 권에 달하는 추리소설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인가. 2층의 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바다가 멀리 보였다. 바다를 닮은 문학관의 유리처럼 내 창작세포도 활짝 열리길 바라며. 3층까지 올라가보려 했지만, 강연이 있다고 해서 아쉽게도 갈 수 없었다. 추리문학관에서 하는 강연은 어떨까. 안내 브로슈어를 보니 추리소설 창작 강의도 있다고 했다. 대전에도 꼭 분점을 내 줬으면 좋겠다. 강의는 물론이고, 아예 추리문학관 2호점을 내준다면.문학관을 나와 조별 기념사진을 찍은 후, 친한 선배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잘 접해보지 못했던 추리문학에 대한 강연도 듣고, 창작욕을 불태울 수 있어서 좋았던 나와는 달리, 선배는 씁쓸했다고 한다. 문학이 과연 이 시대에 환영받는 콘텐츠인가. 문학관에서 소개했던 추리문학 잡지가 폐간된 지 오래라는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었다. 추리문학 등의 장르문학은 물론이고, 문단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순수문학도 설 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실 문학으로 진로를 선택한 후, 외로운 적도 많았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세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길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멀리한다면, 작가들이 직접 다가가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한국 문학을 살리는 것은 지금 세대의 문학도들이 아닐까.조금 허황된(?) 목표이긴 하지만, 나도 새 꿈이 생겼다. 대전 둔산동에 꼭 내 이름을 딴 문학관을 짓겠다는 것이다. 거창할 것 없이, 그냥 북카페 같은 분위기로. 그러려면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큰 노력을 쏟아 부어야겠지. 문학관에서 30분 정도를 달려, 기장군에 있는 해동 용궁사에 도착했다. 주지스님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관음보살 꿈을 꾸고, 용궁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눈을 부릅뜬 사천왕상이 아닌, 사람 키보다 더 큰 십이지신상이었다. (우리 집 근처 공원에도 비슷한 것들이 있는데, 그냥 미니어처 수준이었구나.)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사천왕상은 어쩐지 무섭고 다가가기 힘든데, 십이지신상은 동물 모습이어서인지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 밖에도 절 입구에 석조 작품들이 많아 작은 조각공원 같았다. 들어가기 전에 같은 조 선배가 교통안전 탑에서 절을 했다. 부디 대전에 갈 때까지 무사하길. 그리고 조별 영상을 위해, 학교 단체관광을 온 한 초등학생을 인터뷰했다. 어린 아이가 또박또박 말도 잘하는 것이 참 귀여웠다. “절이 좋아서 좋았어요(?)”라는 소감을 마지막으로, 용궁사로 향하는 108계단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득남불상이 동그란 배를 드러내고 헤헤 웃는 것이 보였다. 시집도 안 간 처녀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배를 만지는 느낌은 참 좋았다. 108배를 하는 기분으로 계단을 걷는데, 무릎에 사리가 쌓이는 이 기분은 뭘까. ‘百八 장수계단’이라는 이름처럼, 부산에서 터뜨린 창작세포도 오래 갔으면 좋겠다.계단이 끝나자, 하얀 다리가 나왔다. 왼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비는 연못이 있었다. 다리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연못에, 정확히 동전을 던져 넣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운데 작은 돌그릇 안은 바라지도 않으니, 제발 들어가기만 해 줬으면. 동전 몇 개를 성공시키다 보니, 동전을 다 써버렸다. 대웅보전에 당도하니, 큰 대웅보전이 있었다. 멀리서도 금박을 입힌 불상이 잘 보였다. 대웅보전을 나와서 다리를 다시 지나고 108계단의 오른쪽으로 빠지면,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이 나온다. 바닷가 바위에 불상을 세워 절을 할 수 있게 한 곳인데, 파도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다. 바다와 가장 가까이 맞닿은 절. 이곳이 바로 용궁이 아닐까.용궁사를 나와, 대구탕 맛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메인 요리인 대구탕과 고등어구이, 묵은지 삼겹살 찜으로 차린 한 상. 