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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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페이지 터너를 생각하며
페이지 터너를 생각하며 변명희 수술실 문이 열리고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나오더니 말했다. “ㅇㅇㅇ보호자님.” 사위가 총알처럼 일어나 문 앞으로 갔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이라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 가슴이 쿵쾅거렸다. 잠시 후 담당 의사의 설명을 듣고 온 사위가 시술 경과를 전해 주었다. 두 달여를 긴장 속에 지냈다. 사위의 권고로 MRI를 찍어본 결과 딸아이가 이름조차 생소한 뇌 질환 판정을 받았다. 재차 확인을 위해 정밀검사를 할 때도 2박3일 동안 입원을 해야 했다. 보통의 경우 추적관찰을 하지만 머릿속 꽈리의 크기나 모양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소견을 들었다. 방치하면 뇌출혈이나 관련 질환이 일어날 확률이 있는 고위험군에 속한다고 했다. 더욱이 시술 보다는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정이 어려웠다. 머리 부분이라 미세한 오차라도 있으면 다른 신경을 건드릴 수 있어서 큰 결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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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슈룹이 되어
슈룹이 되어 변명희 “저어~ 거기요, 조심하세요. 위험해요.” 일행 중 한 남자가 뛰어오더니 내게 던진 말이다. 친구들과 장난하며 강변 둑길을 걷고 있었다. 물에 빠질 수 있으니 안쪽으로 걸으라는 것이었다. ‘무슨 간섭이람.’ 생각하면서도 꼬리를 내리고 조신하게 걸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모종의 작정이라도 했던 것일까. 1983년 겨울 어느 날, 그는 공식적인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얼마 후 외국에 나가 살면서부터는, 그 나라의 관습대로 내 이름 뒤에 그의 성(姓)을 붙여서 썼다.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심리적으로도 의존적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점차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언어소통의 어려움도 있는 데다, 빵 한 봉지 우유 한 팩의 찬거리나 옷가지를 살 때도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녀야 했다. 철저하고 섬세한 성격의 그는 내가 운전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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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수필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변명희 새벽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우리를 텃밭으로 데려갔다. 엷은 햇살을 안은 감나무 옆으로 블루베리가 익어가고, 서둘러 핀 과꽃들도 반가운 손짓을 했다. “누나, 이거 좀 먹어봐. 큰 놈이 맛있거든.” 방아깨비처럼 겅중거리던 동생이 엄지손톱만큼이나 굵은 블루베리 한 줌을 내밀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하늘을 보니 뭉게구름 한 쌍이 정답게 흘러가고 있었다. 세 살 터울인 우리는 늘 손을 잡고 다녔다. 나란히 기찻길을 걸어 큰언니 집에도 가고, 라면이나 건빵을 사러 점방에도 함께 다녔다. 동생이 자라면서부터는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다니기도 했다. 마당에서 둘이 놀다가는, 해 질 무렵이면 남쪽으로 난 토방에 오도카니 앉아 있곤 했다. 그런 때면 어디선가 “들어와 밥 먹어라.” 부르시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오누이의 시선 저쪽 끝에 그렁그렁 매달린 엄마에 대해서는 둘이 다 말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