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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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안국동울음상점 외 3편
눈보라가 빗금을 그으며 떨어지는 12월, 너구리 가죽 가득 눈꽃들을 받아주겠다고 손녀딸의 잠을 툴툴 털어 주고 계신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선생님, 우와, 하고 입을 쫙 벌린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조직 폭력배, 동승, 소설가 김씨, 사실은 순진했던 너구리 가죽을 뒤집어쓴 국회의원 양반, 통속적인 활극을 연출하는 너구리 삼인조, 왁자지껄, 수한무를 찾는 숨이 넘어가는 만담, 모두가 즐거운 한때, 눈은 쌓이는데, 두런두런 유년을 찾아가는데, 종종 미끄러지는데, 청어를 굽는데, 날치 알을 먹으며 깔깔대는데, 하얀 눈은 아랫마을을 재우고는 재 너머 공동묘지에도 내리는데, 썩은 굴참나무 그림자에 빠져 죽은 수상한 허물들 위에도 내리는데, 누군가 죽은 친척 이야길 꺼내 시무룩해졌다가는, 다시 만월(滿月)의 잔이 도는데,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중 「어떤 갠 날」도 좋고, 음정 박자 무시한 「한 오백 년」도 좋은데, 엉덩이춤을 추는데, 정부도 없고 계급도 없고 빈부마저 없이 너구리 가죽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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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승자가 있건 없건, 시선을 숫자 판에 고정시킨 채 목적한 층의 문이 열릴 때까지 뻣뻣하게 서 있어야 하는 머쓱함은 또 어떻고. 남자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푼다. 양복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추기엔 약간 더운 날씨다.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쯤 끄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참는다. 소연회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떠올려본다. 거의가 아는 면면이겠지만, 저쪽 인물 중에는, 존재는 알고 있으되 남자와는 초면인 경우도 한 둘 섞였으리라. 넉살 좋아 뵈는 얼굴, 근엄해 보이는 얼굴, 까닭 없이 못마땅한 티를 내는 얼굴, 호기심 가득한 얼굴,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찌푸린 얼굴, 얼굴들……. 말하자면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얼굴들. 겉으로는 화사해 보이도록 애를 쓰지만, 속으로는 적대적인 저울질에 분망할 얼굴들. 끔찍하군. 남자는 부르르 몸을 떤다. 초록색 불이 켜진다. 남자의 주위에 몰려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앞으로 돌진한다. 맞은편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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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소설 금속성(제1화)
속도를 감당 못 한 오토바이는 커브길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았고 운전자는 즉사했으며 뒤에 탄 동승자는 한 달을 더 살았다. 그러니까 나는 한 번의 사고로 두 번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둘 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자란 또래였는데, 사고가 나기 두 달 전 도시로 놀러오겠다는 걸 간단하게 거절했다. 오지 말라고 했다. 내가 가겠다고. 오토바이를 타고 올까 봐 그랬던 것 같다. 거절하지 말걸, 후회하진 않았다. 오토바이는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져서 어딘가로 보냈다고 했다. 동승했던 녀석의 병문안을 갔을 때, 그의 머리가 함몰되어 있는 것을 멀거니 봤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오는 길은 안 힘들었는지, 병원 식사는 입에 맞는지, 자고 가는지, 퇴원은 언제인지. 집으로 가는 길에 왼손으로 내 머리를 몇 번이나 만져 봤다. 단단했다. 눌러도 도저히 안 들어갈 것처럼. 폭염으로 연일 최고 기온이 기록을 갱신하던 여름의 날들이었다. 말랑말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