경상도 음식이 호불호가 갈린다기에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대구 맑은탕은 고춧가루 하나 없이도 아주 깔끔했고, 비리지 않았다. 새하얀 살이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았다. 대구탕의 흰색과, 묵은지 삼겹살 찜의 붉은색과, 고등어구이의 갈색. 동백나무 옆의 흰 파도소리를 그대로 상에 옮겨놓은 맛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한국해양대학교 구모룡 교수님의 강연을 들었다. 부산만이 갖고 있는 문학적, 지리적 자원에 대한 내용이었다. ‘해양대’라는 이름처럼, 시원하고 열정적인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한국전쟁 때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문인들도 피난을 많이 내려와서 모더니즘 사상이 활발했다. 부산 문학은 대전의 문학에 비해 역사가 긴 편이며, 부산소설가협회의 회원은 무려 60명이 된다고 한다. 꼭 서울의 문학만 주류가 아니다. 항구 도시(seaport city)인 만큼, 추리소설과 해양문학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해양문학을 마린타임 노벨이라고 하는데, 근대화에 힘입어 원양어업이 발달하면서 활성화되었다. 대표적인 해양문학으로는 허먼 멜빌의 <백경>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천금성 작가의 <영해발 부근>이 대표적인 해양문학으로 꼽힌다.무엇보다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찰력과 표현력, 그리고 역사의식과 양심이다. 그리고 절대 돈에 구애받아서도 안 된다. 가장 강조하셨던 것은 장소(place)에 대한 인식, 즉 토포스(topos)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바로 문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교수님이 가장 안타까워하신 것은 한국문학이 모두 서울의 유행을 따른다는 것이었다. 모옌과 무라카미 하루키 둘 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왜 하루키는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토포스에 있었다. 모옌은 <붉은 수수밭>등의 작품에서 확실한 장소인식을 가지고, 중국 근대화시기에 산둥 성에 사는 소시민을 그려낸 반면, 하루키의 작품에는 장소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교수님께서 김성종 작가님을 높이 사는 것도 그 이유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표현력을 갖고 있으며, 역사의식이 살아있고 토포스를 가진 것. 앞에서 열거한 조건에 모두 들어맞는다. 소설가는 탐구적이어야 하며, 연구자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소설가와 인문 학자를 겸하라는 것이다.교수님 말씀대로, 부산은 추리소설을 쓰기에 참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도시의 특성상, 남성적인 기운이 가장 크고, 밀수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나고 자란 이 대전은 어떤 소설을 쓰기에 가장 좋은 곳일까? 사실 소설을 쓰는 나조차도 대전에 대해서 제대로 탐구해 본 적은 없다. 사실 어려서부터 대전에 사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고, 다른 친척들은 다 서울에 사는데 왜 우리만 멀리 대전에 떨어져 사는지가 불만이었다. 중심지가 아닌 주변 도시에 산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크게 열등감 비슷한 걸로 다가왔었나 보다. 그 생각은 커서도 크게 변하진 않았고, 어떻게 하면 빨리 대전을 떠나 서울을 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계산하고만 있었다. 그동안 글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가까운 곳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멀리 있고 매체에서만 보는 것에 더 촉을 기울이니 붕 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전에 문화콘텐츠가 부족하고, 별 특징이 없다고 불평 불만하기보단 자신이 사는 지역의 개성을 드러내 주고, 숨겨진 보물을 찾는 것이 문학도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 첫날밤의 술자리는 간단했다. 밖에서 자유롭게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청소년 수련관의 규칙 때문에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우리 조는 수련관 앞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맥주와 과자 안주들을 먹었다. 