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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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일상의 닻을 내리다 - 아바나에서 살아가기_1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비롯해 목에 걸 수 있는 볼펜, 형광펜, 네임펜, 12색 사인펜(이건 마음에 드는 꼬맹이를 만나면 선물로 주려고), 4색 볼펜, 연필 3자루 등등. 다만 평소에 즐겨 쓰는, 하나에 이천오백 원이나 하는 컬러 수성펜을 사오지 못했다. 수성펜 주제에 이천오백 원이라는 가격이 부당하게 느껴져서 한 번에 하나씩만, 짙은 카키색이나 갈색, 자주색으로 골라 쓰곤 했다. 이미 문구류에 많은 돈을 써버린 탓에 세일 중인 갈색펜(개당 오백 원)을 세 자루 집어왔는데 젠장, 하나같이 조금만 나오다 아예 나오지 않는다. 불량품인 것이다! 노트를 온통 검은색으로만 채우려니 내가 얼마나 컬러 수성펜을 좋아했는지 그제야 알겠다. 착상이 떠오르거나 책을 읽다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이 나오면 없는 펜 생각이 간절해진다. 아쉬운 대로 빨간 볼펜을 집어 들지만, 볼펜은 수성펜과 달리 종이를 미세하게 물들이는 맛이 없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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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Y의 사랑일지
연필, 지우개, 볼펜, 형광펜, 수정테이프 그리고 상황을 예습한 감정들. 헐거운 필통에서 줄줄 새어 나가는 감정들이 정차하는 정류장마다 내렸다. 쓰고 지우고 수정하고 수정하여 넝마가 되어버린 행복. 너를 만나야 하는 정류장이 지나가 버렸다. 이것은 이별의 예고인가 예고된 이별인가 아니면 진부하다던 사랑의 한 페이진가. 어제 저녁 너는 구어체로 ‘사랑해’를 말하고 나는 문어체로 ‘저도, 그렇습니다’라고 사랑을 대답했다. 흐린 차창에 봄눈처럼 스쳐가던 너의 영상 습자지로 베껴낸 사랑이 책장 귀퉁이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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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체호프의 총
체호프의 총 * 구현우 스물의 나는 파리행 비행기를 탄다 케이스에 티셔츠 바지 담요 속옷 가이드북 세면도구와 도구 환전한 지폐…… 부족하다 친구를 떠나보내고 공항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여행을 떠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한 페이지마다 파리와 로마를 오간다 한 페이지마다 아침이 반복된다 파리의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로마의 성당에서 성호를 긋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건 초밥이다 한국에서 이미 그는 자신의 취향을 알았다 놀랍게도 내가 루브르를 보고 싶으면 그가 루브르로 가고 내가 콜로세움의 관객이 되고 싶으면 그가 콜로세움 안이다 사실상의 나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 잠시 후 걸려올 전화로 이런 내용을 담은 말들이 쏟아질 것이다 나의 역할은 기계적인 타이피스트 이 책은 아직 쓰일 수 없다 떠나간 친구가 바로 파리의 휴일과 로마의 우울을 알게 될 미래의 그이기 때문이다 먼저 날아간 케이스에 노트 볼펜 사전 녹음기 카메라 붓 예술도구와 도구 간단한 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