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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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달밤
달밤 이나명 시금치 무치고 상치 씻어 한 상 차렸어요 밥상 위에 푸성귀 같은 문장들이 싱그럽게 피어 있군요 배고픈 당신 얼굴이 찌개처럼 보글보글 끓는군요 수저를 든 당신 손등이 애호박처럼 파릇파릇하군요 밥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당신 입이 나팔꽃처럼 벌어지는군요 배고픈 목구멍으로 꽃씨 같은 문장들이 뜨겁게 달음질쳐 내려가는군요 밥 한 그릇을 고요하게 비우는 밤이에요 당신 뱃속이 부풀어 올라 둥근 보름달 뜨는 밤이에요 보름달 당신을 내가 꿀꺽 삼키는 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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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나무수국
나무수국 박신규 꽃보다 그늘이 아름답지 한밤중 그늘은 더 환하지 한껏 피어나 부풀어 오른 가슴 동여맬수록 두근거리는 몸살 흘러내리는 꽃물 아이를 흘려보낸 아랫배가 서늘하다 단번에 그믐 쪽으로 건너뛰고 싶은 보름달 아래 나무수국 아래 젖을 주는 여자 배고파 우는 무정한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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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두 여자의 검지
두 여자의 검지 김형엽 자분자분 비 내리는 추석 저녁 어머니를 따라나선다 백천저수지 위로 아른거리는 숲속요양원 지난봄에 들어간 큰어머니가 둥글게 몸을 말고 누워있다 큰어머니 손을 잡으며 어머니는 왈칵 눈물부터 쏟는다 그때 살포시 겹쳐지는 두 여자의 손가락 어머니 검지를 그대로 닮은 큰어머니의 검지 젊은 날 작두에 뭉그러진 손톱자리가 맞물려 파르르 떨리고 있다 말 한마디 없어도 살아온 내력 다 안다는 듯 주억거리며 오래된 목도장처럼 서로의 몸을 찍는 검지 기억의 행방 잃어버린 그녀를 다시 눕혀 놓고 요양원을 나오자 어느새 비 그친 구름 사이로 떠오른 보름달 속엔 뭉툭한 골다공의 검지 뼈 투명하게 박혀 날 선 어둠의 틈 사이로 잘 마른 볏짚 같은 달빛을 한 줌 한 줌 흩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