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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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치파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북어가 재차 외쳤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는 동안 북어와 풍채는 지루한 몸을 비틀었다. 풍채는 열쇠 꾸러미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쇳소리가 나서 쓰는 데 여간 방해가 되는 게 아니었다. 북어는 순자가 내온 부드러운 질감의 원두커피를 아끼듯 홀짝였다. 매혹적인 재스민 향이 북어의 찻잔에서 흘러나왔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북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 하고 감탄을 자아냈다. 입 안에 감도는 초콜릿 향 때문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애용하는 커피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 손님 접대용으로 쓰다니. 불만스러운 마음이 순자에게로 향했다. 북어가 일어나 뒷짐을 진 채 어정거리기 시작했다. 눈으로 촘촘히 내 방을 훑기 시작했다. 순자는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서서 빈 쟁반을 가슴에 보듬은 채 나를 지켜보았다. 마치 감독관 같았다. 순자는 내 간병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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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박씨 건어물 상회
박씨 건어물 상회 김수우 멸치와 뱅어들이 꾸려온 한 가계가 팽팽합니다 수만 길 바다를 끌던 치열은 이제 박씨네 수저통과 형광등에 퍼덕입니다 노모의 관절염과 전세계약서, 과외비 속으로 녹아듭니다 다려도 다려도 우툴두툴한 꿈속으로 유영하는, 소금버캐 눈물을 가진 저, 비린 것들 억년 지층에 갈피갈피 엎드렸던 묵언기도입니다 북어와 새우들이 하루를 엽니다 수평선이 걸어옵니다 딱딱한 침묵이 툼벙툼벙 물소리를 냅니다 자갈치 건어물 골목, 아직도 헤엄치는 것들로 파도 높은데, 비탈이 된 가슴패기를 자꾸 흔드는 가을입니다 아가미, 벌렁입니다 죽음을 삼켜 삶을 토해내는 저, 마른 것들 고요입니다 사만 오천 킬로 해저산맥을 걸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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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시 눈 내려라 대포항 - 정미소처럼 늙어라 외1
눈 내려라 대포항 유강희 이제 사랑 없이도 눈 내려라 대포항에 가슴에 쟁인 슬픔의 가지 쳐내듯 푹푹 내려라 펄펄 내려라 다닥다닥 줄 지어 기댄 포장마차마다 게 등딱지보다 붉은 불빛 흘러 넘쳐 배들은 코를 박고 옛사랑에 훌쩍인다 아무데나 어깨 낮추고 기어들면 어떠랴 아픈 아내를 위해 새벽이면 제 속의 이슬 깨고 달빛 걸음으로 절을 찾는 당신의 어둔 이마에도 하루 빨리 봄이 오길 눈썹 들어 빈 잔에 쓴 소주 한잔 채운다 수족관에 끌려온 바다고기들의 선한 눈망울과 건어물집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북어대가리에도 엎드려 절을 하며 내리는 대포항 눈발들, 한순간 물기둥으로 우우 솟구쳐 일어나 누구의 헛된 가슴을 세게 때리려는지 바다는 시퍼런 숫돌처럼 꿈쩍 않고 누워 있고 어디선가 대게들 딱딱 무릎 꺾는 소리와 피시식 입 벌리는 조개들의 탄식 소리 들리는데 하늘에 무슨 커다란 눈고기가 있어 하느님이 지상의 가난한 자들에게 눈발회 한 접시 돌리려고 이렇게 오늘 대포항에 흰 눈발 펑펑 나르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