같은 조 선배가 챙겨 오신 블루투스 스피커가 빛을 발했다. 그리고 부산의 소주를 맛봤다. 그동안 참이슬과 린만 먹었지, 좋은데이와 C1(시원)은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역시 이름대로 C1해서 좋은데이~ 둘째 날: 꽃 피는 동백섬과 첩첩산중 오륙도에는 땀이 비가 되어둘째 날의 아침이 밝아……오지 않고 비가 흩뿌리는 것을 어찌하랴. 맑을 줄 알고 우산도 챙겨오지 않았다. 어쩐지 가방이 가볍다 했어. 해운대에 도착하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우비를 샀다. 다른 바닷가라면 매점에 가는데 한참이 걸릴 텐데, 역시 부산은 다르다. 바다가 보이는 핫 플레이스에 성형외과와 체인점 카페, 편의점이 붙어 있다. 나중에 자유여행을 오기에도 아주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씨는 피해서 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섰을 때, 서울우유 옆에 있는 부산우유를 발견했다. 대전에는 대전우유가 없는데. 하나 사서 마셔볼 것 그랬다.다들 우비를 쓰고 해운대 바닷가로 향하는 모습이, 마치 바다에 퀘스트를 수행하러 가는 예비 마법사들 같았다. 비가 내리는 바닷가는 아주 한산했다. 부산 하면 떠오르는 갈매기들은 비를 피해 죄다 숨었고, 심심한 몇 마리들만 모래사장을 쪼고 있었다. (새우깡이 없어서 미안하다!) 비둘기들은 오히려 비 오는 바닷가가 더 좋은 것 같았다. 모래사장에서 바닷가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비둘기들이 떼지어 날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잠깐 비를 피하기 위해 부산 아쿠아리움의 지붕 아래로 들어갔다. 비 그칠 때까지 안에서 물고기들과 놀고 있어도 괜찮을 텐데, 코스가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아쿠아리움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비가 있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바닷가에 있는 무인 사진기에서 우리 조 단체사진을 한 번 찍고, 부산 웨스턴조선호텔을 지나, 노래 가사에 나온 동백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궂은 날씨에 동백 아가씨들도 나오고 싶지 않았는지, 소나무들만 비를 막고 서 있었다. 동백섬 전망대에 올라가는 길에, 토끼들을 풀어놓은 곳이 있었다. 연인 사이인 토끼들이 나무 사이에서 몰래 애정행각을 벌이는가 하면, 작은 아기 토끼가 비를 피하기 위해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푸른 나무와 붉은 꽃, 그 사이에서 사는 토끼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동백섬 전망대에서는 해운대가 한 눈에 들여다보였다. 고급스러운 건물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마린시티! 밤이 되어 건물에 불이 켜지면, 해운대의 바다는 불빛을 고스란히 받아 빛을 내줄 것이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마린시티에서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점심으로는 밀면과 찐만두를 먹었다. 물밀면을 먹을지 비빔밀면을 먹을지 고민하다, 처음 먹어보는 것이니 가장 기본적인 맛을 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물밀면으로 결정했다. 대전에는 밀면 맛집이 거의 없어 말로만 들어 보고 사진으로만 봤었다. 주문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작은 엘리베이터로 2층까지 밀면들이 올라왔다. 육수에 살얼음이 껴 있고, 고명으로 삶은 계란과 수육을 올린 것, 식초와 겨자를 치는 것은 냉면과 비슷했으나, 면이 달랐다. 칡이 아닌 밀가루 소면. 그리고 냉면과 달리 젓가락으로 절대 자르면 안 된다고 했다. 밀면의 부드러운 맛을 잘 즐길 수 없어서 그런다나. 과연 명주실을 삼키는 것처럼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거기다가 시원한 육수까지! 국수를 먹으면 오래 산다니까, 부산에서의 감동도 오래오래 잘 기억되길. 속을 꽉 채운 만두처럼 머릿속도 가득 채워서 가길. 서비스로 사리추가요. 밀면과 만두의 맛이 채 가시기도 전, 문학기행은 문학고행이 되어버렸다. 바로 오륙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기대 갈맷길을 걸어서 오륙도로 가는 코스였던 것이다. 갈맷길이라고 해서 막연히 부산 갈매기들이 많은 길인 줄 알았는데, 제주도 둘레길 같은 산길이었다. 게다가 빗방울들이 우리를 더욱 괴롭히고 있었다. 포장된 길로 가면 돌아가야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지름길로 들어갔는데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물론, 등산복이나 등산화를 챙겨온 사람들이 있을 리는 없었다. 