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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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_콤마 > 소설 도래한 미래
이 근방의 어느 정류장이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경유 시간을 한참 초과했고, 그 때문에 제때 나오더라도 운이 좋지 않으면 만원 버스를 여러 번 지나쳐 보내다 끝내는 지각하기도 했다. 택시는 외진 이곳을 잘 지나지 않았고 줄을 선 사람 중 여럿이 핸드폰으로 반복해서 택시를 호출하는 모습을 보아 와서 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지각하지 않기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었다. 공공 자전거 거치대는 아침 일찍부터 모두 비어 있고 전철역까지 뛰어간들 이십 분이 넘게 걸렸다. 평일 아침마다 나의 게으름과 무기력에 너무 자주 절망하고 전전긍긍한 나머지, 지각보다는 여기서 핸드폰을 부숴버리고 잠적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파트 보증금을 빼고 모두에게서 도망쳐 흥청망청 살다 가는 것이다. 직장에 갈 필요도, 은행에서 점심시간이 지나기 전에 내 차례가 오기를 초조히 기다릴 필요도, 병원도, 과외도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획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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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쓸쓸하지도 높지도 않게 문학‘하기’
대영박물관의 서고를 뒤져 본 여성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16세기 이전에는 여성의 이름을 건 탁월한 문학작품이 출간된 적이 없다18)면서 문자의 권위마저 독점한 남성 지배력을 적발해 낸다. 여성은 남성의 저작물에 등장하는 가장 빈도수 높은 “동물”(43쪽)일 뿐이었다. 그 보고서 위에다 우리는 한국판 소네트를 목청 높여 불렀을 걸출한 시인을 올려놓는다. 그 이름은, 16세기 여성 황진이다. 18)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역,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14(1판 26쇄), 64쪽. 5. 지속되리라, 배제된 자들의 귀환 자본은 기만적인 환영(illusion)을 마음껏 제조한다. 문화산업은 조직적 전략으로 문학의 체력을 고갈시킨다. 그럴수록 문학은 희망을 무턱대고 믿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희망을 더 의심한다. 희망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거느린 채 유보된다. 재앙에게 털려버린 여분 같은 희망은 이제 신화 속에서만 산다. 그렇다면 문학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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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웹진 > 문장웹진 > 비평 신을 보는 자들은 늘 목마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억압으로서의 검열을 특정한 욕망이나 충동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억누름이거나 상상력의 방해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인지의 새로운 한 프로세스로 이해하고 싶다. 억압은 억압된 욕망의 내용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문화적인 현실에 대한 심의와 성찰을 동시적으로 이끌도록 만든다. 자아에 대한 억압의 행위자, 검열을 수행하게 하는 심급으로서의 초자아는 기존의 문화적 습속에서 볼 때는 자유로운 욕망을 꺾는 방해자로 간주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화를 낳는 긍정적인 원동력이나 에너지로 전위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여수』에서 수행된 시인의 자기검열이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검열을 수행한 문학적인 예라고 간주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 든다. 오히려 시인의 자기검열에서 보이는 부분적인 비일관성 대신에 규칙을 의식적으로 도입하지 않기를 바란다.