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붉은 그림자들
붉은 그림자들 김하늘 더 천해지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몰라, 입안에서 제 이름을 지우는 느린 자살의 언어, 살아 있는 일보다 사라지는 일이 더 쉬워서 손등으로 웃고, 낯선 여자와 몸을 섞으며 내 자궁 속으로 지는 노을을 봤어, 그림자가 오래오래 썩은 잇몸처럼 부식해 갈 때, 무덤 속에서 평온해진 나를 봐 누군가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어야 했어, 일부러 슬펐고 일부러 공허하고 일부러 웃을 거야, 내 안을 견디고 간 여자들은 미쳐버렸고, 내 겉을 훔쳐보던 남자들은 식물처럼 죽어버렸지, 이번 생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이상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맥박만을 믿고 있었어 손목 끝으로 길어지는 흉, 계약되지 못해 죽어간 저녁의 아기들, 늙은 파충류처럼 늘어지는 육체, 무의미로 자욱해지는 무릎들, 그리고 한 벌의 생을 불경하게 소일하는 내 안의 붉은 여자들 얼음 같은 날들에 갇혀 수면제를 먹었지, 자상하게 안아 주던 이도 있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나눈 섹스는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루시드 드리머
루시드 드리머 김하늘 포궁胞宮에 따뜻한 물이 고이는 걸 느꼈어 그림자도 가지지 못한 생명이 가난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때 의도한 무수한 미래들은 나에게 슬픈 일이 벌어질 거라는 작은 예감을 던져 주고 갔어 나를 지탱하는 작은 숨, 가위로 잘라내지 못한 삶, 불규칙적으로 추출되는 꿈, 모두 내가 아는 이야긴데 자꾸만 증식하는 살덩이가 나를 갉아먹고 있을 때 그것을 몰래 사랑하는 일 어쩌면 가장된 애정으로, 신음을 내면서 내게로 걸어 들어오면, 잠시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슬픔의 언어로 꿈의 삶을 낱낱이 기억하며, 몇 번이나 더 응원해야 하는지 또는 네가 썩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며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어딘가로 배달되는 너를 유실함으로써, 알 수 없는 기원을 느껴 잘 아는 얼굴이었다가도 자꾸만 뚱뚱해지는 기억 속에서 너의 기분을 점점 잊어 가는 그 나날들 겁먹은 고양이처럼 네 앞에서 화를 내다가 발가벗은 나의 나체에서 네가 다시 탄생하고
-
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미물
미물 김하늘 손가락 하나를 걸고 우리는 약속했지 작은 먼지처럼 살겠다고, 이름 모를 잎사귀가 되겠다고, 턱이 낮은 우물처럼 가까워지겠다고, 어떤 소용도 없을 무언가가 되어 인간의 기교를 버리겠다고, 아주 유의미한 이 욕구는 그렇게 개역되었다 내 안의 마음이 소실로 가득 찼을 때 온전히 너를 다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을까 땀 많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땀의 온도만큼 뜨거웠던 너의 더운 숨 잘 아는 노랫말처럼 당연했던 그 기색, 우리는 이보다 더 허무해져야 해 닳고 닳은 돌처럼, 돌의 구실도 못 하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미래를 미리 사는 느낌이 들어 손에 익은 건반을 악보도 없이 치는 그런 유려한 삶에서, 몇 번인가 우리는 다시 아름답게 빚어지고, 수많은 밤낮을 오래오래 견디며 우리는 웃었어 굴러다니는 술병에 남은 진득한 액체처럼 내 삶도 아무 곳에서나 벌어졌지 내가 침묵하는 사이 네가 다가왔고 나의 침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