만약 단체로 종이박스나 부대자루를 챙겨 왔더라면, 흙 위에서 눈썰매를 타듯 미끄러져서 더 빨리 내려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모두 무사히 내려갔다.‘이기대(二妓臺)’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두 명의 기녀가 왜장을 안고 바다에 빠져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아마 이런 날, 왜장을 안고 날았을 것이다. 조금만 걸어도 금세 날아가 바다로 다이빙해버릴 것만 같았다. 절벽을 나무다리로 둘러 놔서 처음에는 나름 걸을 만 했다. 하지만 거기서 잠깐, 뒤이어 오르막길이 나타나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바위의 결을 따라 그대로 길을 내서 그런지, 둘레길이 이렇게 기복이 심할 줄은 몰랐다. 밀면과 만두가 얹혀 속은 불편하고……우비 모자는 자꾸 벗겨지고…….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잠시 바다를 보며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바닷물과 몸을 합한 빗물은 바위와도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돌하르방과 비슷하게 생긴 바위였다. 3단으로 쌓여 있었는데, 모자와 얼굴 몸통인 듯 보였다. 설명을 읽어 보니, 바위의 이름은 농바위였다. 장롱을 쌓은 것과 닮았다고 해서 성산포 해녀들이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해녀들이 남천동 해안가에 자리를 틀어 물질을 하면서 이기대와 백운포 해안가에서 서로 연락하는 수단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로는, 부처가 아기를 가슴에 안은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지나가는 배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돌부처상 바위라고 한다. 농바위야, 대전에도 소식을 전해 주렴. 그리고 모두 무사 안녕하게 대전까지 돌아가게 해다오.한참을 걷다 보니, 머리는 바람에 날려 산발이 되었고, 1회용 우비는 여기저기 찢어지고 구멍이 났다. 그때,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아닌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길은 평탄해졌다. 이제 다 왔구나.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 내려가니 오륙도 전망대에 도착했다. 더러워진 손과 흙이 묻은 트레이닝 바지를 닦으러 화장실에 가자, 청소하고 계시던 아주머니께서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셨다. 자신과 다른 말씨를 쓰는 학생들 무리가 이 날씨에 바람을 맞으며 오륙도 산책을 나온 것이 안쓰러워 보인 모양이었다. 현지인들의 관심은 여행자들에게 있어 언제나 반갑다. 대전에서 왔다고 하니, 궂은 날씨에 멀리서도 왔다고 하셨다. 그때 행색이 참 말이 아니었나보다. 오륙도까지 잘 버텨준 다리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오륙도 카페에 들어가 카페모카를 주문했다. 커피 위에 생크림 산이 둥둥 뜬 모습이, 꼭 오륙도를 닮았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싶진 않았으나) 머리를 겨우 정리하고, <나의 펜으로 바다를 열다>가 쓰인 플래카드 뒤에 서서 단체사진을 한 방 찍었다. 이번 강연은 백년어서원의 김수우 대표님의, 부산의 거리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인문학적 문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부산의 원도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부산의 원형은 식민통치에서 왔다고 한다. 자갈치시장은 남항에서 배가 오고가는 용도였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부산에 역을 세우고 철도를 놓게 되어 성장하게 된 것이다. 원도심은 부평동으로, 조선 정부가 일본인에게 외관을 빌려 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구도심과 신도시의 경계는 어느 도시에나 있다. 서울에 강남과 강북이 있는 것처럼, 대전에도 서부와 동부가 있다. 부산도 대전처럼 서부와 동부로 나눠지는데, 해운대와 센텀 시티 등 부산의 동쪽은 신도시인데 반해, 부산의 서쪽은 구도심이다.빔 프로젝터에 뜨는 사진을 보니, 구도심은 산이 많은 부산의 지형과 골목이 어우러져 빈티지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 400계단이 유명하다고 한다. 부산만의 특성 중 하나는, 바로 산복도로이다. 