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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먹구름을 마주 했을때(수정)
내 안의 먹구름을 마주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 먹구름이 어디서 왔는지와는 관계없이. 나에게는 동갑인 사촌이 하나 있다. 이성이고, 같은 동네에 산다. 그래서 바로 옆 학교에는 내 사촌이 다닌다. 그래서인지 그 애와 나를 같이 아는 애라면 어떻게든 우리 둘 사이의 연관점을 찾아내려 한다. 왜냐면 하나도 안닮았으니까. 튀지 않고, 조용히, 최소한의 인간관계만을 유지하며 깔끔하게 살고 싶은 나와는 달리, 그 애는 오지랖이 넓어서 여기저기 말을 걸고 다니고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소위 '나대는'? 또는 '설쳐대는'? 뭐 그런 애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철 없는 어린애들끼리 싸우지도 않고 잘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애가 착해서. 정말 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애의 남다른 친화력은 아직도 내겐 조금 부담스럽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그 애는 그저 '그럭저럭' 하는 애였다. 당연히 비교가 되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이가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그 애가 나와 아주 먼 곳에 살았기 때문에 별로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멀리 사는 그럭저럭인 사촌. 그 애는 나에게 딱 그정도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별로 신경도 안썼다. 하지만 커가면서 우리 둘을 향한 비교는 더욱 심해졌다. 사실 나는 자존심이 강해서 내가 더 잘한다는 사실이 좋기도 했지만, 어쨌든 명절에 우리 둘이 놀고 있을 때마다 어른들은 '00이는 이번에 00점 맞았다던데, **이는 어땠어?' 이렇게 물어본다던가, "00이는 잘하니까, **이도 더 잘하면 되지." 뭐 이렇게 말하는 등의 비교아닌 비교를 계속해서 해왔다. 그저 좋은 친구로만 지내고 싶었던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어른들은, 이 사회는 우리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나도 처음엔 칭찬으로 들었던 말들이, 나중엔 잘한다는 소리조차 듣기 싫어졌다. 정말이지 그 애에게 승부욕을 느끼고, 경쟁하려 하고. 이런 거 따위 너무 끔찍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괜찮다. 그 애는 그런 비교에 별로 신경을 안쓰는 건지 착한건지 딱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진 않았고, 나도 그 애보다 더 잘한다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아 눈치껏 잘 조절을 해왔다. 그리고 난 정말 그 애와 어색해지고 그러기 싫었다. 그런데 내 바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여러 학원을 전진해오던 나와는 달리, 그 애는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생색내면서 이모에게 내가 다니는 학원을 알려주었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그 애와 같은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학원을 옮길때도 그 애는 나를 따라 학원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수학, 국어, 영어마저 나는 그 애와 같은 학원을 다니게 된 것이다.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깟 학원이 뭐 대수라고. 개는 개고, 나는 난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자 상황은 뒤바뀌었다. 당연히 걔는 남고를, 나는 여고를 갔다. 그리고 첫 시험을 봤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중학교 내내 전교 10등 안에 들던 내가, 수학도 나보다 낮은 반에 있고, 영어도 시작한지 얼마 안된 그 애보다 못 본 것이다. 그애는 영어를 100점을 맞았고 나는 2점짜리를 하나 틀렸다. 또, 수학도 그 애보다 못봤다. 나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학원도 끊고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만큼 충격적이고 화나는 경험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지난 3년간 공부를 정말 잘한다고 믿고 있었던 내가, 노력부족인건지 내 실력이 바닥인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성적이 좋게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나에게 실망하고 또 화도 났다. 하지만 그 감정을 절대 들키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은 척, 쿨한 척을 해대며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 했다. 엄마가 나에게 그 애의 성적을 계속해서 들려주고, 나를 비교하기 전까진 말이다. 도대체가 나는 무엇이길래 이런 취급을 받는지, 그리고 그 애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많은 선생님들의 실망과, 더 잘하지 못한 후회와, 가지기 싫은 못난 감정. 뭐 그런 것 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나도 내가 더 잘한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어쩌면 그 애를 속으로 얕잡아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화가남과 동시에 미안했다. 참 못난 감정을 이제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나와 달리, 영어공부를 훨씬 오래 해왔던 나와 달리, 확실한 꿈이나 목표도 없는 나와 달리 그 애는, 다 나보다 일이 잘 풀리고 훨씬 앞서 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실 꼭 그 애 때문이 아니더라도 중학교 때 나랑 비슷했던 애들이 이미 저만치 나보다 앞서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많은 학생들이 느낀다던 소위,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이게 아닌데, 내가 생각해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아직도 내 이 감정을 마주하기는 너무 두렵다. 소위 '열등감' 이라고 말하는 이 감정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난 이미 한없이 치졸하고 속 좁은 애가 되는 것 같았으니까.그리고 그 애는 자꾸 우리집에 왔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나에겐 스트레스가 되었다.심지어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그 애는 전에 나랑 사귀었던 애랑 같은 반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거지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거지' 생각했다. 참 못났지만 그걸 또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더 짜증났다. 내가 더 오래 공부했는데, 내가 더 힘들게 살았는데, 내가 더 많이 노력했는데 어떻게 지금 이 상황에 오게 된 걸까. 내가 지금까지 들여온 시간은 시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를 판단하기 시작하니 내 등급은 너무 낮아지고 진짜 자살시도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러면 내가 너무 못나보여서 할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들킬 수 없었다. …띵동 갑자기 그 애가 또 우리집에 찾아왔다. 나도 안다. 이런 감정은 착한 개에게 들면 안되는 것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대하면 되는 거였더라. 예전의 그냥 하하호호 웃던 우리가 너무 멀어져 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걔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의 분노 섞인 눈빛이 그 애에게 가 닿는 순간, 나의 먹구름은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다. 나도 안다. 사실 이건 그 애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애초에 성적으로 우리를 까내리지 않는 사회였다면, 명절날 용돈 2만원에 더해지는 "00이는 공부도 잘하네! **아, 너도 분발해야지!" 와 같은 농담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사이의 선을 정해놓은 어른들이 아니었다면, 또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우리 가족이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았더라면,나는, 그리고 너는 괜찮았을까. 필시 이건 우리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하하호호 웃다가 성적표 속에 휘말려 각자만의 선과 등급을 정해놓고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충분히 아름다워야만 하는 나이에 경쟁해야하는 이 잔인한 현실 속에 사는 모든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누가 더 잘하고, 누구는 더 못하고. 그런게 다 뭘까. 굳이 그래야만 할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충분히 쓸데 없지만, 그렇게 해야만 나의 이 먹구름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 너와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건 나일까, 이 사회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 집에 찾아온 너를 보며 나는 또 억지로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