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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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나르시시즘의 윤리학
[사랑의 윤리학_제4회] 나르시시즘의 윤리학 민승기(철학자) 나르시시즘의 윤리학? 나르시시즘이 윤리적일 수 있을까? 타자의 전유(appropriation)를 통하여 ‘나’를 확장하는,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나르시시즘이 어떤 점에서 윤리적인가? ‘타자와의 관계맺기’가 윤리라면 타자성을 살해하는 나르시시즘이야말로 비-윤리적이지 않을까? 그것은 ‘관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전유는 온전하지 못하고 살해는 충분치 못하다. 전유가 재─전유를 통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아버지와 같아지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먹지만 죄의식만을 느끼게 되는 프로이트의 기원적 아버지 신화는 ‘동일시’의 실패를 지시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을 가능하게 하는 반복과 동일시는 오히려 나르시시즘의 불가능성을 ‘기입’(inion)하고 있는 것이다. ‘기입’은 지울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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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아픈 천국’, 또는 시의 곤욕스런 황홀경
“속수요, 무책이라고 생각한다”(「시인의 말」, 『그늘과 사귀다』)라는 말로 자기 생의 밑바닥을 누설했던 저 날선 실존의 육성(肉聲)처럼, “가지 말아야 했던 곳/범접해선 안 되었던 숱한 내부들/사람의 집 사랑의 집 세월의 집/더렵혀진 발길이 함부로 밟고 들어가/지나 보면 다 바깥이었다”는 「문(門)」의 1연은 범속한 일상인들이 넘볼 수 없는 지극히 깊은 마음의 공백(vide) 상태를 자체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단 한순간에만 과장되게 연출될 수 있을 나르시시즘적인 포즈나 수사학적 기교의 멋들어진 재주를 결코 동반하지 않는다. 3연에서 “가을바람 은행잎의 비 맞으며/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닿아서야/그곳에 단정히 여민 문이 있었음을 안다”라고 시인은 다시 말한다. 여기서 ‘문(門)’의 이미지는 상반된 의미의 벡터(vector)를 동시에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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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기획 친구라는 ‘부름’ : 『우정의 정치학』
[사랑의 윤리학_제2회] 친구라는 ‘부름’: 『우정의 정치학』 민승기(철학자) 1.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라는 ‘부름’ 속에서 친구가 만들어진다. 이 부름에 응답하기로 결정할 때 나는 비로소 친구가 된다. 우정(philia)을 가능하게 하는 부름은 그러나 지금, 여기에 없는 친구에게 행하는 말건넴(address)일 수 있다. 죽은 친구에 대한 사랑. “친구란 없다.” 부름 이전에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친구를 다시 살려내는 것 역시 이 ‘부름’이다. 데리다의 말대로 친구라는 개념 속에는 유령이 출몰한다. 충분히 죽지 못해 다시 살아온 친구. 우정은 개념이 사유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을 다시 불러낸다. 「우정의 정치학」이란 세미나의 시작을 알리는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다”는 인용은 마치 우정의 역사에 끼워넣어진 ‘이질적 육체’(foreign body)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