부산의 구도심을 배경으로 한 천운영의 단편소설 <눈보라콘>에서 산복도로가 잠깐 언급된 적이 있었다. 산이 특히 많은 서쪽의 지형에 맞춰, 산에다 그냥 도로를 낸 것이다. 산을 깎거나 허물지 않고, 그대로 닦아 도로를 만들었다는 것도 나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지혜가 아닐까. 특히 관심이 갔던 내용은 부산의 헌책방 골목 이야기였다. 보수동 책방골목. 헌책 마니아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냥 허름한 골목에 헌책방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골목 전체가 다 헌책방이었다. 세월을 담은 책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마치 낮에 봤던 이기대의 절벽을 보는 기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며 파도를 맞았을 책들. 책을 거쳐 간 모든 독자들은 그 바다에서 서핑을 했겠지. 대전에도 원동에 헌책방 골목이 있지만, 문을 닫은 곳이 많다고 한다. 헌책방도 소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문화콘텐츠로 발전하지 못하고 버려졌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강연이 끝나고, 부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였냐고 질문을 했다. 대표님은 모든 원도심이 다 기억에 남고 애정이 간다고 하셨다. 질문한 덕분에 예쁜 메모장을 받았다.이틀 동안 부산의 세련된 모습만 봤는데, 동쪽의 낡고 추억이 서린 동네의 사진들을 보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두 곳이 같은 지역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대전만 해도 신도시인 서부와 구도심인 동부는 분위기가 살짝 다르다. 내가 사는 둔산동은 신도시의 세련된 맛은 있지만, 세월이나 추억이 쌓여 있다는 것은 느낀 적이 없었다. 작년 교양시간에, 교수님께서 둔산동의 어디에 추억이 있느냐고 질문하셨는데, 홈플러스라고 대답했다. (PC방이나 프랜차이즈 카페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대전에서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을 꼽자면, 타임월드 근처와 중앙로를 들 수가 있는데 두 곳은 공기가 살짝 다르다. 중앙로도 보수를 많이 하고 근래 스카이타워도 세워 많이 세련되어졌지만 연륜이 쌓인 것은 쉽게 닦이지 않나보다. 성심당만 가더라도 세월을 느낄 수가 있다. 모든 도시에 있는 신도심과 구도심의 두 얼굴. 추억과 새 것이 공존하기에 도시는 오늘도 아름답다. 김수우 대표님의 강연이 끝난 후, 강당에서 뒤풀이를 했다. 청소년수련관이라고 해서, 수학여행 때처럼 촛불과 함께 명상의 시간을 갖고,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일은 물론 없었다. 오랜만에 맡는 술 냄새에 수련관 관계자분들도 술이 당기지 않으셨을까.조 별로 나눈 상에는 회 한 접시와 치킨, 빅 사이즈 피자, 부산 어묵……. 마지막 밤의 만찬은 역시 상다리가 휘어져야 제 맛이다. 가장 손이 간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회였다. 아쉽게도 일정에 자갈치시장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직접 회를 뜨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이게 어디냐. 하얀 살과 조금 붉은 생선살을 입에 넣었다. 작은 물고기들이 입 안에서 팔딱팔딱 뛰는 것 같은 이 맛이란! 역시 여행의 백미는 밤새 이어지는 술자리이다. 강당을 다 정리하고 나서도, 숙소로 돌아와 여러 방을 돌아다니며 계속 술을 마시고, 안주들을 챙겨와 먹었다. 나는 선배 언니들이 있는 방에 들어갔는데, 마침 지도교수님께서 들어오셨다. 구호와 함께 건배를 외치고,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문예! 창작! 나의 펜으로! 바다를 열다! 지화자! 지화자!” 마지막 날: 달콤한 하늘 아래 팔레트 마카롱 마을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여파 덕분에, 졸린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다. 아직도 머릿속은 꿈나라요 알코올 속이었다. 간신히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했다. 해장용으로 준비한 컵라면 국물로 속을 달랬다. 이 면발을 다 삼키면, 이 국물을 다 마시면 숙소와도 이별이구나. 잘 있어라, 해운대 청소년 수련관이여.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휴대폰들은 잘 영글어서 각자 주인 품으로 돌아갔다. 부산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도, 휴대폰과 함께 잘 익었을까. 마지막 일정은 간단했다. 감천문화마을에 갔다가 바로 대전으로 가는 것. 몇 명은 숙소를 나오자마자 할리스 커피에서 음료를 테이크아웃 해 왔는데, 나는 차타는 시간에 늦을까봐 가질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아쉽다. 나중에 부산 자유여행을 간다면, 꼭 할리스 커피와 엔제리너스 송정점에 들러야겠다. 감천문화마을을 가기 위해 센텀 시티를 거쳤다. 세련된 도심의 모습이 점차 지워져가고, 옛날 사진에서 봤을 법한 동네의 모습이 창 밖 가득 찼다. 부산의 서쪽은 전날 김수우 대표님의 강연 때 들었던 것 그대로였다. 세련된 동쪽과는 달리 원도심의 맛이 살아있는 곳. 산복도로를 실제로 달릴 때, 산을 깎아 만든 동네에, 골목도 아닌 도로가 있는 것이 가장 신기했다. 고가도로를 달리는 느낌과는 달랐다. 신호등과 건널목이 있는 평범한 도로가 굽은 모양이었다. 마치 초등학교 때 고무찰흙으로 지층을 쌓아 습곡 모형 만드는 실험을 한 것처럼, 부산의 지층에 누가 장난질을 했을까. 산복도로는 부산의 지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부산의 산길을, 숙소 올라가는 길과 이기대 갈맷길에서 생생하게 경험해 봐서인지 이 정도는 그냥 동네 언덕 수준이었다.감천문화마을의 입구에 도착하자, 알록달록한 집들이 산자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멀리 보였다. 흔히 달동네, 산동네로 불리는 동네가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예쁠 수 있다니. 팔레트에 물감을 짠 것 같기도 하고, 민트, 녹차, 딸기 마카롱을 산처럼 쌓아놓은 것 같았다. 저 집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집어 먹으면 참 맛있을 것 같았다. 마침 감천문화마을에 문화축제가 열린 날이라, 축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전날의 비바람에 지친 마음은 사물놀이패의 소리에 금세 날아갔다. 어르신들은 어묵, 핫도그, 돈가스꼬치 같은 추억의 간식을 맛보고, 동동구리무 장수를 보는 것에서 추억의 향기를 되새기고, 어린 아이들은 예쁜 벽화를 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 조 모두 신기해하고 있자, 한 아주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부산에는 이런 동네가 많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가까운 곳에 사시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살아오신 거라면, 부산 구도심의 변천사와 추억들을 한 몸에 겪었을 것이다.점심이 되어 분식집에 들어가 점심으로 김밥과 우동을 시켜 먹고, 후식을 먹기 위해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나무로 지은 내부에, 아기자기한 소품들, 그리고 손때가 묻은 책들은 감천문화마을을 꼭 닮아 있었다. 달고 시원한 빙수를 한 숟갈 먹으면서,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감천문화마을에 겨울이 찾아오면, 집들도 얼음이 될까. 냉동실에 넣고 잘 얼려 놓았다가 내년 여름에 꺼내 빙수를 만들어 먹으면 맛이 참 예쁠 것 같다.자유시간이 끝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촬영할 소스를 더 찾기 위해, 시화전을 한다는 암자에 올라갔다. 아쉽게도 부채에 시화를 그리신 스님은 인터뷰를 거절하셔서 동영상에 담을 수는 없었다. 절에서 떡과 과일을 조금 얻어먹고, 마당에 전시된 시화들을 잠깐 감상했다. 꽃 그림과 함께 짧은 시가 수놓인 부채들은 참 아름다웠다. 꽃을 달았으니 날개를 달고 날아갈 것만 같아라. 마당에 묶어 놓은 하얀 개도 꽃향기에 취했는지 졸고 있었다. 에필로그: 당신의 바다는 안녕하십니까?한참 달리다 보니, 높은 건물들과 도시의 모습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김해의 논밭들이 창 밖에 보였다. 이제 부산과는 진짜 안녕이구나. 대구 휴게소에 들렀을 때, 반값 책들을 한껏 사서 대전으로 돌아갔다. 여행을 갔으면 기념품을 챙겨와야지.생애 두 번째로 가는 부산은 더더욱 특별했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큰 도시는 상상 외로 특별했다. 그동안 여러 번 국내 여행을 다녀왔지만, 도시와 휴양지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곳은 부산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어디에도 없는 곳이 바로 부산에 있었다. 그리고 부산의 가장 큰 메리트는 바로 바다가 아닐까. 편의점에 들르기 위해 잠깐 나갔는데 바로 옆에 바다가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육지에서 쭉 살아온 나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사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나중에 부산에 집을 한 채 더 사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 것 같고, 잠깐이나마 살게 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부산을 남쪽에 사는 특이한 도시라고만 막연히 생각해 왔고, 부산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가 신기해 보이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 문학기행을 통해, 부산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 같았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인 대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중에 꼭 다시 한 번 자유여행으로 와보고 싶다.누구나 마음속에 바다를 하나쯤은 키우고 있다. 부산처럼 집 옆에 바다가 보이는 동네가 아니라도, 모든 사람은 바다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마음속에 있는 바다는 꼭 소금물과 물고기들로만 채워져 있진 않다. 나의 바다는 문학이고, 창작세포는 물고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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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 한국수필 한국수필 2015년도 8월호
임헌영 경북 의성 출생, 문학평론가, 교수.중앙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6년 『현대문학』 등단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역임,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수상: 2010년 제15회 현대불교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작품론 현대한국수필과 월당 조경희 선생 수필문학세계 월당의 기행문, 기행수필 유혜자 1 월당의 수필들은 삶에서 만난 이야기를 통해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내 용이 많다. 제재범위의 폭이 넓고, 형식이나 내용에서도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은 수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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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 ASIA 고려인 문학의 슬픔
“《레닌기치》”는 반세기의 세월 속에서 시 2,600여 편, 장편 및 중 단편소설200여 편, 문학평론 및 연극평 200여 편, 동요 동시를 포함한 아동문예물이 150여 편, 번역소설과 시 150여 편, 창작가요의 악보 및 가사 150여 편, 아울러 다양한 풍자문과 실화적 이야기, 회상기, 인물평, 기행문 등 수백 편이 발표되고 독자들에게 읽혔다. 또한 400여 명이 넘는 작가를 발굴하고 발표지면을 제공하였다.《 레닌기치》의 폐간은 고려인 한글문학의 종언이었다. ━━━━━ ● 정상진의 증언 내가 직접 겪은 강제이주.《 고려문화》 2집 2007. 서울. 황금두뇌 ● 《 선봉》신문의 윤전기 및 기자재는《 레닌기치》 신문의 창간에 이용되었고 고려사범대학의 장서들은 후에 6인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통해서 불온서적으로 분서갱유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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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 서정시학 정지용의 번역 산문과 일본어 산문
南海過次/ 於 釜山/ 지용”(299쪽)이라 고 적혀있다. 1950년 5월부터 6월에 이르러 정지용은 남해안의 부산, 통영, 진주 등지를 다니며 『國道新聞』에 「南海五月點綴」이라는 제목으로 기행문 을 싣고 있는데, 「시집 『얼굴』을 보며」도 이 당시 쓴 것으로 보인다. 정진업 은 『문장』을 통해 등단하였고, 당시 부산과 마산 시단에서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정지용은 정진업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진업의 시는 시의 이상이 아니다. 이성적 시라는 것이 성립되는 지 나는 아직모른다. 진업의 시는 그만 해도 좋다. 진업의 시는 그의 청춘과 육체적 조건과 패기와 울분과 순정만으로서도 전도 유망하다. 경상도적 토착순정이 도리어 서구 선진 국가의 문화 세련보다도 시의 육체적 조건으로 더 요망 될 것인가 싶다. —(299쪽) 정진업의 시에 대한 정지용의 평을 통해서도 정지용의 토착적인 것에 대 한 애정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